091010_볼 BOL 001 2005.겨울 '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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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비근대인을 찾아서 / 김종철
테러, 전쟁, 문화 - '테러'는 묘한 단어이다 / 아이자즈 아흐마드
어떻게? - 최인훈의 <화두> 2권 9장에 대한 지면 작업 / 황세준
인체의 신비 - 순수한 물질주의의 완성 / 정성철
킬로페의 676개의 환영 / 킬로페
진공
한국 남성 지식인 사회의 도착 / 김은실
지식인, 그 파란만장한 이름 / 김진송
'태극기'와 '실미도'의 정신적 파산 / 박찬경
핵 TV / 황세준
사이버 공간 속 주체의 '불만'
- 지젝의 '존재론적 묵시록'과 네트(net) 문화의 '수행 정치' 사이의 화해 시도 / 이만우
바다에게 묻다 l 프랭크는 5의 규칙에 복종한다 / 짐 우드링
퇴행
우리 안의 전체주의 / 안경화
극단적 풍경 - 2005년의 대한민국과 미술의 '위상' / 조선령
자유라는 이름의 퇴행 / 조선령
과잉
복잡성 연구 / 김주현
원자 시대 / 짐 샌본
nature.gif l nature.jpg / 슬기와 민
진공
핵 TV
_황세준
1.‘여생에는 미련이 없지요” .. 차고 넘치는 파국의 이미지에 어떤 그림을 띄어 놓고 말을 붙여야하나.. 하다 생각났다. 2. ‘방폐장터 경주확정’과 함께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신문기사를 본다. 3. 파국의 이미지 히로시마 원폭의 버섯구름. 4.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 -이것으로 11만명 이 즉사한것으로 추정되고 방사능중독으로 수만명이 몇개월, 몇년 안에 사망, 이것으로 2차세계대전 종결. 5. 역설적이게 핵의 위험은 강조될수록 희석된다. 핵은, 그 참상의 이미지는 파국의 고전으로, 역사적으로 인류가 겪어온 그저 그런 모든 파국의 만신전으로 밀려 올라가 버렸다. 6. 그간의 인류 문명에 종지부를 찍은 두가지 사건은 핵폭탄과 TV의 발명이다. 이둘은 우리를 멀리보게 하는데 하나는 가까이서 먼곳을 비춰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는 먼 소문으로 가까운 고통을 잊게 한다. 오락장이 된 세계에서 이 두 기계는 대중화된다. 7. 이것들은 기능이 높아질수록 아름다워진다. 인터넷으로 미사일사진을 본다. 이름과 그 위력을 상세히 볼수 있다. 이것들은 로켓의 자식이지만 핵의 욕망이다. 마치 이 인터넷이 컴퓨터의 지식이지만 TV의 욕망인것처럼. 8. 이것은 향후 국책사업 유치를 원하는 다른 도시의 모범저 선례, 국토개발의 새 모델이 될 것이다. 이미 원전 선진국에서 방폐장이 위험하고 비밀스런 장소가 아니고 주민의 휴양,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9. 윤리적 자신감은 심미적 태도를 낳기도 한다. 그런데 오락실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란 나는 이 작곡가 -911테러가 이제까지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한 독일 작곡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의 심미적 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0. 이렇게 발랄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문명의 비극적 대단원이 핵은 허구이며 이미지야말로 실제라는 썰렁한 유머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소비노동’에 시달리며 이 문명의 자연사를 기다리며 살게 될 것이다. 별 미련도 없이 11. 그러고 보니 이 오락작에서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생애적 기교는 ‘유예’의 기술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와 ‘꼼짝마’를 외치는 강도처럼, 파국의 이미지는 이미 실소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이버 공간속 주체의 ‘불만’ 지젝의 ‘존재론적 묵시록’과
네트net문화의 ‘수행 정치’ 사이의 화해 시도
_이만우
1. 序 - 사이버공간과 주체성
현대인의 삶에 인터넷을 통해 일상적인 활동영역이 된 사이버공간에게는 ‘좋음’과 ‘나쁨’의 주장들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이 획일적이고 완전히 통제된 전체가 아닌 이상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좀더 광범위한 검토가 필요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화의 대가로 지불해야하는 것은 주체의 본능적 욕동drive의 억압이자, 현대적 신경증과 그와 연관된 각종의 정신질환들로 이어지는 개인과 사고 및 행위라고 주장했다. 정신분석이론은 개인심리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있어 개인과 사회구조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기 부적절할지 모른다. 그러나 테레사 브렌넌은 개인심리에 고착되어 문화과정을 소홀히 하는 듯한 정신분석의 제 개념들은 철저하게 교정되어 재인식되어야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이버공간의 문화틀에 대한 분석에 정신분석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많은 담론의 주제는 주체성의 문제와 연관되며 주체의 ‘위치성’, 그로인한 ‘병리(불만)’을 분석하게 한다. 여기서 핵심은 반성적 수행성의 전략, 즉 제한없는 주체의 개입과 ‘숭고한’개방성의 장소로서 해방적 잠재력을 강조하는 네트의 ‘수행정치’와 관련하여 주체가 어느정도 근본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사이버 공간에 내재한 존재론적 모순에 지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입장을 정리하고, 그가 기초하고 있는 라캉의 문제틀로 돌아가 라캉읽기와는 사뭇다른 수준에서 그가 전개한 존재론적 묵시록과 네트 문화의 수행정치 사이의 ‘상호 담론’을 구성해 보고자 한다.
2. “위협은 가상the virtual 이 아니라 실제the real이다.”..
지젝은 사이버 공간이 생산적인 개방성보다는 존재의 근본적인’닫힘’을 유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상적 형태를 통해 얻을수 있다고 주장되는 ‘자유’에는 가상적 정체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정신병의 조건들을 생산하다는 입장이다. 사이버 공간의 개방성은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실제적인 제한 및 구속보다 더 질식할만한 무한대의 역설이다. 넘쳐나는 정보는 번영이 아닌 식욕부진으로 일어질 수 있다.
사이버 공간 의사소통 기술은 ‘상호수동성’의 관계에 집중되어 무능력상태를 조장한다. 하이데거가 주장한 ‘내맡김’의 개념과 일치하며 마치 매체가 유도한 진부한 웃음소리, 감정의 조작이 욕방주체가 반응하는 능력을 경감시키는 것이 그 개념들의 경험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오늘날 디지털적인 ‘모사물의 돌림병’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모사되지 않는 현실 형태가 아니라 외양 그 자체’라고 말한다. 외양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의미있는 개입을 가능케하는 조건들(미결절성)을 제공한다. 사이버 공간의 위협은 현실이 아닌 바로 외양이다.
이런 사이버 공간은 주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적 환상을 폭로함으로 비가상적 우주(현실)를 식민화하도록 위협하는 주체형성의 매개가 된다. 이는 사이버 기술들이 “상징적 표층조직과 그것을 기초짓는 환상을 분리시키는 틈새”를 매꾼다는 의미의 “과잉충족”을 일으키기 때문에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담힘”을 낳는다는 것이다. ‘거리의 죽음’, ‘닫힘’은‘나와 실제적인 몸을 가진 타자들과의 접촉이 점차 사라지는 거리의 중지, 스크린 속의 환영과 이웃을 맺고, 일반적 접근 가능성은 참을 수 없는 밀실 공포증을 야기할것이다. 선택의 과잉은 선택의 불가능성으로, 또 직접적인 참여공동체는 참여하는 사람들을 강력히 배제하고, 끝없는 변화와 창조의 공간에서 정반대의 사물을 은폐한다.
‘닫힘’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 혹은 대타자가 언어가 발생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이것은 주체의 기능에 필수불가결한 상징계에 대한 주체의 관계에 부여된 미결절성(모호함)이다. 이것이 주체가 현실과의 관계맺기를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친숙한 시공간적 연속체를 따라 주체의 장소가 완벽하게 붕괴되는 조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용어로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장소도 없는 것을 위한 공간을 열어 젖히는 암점의 기능이 방해받는 순간, 우리는 바로 ‘현실감’을 상실하게 된다.” 사이버 공간이 가진 위험은 이러한 구성적 모호성을 기초짓는 방식으로 상징계를 실제로 다시 쓴다는 데 있다.
자아의 가상화가 주체가 세계에 개입하는 좌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지젝에게 자기와 타자 간 차이의 결여, 몸의 경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의 무능력, 그리고 ‘하나됨’의 망상 등은 분명히 사이버 공간에서 드러나는 ‘불만(병리)’의 정신병적 유형들이다. 그의 견해는 확실히 사이버 공간은 편집증의 기괴한 형태를 유발하는 장소이고, 한발 물러나서 비록 그 공간이 정신병적 행동을 포괄하고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에게 편집증적 망상의 심연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3.’가상적인 것은 주체에게 다중적인 잠재력을 제공할 수 있다.”
지젝의 논의가 상당히 염세주의적이긴 하지만 급진적 가상화가 어느정도 현실 생활을 복원하여 새로운 지각을 열어 젖힐 것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이버 공간에서 주체의 개입양식을 변화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기제로서의 후기 자본주의가 주체형성에 본질적인 환상구조를 영속시킨다는 진단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의 견해는 지극히 환원주의적이며 증상을 정확한 진단을 했음에도 그것을 구조적인 문화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대목에서는 다소 일차원적이다. 따라서 그의 논의는 “시장과 같은 규범적 문화틀, 재현된 문화형태들, 또는 직접적 존재로서의 정보사회 간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대행자로서의 주체가 그것들에 의해 어떻게 분열되는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지젝의 존재론적 묵시록은 ‘닫힘’의 경향, 즉 정신병의 사회적 형태를 해명하는 사회이론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며 사이버 공간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의 이행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의 반성성이 결여된 문화비평의 정치적 무용성으로 이어진다.
콘리는 지젝을 컴퓨터나 가상 공간이 주체를 탈중심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만 보는 보수적 하이데거 입장의 대리인이라며 비난한다. 또 어떻게 컴퓨터가 오늘날의 사회환경에서 주체성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파악하지 못하며 오히려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주체성의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기 보다 그저 라캉의 도식에 매몰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존재론은 너무 제한적이고 이분법화되어 있기 때문에 대안적 가능성을 허용할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생각하자면 주체를 일종의 ‘간격interval’ 또는 ‘구획partition’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상징계에 대한 비역사적 이해는 ‘되어감’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를 부가할 여지를 만들지 않는다. 그의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문제틀을 벗어나 다른 전략으로 이론화시키기는 가능하다. 콘리는 “완고한 상징계 대신에 언술행위를 통해 창조성을 강조하는 또 다른 언어 이론”을 기초로 “사이버 공간이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향은 기술 그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기입되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했다.
콘리의 주장이 사이버 공간에서의 급진적”수행정치”를 옹호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정치 전략이 얼마나 유효한가? 사이버 공간은 그 기초가 불명확한 영역안에서도 기능할수 있는 주체들에게만 ‘되어감’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들을 제공할 수 있기때문에 상호주의적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맥락이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과학과 정보통신 기술 등의 소비라는 후기자본주의속 ‘수행정치’의 잠재력은 중시되어야한다. 네트 문화의 ‘수행정치’가 타자에 대한 주체의 전유 또는 지배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주목받아야한다.
지젝의 라캉읽기가 생산한 것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이론화를 통해 해결책을 발견하고자 한다. 바로 자기와 그 생생한 유사물 상의 거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보다는 제한된 자유가 의미를 획득하도록 하는 문화틀을 만든다. 이것은 콘리 주장과 같이 초인간적인 영역에 자리잡은 듯한 반성성을 갈구하는 것보다 생산적이고 실현가능한 것이다. 브렌넌은 그 가능성을 끄집에 내는데 지젝을 단순비판하기보다 거기서 어떤 ‘이익’을 색출하고 콘리의 비판에 부담을 덜어준다.
4.”자아는 자신의 이미지대로 세계를 주조한다.”
브렌넌은 후기자본주의 문화틀을 ‘ 자아의 시대’라고 진단했으며, 그이 주된 논점은 근본환상의 기술적 실현이 역사적으로 주체의 정신세계를 구성하고 과잉결정하는 방식에 놓여지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 정신병’에 빠져 있으며 그로인해 자아는 세계를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주조한다고 한다. 기술은 이러한 자아 투사를 행동하되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라캉의 이론은 “자아가 자연적 존재의 이질성과 다양한 문화적 질서를 성격이 불분명한 동일성의 반사물로 환원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대로 세계를 주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자연적 존재를 소비함으로써 세계를 주조한다. 이것이 정신병에 대한 기술적, 법적 정의이다.” 그는 지젝의 총체적 접근법을 받아들이지만 ‘주인기표’의 복귀에 근거한 정치 전략을 회피한다.
출생이후의 경제는 유아가 상실된 통제상황과 연기된 욕구들을 타자에 대한 통제 및 유아적 만족의 세계에 대한 환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에너지를 고정시키게 된다. 이러한 근본환상은 정신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과 분리시키고, 타자에 대한 감각을 특권화한다. 그리고 개인화와 주체의 자율성이란 환상을 창조하고 타자들을 지배받을 수 밖에 없는 대상들로 분열시킨다.
가상현실의 ‘창조성’에 관한 수많은 담론에 내재한 역설은 창조성의 조건으로 물질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회피’에 기초하고 있다. 가상 현실로 인한 가장 광범위한 오염 또는 중독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는 그 지각적 장이 조절되도록 재구성된 몸이다. 가상현실은 주체에게 권한부여의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물질성으로부터 삶을 빼앗는 첫 단계로 간주되기때문이다. 이과정에서 정보는 주체의 자연적 존재양식을 벗겨버린다. 그리고 가상현실을 가상주체와 비가상주체 사이의 위계구조를 형성한다. 이 감각은 사이버 속 캐릭터가 현실의 인물에 우선한다는 것을 통해 분명히 포착된다. 이제 물질적수준으로 돌아가 추론의 사슬을 엮어가기 보다는 추상적 수준에서 추론하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다. ‘물질적 현실’의 속성은 복잡하고 생성적인 자연적 연쇄와 그것에 덧씌여진 주체-대상의 관계가 만들어 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브렌넌은 총체성과 보편성에 적대하여 다중성과 단절을 강조하는 찰현대적 문화이론과 정치전략의 양가성을 인지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 자가의 환상화된 투사, 즉 지배하고 분리하여 나아가 파편화하고 동일화하려는 ‘자아의지’를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그 의지는 사이버 공간의 다양한 의사소통에서 즉각적으로 확인된다. ‘회피’는 자아가 자신의 방식대로 전유할 수 없는 것을 부인하는 방법이다. 동일성의 욕망에 의해 지배받는 가상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것 이면에서 우리는 자아가 세계를 자신의 이미지로 동일화하려는 감추어진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5. 結- ‘화해’를 위한 상호담론
브렌넌은 사이버공간에서 주체의 ‘위치성’,즉 주체에 대한 권한부여의 문제에 대해 매우 신중한 존재론적 문화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심리적 차원(사회적 정신병)을 경제적-기술적 차원과 결합시켰다. 네트문화에서 주체의 자유, 자유로운 연대, 그리고 물질적 한계의 초월 등은 무언가를 결의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연대적 차원을 허용하므로, 자아가 가상적인 것의 이미지로 비가상적인 세계를 주조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아의 시대”를 확장하는 것을 넘어 설수 있게 한다.
이런 사이버 공간의 존재론적 모순에 그의 해결은 자아에 구조적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 이익에 정치적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브렌넌과 지젝이 정치적 자유와 주체의 위치성, 그리고 가상 공동체와 관련하여 사이버 공간의 존재론적 모순을 지적한 것은 과학 및 정보통신의 기술을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대로 ‘사회적 연결사’를 구성하기 위한 새롭고 의미있는 방법을 색출해낼 수 있다.
가상과 현실세계의 이분법적 사고는 불가피하지만 이익을 얻고자 지젝과 브렌넌 사이를 반성적으로 옮겨다닐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계화되고 추상화된, 유연한 사이버 공간의 성격이 네트 문화에 선험적인, 또한 그 외부의 문화틀에 의해 지탱되기도 하고 제한되기도 함을 의미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사이버 문화의 지배적인 가정에 반대하는 것이지만 현존하는 사회관계와 의례들은 단지 정치적 해방의 방해물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작용의 기본 매체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다에게 묻다│프랭크는 5의 규칙에 복종한다
_짐 우드링
퇴행
우리안의 전체주의
_안경화 독립큐레이터
2003년 월드컵 당시 광화문에 모인 붉은 악마. 15만이 넘는 인파가 같은 옷을 입고 한마음으로 집결했다. 이런 상황에 월드컵을 보기는 커녕 J리그를 더 좋아했다는 필자는 주변인들에게 비애국자와 같은 눈총을 받았다. 빨간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될 수 있었던 그때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이 앞으로 국제무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자화자찬이 미디어를 통해 연달아 뿌려졌다. 월드컵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어디에도 없었고 있어서도 않됐다. 올림픽을 이용해 게르만 민족의 단합을 촉구한 나치즘의 전략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황우석 연구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난치병 극복에 획기적인 치료방식이 될 것으로 다시한번 한국민의 세계적 위상을 드높일수 있는 기회였다. 언론은 심지어 이 연구의 막대한 부가가치 창출과 인간의 무병장수의 가능성에대해 여과없이 내보냈다. 하지만 연구의 성과에 앞서 배아를 파괴하는 행위가 인간 윤리에 대한 기본적인, 본질적인 도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세계각국은 아직 윤리의식에 대한 합의나 해결책이 도출되지 않은 현시점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여러 제약을 가하고 있다. 또한 인간복제 가능성, 난자체취방식 등 생명윤리에 대한 법률 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과연 인류적 윤리문제를 도외시한 채 세계최초의 실적, 자국 경제적 이익, 나와 내 가족의 무병장수가 우선시 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실 이런 비판적 시각은 시대착오적 혹은 비애국자 취급을 받는 이유로 문제를 공론화하기는 힘들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다름을 배척하고 단일을 고수하는 배타성이 역사적인 과오가 될 지도 모를 연구를 성공시키는 성급한 원동력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줄기세포연구를 맹신하며 유토피아를 꿈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파시즘이나 니치즘보다 더 큰 해악으로 자랄 수 있는 파국의 단초를 발견한다.
(줄기세포 연구의 논란 이전의 글)
극단적 풍경 - 2005년 대한민국과 미술의 위상
_조선령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자유라는 이름의 퇴행
_조선령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 글은‘자유라는 이름의 퇴행’의 제목으로 청탁받았지만 사실 ‘퇴행’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다. 한번이라도 성숙했던적이 있었던가. 퇴행보다는 1005년 한국 미술계에 존재하는 어떤 보편적 ‘위기’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조각가 故구본주(2003.9.29)와 삼성생명간의 분쟁이 있었다. 구본주가 교통사고로 죽고 삼성생명에서는 그의 작가로서의 경력을 불인정하며 무직자에 해당하는 보험액을 지급하겠다고 항소했다. 예술이 의미있는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그로인해 미술인 스스로 갖는 자괴감과 소외감은 심각하다. 여기 또 다른 극단적인 풍경이 존재한다. 거대 기업의 미술관에서 개최한‘유망한 젊은 작가전’은 그야말로 신문사의 돈과 미술관의 이름이 결합된 관객 40만 명짜리 블록 버스터가 터진다. 미술이 자본논리속으로 스며들어 문화산업으로 넘어가고 있는것이다. 신사동의 거리에 고급스런 대형복합미술관이 들어선다. 젊은 작가들은 반지하 작업실이 있고, 돈벌이 때문에 작업할 시간을 못내는 것이 현실이다. 2005년 미술계의 또다른 풍경을 보자면, 미술이 ‘유행 아이템 산업’,’명품컬렉션’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믿는 한 젊은 작가(낸시 랭)가 초대받지도 않은 <2003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미모와 몸매를 상품으로 파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구본주의 시대가 지고 새로 떠오른 그녀. 그녀는 자신의 작업처럼 쿨하고 럭셔리하게 인생을 쉽게 사는 인물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지낼곳 없이 친구집에 얹혀 있단다. 구본주와 낸시랭 사이에는 생각만큼 큰 차이가 없다.
사실 자본논리의 구조속에서 미술계는 그닥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미술계가 생각하는 ‘바깥세상’의 무한권력 또한 부풀려져 있다. 자본 논리에 그나마 온전히 편입괴어 있는 부분은 미술계 전체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의식의 초라함이다. 진지하고 반골적인 세대와 쿨하고 가벼운 세대, 이 두가지로 세상을 보는 이분법, 그리고 지금은 과거와 달리 전적인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 자유를 맹목적으로 신봉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방향의 상실로 증오하거나 하는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의식의 획일성. 거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명품 컬렉션의 하나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등록되고 있는 시점에서 작가에게 지급되어야할 ‘푼돈’보험금을 안주려고 버티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거대기업을 비판하는 작업으로 유명한 작가에게 그 기업에서 운영한는 미술관이 친히 공간을 내어고 서문을 써주는 것이 현실이다.
슬라예보 지젝은 모든 역사는 우연한 사건에 필연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우연한 사건에 필연적 형식을 부가한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며, ‘주체’라는 사후적 범주는 자신의 전제를 소급적으로 정립함을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우리를 대항하게 하며 존재의 목적을찾게 만드는 ‘큰 타자’와 그 초월성이 환상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떨어진다. 아방가르드적 의식은 이 타자성의 논리에 의해 지탱된다. 그 ‘타자’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는 타자를 잃었다. 하지만 상실의 감각이 지젝이 말한 대로 더 큰 자유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위기가 아닐까?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 자유는 없고 자유의 강박관념만 있다는 말이다. 이런 ‘실재와의 만남’을 회피하려는 경향은 매끄러운 표면과, 세련된 테크닉, 최첨단 개념으로 자기모순을 포장한작품이나 전시에도 드러난다. 자신의 시대가 가진 문제의식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은 작품은 공허하다. 이전 시대가 할 수 없는 표현들, 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미술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제들, 소재들, 형식들이 너무나 많다.
2005년 대한민국 미술계에, 놀랄만큼 문제의식이 실종되고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미술이 정치적이어야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의 작업이 비정치적이라면 왜 그래야하는지 그 필연성을 말해야하고 도한 그 필연성을 자신의 ‘우연한’ 결단에 의해 설득력있게 보여줘야 한다.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어떤 희망이 있다면, 그런 곳에서 온다고 믿는다.
과잉
원자시대
_ 짐 샌본
<우라윰 자동 방사선 사진>-사진들은 초기 우라늄 광산에서 수집한 우라늄 샘플들을 4*5인치 크기의 필름으로 찍은 것이다. 원석샘플들을 가만히 놓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이 필름에 노출되며 저절로 원석샘플의 사진이 찍힌다. 1934 파벨 체렌코프가 방사능의 ‘색’을 발견하는데 바로 코발트 블루다.
<라듐시계>- 이것은 야광 라듐 알람 시계의 문자판을 저속 촬영한 사진이다. 뉴멕시코 남부의 각 가정에 이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계의 문자판을 칠했던 1920,30,40년대 여성들은 라듐에서 나오는 방사능 물질로 생명을 잃었다.
<핵무기 시리즈>-1950이후 ‘열화’우라늄으로 만들어진 미군의 포탄은 명중하면 자연발화하여 모든 것을 불태운다. 이것은 아주 효과적인 무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랫동안 방사능과 독성물질로 주변을 오염시고 폭발과 동시에 연기와 먼지로 방사능이 유출된다. <원자시대> 30*36, 40*34인치의 일포크롬 프린트
nature.gif / nature.jpg
_슬기와 민
인터넷의 생태계에서 꼭 필요한 디지털이미지 압축기술은 보통 GIF나 JPG포맷으로 ‘손상형’압축시스템이다. 파일 크기를 줄이기 위해 이미지 퀄리티 손상을 감수해야한다는 뜻이다. GIF(Graphics Interchange Format)은 1987년 컴퓨서브사가 자사 네트워크 서비스용으로 개발한 기술이다. 이것은 최대 256색을 구사할수 있어 라인 드로잉, 그래프 그리고 간단한 애니메이션이 가능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JPG는 ‘Joint Photographic Experts Group’이라는 이것의 최초 개발팀 이름을 딴 것으로 퀄리티가 높지만 과도하게 압축하면 ‘아티팩트’라고 불리는 찌꺼기만 남기는 등 명료성을 떨어트린다.
인터넷 상에 존재하는 JPEG와 GIF 이미지를 찾아보면 (Google에서) ‘JPEG’로 8,710,000개, ‘JPG’로 11,800,000여개 등 최소 2천만개, ‘GIF’로 12,100,000개가 존재한다.
인터넷의 이미지는 대부분 다운로드가 가능하고 수집하고 싶은만큼 이상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아무 이미지나 수집해도 괜찮은가. 떠도는 이미지에는 테러리스트의 암호나 알카에다의 비밀지령이 있을수도 있다. 아방가르드의 꿈은 이렇게 그로테스크하게 실현되는 모양이다.
이미지는 풍경사진을 각각 jpg와 gif포맷의 이미지를 각각 8단계에 걸쳐 압축 푸는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