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스터디/도서

091219_이것이 현대적 미술_임근준

seonwa 2011. 2. 21. 20:17


이것이현대적미술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미술이론 > 미술론
지은이 임근준 (갤리온,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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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피카소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연결 고리_로버트 라우센버그 | 컨템퍼러리 아트의 살아있는 규준_제프 쿤스 | ‘yBa’의 늙어버린 악동_데미안 허스트

전후 일본의 아방가르드 미술
원자폭탄 이후의 변종 생태계_쿠도 테츠미 | 재건된 전후 일본을 위한 버내큘러의 도상학_요코오 타다노리 | 천엔 지폐 사건_아카세가와 겐페이 | 진실을 꾸며내는 괴력_오노 요코

에이즈 시대의 미술
“살아있는 조각”으로 사는 영국의 괴짜 듀오_길버트와 조지 | 포르노그래피의 형식으로 탐구한 그레코-로망의 아름다움_로버트 메이플소프 | ‘빛나는 아기’, 영원한 1980년대의 아이콘_키스 해링 | 에이즈 시대의 멜랑콜리한 영웅_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오늘의 얼굴
금빛 마릴린 먼로_앤디 워홀 | 내겐 너무나 소중한 명사들의 청춘(의 어여쁜 초상)_엘리자베스 페이튼 | 오늘의 인륜을 감식하는 새로운 방법_손동현

대중문화의 재탄생
미국식 편집광의 대중문화 유희_리차드 프린스 | 꿈을 모으는 수집광_현태준 | 대중문화를(로) 기억하는 새로운 방법_최정화와 Sasa[44] | 조용필의 위대한 (재)탄생 _Sasa[44] | 비주류의 시학을 담은 잡지 《C와 D사이》,《칠진》과《가짜잡지》

개입의 전술
집과 부동산을 재료로 예술 하기_고든 마타-클락 | ‘의문의 디자인’으로 사회를 비평하는 예술가_크시슈토프 보디츠코 | 현실과 망상의 경계에서 길을 찾아내는 방법_MVRDV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잘못된) 갤러리_롱 갤러리 | 경제로 예술을, 예술로 경제를_디르크 플라이슈만

바탕의 재고안
큰 벽을 위한 색상들_엘즈워스 켈리 | 미술과 언어의 접면에서 개념주의의 새로운 길을 찾은 선구자_솔 르윗 | 바탕에서 다르게 출발하는 그림_제니퍼 바틀렛

새로운 메타 회화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음악_시그마 폴케 | ‘독일의 팝아트’로 출발한 성찰적 사진회화_게르하르트 리히터 | 가상적 상황에서 회화의 역사를 새로이 전개하다_데이나 슈츠

추상이라는 가상 세계
포스트-미디엄의 추상 구조를 부리는 픽셀의 디세뇨_홍승혜 | 건축적 공간을 도해하는 개념의 회오리_줄리 머레투 | 추상적 회화의 소우주(를 자가 해설하는 추상적 회화)_성낙희 | 성욕의 우주에서 가지를 뻗는 수묵의 촉수_이소정

본다는 것의 의미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빛과 공간의 예술’_제임스 터렐 | 유사-과학으로 재현한 대자연의 광학적 경이_올라푸어 엘리아손 | 기계장치를 통해 본 광학적 시선의 존재_최병일

사물의 사물화
과거를 차용해 합리화된 형형색색의 기념비 조각(혹은 썰렁한 영국식 농담)_게리 웹 | 일상 사물들이 조합돼 드러내는 신묘한 질서_사라 시 | 세상과 나의 접면을 기리는 (비)기념비_김민애

사진과 영상의 고민
사진의 레이어_김상길 | 핑크와 블루의 성별 분리주의_윤정미 | 타자의 정체성을 묻고 답하는 사진_김옥선 | 코야니스카시, 균형을 잃은 삶_고드프리 레지오와 필립 글래스 | ‘마음의 생태계’를 탐구하는 영화_구동희

애욕의 풍경
‘비현실의 영역에서’ 펼쳐진 광인의 판타지_헨리 다저 | 성애의 난장을 기념하는 추상화_사이 톰블리 | 당겼다, 풀었다, 꼬였다, 다시 풀려버린 남성 상징의 괴세계_매튜 바니 | 여성의 성적 쾌락으로 재구성되는 멜랑콜리의 무릉도원_이은실

싸움의 기술
미국이 선호하는 ‘전후 추상의 프랑스 대표 작가’_장 뒤뷔페 | ‘흑인미술’의 어제와 오늘_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 | 폭발하는 ‘중국성’을 폭발하는 예술로 포착하다_차이궈창 | ‘아시안 펑크 보이’_테렌스 고

일상의 고고학
우공이산의 예술_로만 오팔카 | “나는 아직 살아있다”_카와라 온 | 실재와 허구를 뒤섞는 일상의 사제_소피 칼 | 불만합창단_텔레르보 칼라이넨과 올리버 코차-칼라이넨

당대 미술의 문제적 지점
눈 밝은 예술 후원자의 힘_링컨 커스틴, 샘 웨그스태프, 사이먼 세인즈베리 |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중첩_‘관계적 미술’과 ‘비평적 디자인’ | 상호참조의 예술_박미나와 잭슨홍



책머리에

나는 ‘오늘의 미술’을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담은 예술이라고 즐겨 설명한다. 나아가 어떤 작품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새로운 성찰을 결여했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오늘의 미술’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은 세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다루는 문화적 메타기술 혹은 미적 유사학문이 됐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를 보는 방법’을 제도화한 결과가 지금의 현대미술이지만, 과연 그 승승장구는 앞으로도 계속될까?
넓은 의미의 현대미술은, 세잔의 작품부터 갓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의 작품까지 포괄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20세기 전반의 것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45년 이전의 미술을 현대미술이라 부르고, 45년 이후의 ‘전후 미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냉전시대의 일이었다. 80년대 중,후반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제 전후 미술은 45-70의 것으로 한정되고, 80년대 이래의 미술은 당대 미술 혹은 포스트-모던 미술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리고 21세기의 첫 10년의 막바지에 이르러, 드디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종결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지금의 상황을 지탱하는 두 개의 큰 축은 교육제도와 전시제도이다. 80년대를 거치며 전지구적 미술학교의 증가로 인한 예비 작가의 수는 천문학적 수준에 다다르고 있으며 여러 역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미술관과 갤러리의 증가는 전시의 기회확보와 유통이 가능하게 되며 젊은 작가들에게도 그럴듯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국제 비엔날레의 난립으로 발생한 심각한 부작용은 작가들이 개인전을 여는 것만으로는 미술사에 이름을 아로새길 수 없게 됐으며 이곳 저곳을 전전하는 유목민형 작가군을 등장하게 했다. 결국 현대미술의 주류는 제도화됐고, 아방가르드의 혁신성이 아니라 궁정 미술과 살롱 미술의 보수성을 닮게 됐다.
‘비재현적 모더니즘 미술’의 전개는 20세기 현대미술의 큰 자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자크랑시에르가 지적하듯, 재현 가능한 것과 재현 불가능한 것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고, 반재현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재현불가능성의 논리라는 과장’에 발 딛고 있다. 고로 반재현적 아방가르드 미술에서 드러나는 개념과 아이디어의 물화도 엄연히 재현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현대미술은 일종의 메타재현의 예술이 되고 만다. 
이 글은 2007-2008년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기사와 <조선일보>, <중앙선데이>등에 기고한 기사에 바탕을 뒀다. 이 책이 소개라는 이들은 전후 미술의 금자탑을 세운 작가, 당대 미술의 승자로 미술사적 위상을 확립한 작가. 바로 지금 현대미술의 전선에서 각축을 벌이며 문제적 지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작가이다.
+ 메타적 접근 : 자기가 말하면서 자기 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반성하고 고치면서 접근하려는 방식.



우리시대의 피카소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연결 고리 ;
로버트 라우센버그
1925. 10. 22 ~ 2008. 5. 12

전후미국 현대미술의 영웅인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추상표현주의에서 팝아트로 전개되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교두보 역할을 맏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51-64년까지가 최전성기로 존케이지의 <4분 33초>에 영향을 받은 <백색 페인팅, 1951>을 시작으로 <버펄로, 1964>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남성 동성애자의 정체성과 욕망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무제(흰 구두의 남자), 1954-55>, <침대, 1955>, 그 중 <모노그램, 1955-1959>은 현대미술사상 가장 노골적으로 성욕을 표현한 작품일 것이다. 콤바인 페인팅을 바닥에 깔고 숫염소가 제 몸통으로 타이어를 꾄 모습이다. 바로 남성간의 항문섹스에 관한 이야기다.
59-60경 전사기법의 일대일 판화를 본격시도했으며 62년엔 실크스크린 기법을 도입, 작품에 반복되는 사진 이미지를 활용하므로 워홀과 함께 ‘실크스크린 기법을 현대미술에 도입한 선구자’로 기억되게 한다. 6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작가로 ‘잭슨 폴록 이후 가장 위대한 미국 미술가” 또는 “미국의 “피카소”로 추앙받았다.


컨템퍼러리 아트의 살아있는 규준 ; 제프 쿤스
1955~ 증권거래인
베르사이유 08. 9.10~12.14

‘제프쿤스’ 하면 ‘키치’ 이지만, 그의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팽창형 꽃과 토끼, 1979>, <뉴 후버 컨버터블, 뉴 쉘튼 습건식 10갤론 더블데커, 1980>, <평형-연작> 이들은 모두 개념미술 성격의 설치작업처럼 보인다. 이에 반해 80년 후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문화 비평이나 기호학 등의 영향을 받아 키치적 성격이 분명하고 해석에도 별 어려움이 없다. <마이클 잭슨과 버블스, 1988>, <메이드 인 해븐-연작, 1989>, <강아지, 1992>
그의 작업 가운데 가장 홀대를 받는 것이 회화 연작이다. 하지만 그의 회화사 내부에서도 독자 생존이 가능한 힘을 지녔다. 조합된 이미지와 각 이미지의 데이터베이스가 2중의 매트릭스로 기능한 묘한 페티시를 창출하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 오타쿠의 이미지 유희와 상통한다. <자유의 종, 2007>
세인들이 주목하는 쿤스의 제1가치는 ‘미술시장적 의의’에 있다. 시장에서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하는 작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911사태 이후 경매 시스템에서 ‘전후 미술’이란 카테고리와 ‘컨템퍼러리’란 카테고리가 분리될 때, 기준점이 된 것이 바로 쿤스였기 때문이다. <욕조 속의 여자, 2001>-250만 달러. ‘전후 미술’의 대표격인 제프 쿤스의 작품은 전전의 역사적인 현대미술품들과 동급이 됐다.
+ 키치 : 억압없이 외형적인 제약없이 표출하고싶은 모든걸 표현하는 것,
+ 오타쿠 : 주로 특정 분야나 취미에 열중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이다.


“yBa”의 늙어버린 악동 ; 데미안 허스트

1965~

라우센버그가 뽑은 ‘우리 시대의 피카소’로 꼽혔던 첫 작가-데미안 허스트. 2007년 화이트 큐브에서 열린 개인전 <데미안 허스트: 믿음 너머에> 에서 공개된 <주님의 사랑으로>은 다이아몬드 8,601개로 장식된 백금 해골 조각이다. 이것의 제작비는 1,200만 파운드(한화221억6천 만원)였으며 5천만 파운드에 구매자가 이미 내정 되 있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살아있음’을 찬미하기 위한 물신숭배, 죽음에 대한 매혹과 공포, 부의 주술적 과시가 생생히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곧 작품의 빛이 바라면서 싸구려로 보이기 시작했고, 3개월 후에 작품을 구매한 투자그룹의 주요 투자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허스트 자신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70-80 ‘yBa’로 명명된 일련의 흐름속에서 허스트는 ‘yBa의 골목대장’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면, <사랑에 빠지고 나오기, 1991>,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의 불가능한 물리적인 죽음, 1991>, <천년, 1991>, <갈라진 엄마와 아이, 1993> 등이 있지만 수조를 이용한 작업들은 제리살츠가 지적했듯, 쿤스의 <평형>연작을 흉내낸 결과다. <규제 약물 키 페인팅, 1993>와 그 파생작 <LSD, 2000>, <아편, 2000>

 

전후 일본의 아방가르드 미술


원자폭탄이후의 번종 생태계 ; 쿠도 테츠미

1935~1990

쿠도 테츠미는 미 정령하의 패전국 일본에서 가치관의 혼돈을 겪으며 성장한 전형적인 전후 세대다. <증식성연쇄반응, 1960>, 그는 네오-다다, 구타이 등 일본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그룹과 어울려 전시하곤 했지만 그의 작업은 확연한 ‘아웃사이더 풍’이라 딱히 그룹을 지정하기 곤란하다. 62년 프랑스로 옮기고 그때부터 서구인의 이원론적 가치 체계를 비판하며 원폭 이후의 휴머니즘이 지닌 이율배반적 성격을, 자신이 꾸며낸 가상적 변태 생태계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랑, 1964>, ‘당신의 초상-연작 ~1970말’ 60년대 후반, 쿠도는 성기와 고치, 새장과 정원의 메타포를 활용하며 형광색으로 도색된 기이한 변종 생물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가 일군 괴세계는 정신병자의 환영처럼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어서, 종종 현대미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됐다.
그는 90년에 암으로 죽기 전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76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 77년 상파울루비엔날레 ‘특별상’, 89년 파리에서의 회고전을 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94년 구겐하임미술관 <9145년 일본미술: 하늘을 향한 비명>을 시작으로, 98년 로스엔젤레스 현대미술관 <행위로부터: 퍼포먼스와 오브제 사이, 1949-1979>에 포함되면 점차 미술사의 주요작가로 재고찰되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수요가 형성됐으며 2008년 6월 안드레아로슨갤러리가 개인전을 열고 이어 10월 워커아트센터가 회고전 <쿠도 테츠미: 메타모포시스의 정원>을 개막했다. 하드코어 예술의 거장인 폴 맥카시의 기획전 <낮은 삶, 느린 삶>에 포함되기도 했다.


재건된 전후 일본을 위한 버내큘러의 도상학 ; 요코오 타다노리
1936~ (73세)

65년 마츠야 긴자에서 열린 그룹전 <페르소나>에서 선언문격인 포스터 <타다노리 요코오> 혁신적인 포스터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의 버내큘러 디자인 문법을 차용해 모던 디자인과의 단절 의식을 표출하는 이 작업은 다층적으로 해석된다. 68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림 전시<말과 이미지>에 참가했을 때 미국의 관객들은 그를 시대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팝아티스트라고 추켜세웠지만 작가 자신은 “소비시회의 상징으로서의 대량 생산제품에 관심을 두는 팝아트와 달리, 모던 디자인의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잡다한 시각적 요소를 수집하는 데서 작업을 시작한다.”고 주장해 팝아트와 거리를 뒀다.
그렇게 5년 동안의 최전성기는 교통사고와 그의 훈인이었던 미시마 유키로의 할복 자살로 인해 한동안 작업을 멀리한 채 불교와 인도의 신비주의를 공부했다. 이후에 나타난 작업은 초기작에 비해 힘이 약했고, 80년대 화가로 전업했으나 미술사적 성취는 없었다. 전후 일본 디자이너의 ‘역사성의 아우라’에 기댄 채 ‘버내큘러 도상의 미적 마조히즘’을 만끽한 요코오 타다노리 작업의 핵심은 ‘팝콘 정신’이라고 한다.
+ 버내큘러 도상 : 버내큘러 디자인은 쉽게 말해 '디자이너가 디자인 하지 않은 디자인'을 의미한다. 곧, 전문가가 디자인하지는 않았으나 휼륭한 기능성과 아름다운 형태로 미적 감동을 주는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다.
+ 팝콘 정신 : ??


천엔 지폐 사건 ; 아카세가와 겐페이
1937~

63년 다카마츠 지로, 나카니시 나츠류키와 함께 결성한 전위예술 그룹 ‘하이레드센터’는 캔버스와 의자 따위를 포장지와 밧줄로 결박한 채 작품으로 전시하거나 온몸을 빨래집게로 집어 놓고는 ‘예술 테스트’라고 주장하는 등, 상식을 뒤엎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들의 예술에 관한 일관된 논리는 “이것도 예술이 아니고, 저것도 예술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시회 초대장에 게재한 단문에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의 소개 글을 의도적으로 고쳐놓고는 예기치 않은 오타라고 주장했으며 이런 ‘계획된 난센스’는 동료들에게 강매한 깡통을 망치로 어렵게 따보면 속에 깡통따개가 있는 식이다. 이렇게 뒤통수 치는 전략은 ‘모형 천엔지폐’ 연작 일부가 위폐로 간주돼 법정 소환되기에 이른다. 천엔 지폐를 실물크기로 인쇄해 포장지로 활용한 것인데 그들은 1966년 공판에서 자신이 행한 일이 예술이 아니라면 범죄가 돼 유죄 판결을 받을 처지라 여태까지의 주장을 180도 바꿔 “이것도 예술이고, 저것도 예술이다.”라는 논리를 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서 그들은 한 시간이 넘게 퍼포먼스를 펼쳤다. 하지만 70년 유죄판결로 징역3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그 후로 수필가 혹은 소설가로서 필명인 오츠지 카츠히코로 이름을 날렸다.  


진실을 꾸며내는 괴력 ; 오노 요코

1933. 2. 18~

1933. 2. 18~ 오노 요코는 귀족적이고 엘리트적인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52년 가쿠슈인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적응에 실패해 뉴욕으로 가서 현대시와 작곡을 공부하면서 이치야나기 도시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을 통해 존 케이지와 교우하게 된 그녀는 이후 젊은 작곡가 라 몬테 영과의 연인관계를 통해 AG갤러리를 운영하던 ‘미스터 플럭서스’ 조지 마키우나스를 만난다. 요코는 존 케이지의 사상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꿈꾸기 시작한다. 조지 마키우나스와 함께 기획한 ‘체임버스가 콘서트, 1960-1961에 <그림자 회화>, <연기 회화>, <밟기 위한 회화> 등을 발표한다. 61년 AG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62년, 전후 일본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돌연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소게츠아트센터에서 <오노 요코의 작품>을 선보이며 작곡가로 데뷔했다. 얼마 후 재즈 음악가이자 영화 제작가인 앤서니 콕스와 결혼해 자신의 사상과 작업을 정리하며 64년 <그레이프프루트, 1964>를 발표했다. 그것은 그녀의 독창적인 ‘지시문 작업’이 제 모양을 갖춘 기념비적 저작으로, 발간과 함께 <자르기 작품, 1964>, <자루 작품, 1964>같은 대표작을 발표했다. 이후 플럭서스에 적극 참여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늘 작품, 1965>, <아침 작품, 1965>, <새벽의 눈내림, 1965>등의 작업을 제작 발표했다.
영국으로 활동거점을 옮긴 그녀는 인디카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서 존 레넌을 만나게 된다. <파란 방 이벤트>, <천장 회화(예스 회화), 1966>, <못 박기 회화, 1966>, <백색 체스 세트, 1966>. 필름으로 작업 영역을 확대한 그녀는 <불 켜는 작품>에 기초한 <No.1(성냥), 1966>, <No.4(엉덩이들), 1966>을 발표했다. 67년부터 연인이 된 존 레넌과 공동작업으로 <방 반쪽, 1967>, <세 개의 숟가락, 1967>, <평화를 위한 침대에 눕기, 1969>, <전쟁은 끝났다, 1969> 등을 작업했으며 둘은 69년 결혼했다. 결혼 후 필름 작업도 지속돼 <파리, 1970>, <평화, 1970>, <아포테오시스, 1971>, <발기, 1971>가 제작됐다. 71년 애버슨미술관에서의 미술관 첫 개인전의 반응은 냉담했고 이후 미술작업에 힘을 쏟지 않고 80년후부터 아예 미술계를 멀리하게 된다. 2000년 회고전 <예스 요코 오노>를 통해 플럭서스의 대표 예술가로 추인되고 개념미술의 숨은 공로자이자, 일본의 전통적 선 사상과 하이쿠를 현대예술에 접목시킨 선구자로 재평가 됐다. 오노 요코의 진정한 역작은, 거짓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자체, 즉 개인의 거짓을 기반으로 했으나 세계가 공유하는 실제가 돼버림으로써 ‘아트’와 ‘역사’가 된 인생자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에이즈 시대의 미술

“살아있는 조각’으로 사는 영국의 괴짜 듀오 ; 길버트와 조지
길버트, 1943년 생
조지, 1942년 생

동성애자 듀오인 길버트와 조지는 스스로 ‘살아있는 조작’임을 주장하는 장난 같은 퍼포먼스와 액자를 여러 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크게 확대한 도발적이면서도 바보 같은 반종교적 사진 이미지로 유명하다. 68년 미니멀아트와 개념미술의 흐름을 정리한 역사적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의 개막 당일 이들이 페인트를 몸에 바르고 스스로 조각품임을 주장한 퍼포먼스는 미니멀리즘이나 개념주의에 대한 힐난으로 독해됐고, 독일의 아트딜러 콘라트 피셔가 이들을 발탁해 미술계의 중심에 진입할 수 있었다.
60년 말 이들의 전략은 기회주의적이었으나 77년 당시 런던의 스피탈필드에서 거주한 이들은 당시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게토지역에서 여러 사회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캠프 스타일의 작품 형식을 자리잡게 된다. 범죄를 일으킨 청소년들을 종교화에 등장하는 성인의 도상처럼 배치하거나, 분비물 사진을 조합해 배경이 되는 패턴을 만드는 등 이들이 작업은 점차 과감해졌고, 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에이즈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에이즈의 공포를 우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상해낸 유일한 작가였다.
+ 캠프 스타일 : 퀴어(성정체성 거부)들을 사회적으로 표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프로노그래피의 형식으로 탐구한 그레코-로망의 아름다움 ; 로버트 메이플소프
1946. 11. 4 ~ 1989. 3. 9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60년 당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흐름에 합류해 70-75년까지의 1500점 이상의 -대개 익명의 나체를 찍은- 폴라로이드 작품을 제작했다. 공공장소에서의 섹스, 혹은 게이 클럽이나 파티 등을 통해 만난 익명의 상대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그는 괴물로 거듭났다. ‘사진기를 유혹의 도구로 삼으며, 피사체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그의 주요 작업에서 느껴지는 사조-마조히즘적인 성격은 그러한 초기의 긴 실험 과정을 통해 계발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뉴욕 게이 명사 사회의 성장과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25살 연상의 연인이자 후원자인 샘 웨그스태프를 만났으며 부와 심미안을 갖춘 큐레이터이자 수집가인 연인의 후원에 힘입어 작업은 일취월장해, 70년 중반부터 점차 안정된 초상사진을 촬영했으며 더욱 강한 자아와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기술을 시험하는 동시에,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점차 높여갔다.
하지만 81년 게이사회를 강타한 에이즈에 메이플과 그의 연인이 감염되었고, 그는 더는 가질 수 없는 이상화된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에 상반되는 죽음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레코-로망의 이상을 재현하는 조각적 이미지는 그리스와 로마의 육체미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흑인 육체의 동시대적 아름다움을 꾸준히 기록했다. <블랙 북, 1986> 결국 에이즈 합병증으로 웨크스태프는 87년, 메이플소프는 89년에 생을 마감한다.
+ 사조-마조히즘 : 고통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뜻


‘빛나는 아기’ 영원한 1980년대의 아이콘 ; 키스 해링

1958~1990. 2. 16

앤디워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 그는 76~78년 동안 피츠버그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고 80년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는 거기서 도시 곳곳에 널린 그래피티와 한창 성장 일로에 있던 게이 공동체에 영감을 얻는다. 지하철역사의 벽면에 분필로 낙서를 하고, ‘클럽 57’에서 몇몇 기획전을 조직하기도 했다. 토니 샤프라지의 갤러리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이듬해 첫 갤러리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다. <빛나는 아기, 1980>-‘콜렙’ 그룹전 <타임스스퀘어 쇼>에서 전광판에 디스플레이. 그리고 만화와 그래피티의 문법을 차용한 거친 형식으로 문명비판적인 메시지를 담는 한편, 화면 전체를 아프리카 풍의 패턴으로 메워 나가는 추상 작업을 병행해, 자신의 미술사적 입지를 분명히 하고자 애썼다.
84년엔 세계 이곳저곳에 대형 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의 작업은 국제적 도시풍경의 일부가 됐다. 86년엔 뉴욕 다운타운에 ‘팝샵’을 개점해 자신의 작품을 응용한 다양한 물건들은 팔기도 했다. 그는 앤디워홀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그는 스타덤에 올랐고 유명 아티스트와 함께 협업했다. 80년 당시 예술계의 기저를 흔들던 에이즈는 “동성애자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는 인식이 아직 있었기에 걸리면 숨기고자 애썼다. 하지만 해링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작품에 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88년 에이즈 감염 후 사실을 숨기지 않고 에이즈와 에이즈 공포증, 그리고 동성애자 차별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89년에 세운 키스 해링 재단은 투병중인 어린이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90. 2. 16. 만31세 ‘영원한 1980년대의 아이콘’ 키스해링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에이즈 시대의 멜랑콜리한 영웅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1957-1996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 특징은, 개념미술의 어법과 미니멀리즘이 형식을 차용해 지극히 개인적인 일화들을 숨기고 그것이 전시되고 해석되는 과정이 정치적 비평 혹은 성찰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전선으로 이어진 전구들, 스냅사진을 인쇄한 퍼즐, 한 쌍의 벽시계/거울/커튼, 바닥에 쏟아놓은 알사탕, 끝없이 제공되는 인쇄물 더미, 반짝이 구슬장식 스크린, 옥외 광고판 등등) <무제(로스), 1991> 집안 귀퉁이에 사탕을 쏟아 놓은 것으로 관람자는 누구나 가져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무게는 (에이즈로 사망한 연인의 몸무게와 같은) 79kg을 유지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사탕은 연인에 대한 달콤한 추억에 대한 알레고리이고, 관객은 사탕을 집어가는 행위를 통해 사적인 기억-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뉴욕에서 활동하다 만 38세의 나이에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요절한 그는 사후 10년이 되서야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주인공이 되었다. 90년대 미국의 탈식민주의를 다룬 작가로 선정되었지만(감독:로버트 스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커미셔너인 낸시 스펙터가 제 맘대로 작가의 미완성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한 ‘신작’은 ‘수준이하’ 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평단이 아끼며 한국에서는 그의 영향은 받아 유사한 작업을 하는 이들도 많은 등 다시 한번 되새겨 볼 가치가 있음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