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스터디/도서

100807_예술, 인문학과 통하다_조광제

seonwa 2011. 2. 22. 13:06


예술인문학과통하다고대주술부터첨단광고까지,예술의본질을캐는16가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지식과학문
지은이 조광제 (웅진지식하우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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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과학하라

진리ː방법
과학적 사실은 언제나 가치중립적일까 (이상욱)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인가, 혁명적인가 (고인석)
과학의 진보를 위해 모든 연구가 허용될까 (이영희)
완전한 객관적 관찰은 가능할까 (정병훈)

가상ː실재
인간과 로봇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일까 (김성우)
마음은 물질로 환원될 수 있을까 (김영건)
불로장생, 신화일까 과학일까 (강신익)

환경ː미래
나폴레옹과 박테리아, 누가 힘이 셀까 (예병일)
테크노피아의 세계는 가능할까 (박영균)
여성주의와 과학은 결혼할 수 있을까 (연효숙)
자연으로 돌아가면 행복할까 (김명식)

과학ː현실
연구 부정행위는 막을 수 없을까 (김병수)
근대적인 것은 과학적인 것일까 (이정우)
과학, 전문가와 대중의 소통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강양구)
동아시아 사람들도 자연법칙을 믿었을까 (김시천)

생명, 인간의 경계를 묻다

생명ː주체
물질과 생명은 구분될 수 있을까 (장회익)
무의식의 과학은 가능할까 (민성길)
쌍둥이는 똑같은 삶을 살까 (이정호)
기氣로 생명을 설명할 수 있을까 (박석준)

자연ː문화
인간 본성, 타고나는 것일까 길러지는 것일까 (김택중)
성, 진화론으로 설명 가능할까 (김성한)
건강과 질병은 연속일까, 단절일까 (여인석)
생물학적 이타주의는 가능할까 (최종덕)

자아ː인생
고통 없는 삶이 좋은 삶일까 (공병혜)
성욕은 어른에게만 있는 것일까 (이정우)
죽음은 이 세상의 끝일까 (임종식)
갓 태어난 아기는 착할까 (김시천)

몸ː사회
경락은 과학적으로 실증될 수 있을까 (곽노규)
건강, 사회의 문제일까 개인의 문제일까 (강명신)
몸으로 말하는 역사를 쓸 수 있을까 (황상익)
내 몸은 진정 나의 것일까 (강신익)

예술, 인문학과 통하다

예술ː철학
예술적 상상력은 타고나는 걸까 길러지는 걸까 (조광제)
주술성과 합리성, 예술은 어느 편에 가까울까 (김융희)
예술가에게도 형이상학이 필요할까 (조광제)
무의 미학은 가능할까 (김갑수)

예술적인 것ː비예술적인 것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분은 가능할까 (박영욱)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구분 가능할까 (유경희)
팔고 사는 예술품, 작품일까 상품일까 (박영균)
예술 작품, 해석의 대상일까 체험의 대상일까 (신응철)

과학ː매체
과학 기술 없는 현대 예술은 가능할까 (김상현)
광고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박영욱)
영화에서 예술과 기술, 어떻게 같고 다를까 (이정하)
예술은 자연을 초월할 수 있을까 (김갑수)

현실ː미학
한국미의 고유성은 옹호될 수 있을까 (정세근)
예술 작품은 언제나 아름다울까 (여현석)
예술은 역사를 초월할 수 있을까 (김상현)
미적 가치는 윤리적 가치와 다를까 (김시천)

문화, 세상을 콜라주하다

사회ː자아
평범함 속에도 악이 깃들 수 있을까 (김선욱)
사이버공간, 밀실인까 광장인까 (이원태)
인정받으면 우리 삶이 달라질까 (이정은)
외모도 개인의 능력일까 (신응철)

실존ː선택
우정과 사랑, 구분 가능할까 (이기백)
운명은 자유의지와 모순될까 (심의용)
죽느냐 사느냐, 선택의 문제일 수 있을까 (김세서리아)
지식인은 과연 현실에서 자유로울까 (김혜경)

문화ː자유
열광하는 스포츠, 과연 축제일까 산업일까 (정준영)
대중문화의 주인은 정말 대중일까 (현남숙)
뉴미디어, 자유일까 구속일까 (고현범)
개고기, 먹어도 되는 걸까 (김성한)

차이ː공존
인권, 타고나는 걸까 쟁취하는 걸까 (구태환)
세계화 시대, 인종차별은 사라질까 (박영균)
한국인과 세계시민, 양립할 수 있을까 (박영미)
학벌 없는 사회는 가능할까 (김장생)



 164-231.p 박선화

Chapter 3. 과학 : 매체

- 영화에서 예술과 기술, 어떻게 같고 다를까 |이정하
최조로 발명된 예술 영화. 예술을 위해 발명된 것은 아니지만, 시네마토그래프의 발명으로 기술적인 동시에 기계적인 ‘테크닉의 발명과 발전’을 거의 내생적이라 할 자기 진화의 추진력으로 삼으며 지난 20세가 가장 강력한 예술로 부상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간이 아닌 기계가 직접적으로 이미지의 발생을 주도한 생산의 매체이자 모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역사를 말할때 테크놀로지의 발명과 도입으로부터 일종의 ‘기술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단절’의 역사로 기록되는것도 같은 의미이다.
카메라의 자동주의와 그 생산방식에서의 기술적 복제성이 어떻게 전통적 예술 작품의 존재 방식과 가치의 전복을 가능하게 했는가에 대해서, 영화 기계는 대상 혹은 세계를 가시적으로 사실임직하게 ‘보여주’는 것을 넘어, 즉 전통적 의미에서 재현하기를 넘어 세계를 ‘있음’ 그대로, 곧 운동과 흐름 속에 ‘존재’하는 그대로 포착하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새로운 지각과 정서의 메커니즘, 곧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창조, 생성할수 있다는 ‘사유 기계’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전망으로 이어진다.
   지가 베르토프 ’키노-아이’; 인간의 눈을 보완하고 넘어선 새로운 지각 체계이자, 기억장치로서의 카메라의 가능성.
   장 엡슈타인 ’기계의 지성’; 과학과 철학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영화이미지의 가능성을 영화의 예술적 본질로 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개념-이미지’; 언어보다 직접적인 이미지의 의미전달 가능성과 몽타주의 의식화 역량에 기반.
영화의 생산과정에 연루된 기술적 장치, 기술적 방법, 기술적 개념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 언어’라 부르는 영화의 특수한 형식 체계를 구성하는 기술적 언어들을 우리의 언어에 부가했고, 동시에 영화가 새로운 지각과 정서의 창조를 통해 세계에 관여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사유하는 인식의 틀을 제공했다.
영화의 기계적 지성은 때로 그 기능이 성취되는 순간보다 오히려 실패하는 순간 그리고 기능의 한계를 노정하게 되는 순간, 예술적 역량을 역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카메라가 멈춰 대상 앞에서 대기하는 순간, 비논리적 편집으로 틈을 드러내는 순간. 데드타임. 이런 순간들은 기술의 이편, 혹은 기술 너머에서, 영화의 예술적 질료들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여, 예술로서의 영화의 물질성과 존재성을 사유하게 하는 미학적 순간들이다.

-예술은 자연을 초월할 수 있을까 |김갑수
예술이란 ‘인간의 창의성을 매개로 자연을 이용하거나 변형하여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창조적 행위나 그 성과물’이라고 정의할수 있을 것이다. 예술과 자연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객관적인 자연에 대해 어떤 감정이나 개인적 해석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가장 자연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자연을 모방만하고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반영되지 않은 것을 기교라고 한다. 우리가 예술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감동이다. 그렇다면 예술이 자연을 초월할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결국 예술이 주는 감동이 자연이 주는 감동을 능가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기운생동 화론은 동양에서 이미 예술 작품이 갖추어야할 첫 번째이자 으뜸의 조건으로 개성 혹은 독창성이라는걸 알수 있다. 이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우선 대상이 가진 생명력이 그림에 생생하게 표현되어야한다는 것인데(장언원), 이것의 또다른 구현은 높은 인품혹은 작가의 타고난 자연적 본성에 의거한다고 한다(곽약허). 특히 곽약허와 동기창은 장자의 수양론(도가)의 영향을 받아 기운은 오고갈수 없으며, 기술이 아닌 보다 높은 차원의 도, 즉 예술의 경지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예술창작 행위는 초월을 위한 도구이고, 예술 작품은 초월의 표현인것이다. (예. 재경의 종틀)


Chapter 4. 현실 : 미학

-예술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울까 |여현석
뒤샹, 고야, 피카소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발생하는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당혹스러움에 앞서 이와 같은 미적 판단을 가능하게 했던 미학적, 역사적 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아름다운과 예술의 관계, 즉 아름다움을 예술의 핵심적 과제로 보는 관점은 철저하게 18세기 이후 근대적인 것이다. 근대 예술 관념은 일반적으로 미학적이며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모더니즘은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고대와 중세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탄생한것이다. 모더니즘의 두가지 중요한 핵심요소는 ‘정치사회적으로 반 부르주아적 태도’(낭만주의)와 ‘자본적 이윤추구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된 예술의 자율성을 자향’(인상주의 이후)하는것이다. 모더니즘 예술의 다양한 전개에 따라서 아름다움의 개념도 대상 중심성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체험하고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예술작의 주관적 태도에 근거하게 된다. (초기 인상주의; 화가가 체험하는 대상의 순간성과 직접성. 인상주의; 대상재현을 넘어 대상에 부딛히는 빛의 순간포착. 후기인상주의; 대상의 종속에서 벗어나 인간의내면의 감정 표현기위해 상징적 의미의 선과 색을 사용하면서 자유로운 색채 사용. 표현주의; 탈재현과 추상적 형식)
모더니즘 예술은 전통적인 미학적 개념, 즉 모방과 재현 개념으로는 더이상 아름다움과 예술의 본질을 정의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예술은 이런 흐름에서 예술지상주의를 통해 스스로 격리시킴으로 자율성을 확보했으나 결과적으로 삶과 예술의 분리를 초래했다.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자본주의와의 격리를 강조하면서 예술과 삶 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인간정신의 해방을 추구했다. 뒤샹이 자본주의적 일상용품을 미술작품으로 사용함으로써, 상품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부르주아적 가치 체계를 공격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술과 관련되는 어떤 것도 이제는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아도르노는 [미학이론]-

-예술은 역사를 초월할 수 있을까 |김상현
미가 초역사적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플라톤은 그렇다고 답한다. 아리스토 텔레스역시 인간정서에 쾌감을 주는 대상을 아름다운 대상이라고 말함으로써 미위 기준이 그것을 감상하는 인간에게 있음을 시사했다. 철학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미란 역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것이다.
예술가를 놓고 말하자면, 단지 예술가가 아니라 정말로 천재하고 부를수 있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 사람의 예술은 시대를 초월할지도 모른다. [숭고에 대하여]는 선천적 소질에 덧붙여 후천적 학습과 노력이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하였다. 칸트는 천재가 본 것은 그리고 천재가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은 역사를 초월하는 진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천재가 우리와는 다른것을 보았다면, 왜 그들은 볼 수 있고,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철학자들이 영감이나 광기enthusisasm(신들림)를 언급한다.
예술작품은 과거의 특정한 어느 한 시점에 등장한다. 바지만 바로 그 찰나는 단지 과거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자체를 거역하는 하나의 절대적 정지이다. 그래야만 역사를 초월하는 역사에 길이 남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텍스트(작품)는 언제나 현재적 지평의 해석을 통해서만 텍스트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예술가는 사라지져도 작품을 진정으로 작품이게끔 하는 바로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력을 이어간다. 매번 새로운 이해와 해석, 지평을 지닌 감상자가 있기에 가능할것이다.

-미적 가치는 윤리적 가치와 다를까 |김시천
예술이 추하고 어둡고 차가운 것은 물론 심지어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내용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예술 작품은 어더ㅎ게 받아들여야 할까? 칸트는 미적범주를 ‘미’와 ‘숭고’ 두가지로 주목했듯이 미학을 단순한 ‘미의 추구’로 제한해서는 곤란할 듯하다. 크게보아 윤리학과 미학은 유리적, 도덕적인 것과 심미적, 감성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사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은 모두 가치이다. 그래서 선은 실천해야할 것이지만 악은 회피되고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와 달리 심미적 가치는 이러한 대립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예술체험, 관객에게 던지고자하는 물음이다.
한자 美의 어원적 의미에 대해 “양이 큰 것을 아름답다고 한다”라고 풀이한다. 플라톤은 예술은 낮게 보았을지언정 아름다운 자체는 좋은 것으로, 진리 인식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대상인 선과 같거나 동등한 것으로 여겼다. 이는 미와 선이 아주 가까운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대체로 긍정적인 가치를 함축하는 미적 대상의 경우는 윤리적 가치와 동일시될수 있는 듯하다.
“양이 큰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사회적 의미는, 희생 제사에 바쳐진 양이 살지고 커서 나누어 먹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때문이다. 80년 이후 우리사회에 크게 등장하였던 민중가요와 예쑬은 분면 나름의 미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이는 윤리적 가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도시의 거대한 빌딩, 제트 비행기와 항공우주선, 거대한 다리나 자동차 등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적 가치와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심미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대상들은 수없이 많다. 이택후는 이러한 미는 형식적 미로서 사회미가 주이거나 자연미와 사회미가 융합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선한것은 곧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를 우리 주변의 예술작품이나 미적 체험에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대로부터의 이상이 그러하듯, 미적인 것이 윤리적인 것과 동일시 될 수 있거나 혹은 바람직한 지향을 담고 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더 커다란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