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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11_공간의시학_가스통바슐라르(과광수 옮김)

seonwa 2011. 2. 22. 13:10

공간의시학(문예신서183)
카테고리 인문 > 문학이론 > 문학이론일반
지은이 가스통 바슐라르 (동문선,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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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집...75
제2장 집과 세계...123
제3장 서랍과 상자와 장롱...169
제4장 새집...191
제5장 조개껍질...213
제6장 구석...253
제7장 세미화...271
제8장 내밀의 무한...317
제9장 안과 밖의 변증법...355
제10장 원의 현상학...383


제 2장 집과 세계
1 보들레르는 바탕이 도시인이지만, 집이 겨울의 공격을 받을 때에 내밀함의 가치가 커가는 것을 느낀 사람이다. ‘아름다운 집은 겨울을 더 시적으로 만들지 않는가? 그 흰 농가는 충분히 높은 산들에 닫힌 조그만 골짜기 및에 앉아 있었다.’ 이 짧은 글에서 휴식의 상상력에 속하는 낱말들을 우리는 강조해 놓았다. 이것이 암시하는 휴식의 몽상을 받아들이면서 읽어본다면, 그것은 곧 우리들이 몸과 마음을 평온 속에 잠기게 할 것이다. 그는 우리들이 자신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몽상의 중심으로 안내한 것이다. 잘 확정된 몽상의 중심들은, 잘 정의된 개념들이 사고의 인간들 사이의 의사 소통의 수단이 되는 것과 똑같은 확실성으로써, 꿈의 인간들 사이의 교감이 수단이 된다. 집안에서는 일체가 분화되어 많은 수로 나뉜다. 겨울로부터 집은 저장된 내밀함과 정묘한 내밀함을 얻는다. 집의 몽상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을 느낀다. 그래서 외계의 존재의 감소로 하여, 모든 내밀함의 가치들의 강도가 커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2 겨울은 가장 나이많은 계절로 오랜과거로 우리들을 되돌려보낸다. 눈밑에서는 집도 나이가 많아진다.
3 (집의 음화) 릴케는 뇌우가 공격적이 되고 하늘이 우리들에게 가장 뚜렷이 그의 노여움을 말한다. 특히 도시에서. ‘그 태풍들은 그들이 비와 바람의 오만 가운데 우리들을 보지조차 않는다. 반면에 그것들은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집은 본다. 그들의 힘센 팔 안에 품어서 튼튼하게 단련시킨다. 그런 들판의 집에서라면, 집밖에 나가고 싶을 것이다.’ 바람과 비를 즐기고 싶은 욕구에서가 아니라, 몽상을 찾기위해서, 즉, 바람의 노여움의 공격에 대항하는 나무의 역공격적인 노여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의 저항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태풍과 번개의 격노 가운데서도 인간의 집을 보고 그것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는 데 뜻을 모은 그 모든 자연의 힘에 신뢰를 두고 있다. 집과 세계는 단순히 병치해 놓은 두 공간이 아니다. 상상력의 영역에서는 그 둘은 서로 반대적인 몽상 가운데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 의해 생동하게 된다. 시련이 오랜된 집은 ‘튼튼하게 단련시킨다’. 상상력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는 우리들은 사실의 영역을 넘어서야 하므로, 오래된 집, 우리들이 태어난 집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임시적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시가지의 집에서 보다 더 평온하고 더 안심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 (집의 양화) 폭풍우의 공격을 받는 집의 드라마에 주인공이 스스로를 전적으로 일치시키는것. 라 르두스라불리는 말리크루아의 집. 작가는 여러 페이지에 걸펴 폭풍우를 마련한다. 그는 절대적 침묵으로 드넓은 침묵의 공간에 이른다. ‘소리들이 그 드넓은 공간을 물들이고 거기에, 이를테면 소리로 이루어진 몸을 부여한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뚝 그치고. 공간의 드넓고 깊고 한없는 느낌이 침묵 가운데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 느낌은 내 내부에 속속들이 파고들어, 몇분동안 그 위대한 밤의 평화와 하나가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광란하는 이 폭풍우의 동물떼에 대항하는 집은 정녕 순수한 인간성의 존재, 결코 공격의 책임이 없으면서 방어만 하는 존재가 된다. 라 르두스는 인간의 ‘저항’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가치이고 ‘인간’의 위대성이다.
폭풍우 한가운데 있는 집의 인간적인 저항; ‘집은 용감하게 싸웠다. ... 바람이 지붕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지붕은 등을 구부리고, 오래된 기둥들에 매달렸다. 집의 벽을 습격해왔다. 그러나 집은 유연하게 몸을 굽혔다가 그 짐승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 끊어지지 않는 뿌리로 섬의 땅에 붙어있는 것 같았고, 그 뿌리에서, 그의 얇은 벽이 초자연적인 힘을 얻은것 같았다. 내 몸을 보호해주고 있는, 이미 인간이 된 그 집은 폭풍우에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집은 마치 암늑대처럼 나를 폭 감싸안았고, 때로 나는 그의 내음이 어머니의 그것인양 내 심장 속에까지 내려오는 듯이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지키고 지탱하기 위해서 그 집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들은 단 둘이었다. 여기서 이미지는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에서 오고 있는게 아니라, 집의 현실적인 보로 역할 가운데 주어져 있다.
폭풍우와 태풍이 동물적인 평태들을 갖추고 휘몰아치는 적대적인 세계를 앞에 두고, 집의 보호적이고 저항적인 가치들은 인간적인 가치들로 전치된다. 집은 인간이 몸뚱이가 가지는 정신적, 유체적인 힘을 취한다. 이와같은 집은 인간을 우주적인 용맹으로 불러간다. 그것은 인간이 우주와 용감하게 맞서는 데 있어서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상상력의 현상학은, 이미지를 표현의 부수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러한 환원에 만족할 수 없다. 이미지의 현상학은 이미지를 우리들이 직접적으로 살(體驗)것을, 이미지를 삶의 느닷없는 사건으로 여길것을 요구한다. 이미지가 새로우면, 세계가 새로운 것이다. 사실 집이란 우선 아주 기하학적인 대상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들이 집을 위안의 공간, 내밀함의 공간, 내밀함을 응축하고 지켜줄 공간으로 여기자마자, 곧 인간적인 것으로의 집의 전치는 이루어진다. 그리되면 일체의 합리성을 넘어서서 꿈의 영역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집들이 몽상에 잠긴 기하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5 우리는 그것들은 그릴수 있고 그것에 대한 현실모사의 모든 성격을 가지는 표상을 할수 있다. 잘 그려졌고 실물이 잘 나타내어졌다는 판단만으로 그 판단은 명상과 몽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날마다 시를 일게 되기 시작하기 훨씬 전에 나는 판화들에서 보는 것과 같은 집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했다. 그 천진스런 몽상의 흔적을, 내가 읽는 책들 속에서 발견했을때 그것은 내게 얼마나 큰 놀라움이었다. 앙드레 라퐁 ‘나는 집을 꿈꾼다, 높은 창문에, 초록에 물든 얄팍하고 낡은 세 계단을 가진 나지막한 집을, 오래된 판화의 분위기를 가진, 보잘것없으나 비밀스런 집을./ 내 마음속에서만 살아있고, 때로 내가 / 음울한 날과 비를 잊기 위해 들어가 앉곤 하는 집을.’ 나는 시인들이 제공하는 ‘문학적 판화’들에 가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한낱 ‘표상’으로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서 선들은 힘차고, 그 피난처는 강장적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거기서 단순하게 살기를, 단순성이 주는 큰 신뢰를 가지고 거기서 살기를 요구한다. 새겨진 집은 내 내부에 오두막집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거기서 나는 조그만 창문이 가지는 시선의 힘을 다시 체험한다.
6 때로 집은 커지고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 집에 살려면, 한결 더 유연한 몽상이, 한결 덜 명확히 그려진 몽상이 필요하다. 강한 현실성에 붙박혀 있는 이미지에 비현실성을 준다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시의 숨결 속에 들어가게 한다. 바람을 제 몸과 하나로 통합하고 공기적인 가벼움을 갈망하는 이와같은 집들, 믿을수 없을 만큼 엄청난 스스로의 성장의 나무 위에, 곧 날아오를 것 같은 새집을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집들의 이미지, 이런 이미지는 실증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면 거부할 수도 있다.
이미지의 솟구침을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르네 카젤의 시편을 읽고 또 읽으며 우리들은 우리들이 집의 높이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초높이의 차원에서 머물러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경우 이미지는 묘사적인 게 아니다. 단호하게 영감적이다. 그것들은 펼쳐진다. 다른곳으로, 다른 때로, 꿈과 추억의 여러 다른 차원으로 쉽사리 옮겨가는 것 같다.
7 (과거의 집) 온통 빛으로 싸여있는 이런 이미지들에서 우리들의 더 먼 과거까지 회상함을 강요하는 고집스런 이미지들로 넘어갈때 시인들은 우리들에게 영원히 잃어버린 집들이 우리들 내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들은 그 옛집에서 더 잘 살수 있을것이다. 그 옛집에서 충분히 깊이있게 살지 않는데 대한 일종의 회한이 과거에서 떠올라 우리들의 영혼에 이르러 우리들을 집어삼킨다. 릴케는 이 내밀한 용해를 알았다. ‘어린 내가 제멋대로 생각하던 대로의 그 집을 지금 내 회억속에서 되찾아보면, 그것은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 내부에 전혀 용해되고 여기저기 나뉘어 흩어져 있다.’
꿈은 무한한 과거 속으로 너무나 깊이 내려가서, 우리들이 태어난 집의 뚜렷한 추억들이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있었던 그 일들은 과연 있었던 건가? 그 일들은 우리들의 기억력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가치를 가졌던가? 멀리 되올라가는 기억력은 그 일들을, 그것들에 하나의 가치, 하나의 행복의 후광을 부여함으로써만 기억하는 법이다. 그 가치가 지워져 버리면, 그 일들도 부지하지 못한다. 우리들 자신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 우리들 자신의 공간의 입구에는 존재의 파지와 존재의 망실 사이의 진동이 있다. 그리하여 추억의 전 현실성이 유령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윌리엄 고이언은 이러한 현실의 비현실성을 알고 있다. ‘그래 너는, 목수들이 일하여 태어난 집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아마도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그것은 네 숨결이 만들어낸 상상된 것에 지나지 않고, 그래 그것은 불어 만든 네가 앞서와 비슷한 숨결로 그것을 무無로 환원시킬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런 글에서는 상상력, 기억력, 지각이 그들의 기능을 서로 교환한다.
8 (미래의 집) 아마도 우리들은, 우리들이 나중에나 살게 될 집, 살 때를 언제나 나중으로 미루어 필경 그것을 지을 시간을 못 가질 집, 그런 집을 향한 몇몇 꿈들을 간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 것일 집, 그래 태어난 집에 대칭적인 것일 집은 꿈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중대한 생각, 슬픈 생각을 마련하기나 할 것이다. 결정적인 상태에서 살기보다는 잠정적인 상태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마지막 집에서나 현실의 나의 집에서나 거주의 몽상은 똑같이 억눌린다. 그러므로 언제나 다른 곳의 몽상을 여러 두어야 하는 것이다. 기차여행은 꿈에 그리는 집에 사는 기능의 얼마나 훌륭한 훈련인지, 꿈에 그리다가 받아들였다가는 거부하는 집들의 영상을 펼쳐 나간다.
내밀함은 보금자리의 중심을 필요로 한다. 에라스무스의 전기 작가가 이렇게 쓰고 있다. : 에라스무스는 ‘그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그의 조그만 몸을 안전하게 숨길 수 있을 보금자리 같은 구석진 곳을 찾아내기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필경 그는 그에게 필요한 데워진 공기를 호흡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방에 칩거했다.’ 그리고 많은 몽상가들은 집에서, 방에서 그들의 몸에 꼭 맞는 옷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쉬페르비엘이 활짝 열어 제친 모든 문, 모든 창문을 통해 우주 전체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순간에 그의 그 노래를 들을 때, 독서의 상상력에 의해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집의 환대는 너무나 전적인 것이어서, 창문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이 집에 속하게 된다.
9 살림사는 행동들을 동반하는 몽상들. 살림살이에 어떻게 창조적인 활동을 부여할 것인가? 의식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억력을 능하는 것이다. 한 시인이 가구를 닦을 때, 그가 닦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하는 양모 천의 걸레로 그의 테이블 위에 약간의 향긋한 밀랍을 묻힐 때, 그는 바로 새로운 대상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무관심한 대상들, 기하학적인 현실에 의해 정의되는 대상들보다 한결 높은 차원의 현실로 솟아오른다. 그것들은 하나의 질서 속에 제 자리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질서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살림살이의 현상학의 경우 우리는 아주 습관적인 행동의 원초성이라는 역설을 문제삼고 있다. 살림살이의 정성에 의해서 집에 그것의 독창성이 아니라 그것의 시초가 되돌려지는 것이다. ‘매일 아침 성 로빈슨 을 한번 생각한다’
릴케는 가정부가 없는 동안 가구들을 닦으며 어린시절 청소하던 때를 회상하며 감동에 찼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주위의 모든 것에 대면하고 있는 내 책상의 넓은 검은색 표면이... 말하자면, 방의 부피를 점점 더 잘 반영하면서 그 부피를 새롭게 의식해가고 있는 동안, 나는 감동을 느꼈다.’ 쉬운 행동이 쉽더라도, 우리들을 행동의 시원에 데려다 놓는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쉬운 행동의 경이인 것이다. 의미없는 것들의 중요성을 인정할 때, 얼마나 큰 독서의 즐거움을 얻게 되는가? 의미없는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영혼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는 내밀한 의미에 대한 지극히 예민한 감수성의 표징이 된다.
10 집이란 풍경보다도 더 ‘한, 영혼의 상태’이다. 외적인 모습에서만 재현된 것일지라도 집은 내밀성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어린이게게 집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그가 그의 행복을 그 속에 보호하고 싶어하는 가장 은밀한 꿈을 보여 달라고 하는것과도 같다. 행복한 아이라면, 문이 닫혀서 잘 보호되고 있는 집을, 공고하고 깊이 뿌리박힌 집을 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