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23_호모 사케르_Giorgio Agamben(박진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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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up 총서를 발행하며
옮긴이 서문 - '담론'을 넘어 '생명'으로
서문
01. 주권의 논리
주권의 역설
주권자의 노모스
잠재성과 법
법의 형식
경계 영역
02. 호모사케르
호모 사케르
신성함의 양가성
신성한 생명
'생사여탈권'
주권자의 신체와 신성한 신체
추방력과 늑대
경계 영역
03.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수용소
생명의 정치화
일권과 생명정치
살 가치가 없는 생명
"정치란 달리 말해서 인민의 생명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VP(인간 모르모트)
죽음을 정치화하기
수용소, 근대성의 '노모스'
경계 영역
- 서문 -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을 조에와 비오스의 개념으로 구분해서 사용했다. 조에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비오스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켰다. 고대 세계에서는 단순한 자연 생명은 본래적 의미에서의 폴리스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단순히 산다는 사실과 정치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서로 상반된 것으로 이해했다.
푸코는 근대에서 ‘영토 국가’ 에서 ‘인구 국가’로의 이행 그리고 그에 따라 생물학적인 생명과 국민 건강이 주권 권력 특유의 문제로 그 중요성이 급증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과 승리는 일련의 적절한 기술들을 통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이른바 ‘순종하는 신체’를 산출해낸 새로운 생명권력의 규율적 통제가 필수적이었다. 조에를 폴리스의 영역에 도입하는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정치화시키는 것은 근대(성)의 결정적 사건에 해당하며, 오늘날 정치가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처럼 근대(성)을 정초한 이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권력에 대한 법․제도적 모델과 생명 정치적 모델 사이의 숨겨진 교차점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연구가 도달 가능한 결론들 중의 하나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분석은 분리될 수 없으며, 그리고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 영역에 포섭하는 것이야말로 주권 권력 본래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1부는 예외의 구조를 설명하며 이는 서구의 정치와 동질적인 것으로 본다. 서양의 정치에서 벌거벗은 생명에게는 그 배제에 인간들의 공동체가 기반 한다는 독특한 존재상의 특권이 주어진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 즉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 즉 호모 사케르의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이 오직 자신을 배제하는 형태로만 그러니까 면책 살인의 가능성을 통해서만 법질서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고대 로마법의 모호한 형상은, 주권에 관한 신성한 텍스트들뿐만 아니라 더 넓게는 정치권력의 약호들 자체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다.
근대 정치를 특징짓는 것은 폴리스에 조에를 포함시키는 것도, 또한 그러한 생명 자체가 국가 권력의 계산과 예측의 남다른 대상이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도 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것은 모든 곳에서 예외가 규칙이 되는 과정과 더불어, 원래 법질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던 벌거벗은 생명의 공간이 서서히 정치 공간과 일치하기 시작하며, 이런 식으로 배제와 포함, 외부와 내부, 비오스와 조에, 법과 사실이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식별역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예외 상태는 벌거벗은 생명을 법적․정치적 질서로부터 배제하는 동시에 포섭하면서 바로 그것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 속에서 정치 체제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숨겨진 토대를 실제적으로 수립했다. 예외 상태의 경계들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경계 안에 머물러 있던 벌거벗은 생명은 도시(국가)에서 해방되어 정치 질서를 둘러싼 갈등들의 주체이자 대상, 즉 국가 권력이 조직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따라서 만약 근대 민주주의에 고대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근대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조에의 권리 주장과 해방으로서 등장했으며, 끊임없이 벌거벗은 생명 그 자체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려 한다는, 즉 ‘조에의 비오스’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또한 근대 민주주의 특유의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근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예속화를 표시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곳—‘벌거벗은 생명’—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인권과 형식적인 자유를 인정하기까지의 기나긴 갈등의 과정 뒤편에는, 희생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살해 가능한 생명체라는 이중적인 속성을 가진 성스러운 인간의 신체가 또다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01 주권의 논리
- 주권의 역설 -
주권자의 역설은 이렇게 표현된다.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법적 권한을 가진 주권자는 법적으로는 법의 외부에 위치한다. 슈미트는 이 구조를 예외의 구조로 표현했다. 법질서가 유의미하려면 먼저 질서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즉 정상적인 상황을 창출해내야만 한다. 이런 정상적인 상황이 진정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자가 바로 주권자이다. 모든 법은 ‘상황법’이다. 주권자는 상황을 그 전체성 속에서 수립하며 보장한다. 그리고 궁극적인 결정권을 독점한다. 국가 주권은 여기에 있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법학에서 예외만큼 높은 위상을 부여하는 이론은 없다.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통해 법이 유효하기 위해서 필요한 "상황을 창출하고 보장한다."
예외란 일종의 배제이다. 하지만 예외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배제된 것은 바로 배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규칙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으며, 단지 질서의 정지에서 비롯된 상황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슈미트가 주권자의 결정은 "법을 창출해내기 위해 반드시 법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말로 정식화한 역설의 궁극적인 의미이다. 주권자의 예외란 근본적인 위치 확정으로서 외부와 내부, 정상적 상황과 혼돈이, 법질서의 효력을 가능케 하는 복잡한 위상학적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연구가 제시하고 있는 테제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 예외 상태 자체가 바로 근본적인 정치 구조로서 점점 더 전면에 떠오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규칙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
법은 주권적 예외 속에 순수한 잠재성으로 남아 있을 때만 개별 사례에 적용될 수 있다. 법은 법이 아닌 것(자연상태라는 형식 속의 순수한 폭력)을 전제하며 그것과 예외 상태 안에서 잠재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것은 언어의 영역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언어란 영원한 예외 상태에서 언어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언어는 언제나 자신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선언하는 주권자이다. 살인을 금하는 규범이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럼에도 처벌할 수 없는 형태들이 있다. 주권자의 예외란 예외에 적용되지 않음으로써 예외에 적용 된다는 점, 그리고 자기 외부에 있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재현되는 형상을 말한다. 예외란 자신이 귀속되어 있는 집합에 포함될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이 이미 항상 포함되어 있는 집합에 귀속 될 수 없다.
슈미트에게서 주권이 예외에 관한 결정 형태를 취하는 것은, 그것이 노모스에 생명을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성을 노모스의 몸체 속에 기입하는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법의 영역에 생명체들이 포함되는 본래의 형태, 또는 법이 요구하는 "생명 관계들이 정상적인 구조화"에 관해 결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실은 배제를 통해 법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위반이 합법적인 사례에 선행하면서 그것을 결정한다. 법질서가 원래는 단지 위반 사실에 대한 제재가 아니라 어떤 제재도 없이 동일한 행위가 반복되는 것 즉, 일종의 예외적 사례를 통해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러한 최초의 위법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법질서 속에 이를 포함 시키는 것, 즉 폭력을 원초적인 법 사실로 정립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외란 법의 본래적 형태이다. 과실은 생명이 법에 포획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위반과는 무관하다. 즉 합법적인 것과 위법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법의 순수한 효력의 발생, 법이 무엇인가를 참조한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와 관련된다. 규칙의 근거가 과실인지 아니면 과실의 전제가 규칙인지 규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예외에 대한 주권자의 결정이 지닌 특징이다. 여기서 생명의 한계-형상, 즉 생명이 법질서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자리잡은 일종의 비식별역이 존재하며, 그곳이 바로 주권의 장이다. 법이란 "대자적인 현존재를 갖지 않는다. 차라리 법의 본질은 특수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생명 그 자체이다." 주권자의 결정영역에서 생명이란 본래 법속에서 배제된 것이다. 이것은 곧 결정 불가능한 것의 지정이다.
예외가 주권의 구조라면 주권이란 전적으로 정치적인 개념도 전적으로 법률적인 범주도 아니다. 주권이란 법이 삶을 창조하며 또 삶을 보류함으로써 삶은 자기 내부에 포함시키는 본래적인 구조이다. 장-뤽 낭시가 시사한 대로 스스로를 무효화하면서 또 더 이상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하는 법의 이러한 잠재성을 추방령이라고 하면, 예외의 관계는 추방령의 관계이다. 추방령을 받은 자는 단순히 법의 바깥으로 내쳐지거나 법과는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법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며, 생명과 법,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비식별역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해진 것이다. 법이 생명과 연관되는 본래적인 방식은 적용이 아니라 내버림이다. 노모스의 잠재력, 노모스 본래의 ‘법적 힘’이란 노모스가 생명을 내버림으로써 생명을 자신의 추방령 속에 끌어안는다는데 있다.
- 주권자의 노모스 -
‘노모스, 모두의. / 나고 죽는 자들과 아니 죽는 자들의 왕은 / 더 없는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 더없이 강력한 손으로 이끄나니. 나의 증거는 / 헤라클레스의 노동이니." 핀다로스의 단편 169번. 이것이 법의 지상권에 대한 수수께끼라 함은, 폭력의 정당화를 통해 노모스의 주권성을 정의하고 있는 점이다. 노모스는 ‘지고한 손으로’ 폭력(비아)과 정의(디케)의 대립물을 역설적으로 결합시키는 힘이다. 솔론의 단편 24번‘나는 노모스의 힘으로써 폭력과 정의를 결합시켰나니..’ 핀다로스에게 주권자의 노모스란 법과 폭력을 통해 그것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을 위험을 야기하는 원리이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속의 인용문 ‘더 없는 정의에 폭력을 가하면서 / 더없이 강력한 손으로 이끄나니.’ 그의 관심사는 주권을 구성하는 폭력과 법의 조응관계이다. 플라톤에게서 ‘자연법’이란 퓌시스와 노모스간의 폭력과 법이 주권 차원에서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인 반면, 소피스트들이 보기에는 명백히 주권의 원리 그리고 비아와 디케의 결합을 정초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또 소피스트들이 보기에 퓌시스의 선행성이 궁극적으로 강자의 폭력을 정당화 시켜주는 반면, 홉스가 보기에는 자연 상태와 폭력의 이러한 동일성 자체가 주권자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 시켜준다. 홉스의 경우 자연상태는 그 본래의 ‘만인에 반하는 법’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인 주권자의 인격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주권은 사회가 자연 상태를 병합하는 것,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자연과 문화, 폭력과 법이 서로 식별되지 않는 영역의 초입구를 표현하다. 바로 이 비식별 상태는 진정으로 노모스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연상태는 국가가 ‘마치 분해된 상태인 것처럼’ 간주되는 바로 그러한 순간에 등장하는 국가의 내적인 원칙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홉스<시민론>. 외부성이란 사실상 정치체제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슈미트에 따르면 규칙이 예외를 통해 연명하듯, 정치체제는 외부성을 통해 연명한다.
슈미트는 법을 제정하는 사건인 주권자의 노모스가 법을 단순한 조정과 협약으로 간주하는 모든 실증주의적 법 개념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려고 한다. 그러면서 노모스와 예외 상태의 본질적인 친근성을 드러낸다. <대지의 노모스>; 대지의 노모스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 질서와 법질서의 연결 관계가 항상 어떻게 법으로부터 배제된 지역, "자유롭고 법적으로 텅 빈 공간" 형태를 취하는 지역을 내포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신대륙; 모든 법이 정지된 시간적, 공간적 영역으로 이해. 예외상태는 노모스의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명확하게 경계지어졌을 경우조차 모든 의미에서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기로서 노모스 속에 포함된다. 따라서 공간질서, 법질서의 연결 관계는 항상 잠재적인 단절을 ‘모든 법의 정지’라는 형태로 이미 자기 내부에 갖고 있다. 하지만 등장하는 것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예외 상태이다. 주권권력이란 뫼비우스의 띠처럼 외부와 내부, 자연과 예외, 퓌시스와 노모스의 구분 불가능성 그 자체를 말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위상학적 식별불가능 지대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만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과정은 이 뫼비우스의 띠가 끊어지고 유럽 공법의 상호 제한과 규칙들의 전 체계가 붕괴되는 과정은 주권적 예외 속에 은폐된 기원을 두고 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은 바로 예외 상태라는 ‘법적으로 텅 빈’ 공간이 자체의 시공간적 경계를 벗어나는 것인데, 이제는 경계 바깥으로 흘러넘치면서 점점 더 도처에 정상적인 질서와 일치하기 시작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는 다시 한 번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된다.
- 잠재성과 법 -
주권의 역설은 제헌(制憲)적 권력, 그리고 그것이 제정(制定)된 권력과 맺고 있는 관계라는 문제에서 더 명료해진다. 제정된 권력은 단지 국가 내부에 존재할 뿐이고 이것은 국가라는 틀을 요구하는 한편 이러한 국가의 현실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이다. 반대로 (국민nation과 동일시되는)제헌적 권력은 국가의 외부에 위치한다. 그것은 국가에 아무런 빚도 지고 있지 않으며 국가 없이도 존재하고 또한 아무리 끄러다 써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 원천과도 같다. 두 관계의 조화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헌적 권력과 제정된 권력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해놓은 잠재성과 현실성이고, 궁극적으로 이 관계는 우리가 잠재성의 존재 및 자율성을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잠재성은 구성상 (무엇을 행하지 혹은 무엇이지)않을 잠재성, 또는 비잠재성 이어야만 한다. 잠재성이 있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현실성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필경사의 모습) 잠재적인 것은 실현되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자신의 비잠재성)을 유보하는 순간에 현실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비잠재성의 유보란 잠재성의 파괴가 아니라 반재로 잠재성의 실현, 잠재성이 자신의 비잠재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주권의 원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잠재성의 구축", 그리고 제헌적 권력을 제정된 권력과 결합시키는 추방령을 완전히 단절할 수 있었던 제헌적 권력을 사유하는 것이 그토록 힘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권에 대한 모든 정의 속에는 잠재성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 핵심은 “잠재성이란 행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며, 복종이란 복종을 가능케 하는 제도들보다 선행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실상 일종의 신화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모든 권력의 비밀을 담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밀의 구조를 버려짐의 관계 그리고 “무엇이지 않을 잠재성”의 관계라는 형태로 조명해보려는 것이다.
- 법의 형식 -
카프카는 주권적 추방령의 구조에 대한 모법적 윤곽을 제시한바 있다. 아무것도 시골사람이 법의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지 않으며, 반대로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또 법은 아무것도 명하지 않는다. 법은 스스로의 적용을 유예함으로써 자신을 시골사람에게 적용시켜, 또한 시골 사람을 자신의 외부에 내버려둠으로써 시골 사람을 자신의 추방령 속에 포획하는 것이다. 하지만 숄렘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법은 단순히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 불가능한 것이라는 형태로 출연한다. 결국 주권적 추방령의 구조란 효력을 가지지만 의미는 없는 법인 것이다. 칸트는 어떤 규정된 목표를 명하거나 금지하지도 않는 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존중’이라고 일컬었다. 1차 세계대전이후의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친숙해져버린 상황을 보면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에 복종하는 삶이란 무고한 몸짓 또는 최소한의 망각조차도 극히 끔찍한 결과를 유발할 수 있는 예외 상태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법 앞에 여전히 존속된다.
호모 사케르 Homo Sacer _ Giorgio Agamben / 박진우 옮김
역자는 911 테러 사건으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분열과 변화에 대하여 글로벌 자본주의와 좌파세력 모두 대안을 상실한 현실에서 조르주 아감벤의 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 책은 조르조 아감벤의『호모 사케르』3부작의 첫 번째 권인 「호모 사케르Ⅰ: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토리노, 줄리오 에이나우디 출판사, 1995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아감벤은 1942년 로마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학부 시절 로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학부 졸업 이후 철학 연구에 뛰어든 그는 프랑스의 철학가 시몬 베유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아비 바르부르크, 발터 벤야민, 하이데거, 푸코 등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유의 대상을 주권에서 통치(성)로 이동시킬 것을 주창한 1970년대 중반의 미셸 푸코의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을 접목시키고 또한 푸코가 본격적으로 탐구하지는 못했던 신학 및 법률 분야로 나아감으로써 근대 정치 철학에 있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 전체의 핵심 주제는 바로 정치의 근본 범주를 ‘주권/벌거벗은 생명’ 의 관계로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비오스,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슈미트와 켈젠, 핀다로스와 헤시오도스, 소피스트들과 플라톤, 그리고 17세기 영국의 홉스가 전개한 주권 이해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과연 주권자가 법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법의 외부에 위치할 수 있느냐의 여부인데, 아감벤은 이것을 정치 체제의 가장 내적인 핵심으로 놓는다. 결국 주권에 대한 정의는 정치의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질문으로 승화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법’ 이라는 형식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존재론적인 ‘모호함’과 ‘비식별역’, ‘내부이자 외부’ 로서의 속성에 대한 탐구로 향한다. 결국 법에 대한 주권자의 중심성은 법 자체의 현존재를 규정짓는 것이다. 이러한 주권 개념의 재검토는 궁극적으로 주권 개념에 기반한 근대 정치 철학의 근본 패러다임의 해체를 겨냥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이 책의 3부에서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을 체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근대의 정치 범주를 푸코가 말한 ‘통치’의 관점으로 파악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생명정치의 문제에 대한 천착으로 나아간다. 현대의 주권은 경찰 과학과 근대 행정의 탄생과 발전에 의존한다. 궁극적으로는 근대 생명정치의 특수성은 전체 인구를 ‘재판에 회부되지 않는’ 호모 사케르로 변형시키는 것으로서, 이는 과거 주권자의 구조적 특성인 예외 상태에 대한 결정권을 실정법의 차원에서 법제화시킬 수 있는 단계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 "내용 없는 인간" L'uomo senza contenuto (1970)
* "방들" Stanze (1977)
* "유년기와 역사" Infanzia e storia (1978)
* "언어와 죽음" Il linguaggio e la morte (1982)
* "산문의 이데아" Idea della prosa (1985)
* "도래하는 공동체" La comunita che viene (1990)
* "바틀비" Bartleby (1993)
* "목적 없는 수단" Mezzi senza fine (1995)
* "호모 사케르" Homo Sacer (1995)
* "이탈리아 카테고리" Categorie italiane (1996)
*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 Quel che resta di Auschwitz (1998)
* "남은 시간" Il tempo che resta. Un commento alla lettera ai Romani (2000)
* "열린 것" L'aperto (2002)
* "비상사태" Stato di eccezione (2003)
* "신성모독" Profanazioni (2005)
* "사고의 잠재력" La Potenza del pensiero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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