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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종언
카테고리 인문 > 문학이론 > 문학비평/평론
지은이 가라타니 고진 (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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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판 서문
- 옮긴이 서문

1부 근대문학의 종언
1. 번역가 시메이 -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으로서의 번역
2. 문학의 쇠퇴 - 소세키의 <문학론>
3. 근대문학의 종언

2부 국가와 역사

1. 역사의 반복에 대하여
반복적인 구조를 파악한다
소비자에게 조국은 없다
주권의 방기로서 헌법 9조

2. 교환, 폭력, 그리고 국가
기반으로서 교환형태
어소시에이션이라는 X
자본주의를 지양한다
네이션의 구조
국가와 폭력
신용은 국가에 의거하지 않는다
국가의 민영화에 대하여
대항운동으로서의 비폭력
국가는 초자아를 갖는다
환경과 제3세계
네이션의 위상
트랜스크리틱 - 이동하는 비평

3부 텍스트의 미래로

1. 아이러니 없는 종언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둘러싸고
외국에 간다는 것
이론, 철학, 비평
일본문학은 죽었다

2. 와야 할 어소시에이션이즘
끝이 없는 텍스트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
보편성을 새긴다
소모전략 또는 진지전의 가능성
NAM을 되돌아보고
X=어소시에이션이란 무엇인가
어소시에이션의 계기로서 렌쿠
어소시에이션이라는 보편성
데리다적 폐색을 넘어선다
네그리&하트의 '다중'을 검증한다
종속이론의 붕괴
생산과정에서 유통과정으로
'희사'라는 아이디어
부의 재분배를
헌법 9조와 국가의 '초자아'
인터넷의 가능성과 함정?282
'처음부터 읽는' 독자들에게
아이러니에 대항하여

- 저자 후기
- 옮긴이 해제 : 문학의 종언과 약간의 망설임



한국어판 서문
우리는 현재 세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전쟁,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 이것들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집약하는 사항들이다. 이것은 시급한일이다. 이전에는 이러한 과제들을 문학은 상상력으로 떠맡았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떠맡고 싶다.
-옮긴이 서문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30년이 넘는 기존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이후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번역사 시메이]는 근대문학의 성립기에 번역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로인해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통찰력있게 보여주므로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그 종언을 발견하는 글이다. 후반부는 대담과 좌담으로 고진의 ‘플라톤식’ 대화편이라볼수 있다. 마지막 [와야 할 어소시에이션이즘]에서는 고진의 작업 전체에 대한 개괄은 물론 NAM의 실패이유, 네그리하트의 [제국], [다중]에 대한 비판 등이 폭넓게 논의되어 있다.


1부 근대문학의 종언


번역가 시메이-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으로서의 번역

메이지 전기 시대. 서양소설의 번역이 활발진행됐지만 의미나 줄거리 소개 정도였다. 거기서 후타바테이 시메이(1864-1909)  등장 이후 원작에 충실하게 *축어적 번역을 시도되었다. 그는 주코프스키(러) 바이런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방법(원작에서 자립한 창작)을 참고했다.
- 그가 쓴 소설 [뜬구름](87-91)은 일본 최초의 근대 소설로서 높이 평가되지만, *투르게네프의 [밀회]등의 번역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무엇보다 원작의 감수성의 움직임이 그대로 일본어로 옮겨진 것 같은 일종의 독특한 어조가 청년들에게 청신한 인상을 주었고, 익숙하지 않은 문체가 오히려 새로운 표현의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 문학 텍스트에는 억어적 형식 자체가 초래하는, 결코 어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뭔가가 있다. 벤야민은 그것을 ‘순수언어’라고 불렀다. 그는 번역가에게 원작의 의미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언어’로 향하도록 강요한다. 후타바테이의 번역은 작품의 ‘순수언어’를 일본어로 구제한 것으로 자국어의 우연적 상태를 파괴했다. 문제는, 일본 근대문학이 ‘투르게네프’의 방향으로 갔다는 것이다. 다른 번역(고골, 고리키 등)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메이지 작가들은 에도소설과 관련있는 풍자적 소설이 아닌 리얼리즘 소설을 일본어로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 19C 프랑스 ; 사진출현 - 인상파 등장 - 우키요에와 접촉 / 일본 ; 인상파이전 미술을 서양미술의 규범으로 받아들임. (리얼리즘 실현)
- 파노프스키가 말하는 리얼리즘 회화의 요소 = 대상 & (그것을 파악하는) 형식 / 소설 = 대상(흔한 인간과 풍경) &  형식 (3인칭 객관묘사)
- 위의 형식을 취해서 확립한 사람이 투르게네프이고 그것을 후타바테이가 번역한 것이다. 이런 흐름에 반대한 작가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영) 스위프트, 로렌스 스턴 등이고 이것은 르네상스적 소설로서 ‘카니발적인 세계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스턴의 카니발적인 세계감각은 시메이와 소세키가 공명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하이카이’라는 전통에 뿌리하는 것이다. 시메이가 20년만에 슨 소설 [평범]에서 그는 대상화된 나와 다른 화자를 유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사쿠로 바꾸었다. 시메이는 투르게네프 선에서 발전한 일본 근대문학의 주류’자연주의’소설을 ‘소가흘리는 침’이라고 불렀다.

*축어적 번역
문자 그대로의 사전적 의미를 표현해 지시적 성격이 강한 구체적 문장을 이룬다.
예)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
→ 잘 된 벼가 그 무게 때문에 밑으로 늘어진다.

*게사쿠
에도시대  통속 오락소설.  심심풀이로 쓰는 소설. 이것은 일본 소설의 가벼움의 실체를 설명할 수 있는데 저변의 중후한 사상성을 전혀 무겁거나 심각하게 만들지 않고 가벼움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쇠퇴 - 소세키의 문학론

1975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구성이 시작되었다. 당시(메이지문학사)는 서양에서 성립된 근대문학의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의만 있었다. 근대 문학은 자연 또는 자면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나쓰메 소세키 [문학론]는 근대문학의 자명성을 의심한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하이쿠와 하이쿠에서 생겨난 산문인 사생문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려했다. 그것은 근대적 리얼리즘의 비판이다. 줄거리가 없고 *하이카이 고유의 풍자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소세키는 에세이에서 사생문의 특징 중 하나를 어떤 ‘정신태도’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어른이 아이를 보는 태도로 프로이트가 ‘유머’에 대해 지적한 ‘정신태도’ 즉 ‘괴로워하는 자아(아이)에 대한 초자아(부모)가 별거 아니라며 위로 하고 힘을 주는’것과 완전히 같다.
- 사생문의 원천에는 ‘하아카랜가’가 있고, 사생문이 가진 ‘세계감각’즉 ‘하이카이적인 것’은 ‘카니발적 감각’이다. 소세키는 하이카이렌가나 사생문이 가진 ‘카니발적 세계감각’을 18세기 영문학에서 찾아낸 것이다. 소세키의 [문학론]은 당시 근대문학의 완전히 비주류에 놓여있던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려는 의도로 쓴 것이다. 
- 30년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썼을때, 나는 일본근대문학의 종언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의 종언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문학의 가능성을 품은 것이었다. 실제 근대문학의 지배적 형태에서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형식들의 글들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소세키가 근거를 부여하려고 했던 타입의 문학재생(르네상스)으로 보였다. 이같은 문학은 90년대에 급격히 쇠락하고, 사회적 지적 임팩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이상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끝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을 마주하게되면서 소세키의 [문학론] 서문을 다시 읽고, 깨닫지 못했던 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사고할 의무가 있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쓰메 소세키(1867-1916)
이후에 등장한 모든 일본 소설가들, 가리타니 고진에 영향.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꼽힌다. 소설,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상과 윤리관 등은 후대 일본의 많은 근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은 일본 지폐 천엔(千円)권에 담겨 있다. 현재는 중국,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의 근대작가 중에서 가장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하이쿠
일본 시문학의 일종이다. 각 행마다 5, 7, 5음으로 모두 17음으로 이루어진다. 운율과 키고에 의해 짧은 시이지만 마음 속에 풍경(심상)을 크게 펼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근세에 발전한 문예인 하이카이렌가, 줄여서 하이카이에서 태어난 근대문예이다. 무로마치 시대에 유행한 렌가의 유희성, 서민성을 높인 문예가 하이카이였지만, 17C 마쓰오 바쇼가 그 예술성을 높였다. 근대문예로서 개인의 창작성을 중시해서 하이쿠를 성립시킨 것은 메이지 시대의 마사오카 시키였다. 시키는 에도 말기의 하이카이를 진부한 하이카이라 비판하였고, 근대화한 문예로 만들기 위한 문학운동을 행했다. 홋쿠가 하이쿠로서 성립했다.


근대문학의 종언

-근대문학의 큰 특질은 소설이다. 근대 이전의 문학에서는 소설이 포함되지 않았다.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것은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했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 사르트르(프) - 그는 철학자이기도 하지만 영구혁명 안에 있는 사회주체성을 표출할 때에는 문학을, 그것도 소설(소설가)의 시점에서 있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존재가 너무 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비판하거나 조소했다. 60년대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이 보급되었는데 그것은 로망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저작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르트르처럼 소설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대신에 사르트르가 ‘문학’으로서 서술했던 것을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으로 바꾼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지위나 영향력의 저하는 USA 에서 프랑스보터 먼저(1950) 일어났다. 그것은 미국 마이너리티 문학으로 흡수되기도했지만, 일본의 대학에 증가한 ‘창작과’에 교수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작가가 대학의 창작코스에서 배출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나는 한국에서 문학의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1990년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들이 김종철을 포함해 모두 문학에서 손을 뗐다고한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문학’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김종철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학을 했지만, 언제부턴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근대문학이 소설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근대이전의 문학(시학)에 소설은 미포함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대중적으로 사랑받으며 존재하고 있었다. 18세기 ‘미학’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감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며 감성·감정이 지적·도덕적 능력(오성이나 지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매개하는 것이 상상력이라는 사고를 등장시키킨다. 상상력이 창조적인 능력으로 평가받은 것은 문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이루었다. 이제까지 감성적 오락을 위한 단순한 읽을 거리였던 ‘소설’에서 보다 인식적이고 도덕적인 가능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은 지식인과 대중 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공감’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을 형성하는 것이다. 소설의 지위가 상승했고, 단지 ‘감성’적 쾌에 지나지 않는다면 미학적이지 않게 되기때문에 끊임없이 지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짐을 지도 커졌다. ‘종교와 문학’, ‘정치와 문학’사이에서 문학은 허구지만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진실을 보여주며, 통상의 인식을 넘어선 인식을 보여준다는 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문학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다”-사르트르
- 오늘날 문학의 의미부여는 불가능하다. 누구도 문학을 비난하거나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와 문학의 연결이 사라지고 작가는 무엇을 써도 상관없다. 하지만 문학의 도덕적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문학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근대문학을 만든 소설이라는 형식이 역사적인 것이되어 그 역할을 완전히 다 했다고 생각한다.
쪾제국주의 때 언어의 사용은 문자언어였다.(한자/라틴어/아랍어 등) 근대국가(네이션=스테이트)는 제국에서 분절되 나온 형태인데, 이때 언어는 민족의 속어로 국어를 만들어갔다. 그런데 실제 속어보다는 세계어를 속어로 번역하는 형태로 국어를 만들어나갔다.
- 루터가 ‘성서’를 속어로 번역한것이 현대 독일어의 기초를 이루고 단테가 ‘신생’을 이탈리아 지방속어로 쓴 것이 지금의 표준 이탈리어.
일본의 경우 메이지시대 속어에 기초한 문어를 언문일치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소설가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언문일치는(미학에서 상상력의 역할과 비슷하게) 감성적, 감정적, 구체적인것과 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의 형성과정과 같다. 당시의 문학의 불가결했던 상황은 지금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해에서 네이션을 생각하게 되었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소설의 종언과 같은 말이다. 다른 문학형식도 아닌 소설이어야만했던 이유에 있어서는 소설의 표현형식이 인쇄기술과 같은 테크놀로지와 관련하는데 있다. 에도의 소설은 문맹인이 많았던 관계로 삽화가 들어가고, 운율이 있는 문체를 소리내며 읽는 형식이었다. 근대소설의 등장은 그림과 음성이 사라지고 묵독과 언문일치를 취하게됐다.
시메이는 [뜬구름]을 언문일치로 쓰다가 방기되어 당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주류에서 벗어났지만, 투르게네프의 [밀회]를 언문일치로 번역한 것은 일본근대문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근대문학은 역시 묵독에 의해 성립되며, 리얼리즘적이고 낭만적인 것이다.
-묵독을 요하는 근대소설은 독자에게 커다란 상상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청각 미디어, 즉 영화가 나오게 되자 그럴 필요가 없게됐다. 회화사에 사진이 등장했을때 회화가 인상파 등의 사진이 할수 없는 다른 길로 현대 회화가 시작된것처럼, 소설도 같은 고민을 했다. 이야기(허구)지만 리얼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영화마저 궁지로 몰아넣는 TV, 비디오 , 컴퓨터에 의한 영상이나 음성의 디지털화가 등장하고 활자문화 또는 소설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오히려 다시 도쿠가와 시대 소설의 회귀라 할수 있는 만화가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더이상 문학이 네셔널리즘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이제 어려울 것이다.
-97년 부커상을 받은 인도 작가 로이는 처녀작으로 상을 받은후 소설을 쓰지않고 사회운동을 하며 에세이만 썼다. 더이상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거나 소설가라는 것도 불가능하다. 로이는 문학을 버린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을 전통적으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는다. 열심히 해서 만화처럼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기 바란다. 
 

-지금까지의 문제는 문학만 생각하면 이해하기어려운데다 근대라는 개념만 해도 불명료하다. 이런 문제는 세계자본주의의 전개속에서 사고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변화가 발생했고, 베버는 산업자본주의를 초래하는 것은 상인자본주의에 있는 소비에의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는 금욕적 태도라는 것을 강조했다.
-사회심리면에서 리스먼은 사회를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타인지향형으로 분류하고, 아메리카 사회가 근대의 내부지향형에서 타인지향형으로 이행했다고 말했다. 타인지향이란 헤겔이 말한 것처럼 타인의 욕망 즉 타인에 의해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산업자본주의가 정보의 생산으로 변하기 시작한 시기에 어디서든 나타난다.
코브제는 세계는 앞으로 ‘아메리카화’할 것이라 했지만, 일본 방문후 “최근 개시된 일본과 서양세계늬 상호교환이 최종적으로 도찰할 곳은 서양인의 ‘일반화’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은 근대소설을 대신하여 만화나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디자인 또는 그것과 연동하는 문학이나 미술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것은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대중문화를 한층 공허하게 그러나 한층 미적으로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앞서 베버가 산업자본주의를 추진시킨 것이 이익이나 욕망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실현된 ‘세속적 금욕’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일본의 경우 이것은 욕망실현의 지연/연장/권리축적 이었다. 일본근대인의 정신적 원동력인 입신출세주의는 메이지 이후 일본인에게 근면이나 금욕이라는 에토스를 가져왔다. 그것은 부모의 뒤를 이어야하는 (전통)을 신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인정을 쟁취하고싶다는 욕망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현실적인 실현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문학’에서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학력주의가 변질되어 프리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입신출세코스로부터 탈락하고 배제됨으로 생겨나는 근대문학의 내면성, 르상티망을 찾기란 어렵다.
-고요의 [금색야차](메이지 36년)를 오늘날 독자가 읽는다면 놀라지 않을것이다. 남녀 모두 처녀성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원조교제에까지 혁명적의미를 부여하려는 학자가 있는걸 보면, 자본주의가 보다 깊숙히 침투했다는걸 알 수 있다. 돈을 벌기위해 투기를 하는 젊은이들은, 자본주의 단계로 말하자면, 산업자본주의 다음 단계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상인자본주의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이 아니라 유통의 교환차액에서 잉여가치를 얻으려고 하며, 그런 자본의 본성이 전면에 등장해 있다. 이런 오늘날의 상황에서 문학은 더이상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운동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한복판에서 대항해갈 필요가 있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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