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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열대(한길그레이트북스031)
카테고리 인문 > 인문교양문고 > 한길그레이트북스
지은이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한길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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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의 마감 ;출발 / 선상에서 / 서인도 제도 / 힘의 탐구
2. 여로에서 ;회고 / 나는 어떻게 하여 민족학자가 되었는가 / 일몰
3. 신세계 ;농무지역(적도 무풍대) / 구아나바라 / 남회귀선 여행 / 상파울루
4. 대지와 인간; 도시와 농촌 / 개척지대 / 마법융단 / 군중 / 장터
5. 카두베오족 ;파라나 / 판타날 / 날리케 / 원주민 사회와 그 형태

6. 보로로족 ;황금과 다이아몬드 / 선량한 미개인 / 죽은 자와 산 자
7. 남비콰라족 ;잃어버린 세계 / 황야에서 / 전신선을 따라 / 가족생활 / 문자의 교훈 / 남자, 여자, 족장
8. 투피 카와이브족 ;카누를 타고 / 로빈슨 / 숲에서 / 귀뚜라미 마을 / 자핌새의 소극 / 아마조니아 / 세린가나무의 숲
9. 귀로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 / 럼주 한 잔 / 탁실라 유적 / 챠옹(불교 사원) 방문



슬 픈 열 대    C 레비-스트로스 / 박옥줄 옮김  ::  발제자 박선화 / 101120

제 4 부 대지와 인간

12. 도시와 농촌
상파울루의 가장 가까운 원시촌락은 1820년경에 독일 이주민 집단이 들어와 비참한 농민생활에 녹아들었다. 일본인들도 많았다. 이민회사를 통해 유입된 그들은 조직적으로 장려된 칩거생활속에서 회사에 진 빚을 갑고, 번 돈은 금고에 보관해가면 긴세월을 보냈다. 상파울루 중심부에는 서민지대의 몇몇시장이 흑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되었다. 사람들은 거의 혼열이지만 시장의 상품들은 지역의 순수혈통을 보존하고 있다.
내륙지방에서는 지중해적 전통의 잔재보다는 잉태 중에 있는 한 사회가 조장하고 있는 이상한 형태를 보는 것이 더 흥미진진했다. 여기서는 유럽 진화의 극히 초기적인 단계를 복구시키는 듯 보이는 것이 유동 중에 있는 형태였다.
19, 20세기에 걸쳐 개척의 선단은 서서히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이동해서 맨 마지막의 지역에서는 1935년에도 커피생산량만큼 인구가 증가했다. 그에 반해 북쪽의 낡은 토지에서는 그만큼 인구가 감소하고 1854년부터 메말라버린 땅들은 폐기되기 시작했다. 이런 공간사용의 순환과정은 그 징후가 일시적인 역사적 진화와 부합되었다. 상파울루의 인구는 24만에서 오늘날엔 200만명 이상의 인구로 증가했다. 그러나 내륙지방에서는 도시의 부류가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고, 그곳 주민이 불어나면 주변 시골의 인구는 단번에 줄어들었다. 이런 변형은 지질학적 단계를 따라 유기적 존재의 수백만 세기에 걸친 진화과정을 비교하는 고생물학자들에게 밝혀지는 것만큼 감동적이다.
현대적인 생활과 교역으로 인구가 밀집했던 해안지방에 비해 중부내륙지역은 20세기 초엽에는 거의 방치된 상태였다. 북,동쪽에는 버림받은 광산도시는 황폐한 환경에 폐허화한 대건축물들(바로크양식의 교회들)만 남아있다. 광산채굴과 특히 제련소에 나무를 대면서 들판이 황폐해지고 숲이 피폐해지자 모두 버리고 떠난것이다.
브라질 최초의 마을들을 보면 세습재산으로 그 도시의 이름이 정해진다. 땅의 소유자가 스스로 개척자 혹은 도시의 주인이 되고자 하여 자기의 이름을 따서 도시이름을 짓는 것이다. 정치적인 계산에서 그 도시가 어떤 유명한 인물의 후원을 받도록 그들 이름을 빌려 대통령의 이름 따위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주기는 몹시 짧았고 그 취락은 다시 몇번씩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렇게 변덕과 야망이 빚어낸 도시에는 몇 안되는 인구가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오두막살이 몇 채만 남게 된다.

13. 개척지대
상파울루에서 남쪽으로 가면 개화된 중앙지대와 가까운데 위치하면서도 아직도 미개한 상태로 남아있는 토착민 사회의 잔재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현대화한 형태의 내륙 식민지 건설지역인 노르테 파라나 지역이 있다. 1930년까도 빽빽히 들어찬 나무들로 그 숲은 거의 처녀지였으며, 오직 몇몇 인디언 무리가 그 때까지 돌아다녔지만 내가 브라질에 도착했을때 그곳이 막 개방되기 시작했다. 숲을 가로질러 철도가 뻗어나갔고, 그 주위 1제곱킬로미터를 개간해 도시가 들어서게 했다. 사람들이 몰렀고, 수천명에 불과했던 이 지역에 1950년에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새 도시들은 완전히 북유럽식이었다. 중부와 동부유럽을 연상시키는 집들, 말이끄는 네바퀴 수레들. 역시 빠른 속도로 형태를 잡아가고 있는 어떤 미래의 윤곽이 예기치 못했던 잔재보다도 더 감격적이었다. 삼림 속 한가운데서 아무렇게나 도려낸 이 사각형 속에서 바르게 난 길들이 출발점에서 보면 특성도 없는 기하학적인 선으로 똑같아 보이지만 다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다. 그리고 도로의 이유에 걸맞게 상업지역과 주거지나 공공기관들이 자리를 잡거나 강요를 받는다. 각기 상이한 도시생활 양식이 결정지어지고 이 요인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혜를 주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실망을 주어가며 성공과 실패를 낳게 함으로써 미래의 주민들을 형성시키게 된다. 도시는 자연의 대상인 동시에 문화적 주제이니 개인임과 동시에 단체, 체험된 것임과 동시에 꿈구어지는 것이며, 인가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다.

14. 마법융단
원래는 어촌이었는데 영국식민지배로 조그만 항구이자 상업도시가 된 카라치는 1947년에 수도(파키스탄)로 승격되었다. 페르시아계의 백만장자들이 서양의 사업가들을 겨냥해 궁전과 같은 호텔을 지었다. 건물 한동이 채 준공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손님을 받아서 준공과 동시에 건축비를 벌었다. 캘커타의 성소인 칼리 여신의 신전에서 종교사업가들이 성지순례자들을 숙박하기 위해 세운 현대판 대상숙소가 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에서 인간 짐짝이 아침에 기상해서 하감, 종기, 곪은 데, 상처 등의 치유를 위해 무릎꿇고 기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무섭게 여러개의 호스가 물을 뿜어내어 숙소 내부를 온통 세척해버린다. 그리고 다음 화물들을 받아들인다. 황마 노무자들이 지내는 쿨리라인스라는 곳은 블록으로 싸인 여물통에서 여섯, 여덟명이 살을 맞대고 산다. 인간의 삶의 기능을 오로지 배설에만 국한시켜버리는 사고법에서 태어난것이다.
어느 젊은 교수의 손님으로 초대받아 간 저소득층 집에는 이제 겨우 해방된 몸인 부인이 있었다. 남편은 자신도 잘 모르는 ‘서양’(문명)에 아첨하기위해 갖가지 그녀를 비꼬며 여러말을 했는데 괴로웠다. 나는 노무자 주거지역과 저소즉층 집단 주택으로 특징지어지는 아시아가 내 눈앞에서 그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생활양식이 그후 ‘신세계’에서 잠시 지쳬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아메리카 고유의 문화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 문화는 1850년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일본에 도달하고, 계속해서 세계일주를 마친 후에 지금은 그 기원지로 되돌아온 것이다.

15. 군중
우리는 물질적이나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최고의 가치들을 도시생활과 결합시키려는 버릇이 있다. 인도의 대도시들은 일종의 빈민굴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끄러워하거나 꺼리는 일들이 인도에서는 도시생활의 자연스런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회피하려고 하는 모든 것, 인간의 공동생활에서 생기는 모든 부산물, 이 모든 것들이 인도에서는 한없이 널려있다. 도리어 도시가 번영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환경이 되고 있다. 구두닦이, 불구자, 매춘 중매인, 시장 짐꾼, 택시 운전수, 노점 상인 등,, 이들의 이런 행동방식의 이유는 단 한가지는 바로 허기이다. 허기가 수많은 사람들을 시골에서 몰아내 캘커타의 인구를 불과 수년 만에 200만에서 500만으로 끌어올린 것이고, 바로 그것이 이향자들을 철도역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운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인간관계라는 개념의 끊임없는 부인인 듯이 보인다. 여기서는 사람을 대할 때 벌써부터, 단순히 한 인간과 접촉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상대방 눈을 쳐다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허기로 가득찬 개인의 요구로 자신을 보호해야하기때문이다. 이렇게 사교상의 규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관장하는 모든 원초적 상황이 무너져버리고,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방법도 없다. 그들은 평등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만한 태도로 자기들을 짓밟아주기를 애원하거나 간청하고 있다. ‘살 권리’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강자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에 의해서만 겨우 얻을 수 있는 분에 넘치는 은혜다.
이런 인간관계의 악화는 유럽의 정신으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것 같이 여겨진다. 우리는 계급간의 대립을 투쟁이나 긴장이라는 형태로 이해하려 든다. 하지만 여기서 ‘긴장’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벌써 찢겨져 나가고 없다. 처음부터 단절되있었고, 좋은시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체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체제를 파괴하기부터 시작하지 않는한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있다. 이 경우, 우리는  관계의 불균형을 발견하고, 그들이 존경을 통해서 우리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내쫓아야한다. 지나친 사치와 지나친 비참 사이의 간격이 인간다움의 차원을 파괴하고 있다. 이제 남아 있는 유일한 사회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바라며 살아 남는 사회, 모든 것을 요구하면서도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인도에 있는 유럽인은 ‘베어러’라는 상당수의 하인의 수발을 받는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을 돌면서 명령을 내려줄 것을 애걸한다. 주인의 행동이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되거나 또는 옛 영국주인처럼 행동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이런 태도는 각자가 자기 아랫사람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거나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어느 타인에 대해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마련인 그런 전통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16. 장터
아대륙(亞大陸, 인도)이라는 말은 이제 ‘대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제대로 갖추기 못한 어떤 한 대륙을 가리키는데 쓰이게 되었다. 한 순환 과정의 극한점까지 추진된 해체작용이, 수억의 인간조직을 수용하던 구조를 파괴해서 공포, 고통, 굶주림처럼 가장 기본적인 동기에 의해 사방으로 몰리고 있다.
온갖 구,신시장을 다녀봤다. 벵골의 수면위에 널린 시장풍경. 이곳은 매년 홍수로 인해 비정상적인 생존조건을 만들어진다. 사람과 동물이 굶주린다. 대부분 베를 짜면서 살아오던 그들은 식민지 지배자들이 면직물시장을 개설하면서 가업 잇는것을 금했기때문에 굶주려 죽게되었다. 그나마 있는 토지에서 재배된 황마마저 공장을 거쳐 유럽, 아메리카로 나갔다. 문맹인데다 반라로 살아가는 이들 농민들은 그 생계가 세계 시장의 경기변동에 좌우하게 되었다. 여기 주민은 출발점부터 도달점가지 소외의 체제하에서 살아왔다. 이곳의 불쌍한 사람들은 입을 것을 사입기도 어렵고, 제품도 ‘외국 규격에 의거해’ 그형식이 결정된다.
자유라는것은 다른 문명보다 더 우수한 문명만이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재산이다. 우수한 문명만이 자유를 낳을 수 있고 또 그것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시의 생활조건과 무관하게 자기의 신조를 선택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조직이 사회의 생존형태를 결정하기는 커녕 생존 형태가 그 자체의 표현인 이데올로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시아와 열대 아메리카의 비교는 아무리 적절한 정치적, 경제적 대비책을 갖고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 제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제한된 구간에서의 인구증가문제이다. 그런점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실패했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여기서 얻어지는 교훈은, 하나의 사회는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 사상가들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예속을 분비해가면서가 아니면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조직적인 가치박탈이 만연하고 있다. 아시아가 미리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미래상. 자유의 행사와 자유의 표상 사시에 적절한 관계가 존재하던 시대의 영상을 소중히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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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 픈 열 대    C 레비-스트로스 / 박옥줄 옮김  ::  발제자 박선화 / 101127


5장 카두베오족

파라나
나는 티바지 강 양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해발 약 1천 미터의 고지대에서 처음으로 미개인들과 접촉했다. 우리 유럽인들이 브라질을 발견했을 당시의 남부 브라질 전테는 어너와 문화의 모양에서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던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해안지역에 사는 침략자들에 의해 몇세기 전 이곳으로 밀려나게 된것 같았다. 해안지역의 침략자들은 다시 식민 개척자들에게 소탕되었지만 이들은 수세기 동안 살 수 있었다. 1935년까지 존속한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단들은 1914년경에 진압되었고 또 브라질 정부는 ‘문명생활에 적용’시킨다는 목적으로 그들을 특정지역 내에 거주시켰다. 학교나 제재소를 만들었고, 정기적으로 도끼나 칼, 의류 등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20년 후 이 실험은 중지되었고 보호국은 인디언들이 독자적으로 살아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짧은 문명생활 체험을 통해 그들은 브라질인들의 옷, 도끼, 칼, 바늘, 실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을뿐 여전히 야외에서 사는것을 좋아하고, 방랑생활을 하며, 침대는 쪼개서 뗄나무로 사용하고, 우유나 고기따위도 먹지 않았다. 결국 티바지 인디언들은 ‘진정한 인디언’.’진정한 야만인’이 아니, 20세기 초반에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났던 사회학적 상황을 완전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였지만 갑작스레 문명의 강요를 당한 ‘예전의 야만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 대한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짐과 동시에 문명은 그들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제는 이들 인디언이 자신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되었기 때문에 근대문화와 미개문화간의 명백한 균형이 이상스럽게 역전되는 점을 주목할 수가 있다.
상제로니무의 원주민 지역은 면적이 약10만 헥타르나 되어 450명의 인디언들이 대여섯 개의 작은 부락에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우리는 주 정부에서 건립한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는 목조가옥들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간이집이나 차양만 있는 야외에서 살았다. 보통 남자들은 누더기 셔츠와 낡은 바지를 입었고 여자들은 면으로 된 옷을 맨살에 그대로 입거나 겨드랑이 밑으로 담요 한 장을 몸에 감았으며, 어린아이들은 발가벗고 다녔다.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서 몽고인종형의 특징이 나타나보였다. 그들은 어느때고 달착지근한 감자를 먹었다. 엷은 고사리덩이 위에서 아무렇게나 자거나 옥수수짚으로 된 거적 위에서 잔다.
우리는 이들의 물건들이 브라질에서 만든것인지 지방 특산물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또 그 보잘것 없는 물건들을 획득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들에겐 돈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더이상 전수가 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물건을 빼앗아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사냥과 채취가 숲에서의 유랑생활을 지배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몇주동안이나 가족들이 모두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이 어느 은밀한 은신처에서 살고 있는지, 또 어떤 복잡한 길을 따라 옮겨 다니는지 모르게된다. 어떤 전통과 의식 그리고 신념에서 그들은 다시 숲속으로 되돌아가는 걸까?
원예는 이들 경제의 으뜸가는 활동으로 숲속을 개간해 바나나, 감자, 마니오크, 옥수수들을 기른다. 사냥을 통해 얻은 짐승과 반야생의 돼지가 육식의 재료가 된다. 또 그들은 애벌레 코루를 좋아하지만, 백인들의 조롱에 기분이 상해 자기들이 그것을 좋아하는것에 대해 부인하고 감춘다. 하지만 어느 인디언의 집에 갑자기 들어가게 되면 그것을 미처 감추기 전에 애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컵을 볼 수 있다.

판타날
카두베오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햇을 분만 아니라 또 그들의 대부분은 벌써 소멸되어 버렸다. 그리고 보로로족은 잘 알려졌으며 지금도 번창하고 있는데, 중부의 마투그로수 주에 살고 있었다. 이곳은 트레스 라고아스역의 바로 전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역에서 기차가 파라나 강을 횡단한다. 이 강은 너무 방대해 우기가 시작됐는데도 아직 강바닥이 보이기도 한다. 나무와 풀이 무성한 계곡이 나타나기도 한다. 캄푸그란데와 아키다우아나 사이에는 보다 깊이 갈라진 틈이 있어 마라카주 산맥의 절벽이 돋보인다. 마라카주 산맥의 협곡은 코리엔테스에서 말하자면 다이아몬드 채취자들의 집결지인 ‘가림푸’를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부터 모든 풍경이 바뀌는데, 아티다우아나를 지나면 곧 판타날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파라과이 강의 중간 유역을 차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늪지대이다. 흐르지 않는 물로 형성된 아치나 복잡한 굴곡형으로 이루어지는 일대 장관을 이룬다. 포르투 에스페란사는 사람이 거의 살 수 없는 저주받은 곳이다. 1,500킬로미터나 되는 긴 철로의 4분의 3이나 되는 사람이 살지않는 지역을 통과하여 정차하게 되는 곳 맞은편의 작은 언덕을 제외하면 그 어떤 것도 이들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다. 철도 고용인과 그들의 집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나 가옥이 전혀 없었다. 나무로 된 허술한 집들이 늪 위에 지어져 있었다. 작은 오두막에 짐을 풀었지만 우리는 기관차에서 지냈다. 새벽에 일어나면 호흡하기 힘들정도로 공기중에 습기가 가득했다. 기관차가 빨리 달렸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았다. 철로를 따라가면 작은 관목들이 마치 과수원처럼 간격을 두고 솟아있고, 나무들은 어두운 덩어리를 이루며 뒤섞여 있었다. 모든것이 미지근한 열기 속에서 천천히 자라도록 준비되어 있는것 같았다. 겉보기와 달리 판타날의 물은 조금씩 흐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어떤 지점에서는 조개껍데기와 진흙이 쌓여서 그곳에 식물들이 뿌리를 뻗고 자란다. 한때 그곳에 인디언들이 살았던 흔적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카팡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농경지가 잇는데, 우리는 그곳을 카두베오족 탐색의 출발지로 선택했다. 사람들이 ‘파젠다 프란세자’(프랑스인 농장)라 불리는 철로 연변의 면적은 약5만 헥타르나 되었고, 철로가 120킬로미터를 통과하고 있었다. 브라질의 영토에서는 카두베오족이 이들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부족이었다. 설립된지 10년이 지났지만 모든 자본은 처음에 토지를 매입하는데 소비되버렸기 때문에 가축과 장비를 개량할 여유가 없어서 쇠퇴해가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거기서 농사꾼으로, 한편으로는 식료품 장사로서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꾼들이나 날품팔이인 엠프레가두들이 그곳에 와서, 사탕수수를 가공해서 알맹이로 만들어 가까운 상점에 팔고는 그 지역에 유일하게 식료품을 파는 파젠다 상점에서 아이들을위해 과자를 사준다. (그들이 가공한 알맹이로 만든 과자. ㅡ훨씬 비싸다)
농장주들은 목장에서 가축들을 ‘돌보면서’ 거의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하루에 두번씩 모든 사람들은 ‘시마랑’. 즉 빨대로 마시는 ‘마테’라고 불리는 파라과이 차를 마기시 위해 모인다. 이것을 찬물에 넣어 끓을때 끄집어 내면 그 향이 보존되어 원기회복에 도움이 된다. ‘시나’로 불리는 소녀가 마테를 가지고 ‘시마랑’을 만들어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한번씩 빨기도 한다. 마테는 아마존 지역의 과라나보다 우수라고, 볼리비아 고원의 보잘것없는 코카보다 훨씬 낫다.

날리케
카두베오족의 수도인 날리케는 과이쿠루스로부터 약 150킬로미터쯤 떠어져 있으며, 말을 타고 가면 사흘이 걸린다. 우리는 작은 짐승들이 진흙탕을 재빨리 건너가고 있는 늪지대를 가로질러 숙영지에 도착했다. 라르곤 전신국에는 목장 하나와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 라르곤을 지나 ‘인디언의 길’을 따라 여행했다. 피토쿠에 도착했다. 황폐한 세개의 가옥뿐이었으나 우리들이 그물 침대를 설치하기에는 충분했다. 피토쿠 강이 수킬로미터 떨어진 판타날 쪽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또 판타날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게되었다. 날리케 근처에 있는 가옥이 다섯채만 남은 엔제뉴(사탕 농장)부락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이곳의 오두막들이나, 원주민들의 의상, 얼굴 생김새가 브라질 농부들의 것과 구별할수 없을만큼 혼합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들 인디언들의 집은 백인들의 오두막(지붕)과 거적으로 된 평평한 지붕을 가졌던 옛날 원주민들의 은신처를 결합한 중간형태이다. 이 집에는 여섯가족가지 함께 살면서 거주공간을 따로 쓴다. 그리고 녹비, 긴 무명천, 호리병박, 그물, 집으로 만든 바구니 따위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사람들은 널빤지로 만든 칸막이 판자위에 드러눕거나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방구석에는 장식이 된 커다란 물 항아리가 3개의 다리로 된 받침대 위에 얹혀있었다.
이곳은 중심지역 세곳의 인구를 모두 합쳐도 200명이 넘지 못하였다. 사냥을 하거나, 야생과일을 채취하며 소따위의 가축을 기르거나, 옥수수를 약간 경작하면서 살았다. 도기를 만드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주요한 활동이었다. 가래로 형태를 만들어 음각을 새겨 산화제일철로 채색을 한 다음 노천에서 불을 굽는다. 그리고 뜨거울 동안 니스러 장식하는 방식이다. 여자아이들은 손쉬운 재료를 가지고 인물이나 동물의 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장난감일까 혹은 신상일까? 이 신성한 목상들이 장난감으로서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신앙의 붕괴라고 간주한다면 너무 단순한 생각인것 같다. 원주민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광범위한 방식으로 신성과 세속을 조정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에 다른 오두막에 살고 있던 어떤 소녀의 사춘기를 축하하기위한 축제가 열렸다. 그녀에게 옛날 옷을 입히고, 어깨, 팔, 얼굴에 화려한 그림을 그리고,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젊은 민족학자들은 원주민들이 사진기들 무서워했기때문에 그것을 완화시키기위해 미리 현금이나 선물을 주는 방법을 섰다. 카두베오족은 이런 체계를 이용하여 사진찍기 전에 항상 보상을 요구할뿐 아니라 보상을 받기위해 사진찍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원주민 사회와 그 형태
한 종족이 지닌 관습들의 전체적 집결에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양식이 존재한다. 관습들이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절대적인 방식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이 가능한 관념의 저장고로부터 어떤 결합들을 선택해낸다. 토바족, 필라가족, 브라질의 카두베오족, 므바야 과이쿠루족의 경우. 카두베오족 여왕은 구아나족의 시중을 들면서 일하지 않고 시합을 즐겼었다. 구아나족은 약탈자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농작물을 세금으로 바쳤다.
므바야족은 카스트로 조직되어 있었다. 귀족은 크게 세습과 신분상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귀족 다음으로 무사계급이 있었다. 구아나족이나 샤마코쿠족, 또는 다른 종족의 노예들이 천민계급을 이룬다. 귀족들은 그들의 가문에 대등하는 문신이나 형판을 몸에 채색함으로써 그들의 서열 표시를 나타낸다. 이들의 오만함은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의 정복자들까지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포르투갈의 여왕만이 그들과 교제할 수 있는 품위를 지녔다고 생각하였다.
이곳 인디언들은 일부일처제였다. 귀부인들은 공공연히 남자들과 연인관계를 가졌는데 남편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결코 질투를 내지 않았다. 이 사회에서는 자연적인 감정에 대한 강한 적의를 나타냈다. 출산에 대한 혐오. 무사들의 원정의 주 목적의 하나는 어린애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귀한 신분의 아기가 태어나면 축제를 열었다.
카두베오족에 있어서 남자는 조각가이고 여자는 화가이다. 남자들은 단단하고 푸르스름한 가이악 나무(유창목)로 채색된 인형을 만든다. 여자들은 도자기와 피부의 장식만을 하도록 제한되어 있는데, 살갗에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몇몇 여자들은 비할 데 없는 대가들이었다. 그들의 얼굴, 때로는 몸 전체가 정교한 기하학적 주체들이 교대로 나타나는 비대칭적인 아라비아 문양의 그물 모양의 그림으로 뒤덮여 있다. 그녀들이 사용하는 주제는 비교적 단순한 것(나섯, S, 십자, 마름모, 완자, 소용돌이 형)들이지만, 이것들은 각각 본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결합되어 있다. 35년에 내가 수집했던 400개의 디자인 가운데서 서로 닮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나와 나의 후계자들은 인디언의 도안양식에 내재하는 이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카두베오족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서로 상대방에게 그림을 그려준다. 그러나 이같은 습속은 한층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산체스 라브라도르의 보고에 의하면, 귀족들은 다만 그들의 이마에만 도식을 행하고, 얼굴 전체에 그림을 그린 사람은 평민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도식은 젊은 여자들에게만 국한지었다. 왜 원주민은 인간의 얼굴 모습을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그는 이 점은 규명해보려고 노력했다. 남을 속이기 위한 의도도 틀림없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림 그리기란 인간 속성의 한 부분이며,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상태의 금수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많은 혼혈인들과 다른 종족출신의 원주민들이 날리케로 와서 그곳에 정착을 하고, 또 결혼도 하였다. 따라서 이처럼 여자들이 얼굴과 신체에 도식을 하는것은 성적매력을 강화하거나 상징화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므바야족은 자연에 대한 그들의 공포를 안면도식과 낙태, 그리고 영아살해라는 관습으로 표시했다. 이 표현은 인간이 신의 모습의 반영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카두베오족 예술의 예외적인 성격을 잘 설명해준다.
이들의 회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직선, 나선, 소용돌이꼴은 바로크양식의 주철세공을 연상케한다. 아마 정복자들로부터 차용한것 아닌가 싶다. 57년에 서양의 군함이 처음 그곳에 왔을때 그들은 온몸에 닻들이 그려진 것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카두베오족의 도안양식을 연구해보면 그것의 독창성은, 이들 최초의 유형들의 상호조합으로 완성돈 작품에 존재함을 알수 있다. 이러한 조합의 구성방식은 너무 체계적이고 세련된 것이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예술이 인디언들에게 제공해 주었을지도 모를, 그분의 어떤 암시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출발점이 무엇이었든간에 이 발전은 아주 놀랄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직 원주민 자신들의 독자적인 이유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
카두베오족 예술의 신비한 매력과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 같은 복잡성은, 만약 한 사회의 이해와 미신이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면 실현될 수 있었던 제도들에 대해서 상징적인 형식을 부여하려했던 사회의 환상으로서 설명될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문화가 지닌 매력은 정말 굉장한 것이었고, 그 문화의 여왕들은 화장으로써 그 문화의 꿈을 장식하였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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