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05_ Art Since1900<1900a~1900b>
ArtSince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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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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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a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다. 빈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표현적인 미술이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등장한다.
20세기 초 억압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의 해방적 표현을 통해 지옥을 휘저어 놓은 듯한 클림트, 에곤실레, 오스카 코코슈카는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와 연결된다. 동시대를 살아간 빈 출신의 이 네 인물 사이의 연결 고리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발전시킨 ‘꿈-작업’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 획기적인 연구에 따르면 꿈은 ‘수수께끼’로, 표현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비밀스러운 소망과 이를 억누르려는 내부 검열자가 만들어 낸 토막 난 내러티브 이미지들이다.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의 도발적인 그림과 초상화에서 주로 나타난 이 갈등은 그림 속 모델과 화가 모두에게 내재해있는 표현과 억압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들의 미술은 다른 어떤 모더니즘 양식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내리기에 적합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열 아홉 명의 미술가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 등의 건축가 그룹은 1897년 미술 아카데미에서 탈퇴하여 독립된 건물까지 갖춘 새로운 조직을 구성했다. 보수적 아카데미 진영에 대항하는 분리파는 당시 빈에 존재하던, 사적 현실과 공공의 도덕 사이에 엄연히 놓여있던 균열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하던 때에 등장한 이런 새로운 미술은 역사학자 칼E.쇼르스케가 주장했듯이, 구 체제에 존재하던 ‘자유로운 자아의 위기’의 징후적 표현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들 미술가와 프로이트와의 연관성이 더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이런 미술이 드러낸 것은 자아의 해방이 아니라, 아카데미와 국가라는, 위기에 처한 권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개별 주체 내부의 갈등, 즉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반역과 새로운 자아에 대한 나르시즘적 추구의 모호한 조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문화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분리파 미술가들의 아르누보 경향 사이에도 간극은 존재했다. 클림트는 모자이크뿐만 아니라 템페라와 금박 같은 고풍스러운 매체를 사용했다. 그러나 선과 색채의 사용에서는 추상적인 형태의 모더니즘 실험을 장려했다. 이처럼 모순에 빠진 분리파는 양식적으로는 구상과 추상, 분위기상으로는 세기말적인 불안과 20세기 초의 삶의 기쁨 사이에서 갈등했고, 이런 갈등은 클림트를 계승한 실레와 코코슈카의 날카롭고 거의 신경증에 가까운 선 표현에서 드러나곤 했다.
빈 분리파의 첫 번째 주자는 구스타프의 작품 세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적 문화에서 시작돼, 19세기말 아방가르드의 반 전통적인 반항을 거쳐, 빈 상류사회의 장식적 초상으로 마감했다. 1894년 신설된 빈 대학에서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라는 계몽주의적인 주제로 철학. 의학. 법학을 나타내는 천정화 세 점을 의뢰 받았다. 10년간 이 작업에 매달린 클림트는 1900년에 첫 작품인 [철학]을 공개했다. 이 세계에서는 마치 빛에 대해 어둠이 승리한 듯 보였다. 1901년에 공개된 다음 작품에서는 의학을 또 다른 지옥으로 표현하여 조롱했다. 대학 측에서 모욕적인 작품을 거듭 거부했고, 법학을 주제로 한 마지막 그림에서는 형 집행의 광경을 지옥으로 묘사하여 대학의 처사에 응수했다. 화면아래 어두운 공간에서는 격양된 복수의 여신 셋이 야윈 남자를 둘러싸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여기서 형벌은 거세를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레와 코코슈카가 이후 작품에서 해방시키려 했던 것은 이와 같은 위축된 남성이었다. 쇼르스케는 ‘그의 반항 자체는 무기력이라는 정신으로 물들어 있다’는 말로 클림트를 설명했다. 이후로 클림트는 아방가르드에서 벗어나, 세련된 사교계 명사들의 사실주의적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장식적인 배경에 장식적 인물들을 그렸다. “억압된 본능적 충동”을 탐구하는 일은 실레와 코코슈카의 몫이 됐고, 이들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고뇌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 반 고흐, 폴 고갱, 에드바르 뭉크와 페르디난드 호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
부르주아 철도 공무원 가정에서 자란 에곤실레는 1907년 클림트를 만났다. 클림트와 코코슈카가 사디즘과 마조히즘 충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면 실레는 도착적인 쾌락에 대한 프로이드의 또 다른 개념인 관음증과 노출증을 탐구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일한 관람자, 스스로 내보인 모습을 은밀하게 엿보는 외로운 관음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입을 벌린 회색 누드 자화상]의 인물은 [법학]에서 나오는 야윈 희생자를 좀 더 젊게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남성임에도 성기는 오그라들었고, 토르소는 여성적이다. 눈가에 둥글게 표현된 부분 때문에 얼굴은 데스마스크 같다. 벌어진 입도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절규나 죽음을 맞이한 순간의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자화상은 삶과 죽음이 신경증의 상태에서 서로 만나는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인물을 변형한 것은 당시 빈 미술의 주요한 유산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30년 뒤 나치는 이 미술을 ‘퇴폐적’이라고 낙인 찍었다. 프로이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 미술가들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인물 묘사를 이어받은 일종의 징후적인 초상화를 만들었다. 이 초상은 미술가의 욕망을 드러내기 보다는 그림 속 모델에 내재된 억압을 몸의 경련과 긴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코코슈카는 이런 징후적 초상을 실레보다 더 발전시켰고 그 파괴적인 차원도 한층 심화시켜, 결국 비에서 추방되기까지 한다. 어려운 시기에 코코슈카는 엄격한 디자인과 격렬한 논쟁으로 악명이 높은 모더니즘 건축가이자 평론가인 아돌프 로스의 지지를 얻었다.
1900b
앙리 마티스가 오퀴스트 로댕의 파리 작업실을 방문하지만 선배 조각가의 양식을 거부한다.
앙리마티스가 1900년에 오귀스트 로댕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이 60세의 노작가는 이미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작품 작품세계는 공공조각과 개인적인 조각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명성은 대부분 대리석작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반면 브론즈 주조를 거의 하지 않은 석고 작품 등, 다수의 혁신적인 작품들은 그의 작업실에 숨어 있었다. [발자크 동상]에서는 전통적인 표현법이 거의 쓰이지 않았는데, 아마 이 작품은 로댕 자신이 선호하는 개인 양식을 형상화한 최고의 공공조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티스는 로댕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모델을 재빨리 스케치한 그림 하나를 가지고 갔다. 로댕은 지금의 드로잉보다 더 “꼼꼼하게 그리고” 세부 묘사를 덧붙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마티스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로댕의 충고는 그가 이미 분명하게 거부했고 로댕 역시 경멸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에콜 데 보자르의 교육 방침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로댕을 찾아간 것은 그의 작업에 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노예]는 분명히 로댕의 미술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동신에 그로부처 결정적으로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예]는 로댕의 팔 없는 [걸어가는 남자]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기 때문이다. 로댕의 것은 동작은 정지돼 있지만 형상은 도약할 준비가 돼 있다. 대조적으로 마티스의 [노예]는 어떻게 바꿔 볼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이면서 자기 충족적이다. 분명 모더니즘적인 최초의 반기념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 조각은 대상으로서 자율성을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서양 조각은 조각가가 대리석에 ‘생명을 물어넣고’ 사람들이 그의 조각에 유기적 생명이 부여됐다고 믿게 만드는 것에 치중했다. 공공조각으로 보면 로댕은 이런 전통의 완벽한 계승자이지만, 개인적인 작업으로 보면 로댕은 [프로세스 아트]의 대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우연이든 아니든 모델링이나 주조 등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로댕은 공공조각에서는 조각의 투명성을 언어로 옹호했지만, 개인적인 작업에서는 조각의 불투명성과 조각의 물질성을 택했다. 마티슨느 분명 이런 선례에 고무돼 [노예]에서 표면의 들쑥날쑥함을 강조했다. 로댕의 ‘과정적’ 특징을 그대로 모방하는 동안 마티스는 로댕의 특성에 더 집착하게 됐다. 들쑥날쑥한 표면은 인체와 인체 전체가 형성하는 구불거리는 곡선과의 통합을 파괴하는 지점, 즉 조각이 회화로 변형되는 지점으로 위험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로댕의 물질성의 원리를 더 확실하게 알게 된 마티스는 두 번 다시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이후 마티스가 선보인 브론즈 작업은 모두 조각의 신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작가가 흙을 만든 흔적은 그대로 간직한 것들이었다. [자네트Ⅴ]의 과장된 이마-1930년에 이 작품을 처음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얼마 안돼 두상이나 흉상 연작에서 마티스의 방식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로댕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대가의 미학과 자신의 미학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도 깨달았다. “나는 로댕이 [성 요한]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성 요한]의 손을 잘라 작업대에 고정시키고 그것을 왼손으로 붙잡고 세부 작업을 한 것 같다. 여하튼 로댕은 그 손을 전체와 분리시켰다가 다시 팔 끝에 붙이고 전체적인 움직임에 손의 방향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작품의 전체 구조를 상상할 수 있었고, 설명적인 세부 대신 생동감 있고 암시적인 종합을 떠올렸다.” 그가 조각을 배운 두 작품 중 하나인 [토끼를 뜯어먹는 재규어]를 계기로 마티스는 자신이 ‘사실주의자’가 아님을 깨닫고 해부학적인 사실성과 결별했다. 그는 고양이의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는데 관심이 없었고, 접합된 파편들을 짜 맞추고 부분적인 형상에 대해 끝없이 탐닉한다는 점에서 로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다른 조각가들의 경우 조각상을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 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아카데미 양식을 따랐는데, 그 욕망이 대개 여성 누드라는 전통적인 모티프에 강한 애착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이 마티스의 작품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특질은 완벽한 정면성으로, 한 시점에서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티스 브론즈 작품의 대부분은 관람자가 작품 주위를 돌면서 봐야 하는데, [뱀처럼 구불거리는 인체]가 대표적인 예이다. 예로부터 인체가 공간에서 그리는 ‘S자형’ 곡선이나 인체의 햅학적 구조를 끈으로 단수화시켜 표현한 것ㅇ르 가리키는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처음 도입하고 매너리즘 시대에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된 ‘뱀처럼 구불거리는 인체’의 암시는 ‘등’ 연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당시 ‘투명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티스는 이 작업이 입체주의의 혁명을 앞지르는 것임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마티스에 대한 적어도 두 가지 오해가 있다.
마티스는 로댕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전통과 힐데브란트가 신봉했던 상상 속 물지의 투명성에 대한 이상을 거부했다. 마티스에게 투명성이란 서로 다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관념적 투며성과 관련된 꿈, 그리고 근대 조각가의 빈 공간 사용을 의미한다. 먼저 빈 공간부터 보자면, [뱀처럼 구불거리는 인체]의 ‘투명성’은, 빈 공간이 대립 기호들의 체계에서 주요 구성 요소로 변형되는 입체주의 조각의 방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뱀처럼 구부리는 인체]에서 빈 공간은 형상이 취한 자세에서 생긴 부차적 효과에 불과했으며 마티스는 두번 다시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결과가 마티스가 주장한 바와 반대라는 점이다. 그 누구도 한 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또 어떤 시점에서 봐도 작품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주위를 백 번 돌아도 이 작품 전체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의 전체성과 거리감은 공간에서 춤추는 곡선을 통해서 확보되는 것이며, 우리는 이런 전체성, 즉 작품이 지닌 물자체의 전체성에 접근할 수 없다.
마티스는 이 모든 것, 즉 해부학이나 환기적인 제스처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티스는 해부학을 간단히 무시하면서도 로댕의 개인적인 조각에서 얻은 교훈의 핵심을 간파했다. 그는 마치 인식의 게임을 하면서, 전체성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놀리기도 하고 그 필연적인 욕구 불만을 선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티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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