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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Foster, Hal (Thames&Hudson,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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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양식적 일관성이 없고 원시적 충동이 드러난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통해 파블로 피카소는 미메시스적 재현에 가장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피카소(1881-1973)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하나의 신화가 됐다. 이 작품은 선언이며, 싸움터고, 근대 미술의 전조이다. 이 그림에 대해 지난 사세기 동안 책 한 권 분량의 논문들이 다수 발표됐으며 심지어 이 그림만을 위해 두 권의 도록을 발간한 전시도 있었다. 사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작품의 평가가 늦어진 데는 우선 이 작품은 근 30년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비평이 다뤄질 때는 제목도 없이 언급되거나 뉴욕에 옮겨지기 전까지 도판도 제작되지 않았다.
(소유자: 자크 두세(피카소에게 헐값 구매, 37년까지 사적인 공개만 몇 차례) → 37년, 한 화상 → 뉴욕근대미술관, MoMA)
거투르드 스타인이 38년 피카소에 관한 연구서 ‘피카소’를 발표하고, 앨 프리드 H.바가 39년 뉴욕근대미술관 피카소 회고전의 도록으로 집필한 ‘피카소의 미술인생 40년’을 기점으로 ‘아가씨들’은 정전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의 이런 관점은 72년 레오 스타인버그의 논문 ‘철학적 매음굴’이 발표되면서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다.
(07-37 평가 안됨  ▶  37-72 최초 입체주의 회화 ; 앨 프리드 H. 바  ▶  73~ 미메시스적 재현의 완성 ; 레오 스타인버그)

스타인버그의 글이 출간되기 전까지 ‘아가씨들은’ 최초의 입체주의 회화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논평가들은 이 그림의 통일성 부족을 비판했다. 캔버스 왼쪽과 오른쪽 사이의 양식적 불일치는 바로 아프리카 미술에서 새로운 충격을 받게 된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습작 도판에는 바로크 전통에서 파생된 연극적 배치를 보여주는 일곱 명의 인물과 무대의 측면에 드리우는 통상적인 커튼이 등장한다. 중앙에 앉은 옷을 입은 선원과 선원을 둘러싼 다섯 명의 창녀들이 화면 왼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명의 의학도가 해골(혹은 책)을 손에 들고 무대를 들어오고 있다. 바는 이 음울한 장면을 죄값에 관한 일종의 메멘토모리의 알레고리나 제스쳐로 봤지만, 이를 이내 그냥 간과해 버렸다. 물론 피카소는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알레고리'를 성적인 주제까지 폐기하지는 않았다.
스타인버그는 바의 '메멘토모리'를 거부하고 피카소가 제거한 알레고리가 '죽음 대 쾌락'이 아니라 '침착하고 초연한 학습 대 성적인 요구'에 관련된 것이라고 정정했다. 습작에 등장하는 해골은 의학도가 이 그림의 참여자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으로, 심지어 의학도는 아가씨들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소심한 선원은 여기에서 무시무시한 여자들에게 뭔가 자극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곧 완성작에서 선원은 사라지고 의학도는 외쪽에서 커튼을 젖히는 서있는 누드로 대체된다. 피카소가 '아가씨들'을 작업하는 동안 그의 주제적 관심이 성적 차이 및 성적 공포에 관한 원초적인 물음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산적해있다. 따라서 피카소는 알레고리를 포기하는 대신 이런 주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습작에서는 인물들이 의학도의 등장에 반응하고 관람자는 화면 밖에서 관찰하는 입장이었지만, 완성작에서는 작품의 양식적이고 장면적인 통일성의 부족이 회화를 관람자와 묶어 주는 것이다. 즉 이 그림의 핵심은 아가씨들의 무시무시한 시선, 특히 오른쪽에 의도적으로 괴물 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들의 시선이다. 마티스를 통해 아프리카 미술을 접하게 되고 몇 달 후 오른쪽 두 여자의 가면 같은 얼굴을 '이베리아' 모델(거투르드 스타인의 초상)에서 '아프리카'모델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 간주한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아가씨들의 '아프리카 주의'는 관람자가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법이다. 피카소 내면 깊은 곳의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강조한 윌리엄 루빈은 자신이 쓴 '아가씨들'에 대한 가장 긴 분량의 연구에서, 이 그림의 복잡한 구조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섹스와 죽음을 연결하는 고리와 관련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그림에 대한 최근의 논문들은 프로이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원초적 장면'과 '거세 콤플렉스(늑대인간)'를
세르게이 판케예프의 유년 시절 꿈 스케치(1910년경). 프로이트의 ‘유아기 신경증의 역사로 부터’에 게재. 1918
 다루는 여러 정신분석학적 설명들은 '아가씨들'에 놀랍도록 잘 적용되며, 알레고리의 제거 및 완성작의 야만성을 모두 설명해준다. '아가씨들' 앞에 서는 관람자는, 스타인버그가 지적한 것처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래 어떤 작품보다 더 폭력적으로 자신을 부른 창녀들에 의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루빈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피카소는 '서사적'방식(알레고리)을 '도상적'방식으로, 즉 연사적 어조의 이야기(옛날 옛적에)를 개인의 위협(날 봐라, 나는 너를 보고 있다)으로 바꿔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서구 회화의 토대가 되는 일점 원근법이 확립한 관람자의 고착된 위치를 폭로하고, 그 위치를 굳어버린 것으로 재확립해
웅크린 아가씨의 머리를 위한 습작, 1907
 악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작용 덕분에 '아가씨들'이 지닌 힘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티스가 이 그림을 보고 화를 낸다. 그것은 1년 반전에 마티스가 완성한 '생의 기쁨'의 주제가 이것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피카소는 서구 전통에 반대하는 두 가지 부친 살해행위를 결합했다. '생의 기쁨'과 '아가씨들'은 둘 다 부친 살해라는 오이디푸스적 주제와 기민하게 연결돼 있지만, 피카소는 바라보기의 상황에 주로 공격을 가해 미메시스에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멀리 이끌어갔다.
 
재현의 위기
스타인버그 등장이전으로 다시 가서, 입체주의를 재현의 규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최초의 입체주의 회화라는 가정은 합당하다. 피카소가 기호와 의미작용에 대해 완전히 몰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가씨들'에서는 기호는 이동하고 서로 결합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 작용은 맥락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입체주의 전체가 실행한 작업일 것이고, 그렇다면 입체주의의 기원은 1908년 작품인 '세여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피카소는 묘사의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회화의 모든 요소를 기호를 닮은 단일한 단위(삼각형)로 채우려고 애썼다.(얼굴을 위한-습작) 1912년 콜라주로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두 번째 실험을 수행하고 나서야 피카소는 기호학적 충동이 지닌 충만한 의미에 다다른다.



1908
빌헬름 보링거가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추상미술을 세계에서의 후퇴로, 재현미술을 세계로의 개입으로 대조한다. 독일 표현주의와 영국 소용돌이파는 이렇게 상반된 심리 상태를 나름의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독일 미술사학자 빌헴름 보링거(1881-1965)는 1908년 논문에서 근대 미술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부족 미술가들의 추상과, 근원적인 추상 의지의 산물인 추상 간의 유사성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보링거가 독일 표현주의자들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1911년 강력한 반모더니스트들이 표현주의자들을 공격했을 때, 보링거는 그들이 기본 형태를 주목하고, 부족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르네상스부터 신인상주의까지의 회화를 지배한 “합리화된 시각”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두둔했다.

청기사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미술을 "영적인 각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함으로써 이런 형이상학적 경향에 공감을 표했다. 1912년 칸딘스키(1866-1944))가 출판한 <청기사 연감>. 마르크(1988-1916)는 보링거와 마찬가지로 자연 세계를 원초적인 흐름의 장소로 표현했지만, 키르히너는 도시 세계를 원시적인 생명력의 장소로 표현했다. 미술에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한 것은 다리파도 마찬가지였다. 청기사와 함께 독일 표현주의 핵심그룹이었던 다리파는 에른스트 루트비피 키르히너의 주도하에 1905년 드레스덴에서 창립됐다. 그러나 이런 표현에 대한 강조가 보링거의 추상개념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립되는 양식들
<추상과 감정이입>에서는 "감정이입"과 "예술의지"라는 두개의 개념이 나온다. 보링거는 서로 다른 미술 양식을 서로 다른 "심리상태"에 연결하고자 이 개념을 사용했다. 자연주의적 재현과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상반된 양식은, 각각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 세계로 감정 이입하여 개입하거나, 충격 때문에 세계에서 후퇴하는 상반된 태도를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링거에 따르면 원시인은 자연을 적대적인 혼란으로 간주하여, 평온을 향한 무한한 욕구에 이끌린 부족미술가는 생김새로부터의 도피처로 추상을 택하는데, 심리적 불안감과 공간에 대한 공포에 내몰린 근대인도 추상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링거의 이런 설명은 청기사파보다는 다리파와 관련이 깊다. 키르히너와 동료들이 비사실적인 색채나 불안한 원근법과 같은 추상적 요소들을 통해 "심리적 불안감"과 공감에 대한 공포"를 표현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이 자연을 혼란스러운 것으로 보았다는 보링거의 주장처럼, 키르히너 역시 근대인들은 도시를 일종의 카오스로 간주한다고 주장했다. '드레스덴의 거리'- 군중이 가득한 만남의 장소에 가면 같은 얼굴을 한 여성들은 관람자를 압박하고, 왜곡된 공간과 선정적인 주홍색이 불안감을 일으키는 등, 표현주의 선구자인 에드바르 뭉크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주황, 녹, 청으로 된 대로를 관통하여 인물들을 감싸고 흐르는 전선의 전류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신경자극제로 혹은 보호막 역할을 하는 이 전선은 바로 결합과 분리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소외의 모순적인 측면이다.
보링거에게 추상은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비롯된 자극을 완화시키는 수단이었지만, 키르히너에게 추상은 그 자극을 표현하고 심화시키는 수단이었다. 청기사파의 추상은 또 다르다. 마르크가 자연 세계와의 결합을 위해 추상에 접근했다면, 칸딘스키는 영적 영역과 교감을 추구했다. 이 두 화가에게 인가의 소외는 극복해야할 대상이지 심화해야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청기사파가 제안한 미학은 추상 대 감정이입이 아니라, 감정이입으로서의 추상이다. 감정과 형태의 방정식, 다시 말해 "내적 필연성"과 외부 세계의 화해를 추구했다. 칸딘스키의 주장대로 그의 미술의 "내용"이란 "그림의 형식과 색채 간의 결합이 미치는 영향력 아래서 관객이 경험하거나 느끼는 바"이다.
 
범신론적인 침투
칸딘스키가 초월적인 영적 세계를 갈망했다면 마르크는 자연에 내재된 세계를 파고들었다. 고갱을 모델로 삼았던 그는 자신의 작업이 "자연, 나무, 동물, 대기에서 박동하는 피의 흐름에 범신론적으로 침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마르크가 추구한 것은 어떤 주어진 표현이 아니라 자신과 타자를 회화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감정이입적 추상이었다. 이런 생각은 실현 불가능하지만, '동물들의 운명'같은 그림은 일종의 '범신론적 침투'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절망은 존재 간의 분리에서 비롯된다. 고통의 효과는 무엇보다 남다른 것이며 개인적이다. 마르크의 감정이입추구는 한계에 부딪쳤다. 동물적 타자는 감정이입을 초월한 비인간적인 타자로 밝혀졌다.
- 표현주의 - <추상과 감정이입> - 보링거  : 완화 역할  
 : 예술의지(추상충동) : 다리파  - 키르히너 : 심화 역할 
 : 감정이입으로의 추상 : 청기사파 - 마르크 : 자연과 결합 
                                               - 칸딘스키 : 영적 영역과 결합 

비인간화라는 진단
결과적으로 추상 대 감정이입 모델은 독일 표현주의보다는 영국 소용돌이파에 더 적합한 것이었다. 이 운동의 회원이었던 흄은 한 강연에서 <추상과 감정이입>을 근거로 소용돌이파를 지지했다. 이 운동을 이끈 윈뎀 루이스(1882-1957)는 "순수하고 명백한 감정들은 모두 낯섦, 놀람, 그리고 원시적인 초연함과 관련돼 있다. 세계는 비인간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근대가 이런 비인간화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비인간화를 더욱 진척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대는 "낯섦, 놀람, 원시적인 초연함"의 한계에 도달해야만 한다.
루이스의 작품을 보면 형상을 서서히 추상화하고 그것이 '시커먼 인간 총탄'이 될 때까지 응고 시켰다. 내재적인 의지에 따라 추상으로 이끌린 1914년경 작품 '소용돌이파 디자인'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별들의 적'에는 두 종류의 외관이 하나로 합쳐진 매우 응축된 형상이 등장한다. 하늘로 승천하는 것 같은 느낌을 표현했던 청기사와는 정반대이다. 이 그림에서 루리스가 제시한 추상은 실제로 감정 이입적이다. 



1909
F.T. 마리네티가 최초의 미래주의 선언을 <르피가로> 지 1면에 발표한다. 아방가르드는 처음으로 매체와 결합했으며, 스스로를 역사와 전통에 저항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1909.2.20 필로포 토마소 마리네티(1876-1944)는 최초의 미래주의 선언인 '미래주의 창립 선언'을 프랑스 신문<르 피가르>에 발표했다. 미래주의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리는 이 사건. 1.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와의 연계 2. 대중문화 생산에 관련된 모든 기법과 전략들이 이제 아방가르드의 선전선동에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 3. 테크놀로지의 선진 형식과 예술 창작의 융합에 전념.

선언이 발표됐을 때 움베르토 보치오니, 자코모 발라, 카를로 카라 같은 주요 인문들은 여전히 1880년대 분할주의라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세잔의 발견과 야수주의나 초기 입체주의의 발전을 계기로 파리 미술계에 등장했던 전략 중 어떤 것도 미래주의 초기, 즉 1910년 이전의 미래주의 회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더구나 미래주의는 뒤늦게 발견한 아방가르드의 전략들을 절충적으로 수용했다. 미래주의는 새로운 회화와 조각 미학을 수립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재빠르게 짜깁기 했는데, 그 빠른 속도 자체가 절충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마리네티 선언이후 미래주의 미술가들의 선언들이 속속 등장했다. 종합하면 미래주의 전략은 1. 서로 다른 감각들, 즉 시, 청, 촉각 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킨 공감각과, 정지하고 있는 신체와 운동하고 있는 신체의 구분을 붕괴시킨 운동감각 2. 초기 영화나 시진의 영향으로 발전한 시각과 재현의 테크놀로지와 회화 사이에서 유사성 찾기 3. 예술과 발전된 테크놀로지를 통합할 것을 열정적으로 역설.

미래주의자들은 회화와 조각을 전통적으로 정적인 미술이라고 이해했던 부르주아 미학을 비판하며 공감각과 운동감각을 강조하고 정적인 것과는 확실한 대조를 이루는 동시성, 시간성, 신체적 운동의 경험을 미술 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발라(1871-1958)와 보치오니(1882-1916)가 분할주의식 회화 표현법을 그대로 사용해서 얻은 작품은 이상하리만치 뒤쳐지고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이게 됐다. 이것은 미래주의자들이 단언하고 정적인 미술이라는 회화의 지위에 결코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크로노포토그라피를 채택하려 했으면서도, 회화적 기표가 테크놀로지 영역을 순수하게 모방하는 관계에 머무르려고 했을 뿐, 산업 생산의 반복적인 형식을 채택하는 것 같은 구조적인 과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미래주의의 가장 흥미로운 화가 발라(1871-1958). 1909년 그가 여전히 전통적인 작업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빛과 도시의 일상적 공간을 지각하고 표현하기 위해 분할주의 방식 적용-'가로등'. 1912년에 그는 크로노포토그라피의 특징인 반복적인 윤곽선으로 대상을 재현하여 자신의 회화 세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발코니를 뛰고 있는 소녀'나 '끈에 묶인 개의 역동성'같은 1912 작품들은 운동을 지각할 때의 동시성을 그대로 살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1913년 발라는 속도, 시간성, 운동, 시각적 변화를 묘사하는 더 적절한 방식을 찾기 위해 재현을 완전히 거부하고, 최초로 설득력 있는 비재현적인 회화 모델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형성된 구성과 색채의 모체는 르네상스 원근법을 새로운 현상학적 공간으로 변형시킨 입체주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보치오니의 조각은 미래주의가 공간에 놓인 물체를 운동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골몰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공간의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는 로봇 같기도 하고 양서류 같기도 한 모호한 형태를 통해 다시 한 번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라피에서 가시화된 운동의 자취를 조각적 신체에 결합했다. '달리는 말과 집의 역동성'은 보치오니가 선언서에서 주장했던 가죽, 발견된 유리조각, 금속파편, 가공된 나무 조각같이 산업 생산된 재료들을 결합했다. 20세기 최초의 완벽한 비재현적인 조각기에 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제작한 추상조각에 견줄 만하다. 아방가르드의 감수성과 대중문화를 융합하려는 자가당착의 시도는 콜라주가 미래주의의 주요 기법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탈리아 시인들이 1914년, 미래주의를 알리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을 때 러시아의 입체-미래주의 시인들은 마리네티의 작품에 나타난 시와 언어의 모방작용 사이의 관계, 특히 그가 사용하는 흉내말 때문에 그를 비난했다. (카라 ‘개입주의자들의 시위’) 당시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은 기호의 음성과 기호의 도해, 즉 언어가 소리 나는 방식과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그 기호가 자연 세계에 가리키는 것과 엄격하게 분리돼 있다는 언어의 자의성에 대한 구조주의적 이해까지 나아간 상태였다.
 
파시즘과 미래주의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발흥하면서 미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태도가 주목을 받았다. 전쟁은 그 자체로 테크놀로지의 가장 앞선 사례였기 때문에 이 요소들은 이제 미술과 전쟁을 통합할 것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데 동원됐다. 선진 산업 테크놀로지와 기계미학을 옹호한 마리네티는 전쟁이 위대한 정화 작용을 할 것이라며 환영했다. (노골적으로 반동적인 정치 우파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20세기 아방가르드 역사에서 미래주의가 유일함, 무솔리니 문화 분야 고문)
미래주의는 1916년 보치오니와 산텔리아가 전사한 이후, 마리네티가 지속적으로 추구하긴 했지만, 아방가르드 운동이라는 길을 잃었다. 세베리니는 1916년 입체-분할주의 회화전략을 포기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순수하고 고전적인 형식들을 택했다. 이후 그는 모더니즘 실천에서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분리하려는 점진적인 시도의 선구자가 됐다. 1917년 데 키리코를 만난 카라는 하룻밤 만에 형이상학 회화에 동참하기 위해 이제까지 관여했던 모든 미래주의 작업들을 포기했다. 그는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인상주의의 효과를 미래주의가 모방한 것을 거부했다. '형이상학적 뮤즈'
카라와 세베리니가 미래주의를 떠나 데 키리코의 추종자가 된 것은 반모더니즘 혹은 대항모더니즘의 첫 번째 사례이자 아마 가장 열정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런 흐름은 결국 다양한 운동의 형태로 전 유럽에 퍼지게 됐으며, 이들은 모두 '질서로의 복귀'라 불리게 됐다.

미래주의 - 마리네티   - 미래주의 선언 (선동적 파시즘)
 - 자코모 발라 - 회화
 - 움베르토 보치오니 - 조각
 - 카를로 카라  - 고전으로 회귀(데 키리코)
 - 세베리니  - 초기 르네상스로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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