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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실험러시아미술1863-1922
카테고리 미분류
지은이 캐밀러 그레이 (시공사펴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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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860년대 - 1890년대
제2장 1890년 - 1905년

제3장 1905년 - 1910년
제4장 1909년 - 1910년
제5장 1912년 - 1914년
제6장 1914년 - 1917년
제7장 1917년 - 1921년
제8장 1921년 - 1922년


◆ 제 1장_ 1860-1890년대

1860이전의 러시아미술은 유럽에서 건너온 신고전주의가 페테르부르크의 아카데미 미술을 통해 이어오고 있었다.

순회파 - 이들은 1757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이 설립해 이어져왔던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최초로 집단으로 도전하여 분리를 선언한 미술가 단체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원했다. 그들의 유력한 후원자이자 동료인 사바 마몬토프를 중심으로 모인 13인의 예술사들을 “마몬토프 서클”이라 불렸고, 그들은 스스로는 ‘방랑자들(순회파)’라고도 불렀다. 그들은 작품의 주제를 강조해 사회 개혁하는 행동세력이 되어야한다고 설명한다. 이미 러시아가 전 국가의 유럽화를 단행한 시점에서 순회파의 전통적 생활방식의 추구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후 민족주의 전통과 러시아 농촌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조하려는 노력이 진행됐고, 러시아 현대미술의 기반이 된 민족주의 운동이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

*사바 마몬토프 - 1870대에 이르러 미술의 후원세력이 기존의 황제나 귀족계층, 관료 등에서 부유한 상인들로 대체되는데 이에 주도적인 인물이 바로 사바 마몬토프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한 예술가이면서 최초로 사립오페라 극장을 설립했고, 많은 예술 분야를 후원했고, 3대에 걸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또 초창기 석탄을 운반하는 철도를 건설하는 등 철도왕으로 불릴 만큼 제력가이기도 했다.

마몬토프 서클 - 마몬토프를 중심으로 모인 러시아 화가들로 순회파의 이상을 가지고, 조각가인 안토콜스키, 풍경화가인 바실리 폴레노프, 미술사학자 아드리안 프라호프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이들은 함께 미술관이나 유적지를 여행하고, 함께 모여 작업하고, 새로운 러시아 문화의 창조에 대한 각자의 계획을 토로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은 마몬토프 부부가 아브람체보를 구입한 후로 그곳에 병원과 임시학교를 세울 정도로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열정적이고 조각공방을 만들어 교류를 확장시켰다.

아브람체보 공동체 - 1874, 마몬토프 부부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며 함께 러시아로 온 미술가들인 폴레노프와 그의 친구 일랴 레핀, 세로프 모자, 마노토프 부부, 빅토르 바스네초프, 아폴리나리우스 바스네초프 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일랴 레핀과 폴레노프

아브람체보 교회- 강의 범람으로 부활절을 지키지 못한 후에 예술가들이 함께 지은 교회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러시아 중세 미술과 성상화의 학문적 연구가 미흡했고, 185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917년 혁명 후 에야 복원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아브람체보의 교회건축은 이러한 학문적 연구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성상화와 의복, 덮개에 들어가는 자수, 모자이크도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했다. 교회완공 후에 지속적으로 러시아 중세 미술에 관심이 증폭된다. (바스네초프 형제는 역사적복원에 빅토르 성상과 동화의 장면, 아폴리 나리우스는 모자이크의 회화적 재창조의 전문가가 됨.)

*바실리 수리코프 - ‘순회파’ 초기 멤버로써 민속적인 이상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결합시키려 노력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아카데미 수업을 받았지만 모스크바에서 그가 나가야할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보야리나 모로코바>; 중세모스크바 거리풍경. 이 작품에서 보이는 역동적이며 연결성 있는 순수하고 완전한 색채의 동적인 특징은 러시아 회화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수리코프의 그림에서 이러한 중세적 방식이 나타난다. 비잔틴 미술의 특이한 색채 영역 즉, 풍부한 갈색, 어두운 빨간색, 밝은 노란색 그리고 장식적인 표면의 리듬과 강한 수평선의 러시아 옛 그림과 현대의 공통적 특징으로 수리코프에서 되살아났다.

 

일요일 밤의 독서모임(아브람체보 공동체의 활동) - 독서모임은 점차 무언극으로 발전했다. 빅토르 바스네프가 무대 장식화를 그린 후에 전통적인 기술자 대신 화가가 무대장치를 함으로써 사실적인 무대장치의 개념이 탄생했다. 이것은 즉시 서유럽으로 전파되고 바스네프의 제자들인 코로빈, 레비탄, 골로빈, 조예리치 등으로 발전됐다. 1890년에는 황제의 국립극장도 예술가들을 기용하기도 했다. 더 이상 무대장치는 단순한 배경장식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 되었고 연극의 종합, 즉 통일성이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연극의 ‘사실주의’가 탄생하는 원동력이 된다.

마몬토프는 모스크바에 전문적인 ‘사립 오페라 극장’을 설립하고, 무대미술은 콘스탄틴 코로빈과 이삭 레비탄으로 이어졌다. 코로빈은 1885년 프랑스 방문 후 인상주의 반영한 최초 러시아 화가로 20C초 아방가르드 거의 대부분의 화가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발렌틴 세로프은 레비탄의 제자면서도 그보다 더 감각적이고 과거 지향적이지 않은 훌륭한 풍경화가다. 그들은 1900-1909까지 모스크바대학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화가이다.

*미하엘 브루벨은 세프로의 친구이자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치스탸코프 제자이다. 그는 1883년 키예프의 성 시실 성당의 복원작업에 합류해 벽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했고, 베네치아에서도 비잔틴 미술에 대해 연구한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일을 얻지 못하고 심신의 고통을 느끼며(‘악마’연작) 지내다가 1887년 블라디미르 대 성당 건축디자인에 공모하여 장식 패널화를 맡게 된다. (전체적 디자인은 빅토르 바스네초프가 당선됨) 그는 세로프와 함께 아카데미에서와 다른 자연연구에 몰두하여 수채화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는 레핀의 제자였지만 스승의 철학을 강력히 비판하고, 미술을 사회의 선전도구로 보는 ‘순회파’해석에 반대했다. 러시아의 세잔으로 부를 수 있는 브루벨은 칸트의 철학에 심취하여 자연연구에 대한 신념이 강해졌다. 하지만 생애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세로프와는 달리 풍경, 자연에 직접적인 관심보다는 자연물의 인공적인 소외감속에 특이한 극적인 리듬을 자아냈다. 그의 비범함과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로 다음세대 미술가들은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험을 가능하게 했고, 길을 알려주었다.

 

제 2장_ 1890-1905년대

  프랑스의 나비파와 유사한 배경을 가진 러시아 ‘예술세계, Mir Iskustva’ 운동은 20C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메이대학의 ‘네프스키의 픽위키안스’라는 단체의 학생들이 알렉산더 베누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마치 영국과 유럽의 ‘아르 누보’운동과 같았다.

*알렉산더 베누아는 ‘예술세계’가 모든 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 표방하는 인물상으로 화가, 무대디자이너, 연출가, 미술사학자, 비평가이기도 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이루어진 선조의 복잡한 혈통은 그를 유럽사상과 친숙하게 했다. 그는 스스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예술, 헌신적인 애호가로서의 예술가, 그리고 영원한 진리와 아름다움의 매체로서의 예술에 대한 확고한 개념을 갖고 있는 예술가였다. 그의 가문은 국수주의적이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한 1890-70년대 러시아 인민주의(혁명이전 공산주의)이념에 끌리지 않았고, 서구와도 단절되지 않았다. 이러한 국제적인 문화의 감각은 ‘순회파’가 득세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러시아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 여겼다. 그들의 목표는 러시아를 최초의 서구 문화의 주류에 기여할 수 있는 국제 중심지로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람체보가 전념한 중세 러시아미술과 ‘순회파’가 무시한 외래의 것 등을 포함한 민족유산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

픽위키안스의 중심인물로는 문학적 능력의 소유자 드미트리 필로소포프, 회화의 절대강자 콘스탄틴 소모프, 음악적 재능을 가진 발터누벨 등이 있다. 레온바크스트(레프 로젠베르크)는 그룹내 최초의 전문미술가며 열렬한 반 아카데미 선동가다. 당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러시아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독일의 화가와 작품에 대해 토론했다. 필로소포프는 알렉산더 제 1세 치하의 사상과 시대 상황, 그리고 투르게네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 했다. 바크스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관대하고 동정심 많았고, 색채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창의적인 작업을 한 예술가였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필로소포프 사촌)는 1890년 대학 졸업하고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진학하기 1년 동안 베누아는 뮌핸으로, 디아길레와 필로소포프는 파리로 가서 인상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러시아에 돌아와 새로운 예술의식이 있는 지식 계층을 창조해야 한다는 임무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학위보다는 음악이나 중요한 사람들 만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바크스트의 아카데미시절 친구인 세로프와 코로빈, 니콜라스 로예리치가 모임에 합류한다. 로예리치는 바크스트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디아길레프의 무대를 가장 혁신적으로 장식하는 무대 디자이너가 된다. 이후 샤를 비를레 가담해 1년 동안 프랑스의 고갱, 쇠라, 반 고흐의 작품들과 인상주의자들을 소개함으로써 당시 프랑스 회화에 대한 그들의 개념에 혁신을 일으켰다. 알프레드 누로크도 소개했고, 그누로크는 오브리 비어즐리를 소개했다. 비어즐리는 책 삽화에 있어 표현력이 드러나는 풍부한 실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등의 혁신을 일이키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잡지발행의 사상이 논의되며 디아길레프는 맴버 각자 재능이 있는 부분이 다른 것을 일련의 창조적인 기획으로 한데 모아 처음에는 잡지, 전시, 그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인 '러시아 발레' 순으로 진행해 나갔다. 그들은 건강과 힘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때묻지 않은 에너지와 신선함을 갖고 있었다. 디아길레프는 외국을 두루 다니며 미술품을 수집했고 여행을 통해 예술 행정분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과 독일의 수채화전>. <스칸디나비아의 화가들>이라는 전시를 처음으로 조직했고 <러시아와 핀란드 화가전>까지 그 기세를 이었다.

1896, 졸업 후 멤버들은 흩어져 대부분 파리로 떠났고 파리로 떠난 베누아는 디아길레프의 잡지창간에 원조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들의 조직은 우익과 좌익의 구분이 나타나는데, 즉 무엇보다도 새로움을 추구하고, 편협하거나 지방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공격하는 좌익과, 지식과 감응의 포괄성에 있어서 학자적이고 약간은 절충적이며 좀 더 관습적인 우익으로 구분된다.

(좌익-누로크, 누벨, 바크스트, 코로빈. 우익- 베누아, 란세레이, 메레슈코프스키. 평화유지군-필로소포프, 디아길레프. 세로프는 왔다갔다. 코로빈은 그저 방문객.)

잡지의 내용과 형식을 정한 후에 그들은 후원자 찾아다녔다. 먼저 테니셰바공주는 후원을 하다가 디아길레프의 성품에 믿음을 갖지 못하고 두 번의 전시회가 끝나고 후원을 중단했다. 당시 사바 마몬토프는 그들의 유력한 후원자였다.

1898년 10월 <예술세계>첫 호가 창간되었다. 인쇄를 위한 목판을 18세기 활자체로 독일서 만들어 오는데 1년이나 걸렸는데 이것은 미술 뿐 아니라 인쇄 기법에서도 혁신적인 기획이었다. 첫 호의 삽화로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작품 실린 사건은 그룹 내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징주의적 사상이 소개되기도 했다. 종교와 음악도 논의 되며 점차 진정한<에술 세계>가 형성되어갔다. 초반에는 서구 유럽의 '아르누보' 미술가들 -비어즐리, 번-존스, 건축과 실내 디자인의 맥킨토시, 반 데 벨데, 요세프 올브리히- 의 삽화가 실렸다. 프랑스의 퓌비드 샤반과 모네, 드가도 소개되었다. 1904년 마지막 호에서는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다뤄졌다. 그들은 점차 원시미술과 민속 미술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관심에 동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아브람체보와 탈라슈키노의 공동체에서 이미 시작된 당시 모스크바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고객, 세잔, 피카소, 마티스 접촉이 지속되며 다음 10년 동안의 러시아 회화를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갈 역동적인 힘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전시는 점차 '국제적' 이기 보다는 모든 화파를 대행하는데 바빴으며, 더 통합된, 그러면서 개별적인 양식의 특징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선의 화가들의 페테르부르크 화파와 색채의 화가들의 모스크바 화파가 바로 그런 새로운 경향이었다.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의 발견과 함께 잡지는 중단되었다. 그들은 선전임무 완수가 되었다고 느꼈고 서구 유럽의 예술적 아방가르드와의 접촉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 지식계층으로 하여금 민족적 예술의 유산을 있는 그대로 깨닫게 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국제문화를 위한 기반이 준비되자 더 이상의 이론적인 포교는 멈췄다.

<예술세계>의 창조적인 작품은 발레에서 찾아야한다.

극장에서는 통합되고 완벽한 실존을 표현하려는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으며 삶을 통한 예술이 가능했다. 제스쳐와 음악, 분장과 장식, 발레의 시각적 통일성, 완벽한 일루전, 완전한 조화가 가능한 것이다. 황실극장의 감독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연극행정부서에 필로소포프를 임명하고 디아길레프를 조감독으로 임명했다. 베누아는 소규모 오페라의 장식과 분장을 맡고, 소모프는 프로그램을 디자인했다. 그러다 감독이 교체되며 디아길레프가 미움을 사고 쫒겨난 후로 텔랴코프스키는 베누아와 일했고, 에서 무용수의 삽입으로 ‘예술세계’ 최초의 발레 작품<아르미다 궁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러시아의 오페라와 발레가 파리 등 서구로 소개된다.

러시아의 활동이 제한되고 혼자가 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는 더 이상 러시아가 아닌 미국과 유럽에서 밖에 볼 수 없게 됐고, 그는 러시아 초상화를 수집하거나 시골등지의 미술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타우리드 궁의 정원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또 1906년, 파리의 살롱 도톤에 러시아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열어 크게 성공하고 러시아에서 공연했던 오페라를 파리로 가져와 대성공을 이룬다. 또 파리에 함께 머문 ‘예술세계’의 친구들과 합심하여 1909년 러시아 발레의 최초의 역사적이고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다. <보르스 두고노프>, <아르미다의 궁전>, <폴포프츠의 춤>등. 1910-14년 까지 매년 파리로 작품을 가져왔다. 우리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속에서 ‘예술세계’가 존재했던 당시의 러시아 예술가들의 삶이 창출해 낸 완전한 소우주를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와 서구의 예술 세계에 끼친 영향을 볼때, 그들의 포부는 타당한 것이었고 그들의 활동은 러시아로부터 나온 새로운 국제 문화를 현실적으로 창조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예술세계’의 두 화파

*페테르부르크 화파는 전통적인 원근법에 의존하지 않고 공간을 표현하는 새로운 구성을 발견했다. 창문을 통한 이중세계 표현, 과장된 실루엣. 실루엣 속에 펼쳐진 물체들을 통해 시간 속에서 포착된 순간의 시각적인 인상들로서의 회화의 특질을 강조했다. 즉 선의 유창함으로 전통적이고 아카데믹한 방법을 타파하고 인각의 모습을 장식적인 형상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모스크바 화파 - 색채를 강조한 모스크바 화파는 캔버스의 평평함을 추구했다. 평평한 채색으로 정적이고 닫힌 형태들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했다. 무한한 공간과 스며드는 것 같은 분위기로 심오한 리얼리티를 나타낼 수 있는 상징주의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확장된 전경과 시점이 하늘에서부터 맨 뒤까지 끌어당기도록 분산되는 평범한 빛을 자주 사용했다.

코로빈과 같이 러시아 미술가들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은 빛과 색채로 한 장면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리얼리티에 관심이 없었으며, 배경과 사물을 똑같이 취급하는 붓 터치의 리듬을 그림 전체에 사용함으로써, 분리시켜 모호하게 한정짓는 요소가 아닌 칼라패치, 즉 색 면으로 인물을 나타냈다.

빅토르 보리소프-무사토프는 유일하게 페테르부르크 화가들의 무대그림과 18세기 및 모스크바 화가들의 색채 실험을 결합시킨 화가였다. 그는 야수파작가를 키워낸 귀스타브 모로의 작업실에 4년 동안 있었으며, 퓌비 드-샤반의 영향으로 역사적인 양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말년에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우울한 분위기와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을 그렸다.

※ 러시아 미술관련 WebSite - http://www.russianavantgard.com/index.html

(참고) =================================================================================

러시아 미술의 특질

[유럽미술과의 접촉]

러시아미술은 직접적으로는 고대그리스의 미술과 접촉하거나 영향받은적 없이, 10세기말에 비잔틴제국으로부터 기독교미술을 섭취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 18세기에는 유럽 속의 러시아를 지향한 적극적인 서유럽화정책이 추진되면서 전역사를 통해 유럽미술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럽미술과 완전히 보조를 같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가 종교적으로 동방정교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점, 유럽으로부터 분단,고립된 기간이 길었던 점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른바 '따따르의 멍에', 즉 13세기부터 250년간 계속된 이민족 몽고인의 지배로 인한 고립화는 유럽으로부터의 영향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러시아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등에 상응하는 시대를 겪지 못했다. 그리고 유럽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된 미술이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적인 풍토에 뿌리를 내리면서 기독교 이전의 이교적인 요소 혹은 몽고인 침공 이후의 아시아적인 요소 등과 융합하여 새로운 것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럽미술과의 차이는 종교의 차이에서도 비롯되지만, 유럽이 '돌 문화권'인 데 반하여 러시아는 슬라브민족 특유의 '나무문화권'에 속한다는 본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기독교로의 개종, 18세기 뾰뜨르1세(대제)에 의한 유럽화 정책, 20세기 들어 겪게 된 혁명 등 정치적 변혁과 역사적인 사건들과 연관되어 미술의 흐름이 급전환을 하게 된 것도 러시아미술의 큰 특색이다.

미술활동의 무대가 된 유럽 동부평원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인데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텐산 등의 산맥이 가로막고있어 남쪽 스텝지대를 제외하고는 아시아대륙의 문화가 유입될 수 없었다. 그래서 슬라브인은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의 국제교역로를 통해 북은 바이킹과 노르만(바랴기), 남으로는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제국과 교역 및 전쟁을 통해 접촉을 계속 유지해왔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이 러시아 유럽화의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미술 세계의 창조]
988년 러시아 최초의 국가인 끼예프러시아가 기독교로 개종하자, 기존의 애니미즘신앙에 바탕을 둔 모든 미적 창조물은 모두 파괴되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비잔틴제국 콤네노스왕조의 이른바 궁정 직속 비잔틴미술이 전해졌다. 봉건제 강화를 위한 기독교로의 일원화는 이교적인 요소를 포섭, 동화시켜 가면서 차츰 러시아 특유의 미적 세계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미술이 당초에 비잔틴양식을 따르면서도, 그 엄격한 양식을 떠나 조금씩 지방적 특색을 지니기 시작한 것은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였다. 그 직접적 동기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리스공략과 뒤이은 라인 강으로의 국제교역로 이동으로 비잔틴과의 교류가 차단되었던 저, 따따르의 러시아 침공이 시작되면서 삼림지대로 밀려난 점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깊은 숲을 외곽방패로 삼고 그 안의 넓은 평야에 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예부터 핀족 및 슬라브족들의 사회에서 전해내려온, 못을 쓰지 않고 목재만으로 집을 짓고 가구,연장을 짜맞추는 특유의 목공기술은 이 무렵 완성기에 접어들었고, 그 독특한 형식과 형태를 석조건축과 공예에까지 응용했다. 외적에 의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된 이 시대에는 그리스의 성지 아토스계의 높은 정신이 특히 북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꼰에 반영되어 있다.

[서유럽화정책과 러시아미술]
러시아미술이 한정점에 도달한 것은 따따르로부터 해방되어 일단 국가적 통일을 이룩한 15세기말이다. 꼰스딴찌노플의 함락에 뒤이어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이탈리아로부터 건축가를 초청하여 모스크바 크렘린 안에 석조교회당과 궁전건물을 잇따라 지었다. 러시아미술사의 큰 전환은 18세기에 일어났다. 뾰뜨르대제의 대개혁에 따라 미술은 종교에 봉사하는 종교 미술이 아니라 세속적 절대권위자인 황제를 위해 봉사하는 궁정미술로 변한다. 회화에서는 그 중심이 이꼰에서 초상화로 옮겨지는 등 세속미술이 나타나게 된다. 러시아미술의 낙후를 만회하기 위해 기술습득이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중세 이래의 전통적인 종교미술은 두드러지게 약화되고 역사화, 풍경화, 풍속화 등 서유럽의 회화장르가 성행하게 된다. 러시아 미술사를 통틀어 놀라운 비약을 이룩한 것은 19세기의 회화이다. 러시아는 이 시기에 18세기 이래 불과 1세기 동안에 서유럽미술 수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동전파처럼 그림을 매체로 해서 민중을 계몽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화가그룹도 등장하게 된다. 특히 혁명 직전에는 첨단적인 전위파들이 무수히 난립하면서 미술계의 역량은 가위 그 극에 달하게 된다.

회화

[종교화의 융성]
10세기말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 17세기까지, 러시아회화는 2차원적 표현을 쓴 종교화가 판을 쳤다. 기독교를 예찬하고 신과신의 세계를 묘사해내는 역할을 하는 이꼰, 프레스코, 모자이크가 오랫동안 회화를 대표하였다. 그 기법은 기독교화를 전후해서 비잔틴에서 끼예프로 전해졌다. 그리하여 러시아회화는 고대그리스풍의 위엄있는 인물상을 평면에다 옮기는 웅장하고 간결한 필치를 배우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다른 나라에선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러시아에서 이꼰이 발달한 것은 삼림자원이 풍부하고 나무숭배와 토속신앙에서 비롯된 수호성인이 많은 점과 관계가 있다. 비잔틴의 엄격한 양식에서 벗어나서 일찍부터 독창성을 보인 지역은 북노브고로드였다. 그곳에는 일찍부터 미회(베체)가 발달하여 다른 도시에 비해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서유럽과 접촉이 있는 등의 특수성을 작용하여 덜 엄숙하고 친근감을 주는 양식이 발달하였다. 짙은 색채와 선명한 윤곽을 좋아하는 경향은 일찍이 12세기 노브고로드 근교 프레스코에서 나타났다. 한편 북동부의 블라지미르 주변지역에서는 비잔틴에서 선물로 보낸 '블라지미르 성모'를 본보기로 하여 비잔틴 정통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정신성이 높은 민족적 감정을 반영한 양식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13세기에 시작된 이민족 침입으로 블라지미르는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는 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여러 도시들이 폐허로 변해가던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는 이민족 침범을 모면한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14세기에는 프레스코의 영향을 받아 우아하면서 아름답고 명쾌하며 율동적인 노브고로드 특유의 이꼰 양식이 생겨 14~15세기에 그 전성기를 맞는다.

14세기말에서 15세기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왕조 파라이오로고스의 영향을 받고 자란 개성적인 화가들이 배출된 황금시대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파의 성과를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화가 페오판 그레크 Feofan Grek(1330년경~1410년경)를 노브고로드로 초빙한 것이 큰 계기였다. 뛰어난 기량과 높은 지식을 가진 이 그리스화가는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이꼰화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몽고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조짐이 보이고, 모스크바공국이 국내통일을 이루어나가고 있던 15세기초에 모스크바 근교 수도원 출신으로 추정되는 수도사 A.루블료프가 이꼰과 프레스코의 최고 걸작을 남겼다. 대표작 '성삼위일체'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종교철학적인 상징성을 지닌 신비롭고 아름다운 화풍을 확립했다. 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화가 디오니시 Dionisii(1440년경~1502년경)는 루블료프의 전통 위에서 새로운 감각을 갖춰, 아름다운 선과 중간색을 사용하는 서정적이고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했다. 콘스탄티노플리스가 함락되어 동방정교회의 지도권이 러시아정교회로 넘어가고, 러시아가 몽고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독립할 무렵부터 이꼰의 인물묘사나 배경이 러시아적으로 변해갔다. 16세기중반, 독재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각지의 뛰어난 이꼰화가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어 지방의 유파들은 자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 출신의 우수한 화가들이 모스크바파를 이루었다. 또 이 무렵부터 신의 세계를 찬미해오던 이꼰이 지상의 주권자인 군주를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고 금은세공으로 장식된 공예품이 등장했다. 세부적인 묘사와 스토리성이 강해지는 경향 속에서 이채로웠던 유파는 북쪽의 거상 스뜨로가노프 가를 위해 가정용 소형이꼰을 세밀화로 만든 스뜨로가노프파였다. 작품에 제작자의 이름을 밝히기 시작한 것도 이 유파였다. 17세기의 화가 우샤꼬프(시몬 푸아도로비치 우샤꼬프;1626~86)는 로마노프왕조 최초의 화가이자 마지막 이꼰화가였다. 그는 종래의 장엄함을 이꼰에다 되살리면서도 점점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나갔다. 오랜 동안 2차원적 표현이라는 엄격한 전통을 따라왔던 이꼰도 폴란드로부터 전해온 세속적인 서유럽 리얼리즘회화의 영향을 받아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속화의 탄생과 근대화]
러시아 정교에 뿌리를 둔 전통문화를 밀어젖히면서 추진되 뾰뜨르대제의 서유럽화정책으로 러시아회화는 급속히 근대 서유럽회화와 가까워졌다. 비잔틴적인 종교미술의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졌으며, 뻬쩨르부르그궁정을 중심으로 세속적 미술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시대 회화의 주류는 이꼰을 대신하는 초상화와 장식화였다. 1757년 뻬쩨르부르그에 미술아카데미가 창설되어 프랑스에서 지도자를 맞아들이면서 러시아에서도 초상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기 회화는 프랑스회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여기서 벗어나 러시아가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사회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되는 19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나폴레옹전쟁(러시아인들은 조국전쟁이라함)에서의 승리는 애국심에 눈을 뜨게 했으며 역사화, 풍속화, 풍경화 등 모든 장르의 그림이 탄생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이바노프(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이바노프;1806~58)처럼 국민의식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도 나타났다. 1850년대말~60년대는 전제정치하의 사회비판을 담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페로프(바실리 그레고레비치 페로프;1834~82)처럼 화필로써 사회 최하층계급의 비애를 호소하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1870년, 진보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카데미즘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발족한 이동전파 화가들은 러시아적 사실주의를 완성시키는 한편, 그림을 통하여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890대말에는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동전파를 비판하는 모더니즘운동이 일어났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두 갈래로 크게 나뉘는 여러 미술단체들이 등장하여 러시아회화는 크게 발전했다.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다이아의 잭'파의 등장(1910)등 마침내 서유럽 근대미술의 수준에까지 도달한 바로 그 즈음에 혁명을 맞게 된다.

그리고 18세기부터 성행한 민중판화 루보끄는 이와 같은 시류에 물들지 않고 20세기초까지 러시아의 오랜전통을 지켜나갔다.

조각
기독교는 러시아에 건축, 회화, 공예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으나 환조조각은 우상을 만드는 일로 간주된 까닭에 18세기까지는 본격적인 조각예술의 발달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12세기에 제2의 수도 블라지미르를 중심으로 외벽면에 성경의 주제와 이교적인 모티브가 뒤섞인 동식물과 인물 머리부분을 얕게 양각한 교회당건축이 나타난것은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지방이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하천을 통한 교역으로 독일,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과 접촉이 있었고, 특히 동방으로부터 들어온 직물과 금속공예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목조건축의 장식으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인 조각예술이 일기 시작한 때는 뾰뜨르대제시기였다.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초빙된 건축가들과 함께 러시아로 들어온 조각가들이 당시 유럽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바로크양식을 전하면서 18세기 중엽에 이미 조각은 전성기를 맞는다. 1716년 이탈리아의 조각가 라스뜨렐리 Bartolomeo Carlo Rastrelli(1675년경~1744, 건축가, B.F.라스뜨렐리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초빙되어와서 정원에 세운 조상을 비롯, '뾰뜨르대제 흉상'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이어서 프랑스의 팔꼬네 Etienne Falconet(1716~91, 1766~79년 뻬쩨르부르그 체류)는 뾰뜨르대제 기마상인 "메드늬이 프사드닉"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러시아조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757년에는 미술아카데미가 개설되어 러시아에도 비로소 본격적인 조각가가 육성되었다. 그리스조각을 예찬하는 자, 바로크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고전을 따르려는 자 등 갖가지였다. 19세기 후기에는 자연주의적인 세밀한 묘사와 인간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이 추구되기도 했다. 이어서 이어서 뜨루베츠꼬이(빠벨 뻬뜨로비치 뜨루베츠꼬이; 1866~1938) 같은 인상주의적 경향을 보인 작가도 나타났고, 20세기초에는 꼬논꼬프 (세르게이 띠모페예비치 꼬뇨꼬프;1874~1971)같은 대조각가를 낳게 된다.

공예
천연자원의 보고인 러시아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종교의식에 쓰이는 예배용 도구를 국내에서 만들게 되면서 귀금속, 보석세공, 칠보, 흑금상감, 도금, 조금 등 모든 기술을 습득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목제 민간생활용구의 형식을 그대로 금속기구에 옮겨 적용하여 손잡이가 붙은 술잔 등 러시아 특유의 형식을 낳았다. 또 러시아의 칠보는 국제적 평가가 높으며 비잔틴, 아르메니아,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달한 것인데 금선이나 은선을 비틀어서 새겨넣은 에마이유 크로아존네는 16~17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17세기에 모스크바 크렘린내의 무기고에는 황실이 주문하는 물품을 만드는 러시아인, 외국인 장인들이 모여들어 러시아공예의 중심을 이루어서 마치 중세 미술,공예아카데미와 가튼 구실을 하였다. 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은 큰 수도원이나 귀족들의 영지 안에도 있었다. 17세기는 모든 공예가 급속히 발전한 시기로 가구, 나염품, 유리제품, 목각, 석각, 보석세공, 자수 등도 바로크 양식과 오리엔트공예품의 영향을 받아 발달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뻬쩨르부르그에 왕립직속 도요공방도 생겼으며 유럽으로부터 지도자를 맞아들여 도자기류도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아방가르드 미술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20세기초 제정러시아는 서유럽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공업화를 도모해왔으나 1905년 '피의 일요일'과 러일전쟁 패배는 러시아 전체를 뒤흔들어놓았다. 이동전파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대사업가 마몬또프(싸바 이바노비치 마몬또프;1841~1918)는 개인미술관을 세워 러시아농민 미술의 성과들을 수집, 전시했고, 사설 오페라극장을 세워 운영하면서 무대미술을 화가들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밖에도 S.I.시추낀이나 I.A.모로조프는 인상파 이후의 서유럽 미술작품을 수집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댜길레프, 베누아 등 '예술세계'그룹(1898년 결성)은 메레슈꼽스끼와 블로끄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중세의 이꼰을 배우면서 서유럽의 아르 누보에 접근하였고, P.V.꾸즈네쪼프, 미류티 형제, M.S.샤리얀 등의 '푸른 장미'(1907)는 포비즘과 접촉하여 상징주의를 넘어선 프리미티비즘(원시주의)을 지향했다. '푸른 장미'파에 속했던 라리오노프와 그의 아내인 꼰차로바는 1910년 I.I.마슈꼬프, R.R.파리끄, P.P.꼰차롭스끼 등과 '다이아의 잭'그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큐비즘과 뮌헨의 '청기사', 그루지야의 화가 피로스마나시빌리(피로스마니) 등을 전람회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잔느주의에 머물고 있는 동료들에게 불만을 품어 1912년에는 샤갈, 말레비치, 타틀린 등과 '나귀꽁지'그룹을 결성하였고, 또 물체가 내뿜는 반사광이 교착하는 추상공간을 추구하면서 광선주의(루치즘)를 제창했으나, 1915년 발레 뤼스에 무대미술가로 참여하여 파리로 망명했다. 러시아 큐비즘은 미래파와 결합하면서, D.D.블루류크, I.A.푸니, N.I.아리트만 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비구상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백지에 흑백의 정사각형, 원, 십자모양을 배치해서 우주적 명상을 표현하는 말레비치의 수프레마티즘과 철, 나무, 종이, 석고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를 릴리프 모양이나 매다는 식으로 만드는 타틀린의 구성주의와 대립이 깊어졌다.

10월 혁명에 뒤이은 내전과 외국군간섭의 시기에 "가두는 우리들의 붓, 광장은 우리들의 팔레트"라고 부르짖던 마야꼽스끼는 전보주문을 받으면 당장에 스텐실 인쇄와 목판으로 포스터를 인쇄하여 배달해주는 '로스타의 창'을 조직하였다. 뻬뜨로그라드의 혁명1주년 기념행사 때 아리트만은 동궁(겨울궁전)의 벽을 미래파풍의 그림으로 장식하고 광장 중앙에 거대한 추상조각을 세우고 무장병사와 군중을 조명으로 비추는 야외극을 연출하였다. 또 메이예르홀트나 타이로프의 실험극에 많은 미술가들이 협력했고, 차체나 선박 몸체에 그림을 그려넣은 선동열차와 선동기선도 야외극의 무대가 되었다. 초대 교육인 민위원장 루나짜르스끼는 동 위원회에 조형예술부(IZO)와 그 협의회를 설치했고, 모스크바미술학교를 회화, 조각, 건축, 도예, 금속공예, 직물, 인쇄의 7개 부문으로 개편하여 시민들에게도 개방했다. 또 서유럽에서 귀국한 자와 국내 급진파를 프후테마스(고등예술기술공방)의 교사로 등용하여 예술혁명을 추진했다. 샤갈은 고향 비텝스끄미술학교 교장이 되어 리시츠키와 말레비치를 교사로 초빙했다. 프후테마스의 교수이자 신설된 회화문화관장으로, 예술문화연구소의 예술교육 개혁안을 기초한 칸딘스끼는 색채, 선, 형태 등의 기본적 요소를 분석해서 기하학적 구성을 중시하고 각 예술을 종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개인적이고 순수예술적이라 하여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구성주의는 당시 생산과 예술의 직접적 결합을 추구하였으며, 프롤레따리아문화의 창조를 목표로 내건 프롤레뜨꿀뜨운동과 손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맹일소와 부르주아문화의 유산계승을 선결문제로 본 레닌은 프롤레따리아문화의 성급한 주장을 비판하고 혁명선구자들의 조상건립을 추진했다. 이러한 가운데 타뜰린이 구상, 계획한, 철과 유리로 된 나선구조에 빛, 전파, 영상 등을 모두 동원한 높이 400m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1920)'은 끝내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구성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1921년 녜프와 함께 질서재건 움직임이 일고 특히 1924년 레닌이 병사한 후, 스딸린의 일국사회주의노선 아래서, 보수적 경향이 강해진다. 아방가르드는 숨을 죽이게 되고 많은 미술가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러한 가운데 '혁명러시아 미술가연맹'등 사실적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그 세력은 1920년대말에 '라쁘'(라시스까야 아쏘찌아찌아 쁘랄레따르스끼 삐싸찔리;RAPP,전러시아 프롤레따리아작가동맹;1925-32)로 합류했다. 1932년에 이르러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문학예술단체를 해산하고 장르별 단일조직을 결성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소련미술가동맹'이 생겼는데, 이것은 스딸린체제 문화영역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했다. 1934년에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쏘비에트예술문학 및 문학비평의 기본적 방법'으로 공인된다. 이 무렵에 대숙청이 시작되어 아방가르드예술도 형식주의이고 코즈머폴리터니즘이라 하여 공격대상이 되었고, A.M.게라시모프, B.V.이오간손 등의 영웅적인 표현속에 현실긍정을 담은 작품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기는 사리얀, A.A.디네카, 쿠크리니크시 등 근대적 요소를 잔존시킨 예술가들이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경향은 대조국전쟁(제 2차 세계대전)부터 스딸린 말년에 걸쳐 절정에 달한다. 비스딸린화의 도화선에 불은 당긴 흐루시쵸프는 당 제1서기시대에 어떤 작품을 '나귀꽁지'라고 비판했는데, 만년에 그는 그 말이 본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고 사과하고 그 조각가 E.I.네이즈베스트니에게 자기가 묻힐 묘의 설계를 맡겼다.

뻬레스뜨로이카(재건) 이후로는 미술계에도 자유의 바람이 불어 미국이나 유럽의 동시대미술과 거의 병행하는 조형활동이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공개될 수 있게 되었다. 또 20세기초의 아방가르드예술에 대한 재평가도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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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길레프 … (러시아 ∵ 예술가) … Diaghilev ∵ Sergey ∵ Pavlovich
1872. 3. 31 러시아 노브고로트 지방~1929. 8. 19 이탈리아 베네치아.
러시아의 예술 진흥에 크게 공헌한 인물.

음악·회화·연극과 같은 각기 다른 예술 형태의 이상과 춤의 이상을 결합시켜 발레를 부흥시켰다. 1906년부터 파리에 살았으며 1909년 발레 뤼스를 창단했다. 이후 발레 뤼스를 이끌고 유럽·미국을 순회했고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명작 〈불새 The Firebird〉·〈페트루슈카 Petrushka〉·〈봄의 제전 The Rite of Spring〉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러시아군 소장과 귀족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다. 어머니로부터 꿈꾸는 듯한 큰 눈을 물려받았으며 개인적으로나 예술적인 면에서의 호사스러운 취미도 물려받은 듯하다. 그는 자신이 완전한 쾌락주의 철학을 따른다고 여러 차례 밝히곤 했다. 계모 헬렌 발레리아노브나 파나예바에게서는 규율감과 지배 본능을 물려받았으며, 어린시절 그의 예술적 감성은 그녀가 음악과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덕분에 발전했다. 학생시절에 피아노 교습을 받고 청중들 앞에서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1890년부터 사회과학·음악·회화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는 그가 한평생 주도한 여러 지성적인 모임 가운데 첫번째 모임이었다. 당시의 친구 가운데 화가 알렉산더 베노이스, 레온 바크스트는 후에 디아길레프의 발레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와 발레의 첫 만남은 엉뚱하게도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1890년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Sleeping Beauty〉를 별 감흥없이 보았던 것이다.

1893년 첫번째 해외여행에 나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를 돌다가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와 오페라 작곡가 샤를 구노, 주세페 베르디를 만났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예술인들을 찾아다니며 자극을 받았다. 1896년 법과대학을 졸업했으나 그는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청중들 앞에서 발표된 그의 성악곡이 신통하지 않자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가 작곡가가 되는 데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후원자를 만나 샬리아핀이 등장하는 오페라 제작을 위한 혁신적인 무대장치를 제안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는 확신을 갖지 못했으나 로마 시대의 매세나 같은 위대한 예술 후원자의 역할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했다. 오페라·발레·문예행사 같은 공연사업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으므로 사적인 수입 없이 이 일을 시작한 그는 많은 장애에 부딪혔다. 더구나 19세기 러시아에서 그의 동성연애는 활동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성적인 매력과 대담함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1899년 그는 〈예술세계 Mir Iskusstva〉를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음으로써 이러한 국제적인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 잡지의 성격은 런던에서 그래픽 미술가 오브리 비어즐리와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생각을 반영하던 〈옐로 북 Yellow Book〉과 비슷했다. 1905년 디아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타우리데 궁에서 역사적인 러시아 예술전을 열었다.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1906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한 것이었다. 바로 파리에서 그는 나중에 프랑스-러시아 예술가동맹이라 불리게 된 조직을 만드는 데 힘썼다. 그는 러시아 예술전을 기획했고 1907년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었으며, 1908년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를 표도르 샬리아핀 주역으로 파리 오페라좌에서 러시아어로 공연했다. 마침내 여러 예술들의 결합 내지 상호침투라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할 때가 왔다. 1899년 러시아 황실 극장 감독 세르게이 볼콘스키 대공의 조수로 임명된 디아길레프는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의 영향을 깊게 받아 창의적 활동을 벌이던 무용가 미첼 포킨을 만나게 되었다. 덩컨의 혁신적인 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이상,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디아길레프는 1909년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발레 뤼스의 첫 시즌을 시작했다. 무용가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미첼 포킨이 그의 무용단에 속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길레프의 공연물에서는 판에 박힌 안무가 자취를 감추었다. 주로 포킨과 레오니드 마신의 영향 아래 완전히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고 있었던 안무가들의 목표는 마임 혹은 행위의 춤이었다. 낡은 예술 형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선택된 작곡가들은 화가와 안무가들의 환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는 디아길레프의 뛰어난 창조물이었으며, 통합예술의 이상을 타고난 안목을 바탕으로 실현한 것이었다. 디아길레프의 예술은 젊은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발레곡 〈불새〉·〈페트루슈카〉·〈봄의 제전〉의 3편에서 절정에 달했다. 디아길레프가 기획한 발레 가운데 가장 뛰어난 〈페트루슈카〉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의 주장에 따라 자신이 종래 작업해오던 진부한 개념의 피아노 협주곡을 마임 형식의 발레곡으로 바꾸어 연예물에 나오는 꼭두각시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실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디아길레프가 함께 일하는 제작진들에게 매우 큰 심리적 영향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관현악곡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이 파리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자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 음악의 불협화음과 거친 리듬은 세련된 관객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관현악단 가까이에 있는 무용수들도 음악을 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대 곁의 의자 위에 서서 고함을 치며 몸짓으로 리듬을 지시한 안무자 니진스키 덕분에 무용수들은 공연을 계속했다. 

디아길레프는 조국 러시아를 떠나 끝내 되돌아가지 않았고, 파리에서 특히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와 일했다. 자신의 발레단을 이끌고 유럽·미국·남아메리카를 순회하였으며 그의 발레 시즌은 1909~29년 동안 계속되었다. 후기의 시즌에는 프랑스·이탈리아·영국·미국 출신의 진보적인 작곡가와 화가들의 작품을 발레에 도입했는데 그의 레퍼토리에 포함된 작곡가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있다. 그는 큰 영향력을 지녔지만 가난했으며,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고독했으며 불만이 많았다.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결코 완벽함을 실현하지 못했으나 늘 개척정신을 지녔다. 그는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았는데,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1929년 시즌이 성공적으로 끝날 즈음 건강이 악화되어 베네치아로 휴가를 떠났으나 고열로 혼수상태에 빠져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산미켈레의 섬 묘지에 묻혔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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