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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몫(모더니티총서10)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정치일반 > 사회철학
지은이 조르주 바타유 (문학동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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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이론적 도입

I. 일반경제의 의미
1. 지구 에너지와 경제의 의존관계
2. 체계의 성장에 쓰일 수 없는 과잉 에너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소모의 필요성에 관하여
3. 일부 유기체 또는 총체 들의 빈곤과 살아 있는 자연의 과잉 풍요
4. 과잉 에너지의 파국적 소모로서의 전쟁

II. 일반경제의 법칙
1. 생화학 에너지의 과잉과 성장
2. 성장의 한계
3. 압력
4. 압력의 첫번째 결과: 확장
5. 압력의 두번째 결과: 낭비 혹은 사치
6. 자연의 세 가지 사치: 먹기, 죽음, 유성생식
7. 노동 또는 기술에 의한 공간의 확장과 인간의 사치
8. 저주의 몫
9. '일반적' 관점과 '개별적' 관점의 대조
10. 일반경제의 해법, 그리고 '자의식'

제2부 역사적 여건들 I ―소비 사회

I. 아즈텍인들의 제의와 전쟁
1. 소모 사회와 기획 사회
2. 아즈텍인들의 세계관과 소모
3.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멕시코의 제의
4. 인간 제물과 제의 집행자의 내밀성
5. 전쟁의 종교적 성격
6. 종교 우선에서 군사적 유효성의 우선으로
7. 희생 혹은 소모
8. 저주받은 그리고 신성한 제물

II. 경쟁적 증여(포틀래치)
1. 멕시코 사회의 과시적 증여와 증여의 일반적 중요성
2. 부자들과 제의적 낭비
3.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
4. 포틀래치 이론 (1): 권력의 획득으로 환원된 증여의 역설
5. 포틀래치 이론 (2): 증여의 표면적 비의미
6. 포틀래치 이론 (3): '지위'의 획득
7. 포틀래치 이론 (4): 근복적인 제1의 법칙
8. 포틀래치 이론 (5): 모호성과 모순
9. 포틀래치 이론 (6): 사치와 빈곤

제3부 역사적 여건들 II ―군사적 기획 사회와 종교적 기획 사회

I. 정복 사회 : 이슬람
1. 이슬람교에 의미 부여하기의 어려움
2. 헤지라 이전 아랍인들의 소모 사회
3. 이슬람의 탄생 또는 군사적 기획 사회
4. 후기 이슬람 또는 아정으로의 회귀

II. 무장 해제의 사회 : 라마교
1. 평화로운 사회
2. 근대 티베트와 영국인 분석가
3.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힘
4. 13대 달라이 라마의 좌절과 반항
5. 군사 조직의 공격에 대한 승려들의 저항
6. 전체 잉여와 라마의 소모
7. 라마교에대한 경제적 설명

제4부 역사적 여건들 III ―산업 사회

I. 자본주의의 기원과 종교개혁
1. 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2. 중세의 경제, 이론과 실제
3. 루터의 도덕적 입장
4. 칼뱅주의
5. 종교개혁의 간접적 효과: 생산 세계의 자율성

II. 부르주아 세계
1. 작업 세계와 내밀성의 근본적 모순
2. 종교개혁과 마르크시즘의 유사성
3. 근대 산업 세계와 부르주아 세계
4. 물질적 궁핍의 해결과 마르크스의 급진주의
5. 종교와 봉건제도의 잔재
6. 공산주의, 그리고 사물의 유용성과 인간의 합치

제5부 현재의 여건

I. 소련의 산업화
1. 진퇴양난의 비공산주의 진영
2.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인의 입장
3. 축적과는 대립적인 노동자 운동
4. 축적에 무기력한 황제들과 공산주의의 축적
5. 토지의 '공유'
6. 가혹한 산업화와 허약한 비판
7. 러시아 문제와 세계 문제의 대립

II. 마셜 플랜
1. 전쟁의 위협
2. 생산 방법들 사이의 비군사적 경쟁 가능성
3. 마셜 플랜
4. 고전경제와 일반경제의 대립
5. 프랑수아 페루의 견해와 일반경제의 관점에서 본 일반적 이익에 대하여
6. 소비에트의 압박과 마셜 플랜
7. 아니면, 전쟁의 위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제로 남는다
8. 역동적 평화
9. 미국 경제의 완성과 인류의 완성
10. 부의 궁극적 사용에 대한 의식과 자아의식



Ⅰ. 아즈텍인들의 제의와 전쟁

 1. 소모사회와 기획사회 | 일반경제운동의 원칙은 낭비다? 자원이 넘쳐 잉여가 발생하면 순수하게 소모되기도 하지만 성장해야 한다면 성장에 할애되는데 성장은 무질서 하게 끓어오르는 힘에 질서를 부여하며 그 힘을 일정한 결실작업으로 유도한다. 하지만 성장을 무한 지속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의 양상은 제멋대로 사느냐(소모사회) 또는 다산성을 보장해 주는 기획의 필요에 따라 사느냐(기획사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인류가 사물들에 대해 대체로 가지고 있는 명확한 인식이 온전한 자아 인식일 수는 없다. 그 상태의 인류는 노동의 결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오직 노동을 위해 살 뿐인 노동의 인류이기 때문이다.

2. 아즈텍인들의 세계관과 소모 | 그들의 세계관과 정신은 우리와 정반대다. 아즈텍인들은 세상은 4번의 창조활동이 있었고 각 세상을 지키는 태양이 있었는데 모두 멸망하고 자신들이 5번째 태양신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태양이 사멸하고 우주가 멸망하는 것을 막고 신이 창조한 우주가 지속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적인 인신공양을 행했다. 생산이 우리에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아즈텍인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소모적 제의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노동'에 애쓰는 만큼 '희생'에 정성을 쏟았다. 그들의 눈에 태양은 그자체로 희생의 표현이었다. "태양의 먹이가 되기 위해, 살과 피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인간뿐 아니라 전쟁역시 만들어졌다는 이러한 신앙은 신화 못지않게 소모의 극단적 가치를 뚜렷이 드러낸다.

3.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멕시코의 제의 | 전쟁에는 정복이 아닌 소모(인간제물을 바치는 제의)의 의미가 있었으며, 더구나 멕시코인들은 전쟁이 없으면 태양 역시 그 빛을 잃어버릴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부활절이 가까워지면 멕시코인들은 육체가 아름다운 젊은이를 제물로 선별하여 1년 동안 대귀족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데 제물은 존귀한 지위에 어울리는 우아함과 위엄을 가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받았고 제물로 바쳐지기 5일전 신의 영예가 주어진다. 죽음의날, 사제들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인간 제물(전쟁의 포로)의 가슴을 흑요석 칼로 찔러 심장을 꺼내 태양에 바친다. 엄청난 폭력이 태양신을 달래는데 예사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축제가 시작되면 제물로 바쳐진 시체를 뜯어먹기도 했다.  

4. 인간 제물과 제의 집행자의 내밀성 | 아즈텍인들은 포로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음식과 술을 주면서 인간적으로 대하면서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하며 희생물들의 고뇌를 진정시키고 싶어 했다.(제물들은 그들이 제물로 바쳐질 것을 알지 못한다.) 축제를 열어 제물을 만취상태로 만들거나 ‘쾌락의 여인’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5. 전쟁의 종교적 성격 | 멕시코인들은 전쟁과 제의의 밀접한 관계를 의식했다. 산파들은 아이(남자)가 태어날 때 탯줄을 자르면서‘너는 태양의 봉헌물로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의무이자 목표임’을 맹세하며 그들에게 있을 희생을 미루어 선포한다. (포로를 데려온 전사는 제의에 있어 사제 못지않은 성스러운 축연의 중요한 역할 담당한다.) "신이시여, 진실로, 우리 전사들이 전투 중에 죽기를 원하게 하소서. 당신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오직 우리의 피와 우리의 살을 태양과 대지에 제물로 바치기 위함이 아닙니까" (전사들을 위한 테츠카틀리포카에게 비는 기도)

전사가 전쟁에서 죽는 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 이유(태양신을 위한 봉헌물로 전쟁에서 피흘림)에 걸맞게 가장 영광스러운 최후라는 것이다.

6. 종교 우선에서 군사적 유효성의 우선으로 | 멕시코사회는 군사 사회가 아니라 순수한 폭력을 행하는 사회이고 전투를 과시하는 형태의 사회, 전사들의 사회이다. 그들은 전쟁의 합리적 조직이나 정복 같은 것은 알지도 못했다. 오히려 진정한 전쟁 사회란 기획 사회이다. 따라서 노예들의 대량살상으로 표상되는 부의 탕진만큼 군사적 조직화(기획사회)와 대립적인 것은 없다. 아즈텍인들은 그러나 소모의 잔인한 폭력성과는 대립적인 기획과 이성의 방향으로 옮겨가며 전사활동에 변화가 생긴다. 왕을 대신하는 포로의 대속행위는 소모의 심리적 원칙인 내적 폭력(왕을 향한)을 타자(신으로 구현된 포로) 에게 돌리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소모의 의미 전복)

7. 희생 혹은 소모 | 희생제의는 천박한 사용(주체의 내밀한 어떤 것이 사물화 됨)에 의해 훼손된 부분을 신성세계로 돌려놓는다. 또한 희생제의가 되살려내는 것은 천박한 사용에 의해 훼손된 제물과 제의 집행자 사이의 내밀한 관계이다.

*노예제도는 이 세계 속에 빛의 부재를 끌어들임으로써 사물을 저마다 자리 잡게 만들며, 유용성을 축소시킨다. 또한 주인에게 단지 사물로서 존재하는 노예와 사물의 한계를 정해 자신의 내밀성을 멀리하는 주인은 극도로 분리된다.

이것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사물로 환원되는 것(천박한 사용)이다.

*노동- 사물세계에 초석을 놓은 것은 최초의 노동이었다. 그러면서 인간도 이러한 세계에(적어도 노동하는 시간만큼은) 하나의 사물이 되었다. 그래 인간의 역사는 지금까지 그러한 실추의 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내밀성 추구의 역사이다.

*종교- 종교는 잃어버린 내밀성을 찾아가는 기나긴 노력이며 고뇌에 찬 추구이며, 사물의 초라함을 벗어나서 신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동식물에게는 내밀한 세계의 진실을. 인간은 인간대로 성스러운 소통을 되찾게 되며. 내적 자유도 가능해진다. 이러한 깊은 자유의 의미는 유용한 작업의 한 고리로 남을 수 있는 어떤 것(인간제물?)을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소모하는 오직폭력만 지배하는 해방의 길을 여는 파괴에서만 얻어진다.

내밀한 세계는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명철한 의식과 도취의 관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현실세계와 대립한다. (나는 광기가 아니면 현실적 질서에 전혀 종속되지 않는, 오직 현재에만 열중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없다고 가정한다.)

내일만 걱정하지 않는다면 무익한 소모(에너지 비축하지 않음)는 나를 즐겁게 한다. 제한 없는 소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소모는 고립된 존재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이 내밀한 질서로 회귀하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소모이다. 희생제의는 공동 작업체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내밀성을 되찾게 해주는 광적 행위이다. 폭력은 희생제의의 원칙이나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제한한다. 축제) 작업(희생제의)는 축제의 한계를 사전에 결정지어 그들을 광란에 휩싸이게 했다가 다시 세속적 시간으로 안내하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파멸을 모면하는 것은 공동체일 뿐 제물은 폭력에 내맡겨진다.

8. 저주받은 그리고 신성한 제물 | 제물은 유용한 부의 일부로서 잉여의 부분이다. 그리고 제물은 오직 아무런 이익 없이 소모되기 위하여, 즉 영원히 파괴되기 위하여 유용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제물로 뽑히는 순간 제물은 폭력적인 소모에 약속된 저주의 몫이다. 제물은 사물이기 때문에 사물의 질서로부터 끌어내려면 파괴를 통해 제물의 유용성, 사물성을 벗겨낼 수 있어야 한다. 제물은 제의 집행자와 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제의 집행자의 소모적 제의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현실적 질서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오직 제물뿐이다. 제의는 고뇌와 광란이 뒤섞인다. 제의의 결과는 밖으로 돌려져야하고, 제의 집행자는 자신의 제산이 될 수도 있었을 제물을 거부해야 한다. 여기서 존중받는 것은 가치 경계를 넘어서는 과잉, 소모이며 그것만이 신에 합당한 대접을 받았다. 인간은 이러한 소모를 대가로 타락에서 벗어났고, 또한 현실적 질서의 냉혹한 타산과 인색함이 인간 내부에 끌어들인 사물의 무게를 걷어낼 수 있었다.



Ⅱ. 경쟁적 증여(포틀래치)

1. 멕시코 사회의 과시적 증여와 일반적 중요성 | 아즈텍 사회에서 자원의 상당한 몫을 비생산적으로 사용했다. (인간 제물로 버려지는 천박한 생명과 피) 과시적 낭비에 혼신을 기울이는 일은 막대한 부를 소유한 군주 또는 종족의 수장이 행하는 기능 중의 하나인데, 군주 또는 군주의 화신이 승인한 제물은 끓어오르는 살해 충동에 무한 소모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목숨을 주기보다 부를 주고(증여) 유희했다. 축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누구든지 이미지, 부, 지위에 따라 할 수 있었다. -전사들이나 상인들(포추테카).

2. 부자들과 제의적 낭비(증여를 통한 교환) | 아즈텍 상인의 거래는 상품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증여에 의한 교환이었다. 그들은 '군주'로부터 부를 증여받고 그것을 거래중인 부족들의 통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면 선물을 받은 그 지역의 대영주들은 왕에 바칠 다른 선물들을 준비했다. 이 증여행위를 통해 교환된 물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영예의 징표요, 그 자체가 영예로 빛났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들은 부와 능력을 과시했다.

상인들이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면 잔치가 벌어지는데 부나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상인들과 귀족들에게 더 성대한 축제나 향연을 베풀었다. 만약 그가 신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주 천하게 취급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치장한 포로를 같이 먹기도 함)

3.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 | 최초의 교환은 상실하거나 소비하려는 욕구와 일치했다. (트린지트, 하이다, 침샨, 콰키우틀족들 에게) 포틀래치는 상업과 마찬가지로 부의 순환 방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래를 배제하고 그저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그에게 도전하기 위한, 그리고 그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쟁자는 부의 막대한 파괴를 통해 상대방의 도전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파괴는 제의와 거의 다르지 않다.

*19세기까지도 트린지트 족 족장은 경쟁자 앞에 나타나 그가 보는 앞에서 노예들의 목을 치고 살육으로 이어지기도 함.

*추크치족은 적의 기를 꺾기 위해 소중한 개를 죽임. *북동부인디언들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카누를 부숴버림.

4. 포틀래치 이론(1): 권력의 획득으로 환원된 증여의 역설 | 포틀래치는 유용한 부의 소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내부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는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유용성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유용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에너지 운동(지위, 명예?)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가 그렇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 활동을 거기에 맞춘다. 문제의 해결은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갖는 하나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한계들을 초월해야 하는 한편,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초월로부터 한계를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제기된 문제는 잉여의 소비인데 우리는 잉여를 증여하거나 상실하거나 파괴해야한다. 그러나 획득의 의미가 없다면 증여는 무모한 짓이다. 그러므로 '증여 한다'는 '권력을 얻음'으로 이어져야한다. 곧 증여는 증여의 주체로 하여금 부를 버림으로써 부를 초월한, 미덕과 권력을 얻게 한다.

어떤 사람이 대상을 다른 사람 앞에서 파괴하거나 증여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 증여 또는 파괴의 힘을 가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부자가 되는데 그것은 그의 부를 가치가 드러나도록 과시적으로 소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잃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증여의 진정한 힘은 그것이 타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포틀래치는 우주의 무한 운동과 인간의 한계를 결합시켜 주는 미덕이 있다.

5. 포틀래치 이론(2): 증여의 표면적 비의미 | 증여하는 사람은 증여받은 사람에게 증여가 부여하는 권력을 행사하며, 증여받은 사람은 다시 증여를 되돌려 줌으로써 그 권력을 깨고 싶어 했다. 경쟁은 경쟁자를 더 큰 증여로 안내한다. 선물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 증여는 반대의 의미를 갖는 모순을 안는다. 여기서 이상적인 포틀래치는 돌려받지 않는 것인데 결국 되돌려주는 사람만이 힘을 얻고 승리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증여의 의미전복)

6. 포틀래치 이론(3): '지위'의 획득 | 포틀래치는 증여자에게 더한 증여를 안겨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지위를 안겨준다.

특권, 영예, 지위는 능력과 혼동될 수 없으며 차라리 그것은 상실의 힘과 동의어다. 지위-개인의 증여(동물적 인자 포함)에 따라 정해진다. 반면 영예는 우월성의 결과이고 타자의 재산을 가로채는 힘과는 다르다.

7. 포틀래치 이론(4): 근본적인 제1의 법칙 | 포틀래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용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에너지의 소모로만 얻어지는)획득이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확보 증대시킨 자원은 어떻게든 완전한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소모가 소모자에게 주는 것은 특권이다. 특권이 마치 재화처럼 그에 의해 얻어지며, 그의 지위를 결정한다.

-사회적 지위는 도구나 토지처럼 소유될 수 있다. 지위가 이익의 원천이라면 이것은 자원들의 단호한 소모행위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8. 포틀래치 이론(5): 모호성과 모순 | 인간은 소모와 동시에 획득을 열망하며 낭비자체를 획득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원을 소모하면 소모자에게 안겨지는 특권이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원의 낭비를 거부하면서 자원의 낭비를 활용하여 인간 스스로를 모순에 빠뜨리며 이뿐 아니라 인간의 실존 자체를 모순에 빠뜨린다. 인간의 실존은 이제부터 모호성에 빠지며, 그 모호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유용한 구체적 사물로부터 인간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부분을 구분해 낸다. 그러다가 절대적 필요성이 사라지면 인간은 더 이상 '유용한 사물'을 소망하지 않는데 그때부터 인간의 실존은 포착할 수 없는 덕, 자기 자신과 재화의 무익한 사용, 그리고 놀이를 찾는다.

인간의 실존은 포착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하고 싶어 하며, 유용성을 거부하던 것에서 유용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위는 전적으로 이러한 잘못된 의지의 산물이다. 지위는 어떠한 의미에서 사물과 대립적이고 지위를 받쳐주는 것은 신성한 것이다. 지위의 전체적 서열은 계급이라고 불린다.

우리의 본성 안에는 이러한 타협이 있는데 그 점은 속임수, 책략, 덫, 착취와 분노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은 채 시대를 가로질러 역사적 광기를 좌우했음을 알려준다. 대체로 희생제의 혹은 포틀래치, 그리고 인간의 활동 혹인 인간의 명상(사유) 안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언제나 그러한 그림자이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것을 시, 열정의 깊이 혹은 내밀성이라고 헛되이 부를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만당할 수밖에 없다. 인식의 와해 없이는 인식의 최종 목적에 이를 수 없고, 지식의 최종적인 문제와 소모의 최종적인 문제는 같다. 파멸 없이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부를 도모하면서 소모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9. 포틀래치 이론(6): 사치와 빈곤 | 개인, 개인간의 경쟁, 성장 또는 획득의 가능성은 어떤 점에서 보면 한계가 있어서, 성장 또는 획득이 한계에 이르면 모든 실존적 탐용의 태상,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거짓 탈을 쓰고 자유를 얻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마침내 인간은 거짓날을 하며, 자유와 이익을 관계지으려 한다. 개인은 원칙적으로 파괴를 위해서 자원을 축적한다. 식량-식량은 부의 소유가 아닌 소비를 아주 명료하게 의미한다.

부의 축적은 상당한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그는 지위에서 오는 자신의 폭발적인 본성을 억누를 것이다. 마치 자신이 부를 갖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벗어나려는 어떤 진실(자신의 폭발적인 본성)을 반대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는 기만을 범할 수밖에 없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포틀래치는 부의 파괴(잉여의 소모)가 아니라 최종적 손실을 보는 사람은 증여자이지만 부의 총체는 유지되는 형태로 잘못된 소모를 행사한다. 이것은 여전히 생산적 소모의 보완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포틀래치의 증여품은 그 시대의 사치품이자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의 지위를 결정짓는다.

부의 빛은 넘침의 진실, 충만한 우주가 발하는 빛이다. 진실과 진실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넘침의 진실을 알 수 없으며 마침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 진실에 관해 최소한의 것을 말하자면 부의 형태는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고, 그렇게 부는 부를 확보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즉 인류를 조롱하기에 이를 거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의 사회는 거짓으로 가득 차있으며, 부의 진리는 부지불식간에 볼품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치와 의미심장한 포틀래치는 가난한 사람, 땅을 베개 삼는 멸시 받는 사람의 몫이 되었다. 진정한 사치는 부의 완전한 멸시를 요구하며, 노동을 무시하는 사람의 무심함을 요구한다. 누더기의 영광, 무심함의 음울한 도전이 없다면 군사적 착취, 종교적 신비화, 그리고 자본주의의 방향전환 너머로 부가 갖는 폭발적 성격, 낭비적 특성, 넘침의 의미를 깨달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짓은 삶의 과잉을 혁명으로 인도하고 말았다고 말해두고 싶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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