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711_숭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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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장 뤽 낭시
고양의 언술 - 위(僞)롱기누스를 다시 읽기 위하여 / 미셸 드기
숭고한 봉헌 / 장 뤽 낭시
칸트 혹은 숭고의 단순성 / 엘리안 에스쿠바
숭고한 진실 / 필립 라쿠 라바르트
숭고와 관심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세계의 선물 / 자콥 로고진스키
비극과 숭고성 - 독일 이상주의 초창기에 시도된 <오이디푸스 왕>의 사변적 해석 / 장 프랑수아 쿠르틴
푸생의 그림 속 바벨탑에 관하여 / 루이 마랭
칸트 혹은 숭고의 단순성
_엘리안 에스쿠바
서언
칸트의 텍스트는 “구성”되는 방식은 “구축”이 아닌 형성이다. 상상력의 형성, “허구-제작”으로서의 형성, 건립하거나 쌓아 올리는 대신 개념들을 구부리고 주제들을 굽히고 접어“형태를 만들어내는”기법으로서의 형성. 하나의 Topic속에 텍스트를 고착시키기보다 대립 항들의 휘말림을 야기하는 전의와 절의 작업. 칸트의 텍스트 내에 이분법들이 작용한다고 하자. 그런데 거기에는 매번 중간마디에 해당하는 제삼의 용어가 개입한다. (인지력의 이분법- 감성과 오성은 제3능력인 상상력에 재차 뒤집힌다.) <판단력 비판> 상상력은 반성, 재현 혹은 제시, 종합 등의 “제작”을 의미한다. 이 같은 선회는 결국 숭고의 (단순성이 지니는) 명징성을 보여준다.
상상력
반성 상상력과 미적판단은 다 같이 비-대상성(대상의 후퇴)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상상력은 대상의 무(無)의 한복판에 형태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서 주어진다.미적 판단의 표현으로 정의되는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그 “특질”상 “재현과 대상간의 관계”가 아니라 “재현과 제반 재현의 능력 전체의 관계”로 정의된다. 취미판단이나 미는 재현으로부터 타자를, 즉 대적자나 대상을 멀리 떼어놓는다. 미적 판단은의 위장의 효과는 절대적 초상으로 규정하지 못하도록 교란한다. 미적 판단은 주관적 합목적성으로 쾌적함과 비장함이라는 두 가지 양상을 띠는 미적 쾌감의 의미이다. 이런 판단은 중성적이고 동일자와 타자, 또는 안과 밖의 대립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미적 판단은 일종의 부여가 이루어지는 계기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미적인 것에 해당하는 이상 그것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진술한 대상에 결코 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동일자도 타자도 아닌, 가운데, 중간마디. 칸트는 상상력이 그런 것이라 보았다. 상상력은 감성처럼“제시 또는 직관의 능력”이면서도, 감성이 수용적인데 반해 오성처럼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중간이란 무엇인가? 취미판단이나 미는 무엇을 반성하는가? - 바로 주체의 능력들의 조화라든가 합주를 반성한다.
1.합주를 실행하는 중간 마디(상상력, 판단력)자체가 합주가 일어나는 두 끝 항들 중 하나가 된다.
2.2.미의 경우 합주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명되는 반면 (상상력과 오성의 일치, 조화) 숭고의 경우에는 첫눈에 보기에 합주가 행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길항)
합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와 숭고의 판단을 통해 표현되지만 그저 주체의 쾌락감을 드러낼 뿐이고 이것은 언술의 후퇴와 함께 이루어진다. 합주가 표명하는 쾌감이란 무엇인가? – 미는(그리고 숭고는) 사유의 쾌감으로 판명된다. 이 사유의 순수한 쾌감은 대상에 대한 앎을 수반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앎의 하나는 아니다. 따라서 반성 및 합주에 관계된 것은 재현적 모방과는 전혀 다른 작용이다. 언술은 발화 행위 안에, 발화행위는 언술 안에 묻히는 이격접촉과 같은 이러한 능력들의 작용이 관조적 쾌감이다.
머묾Verweilung - 시간이 주체의 자기-느낌의 과정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리라. Weile(~동안)은 시간의 “정지”이며 머묾과 거주지로서의 시간. 관조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의 순수한 형태 속에서 기억 없음의 기록이 바로 상상력의 의미이다. 반성, 즉 상상력의 작동이 이루는 합주는 따라서 시간의 순수형태, 다시 말해 발생의 순수형태를 포착하는 작용에 부합한다. 이렇게 재생산이 아닌 생산으로서의 미메시스 개념의 창안된다.
상상력 - 제시 “제시 또는 직관의 능력”인 상상력은 현실의 능력이기도 하다. 상상력은 개념에 직관을 제시함으로써 오성과 감성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이 제시를 일컫는 이름이 도식이다. 여기서 도식은 하나의 광경이고, 상상력은 포착의 능력이다. 칸트에게 상상적인 것은 전적으로 현실에 포함되며 드러냄의 능력인 상상력은 현실의 현실성에 대한 능력이다. 감성은 존재자를 그것의 실질성을 통해 수용하는 반면, 상상력은 형태와 상에 의해 존재자를 제공한다. 출현은 증여의 능력 “있음”의 능력, 존재론적 차이의 능력이다.
존재자의 대적성이 철회되면 그때의 현존은 본질, 즉 순수한 출현의 섬광이다. 이것에 대한, 근거1) 숭고의 예인 거친 자연은 미와 숭고의 능력인 상상력을 존재론적 차이의 능력으로 주제화할 근거를 제공한다. 근거2) 상상력은 순수한 "제시"의 능력인 동시에,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 안에서, 그것의 존재 방식인 출현 혹 외관에 따라 포착하는 능력이다. 근거3) “단순성은 말하자면 숭고의 상태에 도달한 자연의 양식이자, 제이의(초감각적) 자연인 도덕성의 양식이기도 하다.”
단순성, 하나의 주름 - 이것은 자연의 제시 양식이다. 상상력이 숭고를 통해“보라고”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존재론적 차이로서의 단순성 또는 하나의 주름을 제시하는 것이 칸트가 말한 상상력이다. 칸트의 “부정적 제시”, “무한의 제시” - 드러냄의 작업 전체에 관여하되 저 스스로는 결코 드러내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이 곧 형태다. 형태, 혹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직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공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상상력은 사물들의 주름 내지 주름 접기인 공간과 시간의 제시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상상력은 현실의 현실성을 관장하는 능력이다.
양식에 관한 보충설명..
상상력 - 종합 상상력은 모으는 작업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상상력을 스스로 넘쳐나는 작용으로 규정하며 3가지 양태의(선험적) 종합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상상력의 종합은 종합의 일부인 동시에 전체로 이해된다.
1. 포착의 종합 - 이질적 요소들을 포학, 끌어 모음. 2. 이해의 종합, 계열적 종합 – 도식. 3. 재생산의 종합 - 상상력의 작용.
종합의 작용인 상상력의 작용이 각각의 능력 내부에서 마다 진행됨으로써 이분법 및 삼분법의 구분에는 혼선이 생긴다. 칸트는 혼선의 제거를 위해 상상력을 경계들 내에 담긴 채 오성을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재생과 비교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능력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칸트의 오류이다. 이처럼 상상력은 “나는 생각한다”와 동일시하는 시각의 여운으로 상상력의 작용인 미를 사유의 순수한 쾌감과 일치시키고 있는 <판단력 비판>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포착과 이해라는 이중의 작용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기술된다. 포착은 수학적 숭고의 분석으로 총량의 문제와 관련되고, 이해는 연관이며 그것의 극대치의 개념을 내포한다. 이해에는 상상력이 넘어설 수 없는 하나의 극대치가 존재한다. 반면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특성은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극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의 정점에서 숭고가 발생한다. 따라서 상상력은 기묘하게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는 능력인 셈이고, 숭고는 바로 상상력이 낳는 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상상할 수 없는 것, 즉 숭고는 상상력이 벌이는 “적게 잃고 크게 얻는” 게임의 결과다. 이 게임은 “근본척도”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됨의 작용이다. 이해와 정점은 ‘통일”, “조화”, “하나됨”의 능력이라는 위상을 상상력에 부여한다.
칸트의 주제에 관련한 상상력과 숭고에 관한 특성
1) 상상력의 작용은 “~없음”을 통해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서, 완성의 부정으로 행해진다. 이 “없음”의 연쇄의 중간 지점에서 미는 단 한 차례 멈추는데, 거기서부터는 숭고가 작용을 이어받고, 그러면 숭고와 함께 형태 그 자체가 아예 상실되고 만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와 숭고의 능력인 상상력은 존재자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쾌(만족)의 논리이다. 우리가 상상력의 재현을 어떤 개념 하에 놓으면, 상상력의 재현은 개념의 제시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규정된 개념의 범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거리를 스스로 제공하려 하며, 따라서 개념 자체를 미적으로 무제한으로 확장한다. 상상력은 따라서 창조적이다. 이것은 논리적 속성들과 달리, 미적 속성들은 창조의 숭고성과 위엄성의 개념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재현하지 않는다. 미적 관념은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 그것 앞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확장되어가는 동종의 재현의 장의 전망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자연개념의 확장 - 이것은 “주어짐”이 상정하는 연합을 통해 가능해지는 확장이다. 또 그것은 숭고에 의해 일어나는 상상력 그 자체의 확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와 관계된 것은 미의 경우에서처럼 대상과 상관된 만족감이 아니라 상상력 자체의 확장과 상관된 만족감인 것이다. 칸트적 의미의 상상력은 모든 능력들에 혼란을 일으키는 능력, 이분법과 삼분법을 흐트러트리는 능력, 결국 반-능력이다.
2) 시작의 "능력" 상상력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그것은 만족을 계기로, 다시 말해 감각의 도래, 감각의 기별을 계기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감각에 있어서 쾌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이 제공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각이 스스로를 부여하는 것이다. “쾌”= 감각의 발생, 나타남. 이때의 시간성은 연속의 형태가 아니라 정지의 양태를 띤다. 눈에 비치는 대로 바라보는 상태에서 시선은 “그것”것으로서의 존재자에 머무르거나 고정되지 않은 채 나타남으로서의 푸시스를 “포착”한다. 칸트적 의미의 숭고는 지금 나타나는 것의 나타남을 일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숭고의 단순성이다.
숭고한 진실
_필립 라쿠-라바르트
1 절대적으로 숭고한 것들 예1) 숭고는 “항상 사유의 양식과, 다시 말해 지성의 영역과 이성의 관념들이 감성에 대한 우위를 갖도록 하는 데 필요한 규범들과 결부되어야 한다." 이것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늘 높이 존재하는 것이든 낮은 땅 위에 있는 것이든, 혹은 땅보다 더 낮게(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각상이나 그림을 만들지 말라." 는 명령만큼 숭고한 대목은 없다. 예2) 천재, 즉 숭고한 예술가와 관련한 “사유의” 숭고 – 이시스의 신전에 새겨진 문구” 나는 지금 존재하고 이전에 존재했으며 앞으로 존재할 것인, 어떤 인간도 나의 베일을 들어올리지 못하였다.”칸트에 의하면 제시 불가능한 것을 제시하는 것은 숭고하다. 또는 리오타르의 표현에 의거하여 보다 엄밀하게 이야기해보면, 제시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숭고하다.
2 1935-36에 걸쳐 미학을 해체하고자 시도하면서, 하이데거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예술 철학 전체를 광범위하게 “미학”이라 부른다. 하이데거가 취한 해체의 방향은 결과적으로 미학의 규정을 통해 작품이란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로 흐르게 된다. 미란 예술 작품이 스스로 드러내는 어떤 것으로 에크파네스타톤(빛, 광채)을 띠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미는. ‘드러냄’이라는 진실의 측면에서 볼 때, 스스로의 본질 속에 저 자신을 활짝 펼치는 방식이다.” 그것은“무관심”에 의해서만 대상 그 자체와의 본질적 관계가 실현된다. 무관심(자유로운 호의)은 대상과 본질적으로 맺어지기위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한 사실 - 1. 칸트의 미 규정은 미의 본질에, 다시 말해 비-미학적인 미의 이해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다. 2. 빛남에 대한 일관된 사유에 의해서만 미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헤겔의 예술 종말론으로 난관에 봉착하고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관점의 결정적 특성을 거둔다. 그리고 매우 심오한 정치적 공모성과 그 직접적 인과관계를 내어준다.
1)정치적-철학적 공모… 이것은 예술과 예술 작품은 “절대적 필요”를 구성해냈다는 사실에서 위대해지는 것이지, 창조물의 탁월성만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 근대에 들어 이처럼 예술 스스로의 본질을 상실하여 쇠퇴하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수행한 미학의 완성이다.
2)직접적 인과관계… 두 사람 모두 예술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상호 배타적 관계에 놓는다. 예술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지식, 또는 학문이 출현하는 순간 “위대한 예술은 종말을 맞는다.”
… 하이데거가 시도한 작업의 모든 난관은 헤겔의 일관성에 대한 거부에서 기인한다. 미학의 탄생에 관한 헤겔의 논리에 가해진 하이데거의 조정은 예술의 종말로 설명된다. 예술에는 두 개의 죽음이 있다. 하나는 5세기 쇠퇴 무렵 철학의 탄생과 함께였고, 또 한번은 고유한 의미의 미학의 발전과 동궤를 이룬다. 하이데거가 완성한 미학은 헤겔 미학의 윤곽을 형성한 기점이 되었던 “존재자의 진실”을 제 안에 포함하므로 헤겔 미학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존재자의 진실이란 존재자의 직관적 진실이다. 미학적 개념체계의 전제가 그것으로부터 도출된다. 근대 미학은 이미 창작자와 애호가를 기점으로 예술을 파악하는 방식 사이에 공모가 이루어 졌다.
존재자의 직관적 규정보다 더 “시원적인”존재자의 규정이 존재하는가? (칸트와 실러의 재평가.)
1)칸트는 분명히 헤겔이 완결한 미학의 범위에 포함된다. 이것은 상상력에 관련된 용어들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2)칸트가 그 완결된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도 확실하다. 첫째로 실러에 기대면 <비판>의 주관주의를 “주관성”의 영역에서 빼낼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미의 본질을 순수한 빛남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곧 그가 예술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방식과 완전히 결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칸트는 소위 제일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분야 내에서 처음으로 미학의 권리를 인정해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철학의 일부, 또는 포함 분과로서의 미학을 말소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칸트가 미학의 권리를 박탈하게 된 데는 숭고에 대한 사유, 또는 숭고에 대한 어떤 유형의 사유가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1) 롱기누스 시대부터 숭고는 그 개념자체에 있어서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구분, 즉 감각과 초 감각을 구분하는 플라토니즘의 전통에 의거하여 제시되었다는 사실.
2) 미에 대해 부정적 방식으로 정의되는 숭고는 따라서 미의 개념에 끊임없이 종속되며, 미의 개념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제공하지도, 덜 제공하지도 않는다는 사실.
결국 하이데거가 숭고를 미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 헤겔의 관점에 찬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는 “예술의 본질에 관련하여 서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통찰력 있는 성찰”의 관점에 철학적으로 동의했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 내용과 형태 사이의 불일치는 부득이하게 미나 고유한 의미의 예술의 계기를 앞서는 순간으로 생각될 수 밖에 없다. 헤겔이 상징적으로 예술에 포함시킨 숭고가 아직 예술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숭고성은 신과 자연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무한한 주체의 현상이자, 그것이 세계와 맺는 관계이다. 미의 종교의 경우 그 정신적인 것은 외적 형태를 통해 온전히 파악할 수 있지만 숭고성은 숭고를 드러내는 질료가 사라지도록 만든다.
미켈란젤로의 <모세>- 이것은 제현의 금지에 대해 오직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을 가진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해석하는데 실패하고 빈켈만이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 사이의 투쟁이 곧바로 형태의 차원에서 판독될 수 있는 예술 작품의 예인<라오콘>상을 찾는다.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 “욕망하는 힘”,“강력한 관심”과 자유 사이에 빚어지는 길항에 완벽히 일치하는 이것은 미이다. 형상이 형상화하는 바는 형상화에 대한 일체의 적대감을 (숭고하게)포기하는 것, 바로 그것이 결론이다.
프로이트의 난관의 원인, 모세의 형상의 모순이 발생하는 진원지로서 드러내는 사실은, 1)모세의 율법이 실제로 숭고해지는 것은 바로 그 부정성 자체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근대에는” 위대한 예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2) 예술은 본질적으로 직관적 제시의 소관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이 제시라면 본질적으로 형태나 형상 이외에 과연 무엇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제시의 문제와 연결된 질문은 비밀스러울 정도로 조용히 등장(부활)하였다. - 이시스의 신전에 새겨진 문구- 이 질문의 상징적 집약.
4 이시스의 언술은 신비 그 자체이고 그것을 지탱하는 메타포만 제외한다면, 확증적인 것으로서의 진리 언술이다. 그 언술은 신성의 진실 또는 본질, 즉 신성은 폭로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나, 진실은 말한다. 이러한 이시스의 선언은 단지 진실의 언술일 뿐만 아니라 진실에 대한 진실의 언술이기도 하다.
진실은(폭로는) 스스로를 은폐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낸다. 진실은 그저 ‘베일을 벗기는 것’이다. 헤겔은 상직정이고 숭고한 세계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정신", 즉 자의식이 최초로 떠오른 세계인 그리스로의 상질징적인 이행과정에서 환희에 잠긴다. 진실은 그 본질에 있어서 비-진실이다. 우리는 존재자에 관해 더 이상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때 그것을 가장 잘 만날 수 있다. "어떤 인간도 내 베일을 들어올리지 못하였다."는 말은 폭로의 가능 조건 그 자체이다. 예술의 진리란 재현되는 대상의 본질(존재자의 존재)이 예술작품 속에 정립(탈은폐)됐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술작품 속에서 탈은폐된 존재자의 존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존재자에게 낯설음, 섬뜩함(Unheimlichkeit)을 보게 된다. 이런 탈-친숙화의 알레테이아(비은폐성)의 도래는 본질적으로 예술작품에 의해 일어나는데 그런 것이 예술 작품이 유발하는 "타격" 또는 "충격"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존재자에 보충 또는 잉여로서 신비스럽게 덧붙여지는 예술 작품은, 스스로를 창조된 것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그 사실을 통해 바로 존재자의 자리에서(예술작품 자체도 존재자이다)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 그는 "예술작품이 자신이 개진한 존재자의 열림 안으로 순수하게 옮겨지며 옮겨질수록 그것은 한층 더 단순하게 우리를 교란시킨다." 그러면서 우리를 그 열림 속으로 밀어 넣는 동시에 일사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위의 탈-친숙성, 낯설게 하기, 교란, 충격, 단순성, 은닉 또는 철회, 저지 – 이것들은 하나같이 숭고 그 자체를 일컫는 어휘이거나 그것을 하이데거 식 표현법으로 옮겨 쓴 용례들이다. 그는 특히 불안과 ‘죽음을 향하는 존재’의 문제를 언급하며 현존재 또는 탈존의 바깥을 향해 나오는 움직임에서 기인한다고 본 바로 그 경험이기도 하다. 시 작품이 유발하는 충격, 다시 말해 존재자를 낯설게 하는것은 그와 같은 황홀함, 그와 같은 매혹이다. 가장 낯선 것에서 가장 고유한(propre)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5 에크파네스타톤-한의 섬광, 극도의 빛, 바로 출현 그 자체의 빛남. 이것은 더 본원적인 미의 이해에 대한 기억으로 탄생한 숭고의 사유일 것이다. 위대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술의 본질을 다시 사유하는 것은 영원히 마감되고 "끝난"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스의 "위대한 예술"의 범례들에 대한 질문들이다.
l숭고가 특정한 테크네에 속한 것인가?
(여기서 테크네는 좁은 의미로서의 기술의 의미이며,) 그렇다, 숭고는 테크네의 영역에 속한다. 칸트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천재의 문제가 나오는데 칸트는 천재를 예술에 규범들을 부여하는 재주(자연의 선물)이고 그 자체는 자연에 속한다, 그리고 천재는 정신의 천부적 재능으로, 자연은 그것에 힘입어 예술에 규범들을 부여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롱기누스는 자연의 재주에는 스스로의 규칙(규범)이 있고 체계가 있으며 천재는 자신의 규범들은 오직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인다. 숭고와 관련된 푸시스는 "자율적"인 천재에겐 한계의 설정에 따른 방법론이 요구된다. 그 이유는 자기 스스로에게 내맡겨진 천재 앞에는 지나침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숭고의 예술은 단지 이 범위 내에서만 테크네에 속한다.
l이 사실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일상사에서 제일 큰 재산은 행복을 소유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이다. 여기 행복과 신중함 대신 자연(푸시스)과 기예(테크네)로 바꾼다면 오직 기예만이 문체의 어떤 특질들이 단일한 기초를 지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대목에 전개된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이론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해석들 중의 하나임이 확실하다. 오직 기예만이 자연을 드러낼 수 있다 - 또는 테크네가 없다면 푸시스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질상 푸시스는 스스로를 감추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를 일컫는 재현이라는 용어는 제시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또는 현존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테크네는 지식의 생산이다. 이런 지식은 재현하는 능력인 미메시스의 경로를 거쳐 모습을 드러낸다. 미메시스-재현은 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한 지식의 가능 조건이다.
롱기누스는 이상의 미메톨로지를 바탕으로 숭고의 문제를 취급하려 한다. 천재는 어떻게 이 세상에 오거나 싹 틀 수 있는가? 또 숭고로 이르는 길은 무엇이며 위대함을 향한 도정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근본적 수수께끼는 바로 천재성의 전수, 예술의 역사라는 수수께끼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경쟁심이란 개념을 통해 답을 찾으려 한다. 천재성의 전수와 반복은 신비로운 미메시스적 전염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모방의 모델이 아닌 승계, 전승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사실 천재가 예술에 부여하는 규범은 통상적인 교육법의 전달 경로를 통해서는 전수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1) 그 규범이 어떤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며 2) 천재 자신조차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메시스의 외견상 상호 모순되는 결론. 1) 숭고가 좁은 의미의 테크네에 의해 지배를 받는 만큼 테크네는 푸시스를 원조해야 한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따라서 숭고의 과잉을 조절해야 한다. 2)그와 같은 숭고의 경우, 기예는 지워져야 한다. 테크네는 그것이 푸시스처럼 보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목적을 완수한 것이다. 또 푸시스는 제 안에 테크네를 간직하되 사람들의 시선 앞에 그것을 감출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공한 것이다. 테크네는 성공적으로 완수될수록 성공적으로 감춰진다. 이러한 역설은 "자연스런 예술"과 동일한 영역에 속한다.
과연 테크네는 어떤 방식으로 지워져야 하는가? 롱기누스 "당연히 그것 자체의 빛이다." 곧 푸시스의 알레테이아가 바로 숭고의 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 일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숭고한 빛, 숭고라는 빛이다. "마땅히 그래야만 할 순간에 섬광을 발하는 숭고는 마치 번개와도 같다. 숭고가 거쳐갈 때 모든 것이 흩날려버린다." "아름다운 표현들이란 실상 사유의 빛이다."
창세기 구절중 "빛이 있으라!". 여기서 절대 수행의 말이 지니는 유일한 목적은 "있으라" 이고, 여기서 신은 원칙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것은 나타남, 또는 순수 현현의 언술은 바로 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2) 숭고가 미보다 우월한 이유는 숭고가 우리의 목적기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푸시스에게 인간은 위대함을 향해 운명 지어진 생명체로 간주되며, 존재자의 모든 전체가 목도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롱기누스는 존재자의 전체조차도 인간의 이론이나 사유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들은 때때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들을 넘어서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존재 이유 또한 바로 그렇게 해서 깨달아지곤 하지 않은가.
이렇듯 하이데거는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된 바의 일치라는 근대미학의 전제를 해체함으로써, 숭고를 외부 대상(요컨대 ‘대자연’)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술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무엇으로 변모시킨다. 따라서 숭고는 더 이상 미학을 위협하지 않는다.
롱기누스의 결론- "인간에게 유용하거나 심지어 필수적인 것들은 인간의 영향력 아래 놓이지만, 반면 놀라운 것은 인간에게 언제나 패러독스이다." 다시 옮기자면.. 낯섦-"우리는 베일에 가려 비밀스러운 채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 그를 일컬어 낯섦이라 부른다."
6 우리는 존재자체의 낯선 광채라는 것을 도처에서 깨닫게 된다. 에크파네스타톤, 그것은 숭고에 염두를 둔 표현이다. 이것은 벤야민이 쓴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에세이에 생생하게 표현된다.
필립 라쿠-라바르트(1940~2007)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 철학과 교수”가 공식 직함이었던 라쿠-라바르트는 흔히 자크 데리다의 제자로 소개된다. 그러나 그는 데리다의 핵심 개념인 ‘차연’(diffrance)의 논리에 충실하게 스승의 말을 끊임없이 거스르고(differ) 유예시키면서(defer)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쳤다. 그러나 라쿠-라바르트는 독일 낭만주의 연구에서 시작해 라캉과 하이데거를 결합, 데리다의 전매특허인 “해체론”을 정치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를 받는 걸출한 사상가였다. 그의 작업은 「지금우리에게 낭만주의란 무엇인가?」(『세계의 문학』, 106호, 2002),「숭고한 진실“La verite sublime”, 1986」 단 두 개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저서
▶철학의 주체, 도상적 유형학1(79) :문학과 철학의 대립적 관계 안에서 서양사상사의 흐름을 재구성.
▶근대인의 모방, 도상적 유형학2(86) :근대적 미메시스(모방) 개념이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적 효과를 띄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비구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
▶정치성의 허구화(87) :하이데거의 나치참여 이유를 그의 심미적정치학에서 찾고,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성찰.
장-뤽 낭시 (1940- )
일본에는 낭시의 책이 상당수 번역되어 있다. 그 중에는 <주체 뒤에 누가 오는가?>(Who Comes After the Subject?)라는 책도 있다. 이건 낭시가 쓴 것이라기보다는 ≪주체 뒤에 누가 오는가?≫는 장-뤽 낭시가 제기한 물음에 대해 프랑스 사상가들(장 프랑소와 쿠르틴, 에티엔 발리바르, 믹켈 보르흐-야콥센, 알랭 바디우, 모리스 블랑쇼 등)이 답변한 것을 모은 책이다.
http://www.amazon.com/Comes-After-Subject-Eduardo-Cadava/dp/0415903602
그 책의 첫 대목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주체>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철저하게 비판받았다. 그 비판이 일단락된 현재, 도덕이나 이성의 복권을 내건 인간주의적 사상이 발흥하고 있다. 그러나 휴머니즘으로의 회귀는 철학의 망각에 속한다고 낭시는 비판한다. 서양의 주체․인간주의가 포스트모던에 의해 왜 비판되었는가, 그것에 대해 말하자면 푸코가 폭로했듯이 보편적 이상으로 간주되어야 할 인간성을 내건다는 것은 정상적인(이라고 간주된) 인간의 범주에는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소외하며 규탄하는 사태를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적 동질성을 인종차별에 대치시키는 한, 차별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체의 단순한 무화(無化)는 주체의 형이상학의 완성 형태이다. (스스로를 그 자신의 차이의 해소로서, 또는 자신의 아이러니로서 인정하는 자기-현전이다.) 그렇지만 주체의 무화라는 이 니힐리즘에 대해 ‘주체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주체의 장소에 누가 대신 도래하는가를 제시해야만 한다. 즉, ‘주체의 뒤에는 누가 오는가?’를.
여기에서 철학적 주체에 대한 정의를 뒤돌아보자. 철학적 주체란 헤겔의 “자기 속에 자신의 모순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모순이 자기 고유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주체성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외재성, 소원함, 타자)를 목적론적이고 절대적으로 재전유한다. 그 때문에 모든 변증법의 시작에는 주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재, 실존이란 주체가 모든 술어에 선행하는 한에서 주체의 본질이다. 그러나 실존은 본질(결정된 것, 분해불가능한 궁극적 요소)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현실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존하는 ‘실존자’이다. 즉, 인간의 본질인 주체란 지금까지의 철학이 생각해 왔듯이 절대적으로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그 장에서 그 때 그가 대면하는 것과의 관계에서만 본질을 지닐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일관성이라는 정체성/동일성 신화는 붕괴되어 버린다.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게 되는 ‘타자’라고 낭시는 생각한다. 자신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장소에는 사실 아무런 고정적인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바로 이’ 곳에서 어떠한 ‘하나’가 도래한다. ‘하나’는 실체적 통일이 아니다. 자신으로의 도래 속에서 하나이자 유일할 수 있으나 ‘그것’ 자체에 있어서는 다수이며 반복되는 것이다. 현전이란 자기에게 무제한적으로 도래하며 도착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 결코 자기 자신의 주체가 아닌 ‘주체’이다. 이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해 종래의 형이상학은 자기에게 도래하지 않는 타자를 항상 자신의 내부에 변증법적으로 편입하고 지배하려고 해 왔다. 이것은 자신이 모든 것에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오해 때문이다. 자기는 타자와의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장-뤽 낭시는 주로 독일철학, 예를 들어 독일낭만주의,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자신의 사유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이후에 가능한 공동체주의(communisme, 이 역어를 '공산주의' 대신에 택했다)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낭시는 또한 그 보다 한 세대 전 사상가,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를 이어가면서 '무엇'의 동일성의 지배에 저항하는 일종의 유한성의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있다(그러한 정치철학은 바타이유, 블랑쇼, 낭시의 사상을 바탕으로 현재 프랑스에서『선線Lignes』이라는 잡지의 정치적 입장의 배경이 된다).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등과 함께 가장 주목받고있는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 한사람이다. 이 사실을 낭시의 또 다른 측근, 데리다는 2000년『접촉, 장뤽 낭시』를 상자해 확인시켰다. 흔히 낭시를―라쿠라바르트도 마찬가지이지만―데리다의 후계자, 또는 제자로 여기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해라고 말할 수 있다. 낭시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소통, 공동체, 접촉등의 정치적 주제들을 독자적(독창적)인 관점에서 전개해 나아갔다. 낭시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대학 철학과에서 오랜 동안 교수생활을 하다 얼마 전 은퇴했다. 중요 저서로는, 바타이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의 지배 바깥의 공동체, 조직·기관·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무위無爲의 공동체La Communaute desoeuvree』, 실존이 어떻게 타인과 함께 하는 실존, 공-실존co-existence인가를 밝힌『복수적 단수의 존재L'Etre singulier pluriel』, 개념·명제 너머의 의미, 개념·명제의 성립조건으로서의 의미, '의미의 의미'에 대한 정식화,『세계의 의미Le Sens du monde』, 현전presence에 대한 새로운 해석,『사유의 무게Le poids d'une pensee』등이 있다. 낭시의 사상은, 그의 저서들의 번역과 더불어,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상태에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거의 소개 되어있지 않고, 단 한 권의 번역서도 찾을 수 없다. 블랑쇼는 그의『무위의 공동체』에서 영감을 얻어, 저자는 다르지만, 그 책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e inavouable』라는 책을 썼다. 낭시는 2001년에 블랑쇼의『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마주한 공동체La Communaute affrontee』라는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 책이『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번역에 함께 묶여 우리나라에 소개될 것 같다(모리스 블랑쇼,『밝힐 수 없는 공동체』/장-뤽 낭시,『마주한 공동체』, 이학사). (박준상)
[출처] 장-뤽 낭시(1940-).|작성자 지니
(2008 08/05 뉴스메이커 786호)
[독서일기](73) 우리 평범한 삶, 그 어디에도 숭고는 없다
숭고에 대하여_ 장-뤽 낭시 외,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2005
우리는 숭고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높이에 대한 꿈은 사라진 지 오래고, 우리는 끝없이 실패하며 지리멸렬한 일상의 밑바닥에서 어기적거리며 살아간다. 잡담과 업무 사이에, 밥 먹는 일과 거기에 쓴 그릇들을 씻는 일 사이에, 계약과 계약 사이에 어떤 숭고도 깃들 여지가 없다. 잘 다림질한 바지를 망가뜨리는 저 지하철 출근길에, 허망한 소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치르는 예식장의 판박이 결혼식과 진부한 장례식에, 돌연한 병사(病死) 혹은 노화의 결과인 자연사, 저 아파트에서 이루어지는 장삼이사의 평범한 삶 그 어디에도 숭고는 없다.
늘 지체되는 약속, 치솟는 세금과 물가, 불공정한 경쟁, 사소한 다툼, 어이 없는 배신, 타인의 무신경함, 터무니없는 험담과 비난, 오해, 과민반응, 짜증과 신경질…. 내가 이런 것들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사는 게 진절머리가 날 때, 나는 비 오는 날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린다. 비와 땀방울에 젖은 머리칼들이 이마에 달라붙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며 마침내 심장이 파열하기 직전까지. 나는 달리고 또 달린다. 때로는 비틀스의 노래를 듣는다. 내겐 언젠가 외국 여행 중에 발견하고 사들인 비틀스의 전곡을 담은 열한 장의 시디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며 비틀스의 노래를 들을 때면 나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며 화가 가라앉고 봉두난발로 허공을 떠다니는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린다. 나는 벤야민을 사랑한다. 그래서 벤야민의 책을 읽는다. 하루 종일 차를 잔뜩 끓여놓고 그것을 천천히 마시며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으며 아주 신중하게 마음이 행복해질 때까지 자제한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월화수목금토, 오감의 즐거움과 상관없이 배 고파서 먹는 끼니, 보람 없이 의무로만 채워지는 수고, 봉급이 나오는 날짜만 꼽아가며 출근하는 직장, 해마다 나이를 하나씩 더 먹는 것… 이것들에는 범속함의 지루함에 대한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묵묵히 치러야 하는 할당된 책임,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지나야 끝나는 견딤만 있을 뿐이다. 미지근한 맥주 몇 병, 혹은 소주 몇 병과 입에 집어넣는 죽은 동물의 근육 몇 점, 노래방에서 악쓰며 부르는 유행가 몇 곡, 그리고 피로에 절어 기절한 듯 자는 잠이 고작해야 그 책임과 견딤에서 풀려난 우리가 받는 보상이다. 거기 어디에도 숭고는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숭고는 솟구침이며 황홀경, 진실의 위대한 측면이며 미적 고양(高揚)이다. 시, 바흐의 음악, 모네가 그린 수련, 눈이 번쩍 뜨이는 승경(勝景), 이타적 희생, 임종하는 이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마지막 말들 속에 찰나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고 여겨지는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그렇다면 숭고는 어디에 있는가? 숭고는 감성과 오성, 혹은 미(美)와 진리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도덕에서 숭고는 희생과 포기에서 생기는 잉여들, 즉 능동적 가난과 가난이 표상하는 금욕주의에서 발견되는 그 무엇이다. 예술에서 숭고는 미적 실재로 현현된 것, 그 너머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자유의 고양, 감각적 직관을 꿰뚫으며 일어나는 윤리적 황홀경 따위다. 대개의 예술은 사용, 이득, 수익, 손실과 무관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기쁨이며 보상이다. 얀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볼 때 나는 숭고의 한 측면을 감지한다. 푸른 두건을 쓴 소녀의 순진무구한 표정 속에서 크게 뜬 눈동자는 그 아래 짙은 명암 속에서 빛나는 진주 귀고리와 같이 빛난다. 그 습기를 머금은 채 말갛게 빛나는 눈빛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현실 저 너머의 어떤 세계를 암시한다. 뛰어난 예술은 가능성의 극한에 가 닿지만 그것은 가냘프고 찰나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나는 내 그림이 그것들의 외관이 아니라 그 아래에, 저 스스로의 난폭함과 항구적인 힘 겨루기 밑에 있다는 것을 안다. 선(善)이나 숭고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취약하다.”(니콜라 드 스탈) 장-뤽 낭시는 숭고를 문제삼을 때 그것은 ‘제시의 문제’라고 말한다. 제시의 다양한 양태, 이를테면 언술·출현·봉헌·진실·경계·소통·감정·세계·벼락 등은 하나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숭고는 자주 미학의 차원에서 다루어지지만, 미학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예술 속에서 예술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언제나 한계의 예술이니만큼, 예술의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장-뤽 낭시) 예술은 그 한계에 닿을 때 봉헌의 제스처를 취한다. 봉헌에는 순진성과 단순성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감정들의 생동감은 나타나지만 요란한 과도성 혹은 숭고한 열광은 없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숭고와 같이 드높거나 깊디 깊은 곳에 깃들지 않는다.” 그 표면은 그저 과잉이 없는 평온을 지향할 따름이다. 장-뤽 낭시는 숭고가 예술에 대한 사유의 가장 고유한 영역이 될 수 있는 계기를 칸트에서 찾는다. 낭시는 “예술에 대한 사유의 핵은 숭고이며, 미는 단지 그것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 미와 따로 존재하는 숭고란 없다. 왜냐하면 “숭고, 그것은 그를 통해 미가 우리를 건드리는 계기지 미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숭고는 작품과 접촉함으로써 존재하지 그 형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접촉은 작품의 바깥, 작품의 경계선에서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접촉은 예술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예술이 없다면 그 접촉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예술이 드러나고, 예술이 주어진다. 이 사실이 바로 숭고다.”
왜 숭고를 문제삼는가. 미학이 숭고를 문제삼는 것은 미학의 월경(越境)이며 진화의 증거다. 프랑스의 68세대 철학자들이 싹을 틔우고 푸코, 리오타르, 라캉, 들뢰즈, 레비나스 들에 의해 그 논의가 확장된 숭고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구조주의 사유의 압력 아래에 있던 68세대 철학자들이 그 전 세대가 제시한 사유의 틀을 깨고자 하는 욕망이 숭고로 이끈 촉매제가 되었다. 전 세대가 제시한 낡은 틀이 아니라 저희들이 만든 새로운 사유의 틀로 자신의 세대를 규정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숭고를 사유의 영역 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틀을 깨고자 하는 것, 경계 바깥으로 튕겨 나가려 함은 다시 그 틀과 경계에 대한 사유로 재귀하도록 이끈다. “숭고에 대한 사유에 의하면, 윤곽이나 틀, 자취는 그것들 자신으로 귀착한다. 그것들은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 제시 자체의 중지, 다시 말해 윤곽과 틀, 자취들이다.”(장-뤽 낭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숭고에 대한 사유는 경계의 미학 혹은 미학의 경계에 대한 사유로 귀착한다. 다시 한 번 묻자. 숭고란 무엇인가? “찰나적으로 획득한 불멸성의 지점,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항하여 죽음으로부터 낚아챈 말은 숭고하다. 그 안에서 생성-소멸의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그 지점은 죽음의 곡선에 속하되 그와 동시에 그 곡선을 거슬러오르고, 곡선과 접촉하는 순간 역력한 방향의 전환을 일으키며 위로 솟아오르는 첨점이자 육체와 영혼이 합쳐진 채로 정지하는 절정이다. 또한 불안정한 산꼭대기에서 최대한 높이 뛰어내리는 순간에 그런 것처럼, 극미한 무중력의 유토피아다.”(미셸 드기) 숭고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과 세계의 접점, 안과 바깥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숭고는 예술과 자연의 결합 안에서 파생하고 그 파생하는 힘으로 끝없이 움직여 나간다. 숭고는 틀과 경계 안에 가둬놓을 수 없는, 넘치고 흘러나가는, 유동하는 움직임 속에서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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