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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그곳에 가면 보고싶은 사람들이 많다.
내 순수하고 열정 넘쳤던 20대 초반을 뛰어다는 곳.

오랜만에 예전에 만났던 연인의 뒤를 캐보았는데 쉽게 찾아져서 놀랐다.
사진속 그사람은 많이 변해보였지만 좋아보였다.

아직도 거기에 머물고 있는 친구들은 농반 진반으로 나에게 다시 대전으로 오라고 한다.
좋은곳이다.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시간안에 그곳에 갈수있다.
낮고 천천히 흐르던 갑천, 거기 드물게 있는 돌징검다리를 건널수도 있다.
그럼 곧장 넓은 잔디밭이 있다. 거기서 강아지랑 놀기도 하고 책도 읽을수 있다.
제일 좋은건 사람이 많지 않아서 눈치볼게 없다는거다.
때론 자전거를 빌려다가 한참을 강을따라 걸을수 있다.
깔따구가 얼굴에 마구 붙어다녀서 귀찮긴해도 시원한 강바람.. 생각난다.

대학때..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자유롭고, 같이 즐길 줄 아는 친구들이 있었고,
거긴 정말 나다운 내가 있었다. 음.. 나 다운 나ㅎㅎ
공부하다 튀어나와서 햇살을 머금고 잔디밭에서 우리딴엔 진지한 얘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던..
새벽공기마시며 그림그리다 또 잔디밭에 누워 파란 하늘에 명쾌한 색깔의 별들을 보며
마치 그 별을 금새 내 손에 잡을수 있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던..
사람들이 좋고, 친구들이 좋고, 내가 좋고,,
행복은 바로 그런게 아니었을까..

하하  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리려고 하니 혼자 민망하네ㅋㅋ

'동네이야기 > 대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  (0) 2011.02.21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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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옐 리시츠키의 ‘제품시연실’과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바우’가 독일 하노버에 설치된다.
이 구축주의자와 다다미술가는 아카이브로서 미술관 건축을 멜랑콜리아로서 모더니즘 공간의 알레고리를 변증법적으로 구상한다.


1919년 7월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는 새로운 유형의 회화 제작법을 발견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메르츠(Merz)’였는데 광고지에서 우연히 찾아낸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그는 음성학적, 텍스트적, 그래픽적 분할과 콜라주라는 두 미학을 발전시켜 다다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처음 시도에는 표현주의와 미래주의의 모든 표현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모은 금속이나 목재, 혹은 다른 재료의 파편들을 도입하자 작품은 급진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말기름 메르츠 회화)
하지만 그의 작업에 나타난 파편들은 다다에 확실히 동참하는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슈비터스는 테크놀로지적 오브제, 자신의 작업에 나타나는 발견된 재료는 새로운 회화의 유형을 구상하기 위한 기능만 가질 뿐임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시대의 경험을 위한 회화”를 구상하는 일이었다. 그의 입장이 모호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는 어떤 정치적 의도도 갖지 않았고, 자신의 작업을 회화의 전통안에 놓기를 원했다. 그의 목표는 완전히 미학적이면서 새로운 조형 형식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베를린 다다로부터 한층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하노버에 머물며 자신의 프로젝트를 계속 발전시켰고, 동료들이 모이면서 독립된 아방가르드 무대의 중심이 됐다. 특히 미술관 관장이었던 알렉산더 도너는 국제적 아방가르드 활동을 이 지방 도시로 가져와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5 도너가 하노버 란데스 갤러리를 위한 중요한 설치물을 위해 초청한 사람은 러시아 구축주의자 옐 리시츠키였다. 슈비터스와 리시츠키는 1922년에 메르츠 잡지(나스키)의 공동편집인으로 함께 일한적이 있었는데, 이는 분명히 구축주의와 다다의 이상이 맺은 계획적인 동맹이었다. 1926년 이들이 다시 공동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 두 미술가는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회화 작업, 혹은 조각작업에서 점차 건축적 공간에 대한 연구로 변형시켜 가고 있었다.

1922 ‘베를린 미술대전’에 출품한 ‘Proun Room’ 에서 리시츠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먼저 삼차원으로 변형시켜서 벽과 천정을 기하학적 형태와 부조로 디자인했다. 도너는 여기에 새로운 디스플레이 형식을 이론화하기 위한 작업 - 아방가르드 회화와 조각에 적합한 재현과 디스플레이에 적합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미술관 공간을 다시 디자인 하려고 했다. 도너는 리시츠키가 드레스덴 전시를 위해 한 초기 디자인을 보고 그를 컨택했다.(벽에 좁은 나무 널빤지들을 수직으로 설치하고 그 표면에 회화를 걸어서 벽을 철저하게 강조했다. 이 널빤지들은 작품을 설치할 표면 전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됐으며 흰색, 회색, 검정색으로 칠해졌다.)
리시츠키는 하노버에서 ‘제품 시연실’ 이라고 불리는 추상미술 디스플레이를 위한 진열실의 두 번째 디자인을 맡았다.
슈비터스와 그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슈비터스는 이미 회화와 콜라주를 그만두고 그의 첫 번째 건축 프로젝트인 ‘메르츠바우 (Merzbau)’로 이동한 상태였다. 처음 작업실에서 시작해서 주거용 방의 전통적인 입방체 공간의 모든 양상들을 변형시켜 점점 더 왜곡된 다중 시점의 공간 구조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공간 안에 색채된 목재 부조를 설치하고 다양한 오브제와 여러 형태들을 붙였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작가가 서로 절친 관계인 사실은 20세기 중반 독일 아방가르드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지만, 그들은 미술 작품과 관련해서 촉각성과 신체적 경험의 문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도너의 프로젝트는 촉각 경험을 확대하여 작가/대상/관람자가 협업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리시츠키가 디자인한 설치 작업은 관람자가 열고 움직일 수 있는 서랍장, 진열장, 선반에 중점을 두었다. 이로 인해 관람자는 자신을 관람자의 위치에 다시 놓는 일, 혹은 대상을 새로운 관계 속에 놓는 일에 직접적으로 연루됐다. 이런 설치 작업에서 촉각과 감촉은 급진적으로 바뀐 지각적 상호작용 방식의 요소들이었으며, 미술관이라는 명상적 공간을 아카이브로 바꿔 놓았다.
리시츠키는 전시공간과 전시 공간의 디스플레이 장치와 관습을 변형함으로써 미술관 제도의 역사적 변형뿐 아니라 미술관에 전시된 대상들의 위상을 변형시켰다. 즉 소위 숭배의 대상이었던 미술품을 순수한 전시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초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역사적 특수성을 지닌 대상으로 이동시켜 아카이브의 목적에 반드시 필요한 범주의 대상이 되게 했다.

촉각성에 대한 이런 공동의 관심사와는 별개로 슈비터스의 ‘메르츠바우’는 리시츠키의 접근법의 모든 양상을 전복했다. ‘메르츠바우’의 공간은 특수하게 제의적 공간이었고, 대상과 그 대상의 디스플레이는 총체예술(각 분야의 예술이 개개의 특성을 유지한 채 하나의 일관성 있는 주제 아래 결합하여 새로운 종합적 예술을 창조하는 것)의 조건에 대한 바그너적인 열망과 결합됐다. 총체예술에서 그 모든 감각, 즉 모든 지각 요소들은 전시되는 대상, 구조, 재료와 시각적, 인지적, 신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총체적으로 강화된 형식적으로 통합됐다. 이런 원천들은 그가 지각의 신체적 차원을 강조하도록 대상, 조직, 재료를 총체적으로 디스플레이하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도입하는 행위에서 한꺼번에 발생했다. 더욱이 그 사람들로부터 신체와 관련된 은밀한 것들을 받아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는 그 구조의 다양한 층에 이 은밀한 물건을 저장하고 도입했다. 그렇게 하여 비이성적, 비아카이브적, 비제도적 공간을 만들어 냈고, 그 공간에서 무의식적인 건축적 공간의 총체성으로 퇴행하는 그 어떤 것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슈비터스의 ‘메르츠바우’와 리시츠키의 ‘제품 시연실’은 20년대 아방가르드 디자인에서 서로 극단적으로 대입하는 두 개의 가능성으로서 이론화될 수 있다. ‘메르츠바우’는 슈비터스가 일생 동안 계속한 것인데, 이 작업에서 완전한 합리화의 공간이라는 개념은 모든 차원에서 거부됐다. 이처럼 공간을 도구화하거나 합리화하는 프로젝트의 의도는 일상생활의 가장 내밀한 영역으로 곧바로 다가가는 것이었고, 완벽하게 기능 장애적인 공간을 제시했으며, 공간 경험을 합리성, 투명성 그리고 도구화에 종속시키는 것에 대한 완전한 거부를 보여줬다. 슈비터스는 그 공간을 배경, 동굴 그리고 다른 종류의 집으로 강조함으로써 공론장 외부에 존재하면서 공론장에 반대하는 복원된 신체의 공간을 창조했다.
리시츠키의 공간은 어떤 점에서는 미술관이라는 제도의 재이론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나아가 리시츠키는 이미 추상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전망에 대한 내부적 비판을 시작했다(‘제품 시연실’에 전시된 추상의 실례에서 오브제들의 전시되는 방식 자체). 그래서 리시츠키의 부조(벽구조, 진열장, 서랍장, 이동식 패널)는 궁극적인 미술품이며, 반면 추상회화는 그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폐기된 미학의 도해에 불과했다.


1927a.

브뤠셀에서 상업미술가로 활동하던 르네 마그리트가 파리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광고 기법을 활용한 그의 미술은 언어와 재현의 모호한 관계를 탐색한다.
르네 마크리트(1989-1967)는 상업미술 전문 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때때로 의뢰받은 책 디자인과 광고 업무를 병행하면서,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다수로 복제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미지의 배반’은 다섯 차례, ‘빛의 제국’은 열 여섯 점의 유화와 일곱 점의 구아슈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베나 항공사의 광고 ‘하늘-새’를 위해 자신의 작품 ‘대가족’을 표절하기도 했다.
순수예술과 상업 예술간의 상호 보완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대중문화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광고에 의해 부추겨진 상품에 대한 욕망은 유일무이한 대상보다는 다수의 복제품 중 하나에 대한 열망으로 대체된다. 그런 욕망은 “복제를 통해 유일무이한 대상’과 동등한 감각을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발터 벤야민). 유일무이함, 그리고 거리두기라는 관념 그 자체(아우라)가 제거되면서, 상품 문화는 미디어 이미지의 유홍은 물론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하는 진풍경을 형성했다.
모든 초현실주의적 입장은 의도적으로 사전 제작과 대량 생산의 가능성을 회피하면서, 대신 대상이 아무리 진부한 일상용품이라 할지라도 놀라움과 계시적인 힘으로 재충전함으로써, 반복될 수 없는 충격의 순간을 얻고자 한 듯하다.
그의 초기 회화 작품들은 여러 차례 복제되면서 서로 내재적인 관계를 구성한다. 1928년 그가 그린 폴 누제의 초상에서 벨기에 시신의 이미지는 중복되고, 작품 ‘피비린내 나는 하늘’에서 피투성이가 된 새의 사체가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네 번 중복되어 배열된다. 실제로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는 애초부터 그의 작품을 지배했던 중복 형식에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런 중복 형식은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언캐니)이나 반복 강박 개념과 연관되어 시도됐던 초현실주의적 중복의 한 변형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언캐니의 느낌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그 무언의 회귀로 정의하면서, 이런 감정에는 죽음 충동의 반복 강박과 관련된 불안감이 수반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설음은 삶의 한 가운데 출몰하는 ‘살아있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조건’에 등장하는 캔버스의 풍경화는 그것의 실제 풍경에 겹쳐진다. 실제 풍경에 겹쳐진 재현된 풍경의 가장자리는 경계가 모호해서, 과거에는 투명하게 현실을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미지의 전능한 지위는 여기서 그저 실제와 닮게 그린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런 재현의 이중의 죽음은 살아있는 현실 속에 출몰해 그 현실의 견고함을 위협하고 실재성을 박탈한다.

초현실주의의 문맥에서 로제 카유아는 살아있는 죽은 자의 섬뜩함에 대한 다른 사례를 제시한 바 있다. 무생물로 위장한 생물을 모방해 죽은 척 하는 사마귀, 끝없이 모방이 이어지는 거울의 방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60년대 허상(시뮬라크룸:원본이 존재한 적이 없는 동일한 복제(플라톤))이라는 용어로 설명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죽은 척 하는’ 죽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허상은 엇비슷한 사물들을 서로 연결하는 중대한 내부 고리가 끊긴 닮음의 경우를 제시한다. 사마귀의 경우에서는 ‘살아 있음’이,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서는 ‘죄의 부재’가 그러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허상인 상태에서는 원본과 복제품, 죽음과 삶을 변별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원본 없는 복제품들의 세계이다.

푸코가 분명하게 허상이라는 관념에 근거해 문예 이론을 전재한 것은 벨기에에 있는 마그리트의 동료들이 마그리트가 그들을 배반했다고 생각한 6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마그리트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던 푸코는 1968년에는 직접 마그리트의 작품을 소개했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을 구체적으로 사례로 삼은 푸코의 분석은
‘실물학습’ 그 자체이다. 푸코는 이런 그림과 이름의 조합을 ‘공통 배경’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ABC책 에서부터 교과서의 설명이나 사전 표제어,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과학적 설명서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게 되는 관례를 지칭한다. 이런 관례의 위력은 우선 실물 학습의 경우 재현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이 종이나 칠판에 침전된 흑연, 혹은 백묵 가루라 할지라도, 화살이나 지시봉 마냥 멀리서 혹은 어디에선가 특정 사물을 ‘지시’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칼리그람’이라는 모더니즘의 전통은 공통의 자리의 진부함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그 진부함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비에 대한 시를 쓰면서 비가 내리는 모양 그대로 그 시를 수직적으로 배치한 의도는 공통의 자리를 구성하는 두 부분을 보다 고차원적인 질서로 통합하여 비라는 단어가 새롭게 페이지에 새겨진 대상으로 사라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푸코에 따르면 이런 투명성은 무용하다. 왜냐하면 시를 읽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이 만든 이미지를 간과하며, 이미지를 읽는 동안에는 그 단어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그람이 가진 이런 문제점으로부터 마그리트의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미지의 배반’에서 발생하는 것 또한 일종의 ‘흐트러진 칼리그람’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물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 또한 직접 손으로 그려 넣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칼리그람적이다. 그러나 이 칼리그람은 흐트러지는데, 그 이유는 동어반복으로 그림-시가 강조하는 것과 실물학습의 진리 내용 모두가 단번에 해체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그런 해체가 가능한 것은 최소한 세가지 의미로 작용하면서 관람자를 혼란에 빠트리고 종국에는 스스로의 기능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는 단어에 있다. 
푸코는 사물과 캡션을 이어주는 흰색 통로로 되돌아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런 간극을 삼켜 버리는 여타의 칼리그람과 달리” 마그리트의 칼리그람은 “스스로가 묘사한 사물에 매달았던 덫을 다시 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사라진 것은 사물 그 자체이다…. 덫은 공중분해 됐다. 다시 말해 이미지와 텍스트는 나름의 무게를 가지고 각자의 위치로 떨어진다. 그것들은 더 이상 공통 배경을 갖지 않는다.” 실재 세계의 모델인 사물이 그 뒤에 놓여 있는 진리-가치를 보증하던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사라졌다면 이제 남는 것은 허상적인 상황, 즉 원본 없는 복제품의 세계이다.

40년대 마그리트나 폴 누제, 마르셀 마리엥, 그리스티안 도트르몽과 같은 벨기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으며 청년 시인으로 활동하던 마르셀 브로타스에게 푸코의 텍스트를 통해서 알게 된 마그리트의 전략은 중요한 요소가 됐다. 1972년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자신의 ‘근대미술관 독수리 부’에서 개최한 ‘점신세에서 현재까지의 독수리’라는 전시에서는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라는 푯말을 부착한 수백 가지의 사물들을 전시했다. 브로타스는 마르셀 뒤샹을 명제와 마그리트의 반 명제 간의 모순을 공식화한 것이 바로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라는 캡션이라고 설명하면서 전시도록의 마주보는 페이지에 뒤샹의 ‘샘’과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을 복제해 넣었고, 독자들에게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일독하라고 권유했다.
이와 같은 ‘모순을 이해하려면 우선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 실행된 실물 학습이 지시하는 바가 예술 작품이 발생한 제도적인 문맥 전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 이유는 변기나 빗, 모자 걸이와 같은 일상용품들이 예술의 지위를 부여 받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문맥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마그리트의 ‘흐트러진 칼리그림’이 어떻게 무수한 화살들로 학습을 좌절시키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브로타스의 작품에서 그 화살들은 예술 작품이 아닌 푯말 그 자체를 지시하거나, 독수리 모형이나 독수리가 그려진 코르크 마개처럼 미적 대상도 아니면서 예술 작품도 아닌 진열물 들을 지시한다. 혹은 그 화살은 ‘허구적’이라고 가정된 전시 전체를 지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뒤샹이 미술관 제도를 관례적인 것으로 노출시키려 했던 반면, 브로타스는 그 제도를 허상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기때문이다.


발제자. 박선화 11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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