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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의 마지막 기회, Dia’s Last Chance
July 14, 2008
by Jerry Saltz

http://www.artnet.com/magazineus/features/saltz/saltz7-14-08.asp





Q. 필립 베르뉴가 죽은목숨이나 마찬가지인 디아를 살려낼 수 있을까?
Q. Does Philippe Vergne have what it takes to keep Dia from 

말썽많던 디아 아트재단Dia Art foundation에 마침내 몇가지 좋은 소식이 생겼는데, 차기 디렉터로 필립 베르뉴Philippe Vergen가 역임하기로 한 것이다. 42세의 베르뉴는 미네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10년 넘게 큐레이터로 역임했으며 현재는 부디렉터이다. 일류 미술이자 미술가인 그는 모든것을 보고 날카로운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명필가로 최고의 쇼를 기획해내는 자이다. 베르뉴는 우연찮게 명성을 날린 외지인이 아니다. 그는 P.S.1과 뉴욕현대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에서도 고용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디아에서 일을 맡는 것이 그의 경력을 위협할 수 있었다.
; Finally, some good news from the vexed Dia Art Foundation: It’s hired Philippe Vergne as its next director. Vergne, 42, has been curator for over ten years at the Walker Art Center in Minneapolis and is currently deputy director there. A champion of art and artists, he sees everything, has a keen mind, a good eye, writes well and has curated excellent shows. Vergne isn’t just some out-of-towner lucky to make it in the big time; he’s been on the hiring radar at both P.S. 1 and the Museum of Modern Art, too. Taking the Dia job is a real risk for his career.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유머를 발휘했다. 내가 베르뉴의 임명이 공포된 전시 개막식 저녁에서 그를 보고 축하하면서 많은 모금활동을 준비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마치 지갑을 훔치는 것처럼 손을 내 자켓안쪽으로 쑥 내밀었다. 베르뉴는 워커아트센터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었다. 디아에서 그는 수백만달러수익을 내면서 수탁자들을 길들여야 할 것이다.  디아의 딜레마는, 그 곳에 들어가는 것이 단순하고 멍청해 보이지만 나오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결국 그 곳 이사회위원들의 열망으로 -레너드 리지오Leonard Riggio와 디렉터 마이클 고반Michael Goven 그리고 큐레이터 린네 쿠Lynne Cooke가 주도했던- 뉴욕에 바깥쪽에 디아의 대규모 상설전이 열릴 수 있었다. 2003년, 그들은 비콘에 그들의 꿈의 궁전를 열었다. 292.000 평방미터 규모로 새롭게 개조된 전 나비스코 공장Nabisco factory은 멋진 기념비나 미니멀리즘의 무덤, 둘 중에 하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 거대한 건물이 오픈한 지 8개월이 지난 후에  디아가 웨스트 22번가의 건물을 영원히 문닫았다는 것이다. 리지오는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고 떠나버렸다. 고반도 그곳을 떠나 지금은 LA카운티예술박물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의 디렉터이다. 쿠는 여전히  디아에 있지만 최근엔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박물관Reina Sofia 의 유명한 큐레이터이다. 
;But he has a sense of humor about it. When I saw Vergne at an opening the night his appointment was announced, I congratulated him and said I hoped he was prepared to do a lot of fund-raising, and he stuck his hand into my jacket as if to swipe my wallet. Vergne helped raise money for the Walker. At Dia, he’s going to have to raise millions of dollars and tame pigheaded trustees. The dilemma Dia is in will be as hard to get out of as it was seemingly simple and stupid to get into. It can be boiled down to the yearning of the board of trustees -- led at the time by Leonard Riggio, director Michael Govan and curator Lynne Cooke -- to open a huge space outside New York to exhibit Dia’s magnificent permanent collection. In 2003, they opened their dream palace in Beacon. Whether the beautifully renovated 292,000-square-foot former Nabisco factory is a monument or a mausoleum for Minimalism, those who created it deserve credit. What’s unforgivable is that eight months after opening this massive edifice, Dia closed its West 22nd Street home, for good. Rather than remedying the situation, Riggio left. Govan moved on and is now director of 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Cooke is still at Dia but was recently named a curator at the Reina Sofía in Madrid.

디아가 망하기를 바라는 것은 쉬울것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항상 미술세계의 중심에서 특별한 공간을 마련해오고 있다. 첫 번째 전시장은 창고, 박물관, 참선정신의 집합소였던 첼시였다. 예술계에서는 매리네이드에 절여진 공간이었다.
; It would be easy to wish a pox on Dia’s house. But this institution has always held a special place in the art world’s heart. It was the first exhibition site in Chelsea, its spaces a combination of warehouse, museum and Zen retreat -- a place to marinate in art.

디아는 또한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라이팅필드Lightning Field와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의 나선 방파제Spiral Jetty와 같은 대지예술을 총괄하고 있다. 하지만 맨하튼의 상설전시공간 없이는 유령과도 같은  디아 일 뿐이다. 베르뉴는  디아를 예전처럼 만들 수 있는 비전과 능력이 가지고 있다. 이웃주민이 있거나 자치구나 다량으로 다목적이 되는 하는 한은 문제되지 않는다. 어쨌든 만약 베르뉴가 4-5년 안으로 이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아마 두번다시 기회는 없을 것이다.
; Dia also oversees earthworks like Walter De Maria’s Lightning Field and Robert Smithson’s Spiral Jetty. But without a permanent exhibition space in Manhattan, Dia is a ghost of its former self. Vergne has the vision and skill to put Dia back together again. It doesn’t matter what neighborhood it’s in, or even what borough, so long as it’s large and versatile. If Vergne can’t get this to happen within four or five years, however, it’ll probably never happen at all.


Philippe Vergne in 2006, with fellow Whitney Biennial curator Chrissie Iles


The Riggio Galleries at Dia:Beacon, 2003
Photo by Richard Barnes



Dia Beacon, with Michael Heizer’s North, East, South, West (detail)


The former Dia Center for the Arts building at 548 W. 22nd St., with trees planted for Joseph Beuys’ project 7000 Oaks



Former Dia director Michael Govan with Los Angeles collector Eli Broad at the opening of the Broad Art Museum at 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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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괴물, SACRED MONSTER 

May 27, 2009 
by Jerry Saltz

http://www.artnet.com/magazineus/features/saltz/francis-bacon5-27-09.asp



Q. 평론가가 Met의 거장 회고전의 있기 전날의 질문들.
프란시스베이컨은 정말 20세기 최고의 화가인가, 아니면 단순히 매혹적인 쓰레기인가?
Q. On the eve of the Met’s giant retrospective, a critic asks: 
Was Francis Bacon really the greatest painter of the twentieth century, or just a fascinating mess?


Francis 베이컨의 백 주년 기념 회고전이 메트로폴리탄(Met)에서 이 주간 열리고 있다. 그는 아일랜드계 영국 화가로 영국의 아킬레스로 불리는: 혼란에서 올라온 잔혹한 영웅인 무법의 신-이다. 거기다 그의 그림이나 무질서한 삶은 호머의 Iliad의 첫 대사인 “분노”를 생각나게 한다.
;
Francis Bacon, whose centenary is being marked by a Metropolitan Museum of Art retrospective opening this week, is the Irish-born English artist whom the English consider their Achilles: a truculent hero rising from the turbulence, an outlaw god. Indeed, the first word of Homer’s Iliad comes to mind when thinking about his paintings and tumultuous life: "Rage." 

그를 아는 몇몇 화가 친구들은 그를 “악마”, “매춘부”, “세계최고 술꾼 중 하나”, “불쾌한 괴물”, “신성한 괴물”, “최저부자를 지난밤에 몰락한 술 취한 소돔인 몸부림 그리고 소호의 도박꾼 소굴”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베이컨은 고약했다. 그는 스스로를 “연삭기”, “지독하게 역겹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세계최고 화가", "터너 이후 최고"라고 추앙받았다. 로버트 휴즈는 그를 "남색, 가학성 변태, 공포 그리고 죽음의 구토가 20세기 말 영국,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무자비한 무법자로 부상했다."고 썼다.
; Those who knew the artist -- some of them his friends -- described him variously as "devil," "whore," "one of the world’s leading alcoholics," "bilious ogre," "sacred monster" and "a drunken, faded sodomite swaying nocturnally through the lowest dives and gambling dens of Soho." Bacon was no kinder: He called himself a "grinding machine" and "rotten to the core." This hasn’t stopped admirers and critics alike from proclaiming him "the greatest painter in the world," "the best. . . since Turner." Never one to spare hyperbole, Robert Hughes wrote, "This painter of buggery, sadism, dread, and death-vomit has emerged as the toughest, the most implacable, lyric artist in late-20th-century England, perhaps in all the world."

내게 그는 -아마도 작품 주제인 고기를 이름과 공유하는 유일한- 언제나 풍자만화가에 가까웠다. 그는 궁극적으로 불안이 없이 과장된 삽화가이다. 그의 이른 성공은 부정할 수 없으며 Met에서의 66점 작품연구와 이전엔 본적 없는 원자료의 내장물 -정체불명의 살덩어리가 뒤엉켜 있는 캔버스와 내세의 태아, 이드의 창조물이 황무지와 음침한 감옥의 거실에 취하고 있다- 은 4,50년대의 구상회화의 중요한 시점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이 작업의 장점은 열정적 괴물 안으로 이상한 힘으로 변형된 인간의 영혼이 깃든 유황의 어둠 속에 당신을 덮는 것이다.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존재와 타협하는 노력의 작품들은 관람객이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보는 듯 작품을 응시하게 만든다. 당신은 Met에서 경탄에 차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For me, Bacon -- who may be the only artist sharing a name with one of his main subjects, meat -- has always been more of a cartoonist. He’s an illustrator of exaggerated, ultimately empty angst. His early accomplishments are undeniable, and the Met’s survey of 66 paintings and a cache of never-before-seen source material is peppered with high points, especially the signature paintings of the ‘40s and ‘50s: Canvases with twisted masses of faceless flesh and otherworldly homunculi, creatures of the id posed in living-room wastelands and Stygian prisons. The best of this work shrouds you in a sulfuric gloom where strange powers transform human souls into delirious monsters. These paintings make audiences stare as if they were looking at animals in a zoo, trying to come to terms with these merciless inhuman presences. You’ll see this at the Met: people blankly gaping in wonder.


베이컨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가깝게 그를 겨룬 젊은 영국작가들을 보자. 제이크와 다이노스 채프먼 형제가 유리상자 안에 늘어 논 고문하는 모형, 제니 샤빌의 일그러진 가르강튀아스는 베이컨의 골렘을 꼭 빼다 박은 모습이다. 트레이시 에민의 피비린내 나는 작업. 사라 루카스는 기이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데미안 허스트는 베이컨의 진열용 유리케이스뿐 아니라 그 안에 고기와 주검을 넣었다. 달리와 뭉크처럼 베이컨은 우리가 혈기에 넘칠 때 사랑한 작가이다. 우리는 긴급, 불안, 기묘함, 혈액, 성 그리고 육체로 흥분하면서 "이게 나야" "이게 내가 느끼는 거야" 라고 생각한다.
; To understand Bacon’s impact, look no further than the young Brits emulating him. Jake and Dinos Chapman place tortured figures in glass cases; Jenny Saville’s contorted Gargantuas are direct descendants of Bacon’s golems; Tracey Emin works with blood and guts; Sarah Lucas gives us spooks and deformities. Damien Hirst not only makes vitrines straight out of Bacon -- he puts meat and carcasses in them. Like Dalí and Munch, Bacon is an artist we love when young. Tantalized by the urgency, angst, weirdness, blood, sex and bodies, we think, That’s me! That’s how I feel!

당신이 베이컨에게 빠져 살았다면 그와 같은 느낌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의 성생활은 감정결핍과 퇴폐의 연구이다. 그의 청소년기를 보면 그는 종종 "우리는 고기"라고 말했었다. 어릴 때 천식(1992년 그의 사망원인이 됐던) 때문에 모르핀을 한 베이컨은 그의 관능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았다. 자신의 성향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동성애를 "결함"과 "호모"라고 했다. 놀랄 것도 없다. 그가 16살 때 그의 아버지는 엄마의 속옷을 입는 베이컨을 잡았다. -예술가들은 조소적으로 아버지를 “실패한 조마사”로 부른다.- ("망사스타킹은 예술가의 옷장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고 한 전기 작가는 적었다.) 아버지는 벌로 베이컨을 마구간 지기(베이컨이 나중에 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를 시켜 말채찍으로 때렸다. 아버지는 친한 친구에게 "바르게 키워 달라"며 베를린으로 데려가라고 부탁한다. 친구는 승낙하면서 베이컨에서 잠자리를 제공했지만 그 후 W."H 오든이 "남색의 몽상"의 도시라고 부르는 곳에 그를 버렸다.
; You might have reconsidered feeling like Bacon if you’d lived in his skin. His love life is a study in emotional privation and degradation. "We are meat," he often remarked -- understandable, given his adolescence. Bacon, who was given morphine as a child for his asthma (the ailment that contributed to his death in 1992), always knew which way his erotic compass pointed, which is not to say that he approved of its inclination: He called his homosexuality "a defect" and a "limp." And no wonder. When Bacon was 16, his father -- the artist derisively called him "a failed horse-trainer" -- caught the boy wearing his mother’s underwear. ("Fishnet stockings were an essential part of the artist’s wardrobe for most of his life," one biographer notes.) As punishment, the father had him horsewhipped by the stable hands, whom, Bacon later claimed, he then had affairs with. Bacon Sr. asked a family friend to "straighten the boy out" by taking him to Berlin. The man complied -- and subsequently bedded the younger Bacon, then abandoned him in the city that W.?H. Auden called "a bugger’s daydream."

1952년, 베이컨의 사랑에 관한 포식자-먹이 관념과 그의 "고통 받고 싶은 욕망”이 새로운 정점에 치달을 때까지 베이컨은 사회적 유형을 따르면서도 끊임없이 남창과 관계를 가졌다. 43살에 그는 런던의 소호에서 전 영국비행사 피터 레이시를 만났다. 그들은 게이 남성들의 자유를 위한 피난처인 Tangier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베이컨은 “나는 그때까지 어느 누구와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시작부터가 비극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지나친 관심을 받는 건 끔찍한 재앙이다. 나는 내 최대의 적을 결코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이컨은 Peter와 같이 있거나 없거나 살 수 없었다. 그들은 S&M을 폭넓게 실험했다. 최후는 정말 비참했다. 1962년 5월, Tate에서 첫 베이컨의 회고전이 있기 전날, 레이시가 술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 Endless liaisons with rent boys and society types followed, until Bacon’s predator-prey notion of love and his "desire to suffer" reached new heights, in 1952. At the age of 43, he met a former RAF pilot, Peter Lacy, in London’s Soho. They spent a lot of time in Tangier, a refuge for gay men looking for freedom. "I’d never really fallen in love with anyone until then," Bacon said. "Of course, it was the most total disaster from the start." Bacon couldn’t live with or without him: "Being in love in that extreme way," he said, "being totally obsessed by someone, is like having some dreadful disease. I wouldn’t wish it on my worst enemy." They experimented with the far reaches of S&M. The end was horrid, too. On the day before his first Tate retrospective opened, in May 1962, Bacon learned Lacy had been found dead, almost surely from drinking.

그로부터 2년이 못 되서 베이컨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강도짓을 하러 베이컨의 작업실에 침입한 한 남자, 다이어를 만났다. 그 뒤 이들의 7년의 관계는 똑같이 반복되는 우여곡절 속에서 파국의 역사를 맞는다. 1971년 10월25일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베이컨의 회고전이 열리기 전 전날 다이어는 과다복용으로 파리의 호텔방에서 죽었다. 61살의 베이컨은 그 후 다시 망연자실한다. 그가 사랑의 “파멸”에 대해 말하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 Less than two years later, Bacon met George Dyer --reportedly when Dyer broke into his studio to rob him. For the next seven years the relationship rocketed up and down, then history repeated itself. On Oct. 25, 1971, the day before Bacon’s retrospective at the Grand Palais in Paris opened, Dyer overdosed and died in their Paris hotel room. Bacon, then 61, was again devastated. No wonder he talked about "the destruction" of love.

 

Q. 그의 작업에 피카소가 어떤 영향을 미쳤나?
Q. How Picasso influenced his work.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이런 전례 없이 영국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한 그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문학 및 일화에 통용강조와 견 주줄 수 있는 베이컨이 느닫없이 나타났다.(빅토리아 시대의 젊은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와츠는 ”영국의 미켈란젤로”로 여겼다.) 그의 미완성적 표면, 진한 색 그리고 비서사는 그를 영국 미술역사의 변종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는 미술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오로지 스스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미술역사를 탐독했고 당신은 입체파, 낭만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카밍수틴, 고야의 말기회화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초상 등에서 그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 All this manifested itself in his art, which rattled the cage of English painting like nothing before it. Compared with the prevailing emphasis on the literary and the anecdotal (the sappy Victorian painter George Frederic Watts is considered "England’s Michelangelo"), Bacon came out of nowhere. His unfinished surfaces, saturated color, and nonstories make him a near anomaly in the history of his country’s painting. He never attended art school -- he was entirely self-taught -- but he devoured art history, and you can easily spot his influences: Cubism, Romanticism, Expressionism, Surrealism, Chaim Soutine, Goya’s late paintings and the figures of Michelangelo.

1927년 조국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이듬해 베이컨은 100점 이상의 피카소 그림을 둘러봤던 파리로 갔다. 피카소의 전시는 그의 뇌리 새겨졌고 “느낌에 대한 핵심”에 대해 동시대에 누구보다 피카소와 가깝다는 생각을 남겼다. 피카소는 “내가 그리는 동기”가 되었고 “아버지”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강렬한 전시는 입체주의 작품이 아닌 고전회화로 구성되었다. 이로써 베이컨과 모더니즘의 만남은 사실 모던하지 않았다. 또 다른 내부자-외부자 유형의 발튀스처럼 베이컨은 추상화나 그의 시대의 시각적 언어로 그림그리지 않은 미술가다.
; In 1927, a year after he was banished from home, Bacon went to Paris, where he saw a survey of over 100 Picasso drawings. The show tattooed itself on his brain and left him thinking that Picasso had come closer than anyone in the century to "the core of what feeling is about." He became "the reason I paint," Bacon said, "the father figure." Tellingly, the show consisted mainly of Picasso’s classical drawings; no Cubist works were on hand. Thus Bacon’s rendezvous with modernism was fairly un-modern. Like Balthus, another insider-outsider type, he’s an artist who never went abstract or painted in the visual idiom of his time.

1929년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직접 프랑스 현대디자인을 기본으로 가구와 러그 창설한다. 그는 시험적으로 몇 개의 회화를 그의 집에 전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24살로 영국 웨스트엔드에 있는 메이올 갤러리에서 첫 번째 전시를 하는 1933년 4월까지였다. 이내 주목을 받아 소문이 돌았다. 한 달 만에 그의 그림은 예술사학자 허버트 리드의 책 ART NOW에서 최근 피카소의 상대로서 재생산됐다.
;In 1929, back in London, he set himself up creating furniture and rugs based on modern French design. He tentatively showed a few paintings in his own home, but it wasn’t until April 1933, when he was 24, that Bacon exhibited his first painting, at the Mayor Gallery in London’s West End. Interest was immediate and word spread. Within months, a painting of his was reproduced opposite a recent Picasso in art historian Herbert Read’s book Art Now.

베이컨이 “내가 2주 동안 술 먹고 나쁜 감정으로”그렸다고 한 <십자가에 달린, 1933년>은 Met 전시장 안을 감동시켰다. 이것은 그림을 제외한 어떤 것에 감정적 전념이 없이, 귀신들린 작은 것이다. -이질적 가상 심령체는 인광을 발한 날개와 어두운 단색으로 분리된 바닥에 선인지 분간이 안 되는 면으로 팔을 펼치고 서있는 형태이다. 이 소름끼치는 작업은 거의 대부분 무명의 카톨릭교 오스트레일리아 화가 (베이컨의 지도자이자 애인인)로이 드 메스트르에게 영향을 받았고 수틴과 고대 재단장식화의 덕이 컸다. 그것은 또 다른 베이컨의 뛰어난 서술적 묘사 “달팽이를 떠난 인간 존재의 흔적”이라는 그림의 서사문의 전형이었다. -<십자가에 달린>은 들뢰즈가 ”우주방출”이라고 한 것을 발산한다.
;That work, Crucifixion (1933), which vibrates off the walls at the Met, Bacon claimed to have finished "in about a fortnight when I was in a bad mood of drinking." It’s a haunted little thing, with no sense of devotion to anything except painting -- an ectoplasmic alien shape with phosphorescent wings and outstretched arms standing in a murky monochromatic ground demarcated by lines forming invisible planes. The macabre work was influenced by the almost unknown Catholic Australian painter Roy de Maistre (Bacon’s mentor and lover) and owes much to Soutine and archaic altarpiece painting. Yet it also epitomized Bacon’s astonishing description of what a painting should be: "a snail leaving a trail of the human presence." Crucifixion radiates what Deleuze called "cosmic dissipation."

그러나 베이컨이 폭풍처럼 영국예술세계에 등장한 만큼, 그의 흔적은 흩어 없어졌다. 그는 이듬해 작은 관심과 혹평으로 작품전시를 했다. 그는 술에 취해 전시된 모든 그림을 때려 부셨다. 30대 후반에 그는 그리는 것을 그만둔다. 그는 “미련한 복수심으로 자신을 버리고, 술집에서 술집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일련의 사생활 만들기 -그리고 완전 불법적인- 도박장”이라고 그의 전기작가 마이클 페피에트는 말한다.
;But just as it appeared that he would take the English art world by storm, Bacon’s trail dissipated. He exhibited works the following year, to little attention and bad reviews. Stung, he destroyed every painting from the show. By the late ‘30s, he had quit painting. He "abandoned himself with a vengeance to drifting, from bar to bar, from person to person. . . setting up a series of private -- and totally illegal -- gambling clubs," says his biographer Michael Peppiatt.

그 후 “세계의 밤” 2차 세계대전이 찾아왔다. 동시구제와 상상하지 못할 어둠의 달 1945년 4월은 무솔리니의 교수형, 히틀러의 자살, 루즈벨트는 죽음과 부헨발트와 베르겐 벨젠 수용소의 악몽이 밝혀졌다. 그리고 베이컨은 35살에 여전히 몸서리치게 만드는 그림을 전시했다. <십자가에 달린>을 기초로 한 <형상을 위한 3가지 연구>는 하피 같은 도깨비를 변형시킨 엄청난 3부작이다. 그것은 실제공간의 암시였지만 이런 광란하는 지하세계 망령은 주로 동물본능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삶과 죽음을 향한 비탄, 그의 개인 쇼크성 장애를 위한 앙갚음의 그림은 악에 찬 환영의 힘으로 발산한다. 평론가들은 충격에 빠져 두려워했다. : 존 러셀은 <Three Studies>를 보고 ”날카롭게 닫힌 마음이 너무 끔찍해 누그러지지 않는 잔상”이라고 썼다. “우리는 그들에 무명했고 우리가 그들에 대해 느낀 것에 무명했다. (몇 년 후, 1953년 Tate는 이 그림을 기증 받는다.)
;Then came the "night of the world": the Second World War. In April 1945 -- a month of simultaneous relief and unimagined horror -- Mussolini was hanged upside-down, Hitler committed suicide, Roosevelt died, and the nightmares at Buchenwald and Bergen-Belsen were revealed. And Bacon, then 35, exhibited a painting that still induces shudders.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is a triptych depicting howling, deformed, harpy-like goblins. There are intimations of real space, but these raving underworld visitants mostly exist in a universe of animal instinct. A lamentation for the dead and living, a retaliation for his personal traumas, the painting exudes venomous visionary force. Reviewers were shocked and awed: "Images so unrelievedly awful that the mind snaps shut," wrote John Russell after first seeing Three Studies. "We had no name for them, no name for what we felt about them." (Years later, in 1953, the Tate had to be persuaded to accept the painting as a gift.)

베이컨은 새로운 문으로 부상했고, 그의 엄청난 명성은 15년 동안 이어진다. 1946년부터 (1948년 280유로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팔린) 그림은 한층 더 커진 돌파구였다. 이 굳어진 명작에는 웃는 건지 얼굴을 찌푸린 누군가의 상체만 보이는 사람이 펼쳐진 암소시체와 증인석처럼 뵈는 것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우산하나가 그의 머리위에 있다. 여기에 베이컨은 많은 주제들, 기법과 그의 삶에 안정을 위해 전념한 공식적 관심 - 사람, 동물 그리고 고깃덩어리를 발견했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오직 어떤 악한 세력의 마법이다. 무수히 이어서 일어나는 형상들로부터 베이컨은 그것을 캔버스 한가운데의 담 안으로 제안한다. 이 공간은 환각, 위협, 우울, 여울을 느끼게 한다. 모든 것의 으뜸인 채색은 육체적이고 본능적이다. –엉김, 얼룩, 닦아내기, 헝겊과 손과 붓 혹은 튜브에서 바로 바르기. 강렬한 라일락의 핑크와 마젠타는 효과를 다양하게 한다. 몇 년 안 돼 베이컨은 길들여지지 않은 오렌지, 살구, 빨강을 칠한다. 그의 일생에 최악으로까지 있는 몇몇 색은 너무 격렬하고 현대적이었다.
; Bacon had broached a new door, and to his enormous credit, he kept doing that for fifteen years. Painting, from 1946 (bought by the Museum of Modern Art in 1948 for £280), was an even bigger breakthrough. In this coagulated masterpiece, a grinning or grimacing man -- only the bottom of whose face is seen -- is jammed between splayed cow carcasses and what looks like a witness stand. An umbrella is over his head. Here, Bacon hits on many of the themes, techniques and formal concerns that occupied him for the rest of his life: Man, animal and meat merge. There is no narrative, just a conjuration of some malevolent force. As with countless subsequent figures, Bacon isolates this one within an enclosure in the middle of the canvas. The space feels hallucinatory, menacing, sullen, shallow. Best of all, the paint is physical and visceral -- clotted, smeared, wiped off, applied with rags and fingers and brushes or straight from the tubes. Intense lilacs, pinks and magentas multiply the effect. Within a few years, Bacon was applying great unbroken fields of orange, apricot and red. Some of this color is so intense and modern it keeps even the worst of his oeuvre alive.



Q3. 그의 그림은 왜 50세에 혁명적이었나?
Q. Why his paintings were revolutionary during the fifties.
 

1957년, 피터 레이시와 일촉즉발의 개인전 구축의 압박으로 격정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의 고유 단어인 베이컨은 “정신적으나 육체적으로 나쁜 방향”에 있었고, 그는 동성애자 단속을 피하기 위해 탕에르로 떠날 준비를 했다. 이것의 실제적 뜻은 예측 가능한 것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시도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반 고흐가 한층 농도 짙은 표면과 야한 불빛으로 실험한 <타라스콩 길 위의 화가>을 기반으로 “급속히” 연작을 그렸다. 색은 화려하고 놋쇠색이고, 공간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주제는 바깥에 있다. Met에서 반 고흐의 그림 -stunner절세미인- 에서 당신은 기교를 포기한 그를 볼 수 있다. 그의 환상적 효과의 표현을 벗어났지만 그 연작이 처음 드러나자 그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 몇몇은 더 이상 후원하지 않았다. 러셀은 그것을 “소란한”, “광적인”, “어쩌면 가장 약한”것이라 했고, 로렌스 알로웨이는“집시 바이올린으로부터의 반란”과 같은 연작을 추방시켜버렸다.
; In 1957, while going through one of his tumults with Peter Lacy and with the pressure of an imminent solo show building, Bacon, who in his own words was in a "bad way mentally and physically" and was trying to avoid a crackdown on homosexuality in Tangier, tried to make a move in his work. This, for all practical purposes, was the last time he’d attempt to break from predictability. He painted a series "at high speed," based on Van Gogh’s The Painter on the Road to Tarascon, experimenting with more viscous surfaces and strident light. The color is flamboyant and brassy; space is flatter, less reliant on perspective; subjects are outdoors. In the one Van Gogh painting at the Met -- a stunner -- you can see him giving up his tricks, breaking out of his style to fantastic effect. But when the series first appeared, some of his most ardent supporters turned away. Russell called them "clamorous," "hectic," "perhaps the weakest" he ever did; Lawrence Alloway dismissed the series as "an outburst from a gypsy violin."

나는 반 고흐 연작이 베이컨의 시작이자 마지막을 점찍는다고 본다. 이것은 또 다른 35년 동안 그가 그림을 그렸던 진실이고, 6-70년대 눈에 띄도록 <혈액 형상의 3연작>을 만든 것의 진실이다. 사실 그것들 없이 베이컨 유명해 졌다는 것은 의심된다. 그것들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장면에 근거한다. 1976년에 견본은 2008년에 경매 최고가인 $86.3million(1천3백억 원)에 팔렸다.
; I believe the Van Gogh series marks the beginning of the end for Bacon. It’s true that he painted for another 35 years, and that in the ‘60s and ‘70s he produced arresting triptychs of bloody figures -- in fact, it’s doubtful that Bacon would be nearly as famous without them. Bernardo Bertolucci based scenes in Last Tango in Paris on them. A so-so 1976 example sold in 2008 for $86.3 million, setting an auction record.

그러나 베이컨과 같은 메트로폴리탄의 회고전은 그의 주제가 전략이 될 때까지 작업진행을 충분하게 한다. 계산된 그림의 반복과 표면적 발전의 결여는 싫증난다. 수많은 초상화 <머리>와 끔찍한 <물의 분출>을 제외하고 -그가 죽기 4년 전인 1988년에는 거대한 푸른 광선이 내부를 가로질러 칠해진 것이 특징- 베이컨의 방식은 1965년의 정체기에 시작된다.
; But the Metropolitan’s retrospective, like most Bacon shows, makes it clear that he kept working his theme until it became a gimmick. The calculated pictorial repetitiousness and lack of formal development wear thin. Except for a number of fabulous portrait heads and the astounding Jet of Water -- made in 1988, just four years before his death, featuring an enormous streak of blue paint across an interior -- Bacon’s formula had grown stagnant by 1965.

일단 당신이 이점을 인식하고 있으면 그것은 당신이 보는 전부이다. 그는 그의 그림의 끝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당신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시간에 캔버스 안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어안렌즈 혹은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굽이치는 면을 보는 것처럼 그의 그림의 밑바닥은 항상 또 같은 것이다. –그는 유리액자 뒤에 있는 그들을 더 고집하는 그의 그림을 중화시켰다. (그는 “나는 유리 속 렘브란트까지 좋아한다.”고 말했다.)
; Once you’re aware of this point, it becomes all you see. He has no idea what to do with the edges of his paintings. Everything that happens in Bacon’s work happens in the middle of the canvas; at times you don’t have to look anywhere else. The bottoms of his paintings are always the same, too—a receding plane curves up at the sides, like you’re looking through a fish-eye lens or from inside someone’s eye sockets. He neutralized his paintings further by insisting they be framed behind glass. ("I even like Rembrandts under glass," he once said.)

지난 가을 내가 Tate에서 베이컨의 회고전을 봤을 때 마크 로드코의 전시도 함께 진행됐다. 로드코와 베이컨은 거의 나이가 같다. ;둘은 파리를 떠나 작업했고 그들의 주제와 같은 “고통”을 취했다. 그러나 로드코의 빨갛게 달아오른 텅 빈 불교 TV세트와 비교하면 베이컨의 작품은 메너리즘에 빠진, 보수적,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것처럼 보인다. 베이컨은 ”아주 멀리 가야 충분히 멀리 갈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림의 모든 관행을 포기한 로드코는 더 앞서 갔다. 지난겨울 내가 프라도에서 베이컨의 전시를 다시 봤을 때— 발자크의 걸작이 전시장에 가득 찼다. -베이컨의 작품은 죽어 보이고 진부해 보였다. 그의 후원자는 그의 아틀리에의 혼란에 대해 자주 문의했다. (세실 비턴은 “버려진 그림”, “종이 조각”, “신문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쓰레기.”라고 기록했다.) 그의 후반 작업이라면 일부 혼란스러웠다.
; Last fall, when I saw this Bacon retrospective at the Tate, it ran concurrently with a Mark Rothko show. Rothko and Bacon were virtually the same age; both worked away from Paris and took "anguish" as their subject. Yet compared with Rothko’s glowing blank Buddhist television sets, Bacon’s work seems mannered, conservative, simplistic. Bacon said that "only by going too far can you go far enough," yet in giving up all the conventions of painting, Rothko went further. When I saw the Bacon show again at the Prado this past winter -- near the galleries full of Velázquez masterpieces -- Bacon’s work seemed dead and canned. His supporters often refer to the rousing chaos of his studio (Cecil Beaton noted its "discarded paintings, rags, newspapers, and every sort of rubbish"). If only his late work had some of that anarchy.



Q. 특별히 그에게 통렬한 것은 무엇인가? 

Q. What’s especially poignant about him.

베이컨에게 특히 통렬한 것은 그가 자신소유의 감옥을 지은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1963년 초반에 그는 “나의 완고함”을 언급했다. 그는 자신의 표현인 “장애”그리고 “장치”처럼 화가 특유의 병적 집착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1970년 다이어가 거짓으로 마리화나를 소지한 베이컨을 고발하면서 희곡은 희비극으로 전환했다. 급습한 경찰은 체포하고, 공공연히 모욕을 주고, 재판과 석방의 절차를 따랐다. 그때까지의 베이컨과 그의 작품은 그들 스스로 모방 되고 있었다. 작품 속 밝은 백색은 생생히 살아있었지만 다른 모든 것들은 단조로웠다. 당신은 Met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는 그의 시대의 예술로부터 스스로 감금시켰다. “나는 여전히 나의 우리에 갇혀있다.”고 그는 말했다. 베이컨은 추상적 그림을 싫어했고 그것을 “너무 약해서 전달할 수 없는 아무것, 그리고 가방가르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 What’s especially poignant about Bacon is that he knew he’d built his own prison. As early as 1963, he referred to "my rigidness." He talked about the "drawback" of his style and how he used painterly tics as a "device." In 1970, drama turned to tragicomedy when Dyer falsely accused Bacon of marijuana possession. A police raid was followed by arrest, public humiliation, and trial and acquittal. By then Bacon and his work were becoming parodies of themselves. You can see this at the Met; the bright chalky color in his work is vibrantly alive, but everything else is flat. And he seems to have recognized that. He’d sealed himself off from the art of his time. "I stay here in my cage," he said. Bacon disliked abstract art, saying it was "too weak to convey anything, and had "nothing to do with the avant-garde."

1985년 베이컨이 아주 더러운 작업실에서 인터뷰하는BBC영상을 보거나 10년 동안 반복 되어온(그는 “무가치적 낙관론자”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흔해빠진 생각을 분출하는 그를 들어보면 그의 자체평가 하나로 적당해 보인다. ;‘나는 당신이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거짓된 사람이다.” 그의 긴 경력에서 한 가지 더 보면 -특히 25년 전– 베이컨은 내면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술가가 아닌 충분한 근원에 이르지 못한 예술가로서 당신이 느끼게 한다. 베이컨은 “스스로 사실적 격렬함을 말하기”를 원했고 한동안 그는 성공했다. 하지만 말년에 그는 현대 작가보다는 낭만주의 화파의 마지막같이 보였다. 그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나는 사랑하기 위해 그렸다”고 애처롭게 말했다.
; When you watch the 1985 BBC film of Bacon being interviewed in that grubby studio and hear him spout bromides he’d repeated for decades (he was "an optimist about nothing," he said again and again), one of his self-assessments seems apt: "I am the most artificial person you’ll ever meet." The more one looks at his long career -- especially the last 25 years of it -- the more Bacon strikes you not as an artist unafraid of the darkest within himself but as an artist who didn’t go to that source enough. Bacon wanted to "remake the violence of reality itself," and for a time he succeeded. But in the end, he seems less a modern painter than the last of a breed of Romantics -- one who, in his final interview, plaintively stated, "I painted to be loved."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 100주년 회고전, 5.20~8.1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Francis Bacon: A Centenary Retrospective," May 20-Aug. 16, 2009,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000 Fifth Avenue, New York, N.Y. 10028



The first painting in "Francis Bacon: A Centenary Retrospective"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Francis Bacon’s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ca. 1944, Tate


Francis Bacon’s Crucifixion, 1933, the earliest painting in "Francis Bacon: A Centenary Retrospective," was illustrated in Sir Herbert Read’s 1933 survey, Art Now, cementing Bacon’s early success


"Francis Bacon: A Centenary Retrospective," installation view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with Bacon’s Triptych Inspired by T.S. Eliot’s "Sweeny Agonistes," 1967


Francis Bacon
Painting
1946
Museum of Modern Art


Francis Bacon
Head VI
1949
Arts Council Collection, Southbank Centre, London



Francis Bacon
Study after Velazquez
1950
Steven and Alexandra Cohen Collection



Francis Bacon
Study of a Dog
1952
Tate



Francis Bacon
Study for a Portrait
1953
Hamburger Kunsthalle


Francis Bacon
Paralytic Child Walking on All Fours (from Muybridge)
1961
Gemeentemuseum Den Haag, The Hague


Francis Bacon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1962
Solomon R. Guggenheim Museum


Francis Bacon
Portrait of Isabel Rawsthorne Standing in a Street in Soho
1967
Nationalgalerie, Staatliche Museen zu Berlin


Francis Bacon
Two Studies for a Portrait of George Dyer
1968
Sara Hildén Foundation


Francis Bacon
Portrait of George Dyer Riding a Bicycle
1966
Fondation Beyeler, Basel


John Deakin’s photograph of George Dyer in the Reece Mews Studio, ca. 1964, Dublin City Gallery the Hugh Lane


Francis Bacon
Triptych - In Memory of George Dyer
1971
Fondation Beyeler, Basel


Francis Bacon
Blood on Pavement
1988
private collection


Francis Bacon
A Piece of Wasteland
1982
Private collection, courtesy of Ivor Braka Ltd.


Francis Bacon
Figure in Movement
1985
private collection


Francis Bacon
Jet of Water
1988
Collection of Mr. and Mrs. J. Tomilson Hill


Francis Bacon
Triptych
1991
Museum of Modern Art
 
 


*BBC인터뷰 영상 http://channel.tate.org.uk/media/34788293001


*러시아의 석유 재벌 로만 압라모비치는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은 여자 친구 다리아 주코바의 권유로 이 그림을 샀다. 이 작품은 아일랜드 작가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이 1971년 애인이 자살한 다음 몇 년간 겪었던 끔찍한 악몽을 그린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코카서스 산 꼭대기의 바위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았다. 이 작품은 최근 압라모비치가 모스크바에 개관한 CCC Gallery에서 2010년 전시될 예정이다. 트립틱(Triptych)이란 세 폭 짜리 그림을 말한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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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ince1900
카테고리 예술/건축 > 예술사
지은이 Foster, Hal (Thames&Hudson,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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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a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다. 빈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표현적인 미술이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등장한다. 

20세기 초 억압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의 해방적 표현을 통해 지옥을 휘저어 놓은 듯한 클림트, 에곤실레, 오스카 코코슈카는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와 연결된다. 동시대를 살아간 빈 출신의 이 네 인물 사이의 연결 고리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발전시킨 ‘꿈-작업’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 획기적인 연구에 따르면 꿈은 ‘수수께끼’로, 표현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비밀스러운 소망과 이를 억누르려는 내부 검열자가 만들어 낸 토막 난 내러티브 이미지들이다.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의 도발적인 그림과 초상화에서 주로 나타난 이 갈등은 그림 속 모델과 화가 모두에게 내재해있는 표현과 억압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들의 미술은 다른 어떤 모더니즘 양식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내리기에 적합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열 아홉 명의 미술가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 등의 건축가 그룹은 1897년 미술 아카데미에서 탈퇴하여 독립된 건물까지 갖춘 새로운 조직을 구성했다. 보수적 아카데미 진영에 대항하는 분리파는 당시 빈에 존재하던, 사적 현실과 공공의 도덕 사이에 엄연히 놓여있던 균열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하던 때에 등장한 이런 새로운 미술은 역사학자 칼E.쇼르스케가 주장했듯이, 구 체제에 존재하던 ‘자유로운 자아의 위기’의 징후적 표현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들 미술가와 프로이트와의 연관성이 더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이런 미술이 드러낸 것은 자아의 해방이 아니라, 아카데미와 국가라는, 위기에 처한 권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개별 주체 내부의 갈등, 즉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반역과 새로운 자아에 대한 나르시즘적 추구의 모호한 조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문화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분리파 미술가들의 아르누보 경향 사이에도 간극은 존재했다. 클림트는 모자이크뿐만 아니라 템페라와 금박 같은 고풍스러운 매체를 사용했다. 그러나 선과 색채의 사용에서는 추상적인 형태의 모더니즘 실험을 장려했다. 이처럼 모순에 빠진 분리파는 양식적으로는 구상과 추상, 분위기상으로는 세기말적인 불안과 20세기 초의 삶의 기쁨 사이에서 갈등했고, 이런 갈등은 클림트를 계승한 실레와 코코슈카의 날카롭고 거의 신경증에 가까운 선 표현에서 드러나곤 했다.

빈 분리파의 첫 번째 주자는 구스타프의 작품 세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적 문화에서 시작돼, 19세기말 아방가르드의 반 전통적인 반항을 거쳐, 빈 상류사회의 장식적 초상으로 마감했다. 1894년 신설된 빈 대학에서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라는 계몽주의적인 주제로 철학. 의학. 법학을 나타내는 천정화 세 점을 의뢰 받았다. 10년간 이 작업에 매달린 클림트는 1900년에 첫 작품인 [철학]을 공개했다. 이 세계에서는 마치 빛에 대해 어둠이 승리한 듯 보였다. 1901년에 공개된 다음 작품에서는 의학을 또 다른 지옥으로 표현하여 조롱했다. 대학 측에서 모욕적인 작품을 거듭 거부했고, 법학을 주제로 한 마지막 그림에서는 형 집행의 광경을 지옥으로 묘사하여 대학의 처사에 응수했다. 화면아래 어두운 공간에서는 격양된 복수의 여신 셋이 야윈 남자를 둘러싸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여기서 형벌은 거세를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레와 코코슈카가 이후 작품에서 해방시키려 했던 것은 이와 같은 위축된 남성이었다. 쇼르스케는 ‘그의 반항 자체는 무기력이라는 정신으로 물들어 있다’는 말로 클림트를 설명했다. 이후로 클림트는 아방가르드에서 벗어나, 세련된 사교계 명사들의 사실주의적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장식적인 배경에 장식적 인물들을 그렸다. “억압된 본능적 충동”을 탐구하는 일은 실레와 코코슈카의 몫이 됐고, 이들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고뇌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 반 고흐, 폴 고갱, 에드바르 뭉크와 페르디난드 호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

부르주아 철도 공무원 가정에서 자란 에곤실레는 1907년 클림트를 만났다. 클림트와 코코슈카가 사디즘과 마조히즘 충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면 실레는 도착적인 쾌락에 대한 프로이드의 또 다른 개념인 관음증과 노출증을 탐구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일한 관람자, 스스로 내보인 모습을 은밀하게 엿보는 외로운 관음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입을 벌린 회색 누드 자화상]의 인물은 [법학]에서 나오는 야윈 희생자를 좀 더 젊게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남성임에도 성기는 오그라들었고, 토르소는 여성적이다. 눈가에 둥글게 표현된 부분 때문에 얼굴은 데스마스크 같다. 벌어진 입도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절규나 죽음을 맞이한 순간의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자화상은 삶과 죽음이 신경증의 상태에서 서로 만나는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인물을 변형한 것은 당시 빈 미술의 주요한 유산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30년 뒤 나치는 이 미술을 ‘퇴폐적’이라고 낙인 찍었다. 프로이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 미술가들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인물 묘사를 이어받은 일종의 징후적인 초상화를 만들었다. 이 초상은 미술가의 욕망을 드러내기 보다는 그림 속 모델에 내재된 억압을 몸의 경련과 긴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코코슈카는 이런 징후적 초상을 실레보다 더 발전시켰고 그 파괴적인 차원도 한층 심화시켜, 결국 비에서 추방되기까지 한다. 어려운 시기에 코코슈카는 엄격한 디자인과 격렬한 논쟁으로 악명이 높은 모더니즘 건축가이자 평론가인 아돌프 로스의 지지를 얻었다.

 

1900b
앙리 마티스가 오퀴스트 로댕의 파리 작업실을 방문하지만 선배 조각가의 양식을 거부한다.

앙리마티스가 1900년에 오귀스트 로댕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이 60세의 노작가는 이미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작품 작품세계는 공공조각과 개인적인 조각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명성은 대부분 대리석작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반면 브론즈 주조를 거의 하지 않은 석고 작품 등, 다수의 혁신적인 작품들은 그의 작업실에 숨어 있었다. [발자크 동상]에서는 전통적인 표현법이 거의 쓰이지 않았는데, 아마 이 작품은 로댕 자신이 선호하는 개인 양식을 형상화한 최고의 공공조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티스는 로댕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모델을 재빨리 스케치한 그림 하나를 가지고 갔다. 로댕은 지금의 드로잉보다 더 “꼼꼼하게 그리고” 세부 묘사를 덧붙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마티스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로댕의 충고는 그가 이미 분명하게 거부했고 로댕 역시 경멸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에콜 데 보자르의 교육 방침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로댕을 찾아간 것은 그의 작업에 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노예]는 분명히 로댕의 미술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동신에 그로부처 결정적으로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예]는 로댕의 팔 없는 [걸어가는 남자]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기 때문이다. 로댕의 것은 동작은 정지돼 있지만 형상은 도약할 준비가 돼 있다. 대조적으로 마티스의 [노예]는 어떻게 바꿔 볼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이면서 자기 충족적이다. 분명 모더니즘적인 최초의 반기념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 조각은 대상으로서 자율성을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서양 조각은 조각가가 대리석에 ‘생명을 물어넣고’ 사람들이 그의 조각에 유기적 생명이 부여됐다고 믿게 만드는 것에 치중했다. 공공조각으로 보면 로댕은 이런 전통의 완벽한 계승자이지만, 개인적인 작업으로 보면 로댕은 [프로세스 아트]의 대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우연이든 아니든 모델링이나 주조 등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로댕은 공공조각에서는 조각의 투명성을 언어로 옹호했지만, 개인적인 작업에서는 조각의 불투명성과 조각의 물질성을 택했다. 마티슨느 분명 이런 선례에 고무돼 [노예]에서 표면의 들쑥날쑥함을 강조했다. 로댕의 ‘과정적’ 특징을 그대로 모방하는 동안 마티스는 로댕의 특성에 더 집착하게 됐다. 들쑥날쑥한 표면은 인체와 인체 전체가 형성하는 구불거리는 곡선과의 통합을 파괴하는 지점, 즉 조각이 회화로 변형되는 지점으로 위험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로댕의 물질성의 원리를 더 확실하게 알게 된 마티스는 두 번 다시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이후 마티스가 선보인 브론즈 작업은 모두 조각의 신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작가가 흙을 만든 흔적은 그대로 간직한 것들이었다. [자네트Ⅴ]의 과장된 이마-1930년에 이 작품을 처음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얼마 안돼 두상이나 흉상 연작에서 마티스의 방식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로댕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대가의 미학과 자신의 미학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도 깨달았다. “나는 로댕이 [성 요한]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성 요한]의 손을 잘라 작업대에 고정시키고 그것을 왼손으로 붙잡고 세부 작업을 한 것 같다. 여하튼 로댕은 그 손을 전체와 분리시켰다가 다시 팔 끝에 붙이고 전체적인 움직임에 손의 방향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작품의 전체 구조를 상상할 수 있었고, 설명적인 세부 대신 생동감 있고 암시적인 종합을 떠올렸다.” 그가 조각을 배운 두 작품 중 하나인 [토끼를 뜯어먹는 재규어]를 계기로 마티스는 자신이 ‘사실주의자’가 아님을 깨닫고 해부학적인 사실성과 결별했다. 그는 고양이의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는데 관심이 없었고, 접합된 파편들을 짜 맞추고 부분적인 형상에 대해 끝없이 탐닉한다는 점에서 로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다른 조각가들의 경우 조각상을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 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아카데미 양식을 따랐는데, 그 욕망이 대개 여성 누드라는 전통적인 모티프에 강한 애착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이 마티스의 작품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특질은 완벽한 정면성으로, 한 시점에서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티스 브론즈 작품의 대부분은 관람자가 작품 주위를 돌면서 봐야 하는데, [뱀처럼 구불거리는 인체]가 대표적인 예이다. 예로부터 인체가 공간에서 그리는 ‘S자형’ 곡선이나 인체의 햅학적 구조를 끈으로 단수화시켜 표현한 것ㅇ르 가리키는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처음 도입하고 매너리즘 시대에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된 ‘뱀처럼 구불거리는 인체’의 암시는 ‘등’ 연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당시 ‘투명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티스는 이 작업이 입체주의의 혁명을 앞지르는 것임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마티스에 대한 적어도 두 가지 오해가 있다.

마티스는 로댕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전통과 힐데브란트가 신봉했던 상상 속 물지의 투명성에 대한 이상을 거부했다. 마티스에게 투명성이란 서로 다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관념적 투며성과 관련된 꿈, 그리고 근대 조각가의 빈 공간 사용을 의미한다. 먼저 빈 공간부터 보자면, [뱀처럼 구불거리는 인체]의 ‘투명성’은, 빈 공간이 대립 기호들의 체계에서 주요 구성 요소로 변형되는 입체주의 조각의 방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뱀처럼 구부리는 인체]에서 빈 공간은 형상이 취한 자세에서 생긴 부차적 효과에 불과했으며 마티스는 두번 다시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결과가 마티스가 주장한 바와 반대라는 점이다. 그 누구도 한 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또 어떤 시점에서 봐도 작품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주위를 백 번 돌아도 이 작품 전체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의 전체성과 거리감은 공간에서 춤추는 곡선을 통해서 확보되는 것이며, 우리는 이런 전체성, 즉 작품이 지닌 물자체의 전체성에 접근할 수 없다.

마티스는 이 모든 것, 즉 해부학이나 환기적인 제스처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티스는 해부학을 간단히 무시하면서도 로댕의 개인적인 조각에서 얻은 교훈의 핵심을 간파했다. 그는 마치 인식의 게임을 하면서, 전체성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놀리기도 하고 그 필연적인 욕구 불만을 선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티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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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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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만인의만인에대한투쟁을중단하라
카테고리 인문 > 철학 > 청소년철학
지은이 토머스 홉스 (서해문집,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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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인간론
제1장 감각에 대하여
제2장 상상에 대하여
제3장 상상의 흐름에 대하여
제4장 언어에 대하여
제5장 추론과 학문에 대하여
제6장 정념의 내적 원인과 정념을 표현하는 언어에 대하여
제7장 담론의 결론에 대하여
제8장 덕과 그 결함에 대하여
제9장 지식의 주제에 대하여
제10장 힘, 가치, 지위, 명예, 적합성에 대하여
제11장 행동양식의 차이에 대하여
제12장 종교에 대하여
제13장 인간의 자연 상태에 대하여
제14장 제1자연법, 제2자연법, 계약에 대하여
제15장 그 밖의 자연법에 대하여
제16장 인격체, 본인, 인격화된 실체에 대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제2부 국가론
제17장 국가의 기원, 발생, 정의에 대하여
제18장 통치자의 권리에 대하여
제19장 국가의 유형 및 통치 권력의 계승에 대하여
제20장 가부장적 지배와 전제적 지배에 대하여
제21장 백성의 자유에 대하여
제22장 백성의 정치적 조직과 사적 조직에 대하여
제23장 통치 권력의 ‘공적 대리자’에 대하여
제24장 국가의 영양분과 번식에 대하여
제25장 조언에 대하여
제26장 시민법에 대하여
제27장 범죄, 면죄, 죄의 경감에 대하여
제28장 처벌과 보상에 대하여
제29장 국가의 약화와 붕괴를 초래하는 원인에 대하여
제30장 통치자의 직무에 대하여
제31장 신의 왕국에 대하여
홉스를 둘러싼 학문적 지형도

제3부 그리스도교 국가론
제32장 그리스도교 정치학의 원리에 대하여
제33장 성서의 목적과 권위 그리고 해석자들에 대하여
제34장 성서에서의 정령, 천사, 영감의 의미에 대하여
제35장 성서에서의 신의 왕국, 거룩함과 신성함, 성사의 의미에 대하여
제36장 신의 말씀과 예언자에 대하여
제37장 기적과 그 효능에 대하여
제38장 성서에서의 영원한 생명, 지옥, 구원, 내세, 속죄의 의미에 대하여
제39장 성서에서의 교회의 의미에 대하여
제40장 아브라함, 모세, 대제사장들, 유대의 왕들이 신의 왕국에서 지니는 권리에 대하여
제41장 우리의 축복받은 구세주의 직무에 대하여
제42장 교회의 권력에 대하여
제43장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에 대하여

제4부 어둠의 왕국론
제44장 성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생겨난 영적인 어둠에 대하여
제45장 이교도의 악마학 및 그 밖의 종교적 유물에 대하여
제46장 공허한 철학과 터무니없는 전통에서 생겨난 어둠에 대하여
제47장 어둠에서 나오는 이익에 대하여



# 서론 / 인간의 기술은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훌륭한 창작품인 인간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라 불리는 위대한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리바이어던이란 인조인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자연인보다 크고 강하며, 자연인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 국가를 구성하는 물질과 국가의 고안자, 이 둘은 모두 인간이다. 2. 약속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체결되는가? 통치자의 권력 및 권위는 무엇인가? 통치자의 권력 및 권위를 유지하고 해체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3. 그리스도교 국가란 무엇인가? 4. 어둠의 왕국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이 어떤 근거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론하고 희망과 두려움을 느끼는지를 고찰한다면, 자신과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욕망, 두려움, 희망 등 인간이 지닌 정념의 유사성에 관한 것이다. 국가 전체를 통치해야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특정인이 아닌 인류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 1부 인간론

1장, 감각에 대하여

운동이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는 것이 환상이며, 이 환상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꿈꾸고 있을 때나 마찬가지다. 눈을 누르거나 문지르거나 자극을 줌으로써 우리는 빛이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고, 귀에 자극을 가함으로써 소리를 느끼게 된다. 결국 감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환상은 우리의 귀나 눈을 비롯한 신체기관에 외부의 사물이 자극을 가함으로써, 즉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기독교 왕국의 모든 대학에서 이와는 다른 학설을 가르치고 있다.

2장, 상상에 대하여

인간이 무엇을 보거나 꿈을 꿀 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눈을 감아도 직접 보고 있을 때보다는 희미하지만, 영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고대 로마인들은 ‘상상’이라 불렀고, 그리스 인들은 ‘환상’이라고 불렀다. 결국 상상은 ‘쇠퇴해 가는 감각’ 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서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쇠퇴해 가는 감각을 상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쇠퇴해 간다는 것이, 감각이 희미해지고 오래되고 지나간 것을 의미 할 때는 ‘기억’ 이라고 부른다. 결국 상상과 기억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것이다. 언어 혹은 다른 기호에 의해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상을 우리는‘이해’라고 한다. 따라서 이해는 인간과 동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의지뿐만 아니라 긍정과 부정, 그 밖에 다른 말의 형식을 통해 개념과 사고에 입각하여 이해한다는 점이 다르다.

3장, 상상의 흐름에 대하여

인간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의 사고는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상이란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모두 유한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한하다’고 부르는 것에 대한 관념이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4장, 언어에 대하여

언어의 일반적인 효용은 머릿속에 있는 말을 언어로 옮기거나, 사고의 흐름을 언어의 흐름으로 옮기는 것으로, 1. 우리의 사고의 흐름을 기록하고, 또 2. 같은 말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사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또는 무엇에 대해 어떤 욕망이나 공포의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서로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표징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언어가 원인과 결과를 기억하는 방식은 명칭을 부여하고 그 명칭을 결합하는 것이다. 참과 거짓은 언어의 속성이지 사물의 속성은 아니다. 따라서 언어가 없는 곳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기하학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작업을 ‘정의’라고 부른다. 따라서 진정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내려진 정의를 검토하고, 소홀하게 규정된 것이 있을 경우 정정하거나 스스로 새로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의 단어와 단어의 결합이 의미하는 특정한 사고를 갖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 이야기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이해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성질이 같다 할지라도, 인간의 각기 다른 성향이나 편견은 그 사물에 대해 여러가지 다양한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추론할 때는 언어에 주의해야 한다. 

5장, 추론과 학문에 대하여

추론한다는 것은 여러 부분을 더해서 전체의 합을 생각하거나, 전체에서 어떤 부분을 빼서 나머지를 생각하는 것. 사고를 기록하고 표현하기 위해, 합의된 명사들을 연속적으로 계산하는 것. 즉 스스로 추정한 것을 기록하고, 자신이 추정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 보이거나 찬성과 지지를 얻기 위해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발견한 결론을 정리 혹은 아포리즘이라 불리는 일반법칙의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즉 인간은 숫자뿐만 아니라 더하고 빼기가 가능한 모든 사물에 대해 추정하고 계산할 수 있다. 이런 인간의 우월성은 ‘불합리’라는 요인으로 인해 약화된다. 그중에 철학자들이 불합리에 빠지기 쉽다. 철학자 중 누구도 자신이 사용하는 명사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와 설명을 바탕으로 추론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기하학에서는 이런 방법이 사용되어 왔기에 기하학의 결론은 논쟁의 여지없이 명확하다. 추론이란 감각이나 기억처럼 선천적인 것이 아니며, 분별력처럼 경험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추론은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올바른 명사에서 시작해서, 여러 명사들의 결합으로 표현되는 당정에 이르고, 하나의 단정과 또 다른 단정의 결합으로 표현되는 삼단논법에 이르러 당면한 문제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이처럼 질서정연한 방법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 바로 학문이다. 결국 인간정신의 우수성은 명확한 언어에서 나오며, 정확한 정의로 애매성을 제거할 수 있다. 추론은 인간정신의 보폭이며, 학문의 증진은 그 여정이며, 인류의 이익은 그 목표이다.

6장, 정념의 내적 원인과 정념을 표현하는 언어에 대하여

동물의 두 가지 종류의 운동 1. 생명유지에 필요한 운동 2. ‘자발적’운동. 모든 자발적 운동의 최초의 내적 원인이 상상임은 분명하다. 인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의 원인을 ‘의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물을 향한 의도를 ‘욕구’, ‘욕망’이라고 부른다. 반면 어떤 사물로부터 멀어지려는 의도를 ‘혐오’라고 부른다. 욕망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구와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다만 욕구라고 말할 때는 항상 대상의 부재를 의미하는데 반해, 사랑이라고 말할 때는 대체로 대상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과 악의 일반적인 기준은 대상 자체의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없는 곳에서는 개인에게서 나오고, 국가가 있는 곳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7장, 담론의 결론에 대하여

지식욕이 지배하는 모든 담론은 결국 목적한 것을 달성하거나 포기함으로써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선과 악에 대해 심사숙고할 때 욕구가 번갈아 생겨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의 진리에 대해 탐구할 때에도 의견이 번갈아 생겨난다. 심사숙고할 때 마지막 욕구를 ‘의지’라고 하듯이 과거와 미래의 진리를 탐구할 때 최후의 의견은 ‘판단’, ‘최종판결’이라고 한다. 참과 거짓의 문제에서 여러가지 의견이 교대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을 ‘회의’라고 부른다. 담론이 정의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는 하나는 스스로 명상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이것은 의견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정직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타인’의 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이경 우 담론은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얻게 된 결론을 믿음이라 불린다. 즉 이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이며, 사람과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두 가지 의견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말’에 대한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덕’에 대한 의견이다.

8장, 덕과 그 결함에 대하여

덕이란 탁월함에 대한 평가로 흔히 ‘훌륭한 지력’이라고 부른다. 1. ‘타고난 덕’이란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경험하면서 얻어진 지력을 의미한다. 사물을 비교할 때 다른 사람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관찰하는 사람은 지력 또는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특히 시간, 장소, 인물의 차이를 식별해 낼 필요가 있을 경우, 이와 같은 덕을 분별력이라 부른다. 2. ‘습득한 지력’은 훈련과 교육을 통해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추론이라 할 수 있다. 지력의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정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정념의 차이는 부분적으로 ‘신체적 구성의 차이’에 기인하며, 부분적으로는 ‘교육의 차이’에 기인하다. 어떤 일에 대한 정념이 보통 사람보다 강하고 격렬한 경우를 ‘광기’라 부른다.

9장, 지식의 주제에 대하여

1. 사실에 대한 지식; ‘역사’라고 부르는데 자연의 역사, 사회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2. 하나의 확언에서 다른 확언으로의 연속적인 흐름과 그 결론’에 대한 지식; 학문은 하나의 확언에서 다른 확언으로의 연속적인 흐름과 그 결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흔히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0장 힘, 가치, 지위, 명예, 적합성에 대하여

인간이 지닌 힘이란 미래의 분명한 선을 획득할 목적에서 현재 지니고 있는 수단으로, 선천적인 힘과 도구적인 힘으로 나뉜다. 선천적인 힘이란 육체와 정신의 탁월함을 의미한다. 도구적인 힘이란 타고난 힘 혹은 행운에 의해 획득한 것으로,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한 수단 및 도구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방법은 서로의 동의 아래 하나의 인격체에게 힘을 몰아 주는 것이다. 이 경우 인격체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 모든 힘을 사용하는데, 국가의 권력이 이에 해당한다. 인간의 ‘공적 가치’는 국가가 그 사람에게 부여한 가치로, 흔히 지위라고 부른다. 결국 사회적 명예란 그 원천이 국가의 인격 안에 있으며, 주권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관직, 직무, 칭호 등이 그러하며, 화려한 문장이나 방패도 여기에 해당된다.

11장, 행동양식의 차이에 대하여

행동양식이란 인간이 서로 협력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의 특성을 의미한다. 행복이란 마음의 평화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목적에서 다른 목적으로 가는 욕망의 지속적인 흐름이며,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다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일반적으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욕망이 있으며, 이 욕망은 오직 죽어서야 멈추게 된다. 인간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유는 지금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왕은 국내에서는 법으로, 국외에서는 전쟁으로 자신의 힘을 확실하게 해 두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목적이 달성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부, 명예, 지배 등과 같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경쟁은 불화, 증오, 전쟁을 일으키기 쉽다. 경쟁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복종시키거나, 쫓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락한 삶, 감각적인 기쁨에 대한 욕망은 ‘공공의 권력’에 복종하게 만든다. 지식, 평화에 대한 욕망 역시 공공의 권력에 복종하게 만든다. 억압에 대한 두려움은 사회로부터 도움을 기대하거나 갈구하게 만든다.

호기심, 즉 원인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과를 심사숙고하여 원인을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추구하게 된다. 그렇게 원인을 추적해서 마침내 더 이상 어떤 원인도 필요치 않는 ‘영원한 원인’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영원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는 자연적인 원인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할 수 없다.

12장, 종교에 대하여

인간의 끊임없는 공포(미래에 대한 걱정)는 원인에 대한 무지에서 생기고,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옛 시인들은 신이란 원래 인간의 두려움에서 생긴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지식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라기 보다는 자연적 물체의 원인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종교의 씨앗은 어떤 사람은 1. 자기 자신의 창의력으로 키웠고(속세정치의 일부, 국가의 창건자들과 입법자들), 2. 신의 명령과 가르침에 따라 키웠다(구세주, 모세, 아브라함). 이방인들 가운데 국가를 창건한 사람들과 입법자들은 오직 백성들을 복종시키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으로 종교를 내세웠다. 그리고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참고)

## '리바이어던'의 핵심 내용  / 철학자들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홉스 또한 17세기 당시 유럽 사회의 무질서를 종식시키고 계속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출발하여 '국가 권력의 근거는 무엇인가.' 라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 죽 근대 자연법 사상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홉스는 인간 본성과 자연 상태에 대한 이론적 구성을 통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면서 근대적 권리와 의무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인민과 군주의 정당한 통제 관계를 제시하며 세계를 전망하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쌓은 근대국가를 거대한 괴물인 '리바이어던'으로 상정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서로 잡아먹으려는 이리에 비유하면서 그 탐욕스러운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공포를 규제할 수 있는 대상이 곧 국가인 '리바이어던'인 것이다.

# 홉스의 인간 본성관은 어떠한가?  / 홉스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정념은 '욕구'와 '혐오'로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인간 향동의 기본적 원리가 나온다. 홉스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와 행동을 분석해 냄으로써 인간 행위의 법칙을 밝히고 안정된 사회가 가능한 조건들을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욕구'와'혐오'라는 단순한 심리적 장치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모든 인간 행위의 생물학적인 원리는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힘'이며 자기 보존은 생물적 존재의 지속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힘을 무제한으로 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권력이 없는 평등한 상황에서 상호 불신과 공포는 힘에 의한 자기보존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자연상태에서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인데 이러한 공포 때문에 겸허하게 자신의 한계 내에서 안락을 즐기려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증대시키게 된다.

홉스는 이처럼 인간 존재를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물 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자기 보존은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힘의 추구'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다. 그런데 자연물이 운동하거나 힘을 추구하는 것은 목표점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서 욕구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힘의 추구란 곧 '지배의 추구'이다. 따라서 홉스에게서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이며 자기 보존의 욕구에만 충실할 뿐, 타인과는 본능적으로 '경쟁', '불신' 그리고 '영광' 등으로 이러한 것들만 존재하는 자연 상태에서는 결국 전쟁 상태로 가게 되고 그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 인간은 적나라한 폭력을 경험하면서 평화를 지향하게 되고 이성에 의해 타인과'동의'를 하게 된다. 이성에 의한다는 것은 바로 자연법의 발견이고 이 자연법은 인간들이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원리이다.

# 홉스의 자연법 사상과 사회 계약  / 자연 상태를 종식시키고 시민 사회의 평화로운 상태로 넘어오게 만든 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홉스에게 자연법이란 이성에 의하여 발견된 계율, 또는 일반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권을 침해하거나 자연권에 제한을 가하기 위하여. 자연 상태를 종식시키고 시민 사회의 평화로운 상태로 넘어오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보존의 욕구, 힘의 확장의 욕구를 최대한 달성하고자 하는 법칙이다. 즉 홉스에게 이성 능력이란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의 도구적 합리성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법에 따르면, 결국 자연 상태에서 죽음의 공포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서로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이것은 자기 보존을 위한 무한한 힘의 추구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상호 양도하는 '사회계약'을 의미하게 한다. 그러나 다양한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한 시민 사회에서 계약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어서 국가라는, 강제력을 독점하는 '거대한 괴물(리바이어던)'을 상정하게 된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본질적인 특징은 국내외의 평화를 지키고 회복하는 데에 필수적인 독점권을 가진다는 점이다. 홉스는 이러한 독점권이 신민들에게 분할 되거나 양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절대 국가가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자만 이것이 곧 도덕적인 우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목적은 인간의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의 보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자연법에 의해 신민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고 신민 또한 폭력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 을 누리기 위해 국가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국가'는 질서의 유지자로서'계약'에 의해 창조되고, 인민은 그 국가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 홉스의 사회계약 원리이다.

# '리바이어던'의 사회 계약적 의의  /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고 모든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독립한 자율적 실체가 되었을 때.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고 질서를 유지하는가 에 대한 문제 의식과 대답이 바로 근대의 '사회 계약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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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역사
카테고리 미분류
지은이 미셸 푸코 (나남, 2003년)
상세보기

제1부
제1장 "광인들의 배"...41
제2장 대감호...113
제3장 비행의 세계...165
제4장 광기의경험...211
제5장 정신이상자들...249

제2부
서론...291
제1장 종들의 정원에서의 광인...307
제2장 정신착란의 선험성...353
제3장 광기의 형상들...415
제4장 의사와 환자...481

제3부
서론...545
제1장 대공포...559
제2장 새로운 분할...597
제3장 자유의 선용...653
제4장 정신병원의 탄생...711
제5장 인간화의 악순환...779


제 4장. 광기의 경험

구원빈이 창설되고 독일과 영국에서 최초의 교도소가 개설된 시기에서 18세기 말까지 고전주의 시대는 감금의 시대이다. 방탕한 사람, 낭비벽이 심한 아버지, 탕아, 신성 모독자, ‘자살하려고 애쓰는’ 사람, 자유사상가가 감금당한다. 고전주의 시대 특유의 비이성의 경험.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의 세계는 한결같지 않았다. 어떤 광인들의 지위는 특별하다. 파리의 한 구빈원은 이성을 잃은 빈민을 취급할 권리를 확보해두고 있다. 런던에서 베들리헴 구빈원은 ‘미치광이’라고 불리는 이들만을 위한 시설이다. ‘치료할 수 없는 자로 간주된’ 미치광이들은 수용되지 안았으며, 이러한 방침은 구빈원 안에 치유 불가능한 미치광이들을 위한 특별건물 두 동이 건축될 1733년까지 계속된다. 구빈원의 다른 시설들에서는 의료행위가 전혀 실행되지 않는다. 단 한 명의 의사만이 피티에에 거주하면서 구빈원의 각 시설을 일주일에 두 번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환자가 어떻게 시설로 들어왔는지는 설명하지만, 치유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시도하지 않았다.

정신이상자를 구빈원의 진료에 맡기지 않고 그저 구빈원에 머물도록 정죄하는 여러 차례의 기이한 사법적 판단이 증거하듯이, 수용은 정신이상자를 공식적으로 경범죄자들의 무리에 등록시키는 조직이다. 수용시설이 감옥의 모습을 띠고 심지어 광인들이 아무런 차이 없이 이 두 기관에 나뉘어 수용되었을 정도로 두 기관이 흔히 혼동되었다. 대부분의 구빈원에서는 정신이상자가 아무런 구분도 없이 다른 모든 재원자나 피수용자와 뒤섞여 있다. 가장 불안한 정신이상자만이 전용 숙소를 할당 받을 뿐이다. 몇몇 시설에서는 광인들이 이론적으로 치료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광인들을 받아들이지만, 다른 시설들에서는 광인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나 광인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만 광인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전자는 수가 더 적을 것이고 공간이 더 협소할 것이다. (파리의 시립병원에는 80명 이하인 반면, 구빈원에는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 가량) 광기의 경험은 질병의 경우처럼 비록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부정될 수 없다. 광기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광기가 수용, 징벌, 교정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다른 경험과 동시대적이다.

프랑스의 구빈원, 영국의 ‘워크하우스’, 교도소, 또는 감옥에서 구별 없이 마주칠 수 있는 이들로 말하자면, 그들이 그 당시에 막 생겨나고 있는 의학적 이해방식에 따라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일련의 질병에 걸린 경우일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신의 질병들이 영원한 앎 속에서 병리학에 의해 분류되던 확고한 의학적 범주들을 가려내는 것은 의사-역사가들이 즐겨 몰두하는 작업이다. 정신의학은 자체의 영원성에 대한 최초의 보증을 이 사실에서 얻는 것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정신의학에서 생긴다 해도, 정신의학의 탐색대상이 실재했고 시대를 가로질러 정신의학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마 정신의학에 안도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게다가 수용의 의미와 의료기관에서 수용을 채택하게 된 방식을 우연히 염려하게 된 사람도 어쨌든 광인들이 감금되었고 그 애매한 실천에 이미 의학과 관련된 내재적 정의의 형상을 띠는 것이 숨어 있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안도의 표정을 짓지 않을까? 수용되는 정신병자들에게는, 정신병의 이름만이 결여되어 있었던 셈이다.

17세기 이전 광인은 무엇일 수 있었는가. 광인은 실증주의에 의해 의학적 지위를 부여 받기 훨씬 이전인 중세에 이미 개인으로서 충분히 독립적인 존재였고 환자보다는 인물로서의 개체성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 말부터 이 개체성은 어떤 의학적 인본주의의 염려대상이 되었다. 동방과 아랍 사상이 결정적이었을지 모른다. 에스파냐에서 15세기 초에 정신이상자들을 위한 구빈원이 최초로 세워졌는데, 수도회에서 포로 석방 이후 계속 세워졌다.

중세의 일상생활에 현존하고 중세의 사회 지평에서 친숙한 인물로 떠오르는 광인은 르네상스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고, 정확히 의학적 지위를 부여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로부터 고립되면서 모호한 실천의 대상이 된다. 그러다 17세기에 이르러 광인은 개별화의 윤곽선이 희미해져 고전주의시대의 비이성의 일반적 이해 속으로 사라진다. 17세기의 보호소들 한가운데서 광인의 대혁명 진전에 개혁의 움직임이 태동할 때까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모습을 감춘다. 그러다가 수도회의 구빈원의 설립하면서 기존 나병환자 수용시설의 존립을 위해, 수감자(환자)를 위한 형무소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거기에 머물러 있던 정신이상자들은 교정의 체제로 넘어갔다. 감옥체계형성.

광인의 수용은 모든 의학적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탓에 자체의 고유한 논리만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면 광인의 수용은 필연적으로 투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광기의 의식이 변질되면서, 정신이상자들의 보호소가 더 이상 구빈원이 아니라 기껏해야 교도소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르네상스 시대의 말기와 고전주의 시대의 절정기 사이에 제도의 변화뿐만 아니라 광기에 대한 의식의 변질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수용시설, 징역 및 교정시설이다.

수용. 광기에 대한 매우 실증적 경험,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을 분명하게 특징짓던 개체성과 중요성을 광인에게서 빼앗음으로써 광인을 새로운 경험 속으로 밀어 넣고 우리의 통상적 경험영역을 넘어 광인의 새로운 얼굴, 우리가 순진한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모든 광기의 본질을 알아본다고 믿는 얼굴 자체를 준비하는 경험에 대한 전적으로 외적인 접근방식이다. 수용과 입원이 병행하는 현상 때문에 우리는 틀림없이 이 두 가지 제도적 형태의 고유한 연대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병원이 사실은 교도소와 직접적 관련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려고 애쓸 것이다.

교회법과 로마법에서 광기의 인정은 의사의 진단으로 결정되었다. 모든 정신이상의 판단에는 의료의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의사는 모든 신호체계를 자신의 경험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의학적 판단에 근거해서만 정상인과 정신이상자, 범죄자와 책임을 질 수 없는 정신병자를 구별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용의 실천은 전혀 다른 유형으로 구조화되고, 어떤 식으로도 의학적 판단에 종속되지 않으며, 다른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영국에서는 주변사람들에 의해 수용이 요청되건, 치안판사가 관할구역의 질서유지를 위해 수용의 필요성을 제기하건, 수용 영장의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은 치안판사이다. 프랑스에서는 수용 대상자의 경범죄나 중죄가 입증된 경우에 때때로 법원의 판결에 근거해서 수용이 결정된다.

17세기에 광기는 사회적 감성의 문제가 되었다. (수용청원쇄도) 광기는 범죄, 무질서, 추문과 가까워지면서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감성의 가장 자연발생적이고 가장 원시적인 형태들에 의해 판단되기에 이른다. 수용과 수용을 둘러싼 법 해석이 관행에서는 정신이상자에 대한 의학의 영향력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 구빈원에서도 의학의 통제는 불필요해지고 광기가 실재하는 곳에서 광기를 식별하게 되어 있는 결정권은 점점 더 “전 사회의 이름으로 관리되는”듯하다. 

결과적으로 의학의 도움을 받아 광기의 한계와 형태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공들여 구상된 ‘법적 광기론’(판단), 그리고 광기를 거칠게 이해하고 탄압을 위해 이미 준비된 수용형태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사법적 중재를 위해, 그리고 사법적 중재에 의해 마련된 구별 방식을 충실하게 준수하려고 하지 않는 사회적이고 거의 공안적인 ‘실천’(수용), 이 양자 사이의 괴리만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의식은 수용의 실천을 침해하지 않는다. 이 의식과 수용의 실천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다. 하나는 형식과 의미가 분석되는 법적 주체로서의 인격과 관련된 어떤 경험의 영역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관련된 어떤 경험에 속한다. 전자는 정신이 이상함에 따라 책임을 면제받지만, 후자는 광기로 인해 죄의식의 인접부로 끌려 들어간다. 정신질환의 의학이 성립된 것이다.

19세기가 비이성적 인간을 병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고 이와 동시에 수용이 환자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 행위로 전환되기에 이르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의 합리주의가 언제나 출현가능성으로 남겨두었던 정신이상의 이 다양한 주제와 광기의 이 잡다한 얼굴을 혼란스럽고 우리로서는 분간하기 어려운 단일성으로 축소시키는 폭력적 술책에 의해서다. 

  

제 5장. 정신이상자들

정신이상자를 감금한 명분을 일관성있는 질병학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등록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수용자들에 대한 언급 : 집요한 소송광, 소송하기 좋아하는 사람, 매우 심술궂고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사람, 밤이고 낮이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가장 끔찍한 신성모독의 언사를 지껄이는 사람, 격문 부착자, 엄청난 사기꾼, 불안해하고 침울하며 무뚝뚝한 사람 등이다.- 이 문구들로 지시되는 것은 질병이 아니라, 극단적 ‘결함’으로 인식되었을 광기의 형태이다. 바로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가 윤리의 형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합리주의. 합리주의는 역설적으로 이성이 착란되지는 않으나, 도덕생황에 전혀 바르지 않고 의지가 사악하다는 점에 비추어 인식될 그러한 광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듯하다. 결국 광기의 비밀은 이성의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질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고전주의에 의한 광기의 경험과 이 경험에 대한 고전주의의 거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규범뿐만 아니라 윤리의식 전체이다. 광기를 감시하는 것은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 윤리의식이다. 수용은 고전주의 시대의 이성이 광기의 모든 위력을 몰아냈고 사회제도의 층위에서 결정적 분할선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결함과 광기 사이의 모든 엄밀한 구별형태에 대한 무감각은 고전주의 시대의 의식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아마 가장 책임이 있을 주체의 의지가 문제되는 결정적인 선택으로 이성-비이성의 분할이 실현되는 더 깊은 영역이 있음을 말해준다.

비이성에 대한 일반적 이해방식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광기와 관련되고 정확한 의미의 구분 없이 정신이상자, 미쳤거나 탈이 난 정신의 소유자, 괴짜, 정신착란에 빠진 사람으로 지칭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한 조정 기능 같은 것이 있다. 이 특별한 형태의 이해방식은 비이성의 세계에 있는 광기의 고유한 모습을 그려낸다. 이러한 이해방식은 추문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것들의 공공연한 표출은 본보기와 속죄의 작용력을 죄악에 부여했다. 악은 극치에 이르러 사라지기에 앞서 반드시 대중 앞에서 고백되고 표명되어야 했다. 수용은 비인간적인 것이 수치만을 유발하므로 은폐시키는 방법으로 가문의 명예와 종교의 명예를 고려하여 권한다.

은폐의 대상에 예외가 하나 있다. 광인의 경우가 그것이다. 중세부터 광인을 보여주는 것은 오랜 풍습이었을 것이다. 광기는 조용한 보호소에서 구경거리로 떠오르고 모든 이의 즐거움을 위한 추문이 된다. 수용은 비이성을 숨기고, 비이성이 불러일으키는 수치를 드러내지만, 광기를 명백히 보여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광기는 짐승의 모습을 띤다. 혼란된 사람이 아닌 본능적 격분에 휩싸인 짐승. 하지만 광기의 인식에 수반되는 이러한 공포는 두세 세기 후에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 속의 동물은 더 이상 저승의 세계를 가리키는 지표의 가치를 갖지 않을 뿐 아니라, 광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는 인간의 광기, 곧 자연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의 광기가 되었다.

광기는 일반적 비이성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광기의 발작과 정신이상자의 광포함은 다른 정신이상자들의 필시 더 분별있게 들릴 말에서라면 찾아볼 수 없을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광기는 더 특별하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르네상스시대의 기독교 체험과 밀접한 십자가의 광기에서 희생이라는 위대한 비이성을 통해 이성이 상실되도록 인간의 이성에 대해 오만과 확실성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은 이제 문제로 대두되지 않지만,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사는 동안 광기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존중한 듯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광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광기에서 질병이라는 무의지적이고 불가피한 사고를 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진실의 그 하부 한계, 우발적이지 않은 본질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광기의 의학적 진실은 광기를 고전주의적 도덕세계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광기가 빠져 나오게 되면서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광기는 이제 우리에게 발생원인들의 연쇄, 그리고 형태들에 관한 추론의 움직임과 함께 결정론의 당연한 규칙성만을 내보인다. 왜냐하면 광기는 짐승과 사물의 음울한 세계로, 족쇄가 채워진 짐승과 사물의 자유로 되돌아감에 의해서만 근대인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17세기와 18세기가 광기를 알아보는 것은 ‘자연’의 지평 위해서가 아니라 ‘비이성’의 바탕 위에서이다. 광기는 메커니즘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동물성의 괴기스런 형태 속에서 맹위를 떨치는 자유를 드러나게 한다.

광기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비이성과 관련해서 일 뿐이다. 비이성은 광기의 매체이다. 오히려 비이성은 광기의 가능공간을 규정한다고 말하자.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에게 광기는 비이성의 자연적 조건, 심리적이고 인간적인 뿌리가 아니라, 단지 비이성의 경험형태일 뿐이다.

우리 시대의 정신의학도 마찬가지겠지만, 19세기의 정신의학은 18세기의 관행을 폐지했다 해도, 18세기의 지식을 제쳐놓았다 해도, 고전주의 시대의 문화 전체에 의해 새롭게 정립된 비이성과의 그 모든 관계를 은밀히 이어받아 변모시켰고 변위 시켰다. 그들은 객관성에 입각해서 말한다고 하지만,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비이성의 윤리와 동물성의 추문이 여전히 깃들여 있는 광기를 대상으로 했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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