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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과시각문화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 예술사 > 미술사
지은이 강태희 (눈빛,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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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1. 미술사의 추억
2. 워홀·팝·캠프
3. 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
4. 마르셀 브로타스의 미술관
5. 미술과 가치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2부

1. 관인식론
2. 이우환과 1970년대 단색회화
3. 1970년대 개념미술의 현황 : ST 전시를 중심으로
4. 1970년대의 행위미술 이벤트


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

1. 여는 말
패션과 미술은 역사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지만 현대에 와서 교류가 더 활발해 졌다. 이 글은 1980-1990년대 미술과 패션 또는 패션 사진을 중심으로 그들의 복합적인 상관관계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무한히 넓어지는 미술의 경계와 확산하는 시각문화의 관계를 더듬어 보는 일이고 더 나아가 대중문화 시대의 미술의 탄생을 새삼스럽게 음미해보는 계기이기도 하다.

2. 미술과 패션
아트포럼지의 대중문화에서 흐려진 경계에서 대중문화로 진입하면서 그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는 미술제작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한다. 20세기 후반 미술과 패션의 소통의 기점으로 1996년 플로렌스 비엔날레 ‘시간과 패션’에서 리히텐슈타인과 베르사체, 데미안과 프라다, 제니홀저와 헬무트 랑 등 7쌍의 협업작업과 구겜하임미술관의 <미술패션>전이 열리는 등 21세기에 와서 미술세계서 인정받는 디자이너들이 유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대부분 미술계나 건축계에서 비판적이었지만 패션의 또 다른 사회비평적인 기능에 주목하는 긍정적 시각도 있었다.
패션이 예(미)술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하에 이런 문제제기 자체는 미술비평적 시각이 패션에 미학적 분야의 존재를 증명하는 샘이다. 로버타 스미스의 <패션 이후의 미술>에서는 워홀이후 1990중반에 그 어느 때 보다 양자의 밀접해진 사례들을 든 바 있고 이후 매튜바니에 이르기까지 이런 경향이 지속됐다. 이들에게는 사진이라는 공통되는 분모가 있는데 1970년대 개념미술을 거쳐 사진이 미술로 진입하면서 패션사진 역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미술오브제로서 화랑서의 전시로 이어지는 일이 허다해졌다. 결국 패션은 미술의 대중문화에의 몰두의 최근 또는 최종단계이며 미술이 대중문화와 공존하는 이상 이들과늬 관계를 도외시할 수 없게 됐다.

3. 앤디워홀
초상. 초현실주의. 스냅샷
역사적으로 패션과 관계가 가장 밀접하고 생산적이었던 미술은 초현실주의였는데 만 레이, 달리, 마그리트, 키리코 등 여러 작가들이 패션 분야에서 작업했다. 또 초창기 패션사진은 초상이 대부분이었으나 야외촬영이 가능하게 되면서 생기와 발랄함을 불어넣고 서사의 가능성을 열게 됐으며 로버트 프랭크는 모델의 중요성과 상황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변화를 도입했다.
워홀의 <인터뷰>잡지. 1969 - 그것은 영화잡지로 시작해서 로이 할스톤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인터뷰 기제 후 패션화보가 제공되면서 패션관련인사들과 패션사진들이 이면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인터뷰>지는 당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업을 하던 하던 웨버, 허브 리츠, 라체플 등 젊은 패션사진가들의 작업을 과감하게 다뤄준다. 그에게 패션매체는 영화이기도 했으며 패션사진들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4. 미술과 당대 패션, 패션사진
패션은 자기표현의 형태로 현대사회의 표상이며 현재를 규명하는 도구라는 점에 힘이 있지만 일회성, 상업성 또는 전형성 때문에 진지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즉 패티시. 회고 취미. 다원주의 스타일 등의 대두는 이런 패션사진의 연구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보그, 하퍼스 바자, 영국의 더 페이스, 아이디, 인터뷰, 펑크, 빌리지 보이스, 뷰, 등이 기여했다. 의상의 변화도 큰 몫을 차지했다. 1980년대 여피패션과 뽕. 과장된 헤어의 파워 드레싱이 후반으로 가면서 젊은이의 거리 패션 그런지로 옮겨지며 고급패션의 전통이 몰락하거나 새로운 패션개념과 타협하게 된다.
댄 골딘> 성의 지하문화세계(특히 영화)에 심취했던 그는 테크닉은 무시한 채 친구와 주변인물들을 진솔하게 찍은 스냅샷을 찍었다. 그의 사진에 나타난 친밀함은 삶의 기록이자 생존의 방편이었고 당시 그의 성공은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비판적인 시선의 검열이나 왜곡 없이 전달되는 충격적인 현실감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로 드러났다. 1990년 이후 패션사진이 패션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어 그 주안점이 옷에서 생활방식에 종속되는 변화가 오면서 그 초점 역시 오브제에서 서사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패션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 지면서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뉴튼, 부르댕 등은 제품 자체보다는 이미지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여 제품 주변의 서사를 전복 또는 확산했으며.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세팅과 시나리오를 결합시켰다.
신디셔먼> 골딘처럼 미술가로서 패션사진을 찍은 작가다. 그녀는 중년 여성의 반 패션에 초점을 맞췄다. ‘우리 대부분은 미와 세련된 자태의 스테레오타입을 사회로 부터 강요당하면서 자라기에 이들은 그에 대한 반동이다.’ 그는 총 네 번의 패션사진을 제작했으며 이들에 대한 비판과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반패션 사진들은 패션내부에서 변화를 주도한 골딘의 ‘비패션’ 사진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실비 플뢰리> 패션계 출신의 사진가 지망생으로 그에게 패션은 손익은 도구로서 피상적인 접근이 아닌 직접수행의 과정 또는 결과로 활용했다. 그가 직접 고른 명품상품이나 쇼핑백들의 진열로 직접적인 대중소비문화와 그 싸움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팝아트의 후예. 개념미술가로도 분류된다. 아이라이너, 매니큐어, 깃털, 인조 모피 등을 사용한 작업은 패션과 소비에 관련된 여성욕망의 허영과 비속함을 비판하는 억압적인 남성시각의 해체를 전략으로 삼았다. 결국 패션을 미술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미술도 일종의 패션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바네사 비크로프트> 세트 디자인전공을 하고 여성의 몸을 사용해 퍼포먼스 작업을 한 그는 살아있는 조각의 언캐니와 침묵하는 모델과 관음적시선의 관객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주 미디엄으로 활용하여 마치 공간에 펼쳐지는 거대한 회화 또는 조각이라고도 불린다. 이 작업은 패션쇼의 구성을 빌리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들의 광범위한 협찬을 받았고 다수 패션잡지를 위해 프로젝트도 제작했다.
리처드 프린스> 그는 잡지 등의 미디어 이미지를 재촬영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기존의 사진들을 자신의 시점으로 재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들을 예술사진으로 변모시켜 왔다. 그는 사진 미디어 자체나 테크닉에 대한 관심이 없으며 미디어 이미지의 공허한 매혹과 순환 등에 대한 보다 복합적인 비판과 성찰이 전제되어 있다. 그는 사진의 중요한 효과를 같음과 다름,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언캐니로 보고 실제와 재현의 미묘한 차이를 극복하는 사진미디엄의 정상성이나 권위의 느낌을 작업의 토대로 삼는다. 이런 소박하고 과장된 아마추어리즘은 당대 패션사진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이런 사진들이 그에 의해 미술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이미지들이 갑자기 한 비평적 순간에 가시화되고 미술의 영토는 다시한번 드넓어진다는 사실이다.

5. 남은 말
1990년 이후 로우 앤 하이의 교류가 급격히 증대했으며 구분마저 모호해졌다.
1980년 웨버는 자신의 패션사진에 상업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주장과 같이 패션사진은 더 이상 패션과 무관해졌고 예술사진에 더 가까워졌다. 잡지에 등장한 사진과 갤러리에서 팔리는 사진들의 유일한 차이는 전자에는 크레딧이 있고 후자에는 없다는 사실 뿐이다.
올리비에로 토스카니. 미술처럼 사회 문화적인 사안들을 내비치며 베네통의 광고는 전세계적인 화제와 논란을 일으킨 패션사진을 출판한다. 의상이 완전히 배제되고 충격적인 저널리즘 사진 위에 로고만을 붙인 것이다. 노예제도, 갓난 아기, 수녀와 키스하는 신부, 마피아의 피살, 홍수, 불타는 자동차, 군인, 아동노동자, 전기의자, 환경오염, 난민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이슈화 시켜 상업의 노리개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결국 사형제도의 불합리성을 표현한 사진으로인해 해고당했지만 그는 “광고야말로 의사소통의 가장 강력하고 풍부한 형태이므로 사람들을 생각하고 토론하게 해야 한다... 광고는 소비자를 미망에 빠뜨려야 맞는 모양이다. 나는 늘 가짜가 받아들여지고 실제가 거부당하는 데 대해 당혹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결국 패션사진들이 이슈들을 끌어들여 스펙터클을 장식할 수는 있지만 심각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패션사진의 의미와 효용성에서 그것이 한 시대 문화의 가자 예민한 센서 중의 하나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골딘의<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는 개인과 시대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되었다. 이와 달리 초현실주의적인 풍경을 천의무봉하게 그려내는 디지털 사진은 그간 패션이 그나마 지니고 있던 현실과 환상 사이의 모호한 긴장을 소리 없이 증발시킨다. 그것은 .유령 같은 키치적 흥분과 환각적인 지복감 ‘느낌이 배제된 세계를 반향하는 깊이 없는 광택의’ 깨지지 않는 거울이다. 디지털의 매끄러운 표면이 패션사진의 필연적 미래라면 우리의 추억과 욕정을 비추는 거울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속하는 것일까?



마르셀 브로타스의 미술관

1. 여는말
이미 근 40여 년 전 현대를 ‘미술관의 시대’로 규정했다지만 지금은 ‘미술관이즘’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술관과 대규모 국제전시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미학의 태동과 함께 미술관이 등장했지만 그 역사는 서로 다른 길을 향해 진행되어 왔다. 당초 소장품의 보관과 전시를 위한 공간이었던 미술관은 어느새 미술을 정의하고 미술사 기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강력한 제도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미술과의 역사와 권위에 따라 관람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기꺼이 따라가리라는 의식을 고취하게 된다. 하지만 미술관은 모든 것이 통제되고 기획된 극히 이념적이고 제한적인 선택의 장이다. 표면적으로는 고매하고 중립적이며 사회의 모든 비속과는 무관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숨기는 곳으로, 미술관의 이런 측면에 먼저 눈 뜬 것은 작가들이었다. 1960년대 개념미술가들을 중심으로 미술환경자체평가를 검토하고 비판하는 일련의 작업이 등장했다.
전시공간과 구성개념에도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틀을 깬 기획전시가 이루어지는 등 미술관은 일종의 ‘전시 퍼포머스’의 장이 되고 있다. 이런 전시와 연관된 현대미술의 제반 양상을 살피는 데는 1960년대 마르셀 브로타스의 작품을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2. 성전에서 포럼으로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벽없는) 미술관’은 사진의 등장으로 작품들이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란히 비교하면서 양식을 추출해 내고 미술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을 뜻한다. 이곳은 이런 변신을 정면으로 대하는 곳이며 거기에는 모든 오브제를 작품화하는 ‘미술관 효과’가 작용한다.
근자에 들어 미술관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성전과 포럼’으로 대립된다. 미술관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그를 성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인 반면 포럼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를 대결, 실험, 토론의 장으로 보고 그 구조, 의식, 이념에 대한 폭로를 증시하는 입장이다. 미술관을 포럼으로 보는 미술관 담론에서 미술관은 자연스러운 곳이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특정 이데올로기와 전시정책이 결정되고 과시되는 곳이라는 대전제를 가진다.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는 사진이 매체가 되어 미술의 기원이나 용도 목적. 스케일 등의 왜곡으로 나타나는 총체적인 탈문맥화되어 양식이라는 내적인 일관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하지만, 로잘린드 크라우드는 그것에 미술관이 창조행위의 보편성이 추구되는 곳이라는 모더니즘을 기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며 이는 위대한 허구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더글러스 크림프 역시 미술관이 제공하는 일관성은 하나의 허구이며 존재론적 에센스로서의 미술은 미술사의 망령일 뿐이라고 했다. 도널드 프레지오시는 미술관은 현대 사회에 있어 가장 강력하고 명민한 허구 중의 하나이며 예술의 총체적 관념을 만든 것이 그 최대의 성공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예술의 문화적 의미를 확립하고 통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논의들은 아직 뚜렷한 성과가 축적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대변하던 권력이 전시 디자이너라는 특정 개인에게로 넘어가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1970이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다룬 작가들로는 브로타스 외에도 다니엘 뷔랭, 한스하케, 마이클 애셔, 루이즈 롤러 등이 대표적이고 이들은 다양하게 미술관과 전시를 비판하고 패러디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들의 작업이 결국 미술관에 흡수되는 쉽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하나의 실천으로, 하나의 상징으로, 그 작업들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3.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브로타스는 40이 되서야 미술가가 되었는데 쿠르트 쉬비터즈, 피에로 만조니와 이브클라인과에게 많은 영감을 얻었다. 특히 조지 시갈의 석고 캐스팅은 그의 작가로의 변신의 직접적인 동기 되었다. 시갈은 그에게 틀 즉 용기나 문맥에 관한 질문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4년 후 미술관 설립 전까지 갖가지 오브제를 만들었는데 홍합, 계란 껍질, 냄비, 와인병 등 음식이나 그릇용기 또는 껍질이나 틀 등이 소재가 되었다.
그가 미술관과 문화를 통제하는 시스템에 대해 처음 눈을 뜨고 얼마 후 미술관을 열고 그는 문화가 유연하고 순종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통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도 마찬가지 목적을 가졌다고 밝혔다.
자신의 아파트에 설립한 첫 미술관은 ‘현대미술관, 독수리 부, 19세기 섹션’이란 주제로 스스로가 관장이자 전시 디자이너이며 경영자로 자처했다. 미술관과 같은 전시 오프닝을 표방했지만 거기엔 유리창에 ‘미술관’이라고 써진 글씨와 ‘취급주의’ 가 붙은 빌려온 작품 운송장과 빈 상자, 전시작품으로는 벽에 붙어있는 명화그림엽서와 19세기 화가의 슬라이드를 연속으로 비췄을 뿐이었다. 브로타스의 미술관은 1972년 까지 이어졌고, 그것은 아이디어와 기억으로만 남은 허구의 존재였지만 4년 동안 위치와 섹션의 명칭만 바뀌면서 꾸준히 지소되어 총 11개가 만들어 졌다.
그는 워홀처럼 모든 예술의 목적은 상업적이며 자신의 목적도 역시 상업적이라고 단언했으며 말년에는 미술은 ‘초정치적이며 도덕적 의의는 별로 없는 쓸모없는 노동’이라고 결론지은바 있다. 그는 작가의 기회주의적 입장을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으로 보고 정치적 입장과 예술적 실천 사이에 내재하는 모순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것의 그의 미술관 설립을 증명하는 샘이다. 그는 기존의 미술관을 비판하기 위해 허구의 미술관을 설립하고 드문드문 전시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이런 일인극이 어떤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회의했다.

4. 이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뒤셀도르프 미술관 ‘이미지 섹션’ 점신세부터 지금까지의 독수리.
266개의 독수리에 관한 작품들이 장르와 종류를 망라하고 진열되었다. 모든 전시작에는 ‘이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라고 쓰인 똑같은 크기의 명패가 부착되었다. 브로타스는 이 전시의 개념을 아이디어로서의 독수리와 아이디어로서의 예술의 동일성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예술의 개념이 점검 없이 숭배되고 순환되는 데 대한 패러디이며. 그는 독수리로 상징되는 미술의 권위에 눈먼 대중들에게 뒤샹와 마그리트의 교훈을 다시 한번 깨우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의 의의는 제도권 비판으로서의 전시개념과 방법. 그리고 이들의 뒤샹과 마그리트와의 관계로 요약된다.
전시효과는 허구를 통해 강한 현실의 의식을 얻는 것이며, 자신의 미술관과 허구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것이 감추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미지가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하나의 징후로 보여질 때 전시는 계시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는 직접적이기보다는 빈틈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현실의 허구를 노출하기 위해 인위적인 허구를 만든 셈이며 또 신화화의 허구에 저항하기 위해 새로운 인위적인 신화를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브로타스의 전시는 뒤샹의 작업을 전제로 한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뒤샹의 실패를 적시하는 것을 뜻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로 통용되는 제스쳐가 예술의 패러다임을 ‘무엇’에서 ‘언제, 어디서'로 바꾼것이라면 브로타스는 '누가'를 되짚어 질문하고 그에 반기를 든다. 예술가가 예술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는 마그리트의 작업에 있어서도 그의 기호학이나 문학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품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며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뒤샹과 마그리트를 결합하여 자신의 공식을 끌어내어 미술과 그 이름이 표방하는 권능을 시험대에 올린 것이다. 그는 작가로 확립되면서 작품이 대형 국제미술제에 초대받으며 더 이상 미술관 지속의 명분이 없어졌다.

5. 맺는 말
제만이 기획한 '개인적 신화들'에서 '현대미술섹션'은 얼마 뒤 작품에 내용이 바뀐다. 가상의 미술관이었으나 스스로 책임자였으나 제만이 구성 전시에서는 그저 전체 테마에 종속된 일부일 뿐이었으며 자신이 패러디하고 공격한 그 상황에 자신의 작업이 함몰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여러 제도권 비판의 작업 가운데 미술관이나 전시를 그처럼 일관되게 또 치열하게 작품의 내용으로 삼은 작가로는 브로타스가 유일하다. 물론 1990년대 중반부터는 전시기획이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될 정도로 여러 작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작가와 큐레이터는 상호교환이 가능해졌다. 최근 이런 경향은 미술관에 대결의 장 보다는 재현과 현실에 대한 숙고의 장이 되었다고도 한다.
모래사장위에 미술관을 짓고 ‘다큐멘터리 섹션’이라고 이름한 작품은 미술관 또는 그가 설립한 미술관이 허구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강력한 메타포로 제시한 예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미술이 사기와 오류의 조건을 놓인다면 그것은 여전히 미술인가? 대답할 수 없다.



1970년대 개념미술의 현황 : ST전시를 중심으로

1. 여는 말
1970년대 우리 현대미술을 점검하고 당시 미술의 흐름이었던 앵포르멜과 단색회화 사이를 벗어난 그밖에 움직임에 시야를 돌려보고자 한다. 미술사의 성장을 위해 한국의 개념미술을 비롯한 실험미술을 재구성해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2. 실험미술이라는 명칭
1960후반부터 10여 년 사이의 오브제, 입체, 설치, 해프닝, 영화, 이벤트, 개념적 작업등의 실험 미술이라 불리는 작업은 그 당시의 역동, 격정, 도전, 반란, 전환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과히 생산적이었던 당시의 작업들이 그 후의 미술에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실험미술에서 재료나 기법 면의 확장에 치중한 것을 실험으로 봤을 때,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향한 ‘실험성’이 전제조건이었던 외국의 경우와 달리 주어진 양식을 받아들인 우리의 경우에는 실험이 어떤 식으로 내면화되었으며, 우리 나름의 집중적이고도 가시적인 형식 실험이 있었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되겠다. 일단 당시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며 작업한 작가들을 보자면 최명현, 박영남, 김구림, 정찬승 등이 있었지만 사실 자신들의 작업에 있었지만 그들조차 이 명칭에 회의적이었다. 또 당시의 상황은 앵포르멜에 대한 포만감과 무력감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갈증을 고조시켰는데 우리 미술의 결점 중의 하나인 획일화를 벗어난 이시기에는 다양한 시도와 변화가 추구되었던 만은 틀림없다. 덧붙여 당시의 미술을 더 이상 실험미술이 아닌 ‘탈 평면미술’이라 칭할 것을 제안한다.

3. 1960-70년의 개념미술
 당시 실험미술만큼이나 개념과 특성의 정리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개념미술은 1960 후반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의 퇴조와 함께 아이디어 혹은 개념이 작품 성립의 주요 요인으로 분리되어 개념자체를 작품으로 독립된 장르로 성립된 것이다. 개념미술이란 ‘아이디어가 우선 편재하며 물질적인 형태는 이차적인 것으로, 가볍고, 한시적이고, 싸고 소박하며 그리고 또는 비물질화’한 미술이다.

1) 특성과 발단 : 1970년 <AG> 2호에서 ‘사념작품’이란 명칭으로 미국의 작품이 소개된 것이 처음이었다. 60년 당시 국제적 파장을 안긴 미국의 개념미술이 ST를 통해 국내에서도 심화되지만 그 존속기간과 참여작가를 보자면 소규모운동이었다. ST의 작업들은 오브제나 입체가 주종을 이루었고 행위를 통해 개념의 표현과 전달을 의도한 물질적이고 시각적인 것이 뚜렷한 특징으로 고도로 이론화한 논리가 요구되는 미술의 개념규정이나 영역설정에 관한 언어 분석적인 작업이 전무했다. 따라서 행위예술, 특히 이벤트가 주가 되었다. 우리나라 개념미술 1호: 김구림, 김차섭 <매스미디어의 유물, 1969>+설명-우편 통신의 종말을 예감하고 곧 폐기될 편지라는 수단을 통해 미술작업을 주고 받았다. 그 해 ‘ST 미술학회’ 라는 ST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이 이루어진다. (이건용, 김복영, 김문자, 여운, 박원준, 한정문, 신성희)

2) ST의 전시 <표>
-3회전  ..
당시 파리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공개토론회를 열어 현대미술의 역사성과 반 역사주의가 논의 되기도 했다. 
성능경의 신문작업이 주목 받았으며 ST전에서는 처음으로 기록될 수 있는 개념미술의 예다.
-4회전  ..
“한국현대 미술의 딜레마를 자기 논리 및 분석의 결여로 보고, 창작과 평론의 부재를 정감하고, 논리와 분석을 사진, 물질, 환경, 행위(이벤트)를 통해 모색하겠다.”
그룹의 정체성에대한 입장.
-5회전  ..
김영복의 서문에서 개념미술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목적의식에 대한 부재가 드러난다. 대신 물질과 사건, 즉 오브제와 이벤트를 강조하며 이것이 전시의 주가 되었다.
전시 오프닝에서는 이건용,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이 퍼포먼스를 했으며 나카하라 유스케의 개념예술과 예술의 개념이 토론되었다.
이벤트와 사진 외에는 여전히 물질이나 일루전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었다.
-6회전  ..
김영복 서문 “해프너들이 환경, 신체, 대지를 통해서 나타낸 시위는 ‘예술은 또 다시 자연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는 점에서 금후 현대사에서 그 의의가 크게 강조될 것이며, 컨셉츄얼 아트와 극사실주의는 이념을 어느 정도 성숙된 원리의 실험에 의해 표명한 획기적인 것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ST의 개념작업은 행위와 자연이 그 틀과 내용 이었다는 것이다.
이벤트는 지나치게 무겁고 관념적인 ST의 이벤트에 대한 대안으로 관객을 재미있게 참여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이다.
-7회전  .. 멤버 무더기 탈퇴로 그룹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8회전  .. 동덕미술관 현대미술워크숍의 일환으로 열림 마지만 ST전시이다. 이건용, 성능경, 김장섭 만을 남기고 기존 멤버 대거 탈퇴한다. ST의 연속이라기 보기엔 궁색한 전시였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ST는 자신의 종말을 자체 증명하며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의 활동을 접게 된다.

3) ST와 개념미술
ST는 서구의 사고와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존의 행태를 백지화 하고 비판토론을 거쳐서 수용하고자 했으며, 창작과 논리라는 지적인 유기적 관계를 증진시키고, 단순한 장인이 아닌 사고자로서 예술의 본질을 새롭게 사고하고자 했다. 그 성과는 논리적 작가 타입 형성과, 입체, 사진, 평면화, 이벤트 등 매체의 개혁을 통한 미디어의 영역확장과 예술의 개념과 미디어의 문제를 통한 본질적인 문제 추구를 가능케 했다. 또한 외국의 주요 논문을 공개 토론하는 등 진지한 세미나를 열었고 지성적인 모임과 순수한 활동 전개로 한국화단에 좋은 작가와 이념을 구현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을 총평하자면 개념미술로 규정짓기 어려우며 입체작업이나 사진으로 작업을 심화시키지 못하고 유일하게 지속가능 했던 이벤트는 이건용으로 가능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벤트가 개념미술에 속하는가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신체의 장이 강조되는 사건의 전개에 치중했기에 개념적인 행위미술로 볼 수 있다.

4. 맺는 말    |    그들의 작업은 크게 보아 입체 작업을 통한 물질 탐구와 형식 실험 그리고 행위를 통한 논리나 관념의 점검이었다. 윤진섭은 1970년대의 개념화, 논리화의 훈련 덕분에 화면canvas을 감정 분출의 장이 아닌 사색의 장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행위미술 이벤트


1. 여는 말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으로 시작한 행위미술은 좀처럼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다 1975년 4월 ST의 이건용에 의해 새로운 행위미술이 나타났는데 그는 자신의 작업을 해프닝과는 차별화한 이벤트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그것의 발전과정이나 사상적 배경, 그 의의에 있어 일관된 평가가 없는 실정이다. 외국의 행위미술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서도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단절에 이른 상황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이벤트 시원
그는 60년대 해프닝 즉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행위와 달리 70년대를 이벤트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이벤트는 행위가 논리적으로 진행된다며 차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정의는 원조가 되는 구미 이벤트는 원래 플럭서스의 행위미술을 칭하는 말로서 존 케이지의 제자들인 플럭서스 작가들이 그들의 음악적인 행위미술을 해프닝과 구별하기 위해 이벤트(또는, 이벤트 스코어 notation, piece)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 당시 케이지의 수업에 참가했던 앨런 카프로가 해프닝의 효시가 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거니와 후에 플럭서스에 가담한 미술가들이 짤막하고 단순한 행위로 이루어진 극히 일상적인 작품들을 구상하고 실현했던 것이 그 시원인 것이다. 그 최초의 예는 조지 브레흐트의<석양의 자동차, 1960>로 겉보기에는 장난 같고 허망해 보이기 까지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사소한 우연의 점철로 이루어진 인생에 대한 언급이자 철학이 제시이며, 그 바탕에는 선을 깊이 연구한 케이지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벤트란 명칭은 일본의 그것이 (김구림에 의해)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에는 이미 케이지에게 수업을 받은 전위음악가 이치야나기 도시, 오노요코 등의 플럭서스 활동의 모체가 되는 일련의 개념적 음악회와 이벤트의 발표의 장이 있었다. ‘음악그룹’은 도쿄 플럭서스 결성을 주도했으며 그들의 이벤트는 플럭서스 이벤트보다는 해프닝적인 요소가 많아 보다 자극적이고 연극적이었고 백남준도 참여했다.

*이건용의 첫 이벤트 ‘현신’ <실내측정><동일면적>.. 그가 고집하는 언어 행위는 “사물과 작가의 신체가 하나의 사건화하는 과정”에 돌입하여 그것이 다시 “세계화라는 장의 확산”으로 이어져서 이벤트를 통해 “사건과 행위의 형이상학을 장과 신체의 조응” 속에서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몸과 장소하는 매개를 통해 세계와 관계를 어떻게 맺는지 분명하지 않고 관객은 투명한 논리의 결말로 직관적이고 통합적인 초논리의 세계로 인도된다는 문제점을 안게 된다.

3. ST멤버의 이벤트
이건용의 ‘공간미술대상’전의 <테이프자르고잇기>의 이벤트를 시작으로 ST 4, 5, 6회전과 AG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그러나 ST의 침체와 더불어 이건용을 제외하고는 이벤트를 이어가지 못했다.

1) 이건용의 이벤트   
그는  175~80년까지 입체작품을 거쳐 행위미술까지 50여개의 작품을 내놓았으며 당시엔 입체와 행위를 탈평면이라는 이유로 같이묶어서 인식되었다. 그는 미술의 개념을 질문하고 정의하는 아이디어 위주의 작업보다는 공간, 상황, 장소, 신체 등이 연루되는 ‘행위’를 선택했다. 또한 제작 행위를 멀리하고 짤막하지만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 줌으로써 정확한 사건의 본질을 보고자 한 그는 사건 형태가 논리적인 관계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의 논리는 감정의 해석이 아닌 자기충족적이고 동어반복적인 “논리를 위한 논리”가 된다. 그러면서  다다적인 행위를 통해 인생을 넌지시 보여주고자 한 플럭서스 이벤트와는 거리가 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개념미술은 정보나 지식에 머물러 세계와의 직접적 관계를 떠나게 되어 모두 극단적이므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이벤트는 이런 결점을 극복하는 관계론적 논리적 사건이라며 개념미술과 차별화시키고자 했다.
제 2회 대구현대미술제:<물 마시기>, <성냥커기>, <물 붓기> ST:<건빵먹기>, <금긋기>, <열 번 왕복>, <두 사람의 왕복>, <셈세기>-일상의 사소한 행위로’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논리’로 설명한다. AG : <장소의 논리>, <이리오너라>, <바늘구멍꿰기>, <내가 보이느냐> ‘4인이벤트’-<장소의 논리>, <로프와 고무줄>, <로프와 두사람>, <고무줄 감기> 등. ‘3인의 이벤트’: <다섯 걸음>, <손의 논리>, <장소의 논리>. 신체드로잉 : <화면뒤에서>, <화면 앞에서>, <옆으로 서서>, <팔에 깁스>, <다리 사이에>, <양팔로>, <어깨를 축으로>등. 
그 특유의 명료한 행위와 논리적 사건의 전개로 당대 행위미술의 전형을 세웠다고 볼수 있지만 이벤트의 모호한 ‘개념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으며 ‘논리’와 완벽을 추구하다보니 이벤트 특유의 모순이나 돌발 사태 등 우연의 개입이 철저하게 배제된 것 문제 중 하나이다.

2)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 윤진섭
쪾김용민> 75~79년  ‘3인 이벤트 쇼’:<두개의 돌>, <긋는 것과 지우는 것>, <샌드 페이퍼>. <물걸레>, <발자국>, <테이프> 등
쪾성능경>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 <신문읽기>, <돌 던지기>, <돈 세기>, <수축과 팽창>, <위치>, <끽연>, <손>, <검지>, <위치>, <팔 흔들기>, <한장의 신문> 등 한동안 이벤트를 했지만 그 후에는 신문 사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 보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옮아갔다.
쪾장석원> <혼인이벤트>, <시계>,<하나, 둘, 셋, 넷, 다섯> 등
쪾윤진섭> <돌과 반죽>, <종이와 물>, <노란 구두>,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등

3) 이우환의 영향
그의 철학적, 사변적, 이론적인 작업성향은 특히 논리와 개념을 추구하는 ST작가들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전범이 되었다. 이우환은 신체의 행위적이고 직관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험의 구조를 중시했다. 그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은 서구의 논리와 동양의 사상이 접목되어 ST \작가들이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다.비록 그의 글이 추상적인 것으로 구조, 현전, 만남 등의 개념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서구를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일이 없이 미술을 할 수 있다는 각성을 준 점에서 사건을 강조한 행위미술의 당위성을 보장하고 또한 그들  작업의 전반적인 철학적 배경이 된 점은 부인할수 없다.

4. 맺는 말
신체를 매개로 논리적이고 사념적인 행위를 통해 세계와의 연결을 인식하고 미술의 보다 본질적인 통로를 발견하고 제시하고자 했으나 한정되고 일회적인’사건’의 제시로 보편적인 만남을 이루려는 시도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많은 관객과의 소통에도 어려웠다. 어쨌든 이들의 이벤트는 우리 특유의 행위미술의 가능성을 개진했다는 긍정적인 평ㅇ가와 그를 개인적인 영역으로 비의화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할 수 있겠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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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실험러시아미술1863-1922
카테고리 미분류
지은이 캐밀러 그레이 (시공사펴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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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860년대 - 1890년대
제2장 1890년 - 1905년

제3장 1905년 - 1910년
제4장 1909년 - 1910년
제5장 1912년 - 1914년
제6장 1914년 - 1917년
제7장 1917년 - 1921년
제8장 1921년 - 1922년


◆ 제 1장_ 1860-1890년대

1860이전의 러시아미술은 유럽에서 건너온 신고전주의가 페테르부르크의 아카데미 미술을 통해 이어오고 있었다.

순회파 - 이들은 1757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이 설립해 이어져왔던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최초로 집단으로 도전하여 분리를 선언한 미술가 단체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원했다. 그들의 유력한 후원자이자 동료인 사바 마몬토프를 중심으로 모인 13인의 예술사들을 “마몬토프 서클”이라 불렸고, 그들은 스스로는 ‘방랑자들(순회파)’라고도 불렀다. 그들은 작품의 주제를 강조해 사회 개혁하는 행동세력이 되어야한다고 설명한다. 이미 러시아가 전 국가의 유럽화를 단행한 시점에서 순회파의 전통적 생활방식의 추구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후 민족주의 전통과 러시아 농촌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조하려는 노력이 진행됐고, 러시아 현대미술의 기반이 된 민족주의 운동이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

*사바 마몬토프 - 1870대에 이르러 미술의 후원세력이 기존의 황제나 귀족계층, 관료 등에서 부유한 상인들로 대체되는데 이에 주도적인 인물이 바로 사바 마몬토프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한 예술가이면서 최초로 사립오페라 극장을 설립했고, 많은 예술 분야를 후원했고, 3대에 걸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또 초창기 석탄을 운반하는 철도를 건설하는 등 철도왕으로 불릴 만큼 제력가이기도 했다.

마몬토프 서클 - 마몬토프를 중심으로 모인 러시아 화가들로 순회파의 이상을 가지고, 조각가인 안토콜스키, 풍경화가인 바실리 폴레노프, 미술사학자 아드리안 프라호프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이들은 함께 미술관이나 유적지를 여행하고, 함께 모여 작업하고, 새로운 러시아 문화의 창조에 대한 각자의 계획을 토로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은 마몬토프 부부가 아브람체보를 구입한 후로 그곳에 병원과 임시학교를 세울 정도로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열정적이고 조각공방을 만들어 교류를 확장시켰다.

아브람체보 공동체 - 1874, 마몬토프 부부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며 함께 러시아로 온 미술가들인 폴레노프와 그의 친구 일랴 레핀, 세로프 모자, 마노토프 부부, 빅토르 바스네초프, 아폴리나리우스 바스네초프 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일랴 레핀과 폴레노프

아브람체보 교회- 강의 범람으로 부활절을 지키지 못한 후에 예술가들이 함께 지은 교회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러시아 중세 미술과 성상화의 학문적 연구가 미흡했고, 185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917년 혁명 후 에야 복원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아브람체보의 교회건축은 이러한 학문적 연구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성상화와 의복, 덮개에 들어가는 자수, 모자이크도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했다. 교회완공 후에 지속적으로 러시아 중세 미술에 관심이 증폭된다. (바스네초프 형제는 역사적복원에 빅토르 성상과 동화의 장면, 아폴리 나리우스는 모자이크의 회화적 재창조의 전문가가 됨.)

*바실리 수리코프 - ‘순회파’ 초기 멤버로써 민속적인 이상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결합시키려 노력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아카데미 수업을 받았지만 모스크바에서 그가 나가야할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보야리나 모로코바>; 중세모스크바 거리풍경. 이 작품에서 보이는 역동적이며 연결성 있는 순수하고 완전한 색채의 동적인 특징은 러시아 회화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수리코프의 그림에서 이러한 중세적 방식이 나타난다. 비잔틴 미술의 특이한 색채 영역 즉, 풍부한 갈색, 어두운 빨간색, 밝은 노란색 그리고 장식적인 표면의 리듬과 강한 수평선의 러시아 옛 그림과 현대의 공통적 특징으로 수리코프에서 되살아났다.

 

일요일 밤의 독서모임(아브람체보 공동체의 활동) - 독서모임은 점차 무언극으로 발전했다. 빅토르 바스네프가 무대 장식화를 그린 후에 전통적인 기술자 대신 화가가 무대장치를 함으로써 사실적인 무대장치의 개념이 탄생했다. 이것은 즉시 서유럽으로 전파되고 바스네프의 제자들인 코로빈, 레비탄, 골로빈, 조예리치 등으로 발전됐다. 1890년에는 황제의 국립극장도 예술가들을 기용하기도 했다. 더 이상 무대장치는 단순한 배경장식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 되었고 연극의 종합, 즉 통일성이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연극의 ‘사실주의’가 탄생하는 원동력이 된다.

마몬토프는 모스크바에 전문적인 ‘사립 오페라 극장’을 설립하고, 무대미술은 콘스탄틴 코로빈과 이삭 레비탄으로 이어졌다. 코로빈은 1885년 프랑스 방문 후 인상주의 반영한 최초 러시아 화가로 20C초 아방가르드 거의 대부분의 화가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발렌틴 세로프은 레비탄의 제자면서도 그보다 더 감각적이고 과거 지향적이지 않은 훌륭한 풍경화가다. 그들은 1900-1909까지 모스크바대학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화가이다.

*미하엘 브루벨은 세프로의 친구이자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치스탸코프 제자이다. 그는 1883년 키예프의 성 시실 성당의 복원작업에 합류해 벽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했고, 베네치아에서도 비잔틴 미술에 대해 연구한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일을 얻지 못하고 심신의 고통을 느끼며(‘악마’연작) 지내다가 1887년 블라디미르 대 성당 건축디자인에 공모하여 장식 패널화를 맡게 된다. (전체적 디자인은 빅토르 바스네초프가 당선됨) 그는 세로프와 함께 아카데미에서와 다른 자연연구에 몰두하여 수채화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는 레핀의 제자였지만 스승의 철학을 강력히 비판하고, 미술을 사회의 선전도구로 보는 ‘순회파’해석에 반대했다. 러시아의 세잔으로 부를 수 있는 브루벨은 칸트의 철학에 심취하여 자연연구에 대한 신념이 강해졌다. 하지만 생애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세로프와는 달리 풍경, 자연에 직접적인 관심보다는 자연물의 인공적인 소외감속에 특이한 극적인 리듬을 자아냈다. 그의 비범함과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로 다음세대 미술가들은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험을 가능하게 했고, 길을 알려주었다.

 

제 2장_ 1890-1905년대

  프랑스의 나비파와 유사한 배경을 가진 러시아 ‘예술세계, Mir Iskustva’ 운동은 20C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메이대학의 ‘네프스키의 픽위키안스’라는 단체의 학생들이 알렉산더 베누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마치 영국과 유럽의 ‘아르 누보’운동과 같았다.

*알렉산더 베누아는 ‘예술세계’가 모든 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 표방하는 인물상으로 화가, 무대디자이너, 연출가, 미술사학자, 비평가이기도 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이루어진 선조의 복잡한 혈통은 그를 유럽사상과 친숙하게 했다. 그는 스스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예술, 헌신적인 애호가로서의 예술가, 그리고 영원한 진리와 아름다움의 매체로서의 예술에 대한 확고한 개념을 갖고 있는 예술가였다. 그의 가문은 국수주의적이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한 1890-70년대 러시아 인민주의(혁명이전 공산주의)이념에 끌리지 않았고, 서구와도 단절되지 않았다. 이러한 국제적인 문화의 감각은 ‘순회파’가 득세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러시아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 여겼다. 그들의 목표는 러시아를 최초의 서구 문화의 주류에 기여할 수 있는 국제 중심지로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람체보가 전념한 중세 러시아미술과 ‘순회파’가 무시한 외래의 것 등을 포함한 민족유산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

픽위키안스의 중심인물로는 문학적 능력의 소유자 드미트리 필로소포프, 회화의 절대강자 콘스탄틴 소모프, 음악적 재능을 가진 발터누벨 등이 있다. 레온바크스트(레프 로젠베르크)는 그룹내 최초의 전문미술가며 열렬한 반 아카데미 선동가다. 당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러시아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독일의 화가와 작품에 대해 토론했다. 필로소포프는 알렉산더 제 1세 치하의 사상과 시대 상황, 그리고 투르게네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 했다. 바크스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관대하고 동정심 많았고, 색채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창의적인 작업을 한 예술가였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필로소포프 사촌)는 1890년 대학 졸업하고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진학하기 1년 동안 베누아는 뮌핸으로, 디아길레와 필로소포프는 파리로 가서 인상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러시아에 돌아와 새로운 예술의식이 있는 지식 계층을 창조해야 한다는 임무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학위보다는 음악이나 중요한 사람들 만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바크스트의 아카데미시절 친구인 세로프와 코로빈, 니콜라스 로예리치가 모임에 합류한다. 로예리치는 바크스트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디아길레프의 무대를 가장 혁신적으로 장식하는 무대 디자이너가 된다. 이후 샤를 비를레 가담해 1년 동안 프랑스의 고갱, 쇠라, 반 고흐의 작품들과 인상주의자들을 소개함으로써 당시 프랑스 회화에 대한 그들의 개념에 혁신을 일으켰다. 알프레드 누로크도 소개했고, 그누로크는 오브리 비어즐리를 소개했다. 비어즐리는 책 삽화에 있어 표현력이 드러나는 풍부한 실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등의 혁신을 일이키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잡지발행의 사상이 논의되며 디아길레프는 맴버 각자 재능이 있는 부분이 다른 것을 일련의 창조적인 기획으로 한데 모아 처음에는 잡지, 전시, 그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인 '러시아 발레' 순으로 진행해 나갔다. 그들은 건강과 힘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때묻지 않은 에너지와 신선함을 갖고 있었다. 디아길레프는 외국을 두루 다니며 미술품을 수집했고 여행을 통해 예술 행정분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과 독일의 수채화전>. <스칸디나비아의 화가들>이라는 전시를 처음으로 조직했고 <러시아와 핀란드 화가전>까지 그 기세를 이었다.

1896, 졸업 후 멤버들은 흩어져 대부분 파리로 떠났고 파리로 떠난 베누아는 디아길레프의 잡지창간에 원조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들의 조직은 우익과 좌익의 구분이 나타나는데, 즉 무엇보다도 새로움을 추구하고, 편협하거나 지방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공격하는 좌익과, 지식과 감응의 포괄성에 있어서 학자적이고 약간은 절충적이며 좀 더 관습적인 우익으로 구분된다.

(좌익-누로크, 누벨, 바크스트, 코로빈. 우익- 베누아, 란세레이, 메레슈코프스키. 평화유지군-필로소포프, 디아길레프. 세로프는 왔다갔다. 코로빈은 그저 방문객.)

잡지의 내용과 형식을 정한 후에 그들은 후원자 찾아다녔다. 먼저 테니셰바공주는 후원을 하다가 디아길레프의 성품에 믿음을 갖지 못하고 두 번의 전시회가 끝나고 후원을 중단했다. 당시 사바 마몬토프는 그들의 유력한 후원자였다.

1898년 10월 <예술세계>첫 호가 창간되었다. 인쇄를 위한 목판을 18세기 활자체로 독일서 만들어 오는데 1년이나 걸렸는데 이것은 미술 뿐 아니라 인쇄 기법에서도 혁신적인 기획이었다. 첫 호의 삽화로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작품 실린 사건은 그룹 내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징주의적 사상이 소개되기도 했다. 종교와 음악도 논의 되며 점차 진정한<에술 세계>가 형성되어갔다. 초반에는 서구 유럽의 '아르누보' 미술가들 -비어즐리, 번-존스, 건축과 실내 디자인의 맥킨토시, 반 데 벨데, 요세프 올브리히- 의 삽화가 실렸다. 프랑스의 퓌비드 샤반과 모네, 드가도 소개되었다. 1904년 마지막 호에서는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다뤄졌다. 그들은 점차 원시미술과 민속 미술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관심에 동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아브람체보와 탈라슈키노의 공동체에서 이미 시작된 당시 모스크바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고객, 세잔, 피카소, 마티스 접촉이 지속되며 다음 10년 동안의 러시아 회화를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갈 역동적인 힘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전시는 점차 '국제적' 이기 보다는 모든 화파를 대행하는데 바빴으며, 더 통합된, 그러면서 개별적인 양식의 특징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선의 화가들의 페테르부르크 화파와 색채의 화가들의 모스크바 화파가 바로 그런 새로운 경향이었다.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의 발견과 함께 잡지는 중단되었다. 그들은 선전임무 완수가 되었다고 느꼈고 서구 유럽의 예술적 아방가르드와의 접촉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 지식계층으로 하여금 민족적 예술의 유산을 있는 그대로 깨닫게 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국제문화를 위한 기반이 준비되자 더 이상의 이론적인 포교는 멈췄다.

<예술세계>의 창조적인 작품은 발레에서 찾아야한다.

극장에서는 통합되고 완벽한 실존을 표현하려는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으며 삶을 통한 예술이 가능했다. 제스쳐와 음악, 분장과 장식, 발레의 시각적 통일성, 완벽한 일루전, 완전한 조화가 가능한 것이다. 황실극장의 감독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연극행정부서에 필로소포프를 임명하고 디아길레프를 조감독으로 임명했다. 베누아는 소규모 오페라의 장식과 분장을 맡고, 소모프는 프로그램을 디자인했다. 그러다 감독이 교체되며 디아길레프가 미움을 사고 쫒겨난 후로 텔랴코프스키는 베누아와 일했고, 에서 무용수의 삽입으로 ‘예술세계’ 최초의 발레 작품<아르미다 궁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러시아의 오페라와 발레가 파리 등 서구로 소개된다.

러시아의 활동이 제한되고 혼자가 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는 더 이상 러시아가 아닌 미국과 유럽에서 밖에 볼 수 없게 됐고, 그는 러시아 초상화를 수집하거나 시골등지의 미술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타우리드 궁의 정원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또 1906년, 파리의 살롱 도톤에 러시아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열어 크게 성공하고 러시아에서 공연했던 오페라를 파리로 가져와 대성공을 이룬다. 또 파리에 함께 머문 ‘예술세계’의 친구들과 합심하여 1909년 러시아 발레의 최초의 역사적이고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다. <보르스 두고노프>, <아르미다의 궁전>, <폴포프츠의 춤>등. 1910-14년 까지 매년 파리로 작품을 가져왔다. 우리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속에서 ‘예술세계’가 존재했던 당시의 러시아 예술가들의 삶이 창출해 낸 완전한 소우주를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와 서구의 예술 세계에 끼친 영향을 볼때, 그들의 포부는 타당한 것이었고 그들의 활동은 러시아로부터 나온 새로운 국제 문화를 현실적으로 창조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예술세계’의 두 화파

*페테르부르크 화파는 전통적인 원근법에 의존하지 않고 공간을 표현하는 새로운 구성을 발견했다. 창문을 통한 이중세계 표현, 과장된 실루엣. 실루엣 속에 펼쳐진 물체들을 통해 시간 속에서 포착된 순간의 시각적인 인상들로서의 회화의 특질을 강조했다. 즉 선의 유창함으로 전통적이고 아카데믹한 방법을 타파하고 인각의 모습을 장식적인 형상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모스크바 화파 - 색채를 강조한 모스크바 화파는 캔버스의 평평함을 추구했다. 평평한 채색으로 정적이고 닫힌 형태들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했다. 무한한 공간과 스며드는 것 같은 분위기로 심오한 리얼리티를 나타낼 수 있는 상징주의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확장된 전경과 시점이 하늘에서부터 맨 뒤까지 끌어당기도록 분산되는 평범한 빛을 자주 사용했다.

코로빈과 같이 러시아 미술가들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은 빛과 색채로 한 장면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리얼리티에 관심이 없었으며, 배경과 사물을 똑같이 취급하는 붓 터치의 리듬을 그림 전체에 사용함으로써, 분리시켜 모호하게 한정짓는 요소가 아닌 칼라패치, 즉 색 면으로 인물을 나타냈다.

빅토르 보리소프-무사토프는 유일하게 페테르부르크 화가들의 무대그림과 18세기 및 모스크바 화가들의 색채 실험을 결합시킨 화가였다. 그는 야수파작가를 키워낸 귀스타브 모로의 작업실에 4년 동안 있었으며, 퓌비 드-샤반의 영향으로 역사적인 양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말년에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우울한 분위기와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을 그렸다.

※ 러시아 미술관련 WebSite - http://www.russianavantgard.com/index.html

(참고) =================================================================================

러시아 미술의 특질

[유럽미술과의 접촉]

러시아미술은 직접적으로는 고대그리스의 미술과 접촉하거나 영향받은적 없이, 10세기말에 비잔틴제국으로부터 기독교미술을 섭취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 18세기에는 유럽 속의 러시아를 지향한 적극적인 서유럽화정책이 추진되면서 전역사를 통해 유럽미술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럽미술과 완전히 보조를 같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가 종교적으로 동방정교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점, 유럽으로부터 분단,고립된 기간이 길었던 점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른바 '따따르의 멍에', 즉 13세기부터 250년간 계속된 이민족 몽고인의 지배로 인한 고립화는 유럽으로부터의 영향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러시아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등에 상응하는 시대를 겪지 못했다. 그리고 유럽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된 미술이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적인 풍토에 뿌리를 내리면서 기독교 이전의 이교적인 요소 혹은 몽고인 침공 이후의 아시아적인 요소 등과 융합하여 새로운 것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럽미술과의 차이는 종교의 차이에서도 비롯되지만, 유럽이 '돌 문화권'인 데 반하여 러시아는 슬라브민족 특유의 '나무문화권'에 속한다는 본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기독교로의 개종, 18세기 뾰뜨르1세(대제)에 의한 유럽화 정책, 20세기 들어 겪게 된 혁명 등 정치적 변혁과 역사적인 사건들과 연관되어 미술의 흐름이 급전환을 하게 된 것도 러시아미술의 큰 특색이다.

미술활동의 무대가 된 유럽 동부평원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인데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텐산 등의 산맥이 가로막고있어 남쪽 스텝지대를 제외하고는 아시아대륙의 문화가 유입될 수 없었다. 그래서 슬라브인은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의 국제교역로를 통해 북은 바이킹과 노르만(바랴기), 남으로는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제국과 교역 및 전쟁을 통해 접촉을 계속 유지해왔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이 러시아 유럽화의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미술 세계의 창조]
988년 러시아 최초의 국가인 끼예프러시아가 기독교로 개종하자, 기존의 애니미즘신앙에 바탕을 둔 모든 미적 창조물은 모두 파괴되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비잔틴제국 콤네노스왕조의 이른바 궁정 직속 비잔틴미술이 전해졌다. 봉건제 강화를 위한 기독교로의 일원화는 이교적인 요소를 포섭, 동화시켜 가면서 차츰 러시아 특유의 미적 세계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미술이 당초에 비잔틴양식을 따르면서도, 그 엄격한 양식을 떠나 조금씩 지방적 특색을 지니기 시작한 것은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였다. 그 직접적 동기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리스공략과 뒤이은 라인 강으로의 국제교역로 이동으로 비잔틴과의 교류가 차단되었던 저, 따따르의 러시아 침공이 시작되면서 삼림지대로 밀려난 점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깊은 숲을 외곽방패로 삼고 그 안의 넓은 평야에 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예부터 핀족 및 슬라브족들의 사회에서 전해내려온, 못을 쓰지 않고 목재만으로 집을 짓고 가구,연장을 짜맞추는 특유의 목공기술은 이 무렵 완성기에 접어들었고, 그 독특한 형식과 형태를 석조건축과 공예에까지 응용했다. 외적에 의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된 이 시대에는 그리스의 성지 아토스계의 높은 정신이 특히 북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꼰에 반영되어 있다.

[서유럽화정책과 러시아미술]
러시아미술이 한정점에 도달한 것은 따따르로부터 해방되어 일단 국가적 통일을 이룩한 15세기말이다. 꼰스딴찌노플의 함락에 뒤이어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이탈리아로부터 건축가를 초청하여 모스크바 크렘린 안에 석조교회당과 궁전건물을 잇따라 지었다. 러시아미술사의 큰 전환은 18세기에 일어났다. 뾰뜨르대제의 대개혁에 따라 미술은 종교에 봉사하는 종교 미술이 아니라 세속적 절대권위자인 황제를 위해 봉사하는 궁정미술로 변한다. 회화에서는 그 중심이 이꼰에서 초상화로 옮겨지는 등 세속미술이 나타나게 된다. 러시아미술의 낙후를 만회하기 위해 기술습득이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중세 이래의 전통적인 종교미술은 두드러지게 약화되고 역사화, 풍경화, 풍속화 등 서유럽의 회화장르가 성행하게 된다. 러시아 미술사를 통틀어 놀라운 비약을 이룩한 것은 19세기의 회화이다. 러시아는 이 시기에 18세기 이래 불과 1세기 동안에 서유럽미술 수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동전파처럼 그림을 매체로 해서 민중을 계몽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화가그룹도 등장하게 된다. 특히 혁명 직전에는 첨단적인 전위파들이 무수히 난립하면서 미술계의 역량은 가위 그 극에 달하게 된다.

회화

[종교화의 융성]
10세기말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 17세기까지, 러시아회화는 2차원적 표현을 쓴 종교화가 판을 쳤다. 기독교를 예찬하고 신과신의 세계를 묘사해내는 역할을 하는 이꼰, 프레스코, 모자이크가 오랫동안 회화를 대표하였다. 그 기법은 기독교화를 전후해서 비잔틴에서 끼예프로 전해졌다. 그리하여 러시아회화는 고대그리스풍의 위엄있는 인물상을 평면에다 옮기는 웅장하고 간결한 필치를 배우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다른 나라에선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러시아에서 이꼰이 발달한 것은 삼림자원이 풍부하고 나무숭배와 토속신앙에서 비롯된 수호성인이 많은 점과 관계가 있다. 비잔틴의 엄격한 양식에서 벗어나서 일찍부터 독창성을 보인 지역은 북노브고로드였다. 그곳에는 일찍부터 미회(베체)가 발달하여 다른 도시에 비해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서유럽과 접촉이 있는 등의 특수성을 작용하여 덜 엄숙하고 친근감을 주는 양식이 발달하였다. 짙은 색채와 선명한 윤곽을 좋아하는 경향은 일찍이 12세기 노브고로드 근교 프레스코에서 나타났다. 한편 북동부의 블라지미르 주변지역에서는 비잔틴에서 선물로 보낸 '블라지미르 성모'를 본보기로 하여 비잔틴 정통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정신성이 높은 민족적 감정을 반영한 양식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13세기에 시작된 이민족 침입으로 블라지미르는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는 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여러 도시들이 폐허로 변해가던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는 이민족 침범을 모면한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14세기에는 프레스코의 영향을 받아 우아하면서 아름답고 명쾌하며 율동적인 노브고로드 특유의 이꼰 양식이 생겨 14~15세기에 그 전성기를 맞는다.

14세기말에서 15세기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왕조 파라이오로고스의 영향을 받고 자란 개성적인 화가들이 배출된 황금시대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파의 성과를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화가 페오판 그레크 Feofan Grek(1330년경~1410년경)를 노브고로드로 초빙한 것이 큰 계기였다. 뛰어난 기량과 높은 지식을 가진 이 그리스화가는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이꼰화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몽고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조짐이 보이고, 모스크바공국이 국내통일을 이루어나가고 있던 15세기초에 모스크바 근교 수도원 출신으로 추정되는 수도사 A.루블료프가 이꼰과 프레스코의 최고 걸작을 남겼다. 대표작 '성삼위일체'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종교철학적인 상징성을 지닌 신비롭고 아름다운 화풍을 확립했다. 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화가 디오니시 Dionisii(1440년경~1502년경)는 루블료프의 전통 위에서 새로운 감각을 갖춰, 아름다운 선과 중간색을 사용하는 서정적이고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했다. 콘스탄티노플리스가 함락되어 동방정교회의 지도권이 러시아정교회로 넘어가고, 러시아가 몽고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독립할 무렵부터 이꼰의 인물묘사나 배경이 러시아적으로 변해갔다. 16세기중반, 독재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각지의 뛰어난 이꼰화가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어 지방의 유파들은 자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 출신의 우수한 화가들이 모스크바파를 이루었다. 또 이 무렵부터 신의 세계를 찬미해오던 이꼰이 지상의 주권자인 군주를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고 금은세공으로 장식된 공예품이 등장했다. 세부적인 묘사와 스토리성이 강해지는 경향 속에서 이채로웠던 유파는 북쪽의 거상 스뜨로가노프 가를 위해 가정용 소형이꼰을 세밀화로 만든 스뜨로가노프파였다. 작품에 제작자의 이름을 밝히기 시작한 것도 이 유파였다. 17세기의 화가 우샤꼬프(시몬 푸아도로비치 우샤꼬프;1626~86)는 로마노프왕조 최초의 화가이자 마지막 이꼰화가였다. 그는 종래의 장엄함을 이꼰에다 되살리면서도 점점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나갔다. 오랜 동안 2차원적 표현이라는 엄격한 전통을 따라왔던 이꼰도 폴란드로부터 전해온 세속적인 서유럽 리얼리즘회화의 영향을 받아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속화의 탄생과 근대화]
러시아 정교에 뿌리를 둔 전통문화를 밀어젖히면서 추진되 뾰뜨르대제의 서유럽화정책으로 러시아회화는 급속히 근대 서유럽회화와 가까워졌다. 비잔틴적인 종교미술의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졌으며, 뻬쩨르부르그궁정을 중심으로 세속적 미술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시대 회화의 주류는 이꼰을 대신하는 초상화와 장식화였다. 1757년 뻬쩨르부르그에 미술아카데미가 창설되어 프랑스에서 지도자를 맞아들이면서 러시아에서도 초상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기 회화는 프랑스회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여기서 벗어나 러시아가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사회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되는 19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나폴레옹전쟁(러시아인들은 조국전쟁이라함)에서의 승리는 애국심에 눈을 뜨게 했으며 역사화, 풍속화, 풍경화 등 모든 장르의 그림이 탄생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이바노프(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이바노프;1806~58)처럼 국민의식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도 나타났다. 1850년대말~60년대는 전제정치하의 사회비판을 담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페로프(바실리 그레고레비치 페로프;1834~82)처럼 화필로써 사회 최하층계급의 비애를 호소하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1870년, 진보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카데미즘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발족한 이동전파 화가들은 러시아적 사실주의를 완성시키는 한편, 그림을 통하여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890대말에는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동전파를 비판하는 모더니즘운동이 일어났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두 갈래로 크게 나뉘는 여러 미술단체들이 등장하여 러시아회화는 크게 발전했다.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다이아의 잭'파의 등장(1910)등 마침내 서유럽 근대미술의 수준에까지 도달한 바로 그 즈음에 혁명을 맞게 된다.

그리고 18세기부터 성행한 민중판화 루보끄는 이와 같은 시류에 물들지 않고 20세기초까지 러시아의 오랜전통을 지켜나갔다.

조각
기독교는 러시아에 건축, 회화, 공예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으나 환조조각은 우상을 만드는 일로 간주된 까닭에 18세기까지는 본격적인 조각예술의 발달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12세기에 제2의 수도 블라지미르를 중심으로 외벽면에 성경의 주제와 이교적인 모티브가 뒤섞인 동식물과 인물 머리부분을 얕게 양각한 교회당건축이 나타난것은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지방이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하천을 통한 교역으로 독일,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과 접촉이 있었고, 특히 동방으로부터 들어온 직물과 금속공예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목조건축의 장식으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인 조각예술이 일기 시작한 때는 뾰뜨르대제시기였다.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초빙된 건축가들과 함께 러시아로 들어온 조각가들이 당시 유럽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바로크양식을 전하면서 18세기 중엽에 이미 조각은 전성기를 맞는다. 1716년 이탈리아의 조각가 라스뜨렐리 Bartolomeo Carlo Rastrelli(1675년경~1744, 건축가, B.F.라스뜨렐리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초빙되어와서 정원에 세운 조상을 비롯, '뾰뜨르대제 흉상'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이어서 프랑스의 팔꼬네 Etienne Falconet(1716~91, 1766~79년 뻬쩨르부르그 체류)는 뾰뜨르대제 기마상인 "메드늬이 프사드닉"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러시아조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757년에는 미술아카데미가 개설되어 러시아에도 비로소 본격적인 조각가가 육성되었다. 그리스조각을 예찬하는 자, 바로크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고전을 따르려는 자 등 갖가지였다. 19세기 후기에는 자연주의적인 세밀한 묘사와 인간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이 추구되기도 했다. 이어서 이어서 뜨루베츠꼬이(빠벨 뻬뜨로비치 뜨루베츠꼬이; 1866~1938) 같은 인상주의적 경향을 보인 작가도 나타났고, 20세기초에는 꼬논꼬프 (세르게이 띠모페예비치 꼬뇨꼬프;1874~1971)같은 대조각가를 낳게 된다.

공예
천연자원의 보고인 러시아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종교의식에 쓰이는 예배용 도구를 국내에서 만들게 되면서 귀금속, 보석세공, 칠보, 흑금상감, 도금, 조금 등 모든 기술을 습득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목제 민간생활용구의 형식을 그대로 금속기구에 옮겨 적용하여 손잡이가 붙은 술잔 등 러시아 특유의 형식을 낳았다. 또 러시아의 칠보는 국제적 평가가 높으며 비잔틴, 아르메니아,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달한 것인데 금선이나 은선을 비틀어서 새겨넣은 에마이유 크로아존네는 16~17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17세기에 모스크바 크렘린내의 무기고에는 황실이 주문하는 물품을 만드는 러시아인, 외국인 장인들이 모여들어 러시아공예의 중심을 이루어서 마치 중세 미술,공예아카데미와 가튼 구실을 하였다. 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은 큰 수도원이나 귀족들의 영지 안에도 있었다. 17세기는 모든 공예가 급속히 발전한 시기로 가구, 나염품, 유리제품, 목각, 석각, 보석세공, 자수 등도 바로크 양식과 오리엔트공예품의 영향을 받아 발달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뻬쩨르부르그에 왕립직속 도요공방도 생겼으며 유럽으로부터 지도자를 맞아들여 도자기류도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아방가르드 미술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20세기초 제정러시아는 서유럽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공업화를 도모해왔으나 1905년 '피의 일요일'과 러일전쟁 패배는 러시아 전체를 뒤흔들어놓았다. 이동전파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대사업가 마몬또프(싸바 이바노비치 마몬또프;1841~1918)는 개인미술관을 세워 러시아농민 미술의 성과들을 수집, 전시했고, 사설 오페라극장을 세워 운영하면서 무대미술을 화가들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밖에도 S.I.시추낀이나 I.A.모로조프는 인상파 이후의 서유럽 미술작품을 수집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댜길레프, 베누아 등 '예술세계'그룹(1898년 결성)은 메레슈꼽스끼와 블로끄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중세의 이꼰을 배우면서 서유럽의 아르 누보에 접근하였고, P.V.꾸즈네쪼프, 미류티 형제, M.S.샤리얀 등의 '푸른 장미'(1907)는 포비즘과 접촉하여 상징주의를 넘어선 프리미티비즘(원시주의)을 지향했다. '푸른 장미'파에 속했던 라리오노프와 그의 아내인 꼰차로바는 1910년 I.I.마슈꼬프, R.R.파리끄, P.P.꼰차롭스끼 등과 '다이아의 잭'그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큐비즘과 뮌헨의 '청기사', 그루지야의 화가 피로스마나시빌리(피로스마니) 등을 전람회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잔느주의에 머물고 있는 동료들에게 불만을 품어 1912년에는 샤갈, 말레비치, 타틀린 등과 '나귀꽁지'그룹을 결성하였고, 또 물체가 내뿜는 반사광이 교착하는 추상공간을 추구하면서 광선주의(루치즘)를 제창했으나, 1915년 발레 뤼스에 무대미술가로 참여하여 파리로 망명했다. 러시아 큐비즘은 미래파와 결합하면서, D.D.블루류크, I.A.푸니, N.I.아리트만 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비구상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백지에 흑백의 정사각형, 원, 십자모양을 배치해서 우주적 명상을 표현하는 말레비치의 수프레마티즘과 철, 나무, 종이, 석고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를 릴리프 모양이나 매다는 식으로 만드는 타틀린의 구성주의와 대립이 깊어졌다.

10월 혁명에 뒤이은 내전과 외국군간섭의 시기에 "가두는 우리들의 붓, 광장은 우리들의 팔레트"라고 부르짖던 마야꼽스끼는 전보주문을 받으면 당장에 스텐실 인쇄와 목판으로 포스터를 인쇄하여 배달해주는 '로스타의 창'을 조직하였다. 뻬뜨로그라드의 혁명1주년 기념행사 때 아리트만은 동궁(겨울궁전)의 벽을 미래파풍의 그림으로 장식하고 광장 중앙에 거대한 추상조각을 세우고 무장병사와 군중을 조명으로 비추는 야외극을 연출하였다. 또 메이예르홀트나 타이로프의 실험극에 많은 미술가들이 협력했고, 차체나 선박 몸체에 그림을 그려넣은 선동열차와 선동기선도 야외극의 무대가 되었다. 초대 교육인 민위원장 루나짜르스끼는 동 위원회에 조형예술부(IZO)와 그 협의회를 설치했고, 모스크바미술학교를 회화, 조각, 건축, 도예, 금속공예, 직물, 인쇄의 7개 부문으로 개편하여 시민들에게도 개방했다. 또 서유럽에서 귀국한 자와 국내 급진파를 프후테마스(고등예술기술공방)의 교사로 등용하여 예술혁명을 추진했다. 샤갈은 고향 비텝스끄미술학교 교장이 되어 리시츠키와 말레비치를 교사로 초빙했다. 프후테마스의 교수이자 신설된 회화문화관장으로, 예술문화연구소의 예술교육 개혁안을 기초한 칸딘스끼는 색채, 선, 형태 등의 기본적 요소를 분석해서 기하학적 구성을 중시하고 각 예술을 종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개인적이고 순수예술적이라 하여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구성주의는 당시 생산과 예술의 직접적 결합을 추구하였으며, 프롤레따리아문화의 창조를 목표로 내건 프롤레뜨꿀뜨운동과 손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맹일소와 부르주아문화의 유산계승을 선결문제로 본 레닌은 프롤레따리아문화의 성급한 주장을 비판하고 혁명선구자들의 조상건립을 추진했다. 이러한 가운데 타뜰린이 구상, 계획한, 철과 유리로 된 나선구조에 빛, 전파, 영상 등을 모두 동원한 높이 400m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1920)'은 끝내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구성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1921년 녜프와 함께 질서재건 움직임이 일고 특히 1924년 레닌이 병사한 후, 스딸린의 일국사회주의노선 아래서, 보수적 경향이 강해진다. 아방가르드는 숨을 죽이게 되고 많은 미술가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러한 가운데 '혁명러시아 미술가연맹'등 사실적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그 세력은 1920년대말에 '라쁘'(라시스까야 아쏘찌아찌아 쁘랄레따르스끼 삐싸찔리;RAPP,전러시아 프롤레따리아작가동맹;1925-32)로 합류했다. 1932년에 이르러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문학예술단체를 해산하고 장르별 단일조직을 결성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소련미술가동맹'이 생겼는데, 이것은 스딸린체제 문화영역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했다. 1934년에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쏘비에트예술문학 및 문학비평의 기본적 방법'으로 공인된다. 이 무렵에 대숙청이 시작되어 아방가르드예술도 형식주의이고 코즈머폴리터니즘이라 하여 공격대상이 되었고, A.M.게라시모프, B.V.이오간손 등의 영웅적인 표현속에 현실긍정을 담은 작품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기는 사리얀, A.A.디네카, 쿠크리니크시 등 근대적 요소를 잔존시킨 예술가들이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경향은 대조국전쟁(제 2차 세계대전)부터 스딸린 말년에 걸쳐 절정에 달한다. 비스딸린화의 도화선에 불은 당긴 흐루시쵸프는 당 제1서기시대에 어떤 작품을 '나귀꽁지'라고 비판했는데, 만년에 그는 그 말이 본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고 사과하고 그 조각가 E.I.네이즈베스트니에게 자기가 묻힐 묘의 설계를 맡겼다.

뻬레스뜨로이카(재건) 이후로는 미술계에도 자유의 바람이 불어 미국이나 유럽의 동시대미술과 거의 병행하는 조형활동이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공개될 수 있게 되었다. 또 20세기초의 아방가르드예술에 대한 재평가도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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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길레프 … (러시아 ∵ 예술가) … Diaghilev ∵ Sergey ∵ Pavlovich
1872. 3. 31 러시아 노브고로트 지방~1929. 8. 19 이탈리아 베네치아.
러시아의 예술 진흥에 크게 공헌한 인물.

음악·회화·연극과 같은 각기 다른 예술 형태의 이상과 춤의 이상을 결합시켜 발레를 부흥시켰다. 1906년부터 파리에 살았으며 1909년 발레 뤼스를 창단했다. 이후 발레 뤼스를 이끌고 유럽·미국을 순회했고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명작 〈불새 The Firebird〉·〈페트루슈카 Petrushka〉·〈봄의 제전 The Rite of Spring〉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러시아군 소장과 귀족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다. 어머니로부터 꿈꾸는 듯한 큰 눈을 물려받았으며 개인적으로나 예술적인 면에서의 호사스러운 취미도 물려받은 듯하다. 그는 자신이 완전한 쾌락주의 철학을 따른다고 여러 차례 밝히곤 했다. 계모 헬렌 발레리아노브나 파나예바에게서는 규율감과 지배 본능을 물려받았으며, 어린시절 그의 예술적 감성은 그녀가 음악과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덕분에 발전했다. 학생시절에 피아노 교습을 받고 청중들 앞에서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1890년부터 사회과학·음악·회화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는 그가 한평생 주도한 여러 지성적인 모임 가운데 첫번째 모임이었다. 당시의 친구 가운데 화가 알렉산더 베노이스, 레온 바크스트는 후에 디아길레프의 발레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와 발레의 첫 만남은 엉뚱하게도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1890년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Sleeping Beauty〉를 별 감흥없이 보았던 것이다.

1893년 첫번째 해외여행에 나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를 돌다가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와 오페라 작곡가 샤를 구노, 주세페 베르디를 만났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예술인들을 찾아다니며 자극을 받았다. 1896년 법과대학을 졸업했으나 그는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청중들 앞에서 발표된 그의 성악곡이 신통하지 않자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가 작곡가가 되는 데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후원자를 만나 샬리아핀이 등장하는 오페라 제작을 위한 혁신적인 무대장치를 제안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는 확신을 갖지 못했으나 로마 시대의 매세나 같은 위대한 예술 후원자의 역할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했다. 오페라·발레·문예행사 같은 공연사업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으므로 사적인 수입 없이 이 일을 시작한 그는 많은 장애에 부딪혔다. 더구나 19세기 러시아에서 그의 동성연애는 활동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성적인 매력과 대담함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1899년 그는 〈예술세계 Mir Iskusstva〉를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음으로써 이러한 국제적인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 잡지의 성격은 런던에서 그래픽 미술가 오브리 비어즐리와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생각을 반영하던 〈옐로 북 Yellow Book〉과 비슷했다. 1905년 디아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타우리데 궁에서 역사적인 러시아 예술전을 열었다.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1906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한 것이었다. 바로 파리에서 그는 나중에 프랑스-러시아 예술가동맹이라 불리게 된 조직을 만드는 데 힘썼다. 그는 러시아 예술전을 기획했고 1907년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었으며, 1908년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를 표도르 샬리아핀 주역으로 파리 오페라좌에서 러시아어로 공연했다. 마침내 여러 예술들의 결합 내지 상호침투라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할 때가 왔다. 1899년 러시아 황실 극장 감독 세르게이 볼콘스키 대공의 조수로 임명된 디아길레프는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의 영향을 깊게 받아 창의적 활동을 벌이던 무용가 미첼 포킨을 만나게 되었다. 덩컨의 혁신적인 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이상,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디아길레프는 1909년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발레 뤼스의 첫 시즌을 시작했다. 무용가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미첼 포킨이 그의 무용단에 속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길레프의 공연물에서는 판에 박힌 안무가 자취를 감추었다. 주로 포킨과 레오니드 마신의 영향 아래 완전히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고 있었던 안무가들의 목표는 마임 혹은 행위의 춤이었다. 낡은 예술 형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선택된 작곡가들은 화가와 안무가들의 환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는 디아길레프의 뛰어난 창조물이었으며, 통합예술의 이상을 타고난 안목을 바탕으로 실현한 것이었다. 디아길레프의 예술은 젊은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발레곡 〈불새〉·〈페트루슈카〉·〈봄의 제전〉의 3편에서 절정에 달했다. 디아길레프가 기획한 발레 가운데 가장 뛰어난 〈페트루슈카〉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의 주장에 따라 자신이 종래 작업해오던 진부한 개념의 피아노 협주곡을 마임 형식의 발레곡으로 바꾸어 연예물에 나오는 꼭두각시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실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디아길레프가 함께 일하는 제작진들에게 매우 큰 심리적 영향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관현악곡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이 파리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자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 음악의 불협화음과 거친 리듬은 세련된 관객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관현악단 가까이에 있는 무용수들도 음악을 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대 곁의 의자 위에 서서 고함을 치며 몸짓으로 리듬을 지시한 안무자 니진스키 덕분에 무용수들은 공연을 계속했다. 

디아길레프는 조국 러시아를 떠나 끝내 되돌아가지 않았고, 파리에서 특히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와 일했다. 자신의 발레단을 이끌고 유럽·미국·남아메리카를 순회하였으며 그의 발레 시즌은 1909~29년 동안 계속되었다. 후기의 시즌에는 프랑스·이탈리아·영국·미국 출신의 진보적인 작곡가와 화가들의 작품을 발레에 도입했는데 그의 레퍼토리에 포함된 작곡가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있다. 그는 큰 영향력을 지녔지만 가난했으며,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고독했으며 불만이 많았다.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결코 완벽함을 실현하지 못했으나 늘 개척정신을 지녔다. 그는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았는데,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1929년 시즌이 성공적으로 끝날 즈음 건강이 악화되어 베네치아로 휴가를 떠났으나 고열로 혼수상태에 빠져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산미켈레의 섬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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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회귀, THE GREAT REGRESSION
Sept. 29, 2010
by Jerry Saltz

http://www.artnet.com/magazineus/features/saltz/dan-colen9-27-10.asp



2010년에 2007년을 만든 Dan Colen
; Dan Colen is making 2007 art in 2010.

예술의 계절 가을이 - 소문에 의하면 과대투기사업의 마지막이 정리된 한참 후에- 선의한척 하지만 잘못된 콜른과 같은 어리석은 영혼과 함께 시작됐다. 몇 주 전에, 뉴욕타임즈는 발기한 성기에 탈리스(유대인이 기도할때 쓰는 숄)을 매단 자신의 나체사진의 전시 전단지로 2006 베를린에 소란을 일으켰던 작가를 대서특필했다. 이 얼간이가 선생이라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한건 우리에게 피카소와 만초니의 화려한 전시를 선사한 슈퍼스타 메가딜러 래리 가고시안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신의 영역 표시의 신뢰도를 끝까지 불태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The fall art season has begun -- well after the purportedly cleansing end of the bubble -- with the Spirit of Stupidity, stalking us in the form of the well-meaning but misguided Dan Colen. A few weeks ago, the New York Times featured the artist, reporting that he caused an uproar in Berlin in 2006 by posting exhibition flyers that showed him nude with a tallis hanging from his erection. The would-be rabbi breathing life into this golem is superstar mega-dealer Larry Gagosian, who has given us stellar shows of Picasso and Manzoni, but here seems intent on burning up his credibility on a display of dominion.

만약 이 전시가 아무 다른 갤러리에서 했다면, 무시되거나, 최소한 2007년 중 하나의 이벤트로 여겨졌을것이다.  -- 수없이 많은 모조품을 멍청한 컬렉터들이 지나치게 열심히 무분별하게 거래했다. 물론 콜렌이 재능이 없는건 아니다. 그는 트롬프 뢰유(눈속임 그림)도 안다. 그는 달리를 거쳐 디즈니에서 영감을 받아 촛불 대형회화 연작을 포함해 과거에 좋은 작업을 했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전시는 모두 전략적이고 무미건조하다. -- 아주 객관적이고, 호황시절의 연극조로 쓰여진 각본은 매끄러운 시장원리의 얇은 판으로 귀결되었다. 풍선껌으로 만든 대형 회화는 잭슨폴록과 이브클랭 추상회화의 재탕이다. 거대한 해프-파이프를 뒤짚은 화판은 아마 미니멀리즘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2002년 Jeffrey Deitch가 그의 갤러리에 보여주었던 볼처럼 둥근 화판을 생각나게한다. “시” 라고 불리는 이 전시에서 마찬가지로 데미안 허스트가 보여줄수 있는 초토화된 기차의 잔해처럼 주의를 끌만큼 재밌지 않았다. 콜렌의 전시는 자생적이지 않다.
;If this show were at almost any other gallery, it’d be ignored, or at least written off as an event straight out of 2007 -- an array of ersatz art calculated to cash in on the mindlessness of overeager, oblivious collectors. Indeed, Colen is not untalented, and he has a way with trompe l’oeil realism. He has made good work in the past, including a series of large paintings of candles inspired by Disney by way of Dali. His current show, however, is all strategy and insipidity -- so clinical and scripted that its boom-time theatricality and market-driven slickness are laminated on arrival. Large pretty paintings made of chewing gum replicate the abstraction of Jackson Pollock and Yves Klein. There’s a huge skateboard half-pipe displayed upside-down that is presumably meant to bring minimalism to mind but just makes you think of the skateboarding bowl Jeffrey Deitch placed in his gallery in 2002. “Poetry," as the show is called, isn’t even fun in the way that, say, a Damien Hirst show can be, as a train wreck of attention-getting desperation. Colen shows not a lick of spontaneity.

소문에 30만 달러를 웃돌던 작품을 아마 거의 다 팔아치워 텅빈 가고시안을 우리는 무시할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자체 협정은 사라지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밝혀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에 대해 얘기 하고, 무엇을 해야하냐는 것이다. 저항은 무의미한것인가?
;Emptiness at Gagosian -- with prices rumored to be around $300,000 and all the work supposedly sold -- can’t be ignored, and won’t go away of its own accord. We all have to discuss it. The question becomes what to do, how to talk about it. Is resistance futile?

문제는 더이상 갈 곳 없는 게임속에서 단지 기꺼이 볼모가 된 콜렌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잘못된 생각들, 그리고 겉만 번지르르한 가고시안과 냄새나는 다른공간의 텅빈 스펙타클한 세상이다. 옛날 1990년대, 예술은 작가-딜러-구매자의 집합체를 비판하기 위해 컬렉터를 유인하는 구조와 연좌하려고 저속하게 강제적으로 내부를 교란시키는 체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각광받는 아무 아티스트, 딜러, 큐레이터의 거대 산업의 비싼 작품을 소유했다. 콜렌이 치즈로 그림을 그리고, 오토바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스케이트보드 경사로같은 하이/로우 아트는 이제는 이미 구태의연한 사고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더이상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예술의 구시대적 사고에 대한 낡은 예술이다. 이 시점에서, 워홀, 리차드 프린스, 다카시 무라카미와 제프쿤스의 발자국을 따라 계속 파생되고, 완전히 자동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콜렌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숭배하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것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은 마치 social light의 울타리 안에서 쫓겨나 초대받지 못할까 두려운 것처럼, 예술이 나쁘다고 많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것 같다. 
;The problem is not so much with Colen himself, who is just a willing pawn in a dead-end game. It’s his kind of faulty thinking, and the brassy, vacuous spectacles staged at Gagosian and elsewhere, that are poisonous. Once upon a time in the 1990s, art that wanted to be complicit with the system, that tried to lure collectors as it criticized the artist-dealer-buyer complex, had an edgy Trojan-horse coerciveness. A lot of people got rich creating a gigantic industry of artists, dealers, and curators who’d do almost anything for the limelight. By now, Colen’s high/low art -- paintings made of cheesy materials; kicked-over tricked-out motorcycles; those skateboard ramps -- is not only lazy thinking. It is old-fashioned art about old-fashioned ideas about commodity-art-about-art that no one cares about anymore. At this point, continuing to follow in the footsteps of Warhol, Richard Prince, Takashi Murakami and Jeff Koons appears derivative, completely mechanical, and possibly corrupt. Colen fetishizes a moment that no longer exists, and behaves like nothing’s changed. People seem scared to say a lot of this art is bad; it’s as if they fear being uninvited, cast out from the circle of social light.

전시가 중단될정도로 값비싸고 호화롭게 만들어진 전시는 개인전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현란한 종류의 선전들이 사라지고 전시회는 방을 벗어나면 온통 실망스런 분위기다. 그러나 콜렌의 전시는 희망의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자본은 몇년 전에 그랬던것처럼 완전히 예술 담론을 지배하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없이 이런 강렬한 환대 속에 힘없이 물러나버린 시스템의 양상이 재생되기를 노력한다. 나는 그것이 스스로를 지켜낼거라 생각한다. 진짜 얼간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대기업이 무의식적으로 더이상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더이상 그 자체가 끝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에 의존하고 풋내기들을 속이는시대는 지나갔다. 직감은 다시 돈보다 더 중요해졌다. 앤디워홀이 “상업미술”의 미래에 대해 유명한 말을 했다. 우리는 여기 있지만, 예술은 없다. 단지 사업가만 있다.
;Highly produced show-stopping extravaganzas make it hard for more personal shows to gain traction. It’s frustrating that just when these sorts of gaudy gestures were going away, a show like this sucks all the air out of the room. But the Colen show is also a reason to hope. Now that money is not dominating art-talk as thoroughly as it did a few years ago, attempts to play this aspect of the system come off as hollow, high-octane celebrations of nothing. I think that this will take care of itself. Except for the real dupes, most people instinctively know that big is no longer automatically better, doing something just because you can is no longer an end in itself, hunger for power and snowing rubes is old hat, vision is again more important than money. Andy Warhol famously talked about a future of “business art." Here we have that, but without the art. Now we’re just getting the business.












Dan Colen, Overture ("Two Minutes in Silver Wells, Two Minutes Here, Two Minutes There, It Was Going to Be Over in This Bedroom in Encino), 2010, Gagosian Gallery, New York
© Dan Colen
Photo by Robert McKeever

Dan Colen, "Poetry," installation view, Gagosian Gallery, New York
© Dan Colen
Photo by Robert McKeever

Dan Colen, "Poetry," installation view, with The Space between Nothing and Everything, left, and Overture ("Two Minutes in Silver Wells, Two Minutes Here, Two Minutes There, It Was Going to Be Over in This Bedroom in Encino), both 2010, at Gagosian Gallery, New York
© Dan Colen

Dan Colen, "Poetry," installation view, with Cracks in the Clouds, foreground, and In a Million Years, both 2010, at Gagosian Gallery, New York
© Dan Colen
Photo by Robert McKeever

Dan Colen, Cracks in the Clouds, 2010, Gagosian Gallery, New York
© Dan Colen
Photo by Robert McKeever











Dan Colen, And She Smiled Sweetly, 2010, Gagosian Gallery, New York
© Dan Colen
Photo by Robert McKeever


Dan Colen, And She Smiled Sweetly, 2010, Gagosian Gallery, New York
© Dan Colen
Photo by Robert McKeever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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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평론가에게 물어보세요, ASK AN ART CRITIC 
Oct. 4, 2010
by Jerry Saltz

http://www.artnet.com/magazineus/features/saltz/ask-an-art-critic10-4-10.asp




엘리트의식
, 입신출세주의 그리고 족벌주의에 대한 독자의 질문과 제리의 답변.
A new feature: Critic Jerry Saltz answers his reader’s questions on elitism, careerism and cronyism.

Q. 제리, 난 당신이 예술이 엘리트 활동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그게 좋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새라 페일린(미국 공화당의원)과 관계되는 작품을 만들거나 글렌 백(폭스TV/유명보수논객)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작품에 대해 말하길 바라겠는가? – 스테파니 벤슨
; Dear Jerry,
I know you don’t think art is an elitist activity, but I do. And I think that’s a good thing. Why would I want to make work Sarah Palin could relate to? Or talk about work in a way that Glenn Beck could understand?

Stefany Benson

A. 스테파니, 난 당신이 어디 출신인지 압니다. 난 여전히 반대다. 그것은 예술은 어떤 사람을 위한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작년 평론에서, 나는 글렌 백에게 자기 입맛에 맞고, 좋아하는 작품 선별해줄 것을 요구했다. 난 여기에 그 전시에 대해 기고할 것을 약속했다. 나는 그것을 그가 오바마, 무솔리니, 매독, 파시즘에 빠져 정신이 나가서, 록펠러 플라자의 정문에 밀과 망치를 들고 있는 조각상이 전시된 이후에 했다. 그의 광분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예술이 엘리트적이 되길 바랐다. - 그것은 그의 취향을 숨길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엘리트적이지 않았다. - 비록 그게 자주 눈에 띄지만..

요점은 “엘리트”가 되기 위해 과학이나 물리학이나 의학에 너무 울타리를 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술은 과학, 의학 등과 같이 특수분야이다. 당신이 이해한 그 뭔가를 더 자세히 공부하라. 하지만 다른 분야와 다르게 누구든 그냥 보고, 전시장에 가고, 모든 가능한 것을 보고, 그리고 진심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예술 전문가로 그들 자신이 훈련할 수 있다.

예술이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엘리트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시 한번, 그게 아니라 다행이다. 예술이 민주적이라면, 최고의 예술가는 리로이 니만 아니면 가장 비싸게 판매되는 작품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실 이런 거짓된 미친 사고에서 시작된 예술세계의 비정상적인 단계를 이제 막 겪었다. 예술세계가 엘리트처럼 보이도록 만든 다른 이유는 아마 예술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수제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종종 예술 그렇게 비싼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백에게 자유의 여신상 대좌의 시가 공산주의 유태인 여자의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 Dear Stefany,
I know where you’re coming from; I still disagree. It’s been said that art is for anyone; it’s just not for everyone.

In an article last year, I challenged Glenn Beck to put his taste where his mouth is and curate a show of art that he liked. I even promised to write about this show here. I did this after he went bat-shit and tied together Obama, Mussolini, syphilis, fascism, and a door frame at Rockefeller Plaza showing a figure with wheat and a man holding a hammer. When I heard his hysteria, I wanted art to be elitist, too -- so it could hide from the likes of him. But art isn’t elitist -- although it does often hide in plain sight.

The point is that no one rails at physics or science or medicine for being “elitist.” Like physics, medicine, etc., art is a specialist field -- something you understand more the more you study it. Unlike these other fields, however, someone can really teach themselves to be an expert in art, just by looking, going to shows, seeing everything possible, and really thinking about it.

Art can also seem elitist because it’s not democratic. Again, thank God it’s not. If art were democratic, the best artist would be Leroy Neiman or the art that sells for the most money. Sadly, we just went through an idiotic phase where the art world actually started to mimic this sort of demented thinking -- the most expensive art was assumed to be the best. That is passing. The other thing that does make the art world seem elite is that art may be the most expensive handmade thing on earth. I often wonder why art is so expensive.

In any event, whatever you do, don’t tell Beck the poem on the base of the Statue of Liberty is by a communist Jewish woman.



Q. 제리, 데이브 히키가 “정상에서부터 시작해라, 거기엔 사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진짜인가요 거짓인가요?  - 메리 저지
; Dear Jerry, Dave Hickey said, "Start at the top, cause there is no ladder." True or false?


A. 메리, 나는 철학자 데이브 히키의 ‘카우보이’라는 평론을 알고 있고, 무척 존경한다. Hickey는 사막에서 예술 세계의 끝자락에서 삶을 산 샤먼-형이상학 배교자이다. (나는 그가 라스베가스를 떠나서 가르치기 위해 앨버커키로 이사갔다고 들었다.) 그는 우리의 키스 리차드(롤링스톤스 맴버)와 에멀슨(EPL 건반리스트)을 합쳐 하나로 했다. - 우리의 맨 인 블랙. 나는 그러나, 이걸 가지고 그와 함께 싸워야 했다. 요즘 미술 세계는 주의, 양식, 미술관, 혹은 더 이상 “정상”없는 작가들의 서열에서 권력층 수립 없이 너무 크고 너무 많은 다른 일을 하는 너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예술 세계는 - 형태가 변하고, 확장되고, 축소되고, 나타나고, 그리고 사라지는 어떤- 무정형의 구름에 가깝다.

요즘, 젊은 예술가가 레리 가고시안에서 전시를 선보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어리석고, 잘못되고, 균형을 잃고, 상식을 벗어난 느낌이다. - 예술가들이 그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고시안 같은 메가딜러가 당신처럼 젊은 야심 있는 예술가에게 전시할 것을 제안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나는 모든 예술가들이 만약 그들이 원하는 뭔가가 있다면 돈을 벌기 바란다. 혹 당신이 텐트촌, 투기장 같은 카지노로 갈 처지가 되더라도 부디 당신이 ‘네’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단지 조금 줄어드는 것뿐이다. 당신이 꼭 완전한 공간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마 몇몇 갤러리는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냥 가고시안 규모의 동굴 중 하나에서 당신의 작품을 설치하십시요. 작품이 좋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형편없다면, 아마 당신은 여전히 부자일겁니다. - 그곳은 아마도 당신이 처음부터 원하던 곳이었을 겁니다. 당신에게, 그것이 안전하다.

하지만, 주변을 잘 보고, 몸 조심하고, 탭텐스 추는 것을 경계해라,,

Mary Judgee

Dear Mary,
I know and revere critic-cowboy-philosopher Dave Hickey. Hickey is a renegade shaman-metaphysician living on the edge of the art world in the desert (I hear he’s leaving Las Vegas and moving to Albuquerque to teach). He’s our Keith Richards and Emerson rolled into one -- our man in black. I have to disagree with him on this one, however. These days the art world is so big and comprised of so many people doing so many different things, with no established hierarchy of isms, styles, museums, or pecking order of artists, that there is no “top” anymore. Now the art world is more of an amorphous cloud -- something that changes shapes, expands, contracts, appears, and disappears.

These days, if a young artist starts out showing at Larry Gagosian it feels silly, misguided, out of scale, and odd -- like the artist is in it for the wrong reasons. But what do you do if you’re a young ambitious artist and a megadealer like Gagosian asks you to show? I want all artists to make money if that’s what they want. If you’re driven into this tent-city, casinolike arena, I think you can say "Yes," but for God’s sake, scale it back a bit; you don’t have to use the whole space, do you? Maybe close a few of the galleries; just install your show in one of Gagosian’s massive caverns. If you’re good, people will be able to figure it out. If you’re lousy, you’ll still probably get rich -- which is probably what you wanted in the first place. For you, it’s a win-win.

But watch out now, take care, beware of soft-shoe shufflers. . . .



Q. 여기 질문이에요. 미술 평론가가 그들이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작가에 대해 글을 쓴다면 면책사항을 게시해야 하나요? - 박물관 최고 얼간이
; Dear Jerry, Here’s my question: Should an art critic post a disclaimer if they write about an artist whose work they own?

 

A. Dear Mr. 혹은 Ms. 박물관 얼간이,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규칙을 만들지 않지만 내 방식에 있어 내가 소유하거나 잘 아는 작품의 작가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와의 관계를 공개한다. The Village Voice(매체)를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쓴 칼럼은 바바라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열린 화가 캐롤 던햄의 전시였다. 평론 맨 첫 줄, “우리가 친구라면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만일 내가 캐롤 던햄의 그림을 회화를 좋아한다면 더 이상 모른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 대한 나의 말은 편향되어있다. 비록 지난 몇 년 동안 던햄에게 똑같은 남성 캐릭터가 계속 반복해서 그린 것 같아 그가 얼마나 잘못됐는지에 냉철히 괴롭혔다. 나는 내 친구인 큐레이터 프란체스코 보나미의 훌륭한 전시 중 하나로 불리는 것과 프랑스 명품상품 거물 억만장자 미술 컬렉터(수집가)로써 유능한 프랑수아 피오가 가로채간 다른 것에 대해 “정말 최악이야”라고 글을 썼었다. 그들에겐 각자의 몫이 있다. “그건 당신을 어둠 속에 떨어진 조각처럼 혼자 두려는 게 아니다” 나는 위트먼의 글에 동의한다.


왠지 프리즈의 현재 문제에 관심이 간다. 스버트 스토는 그 잡지의 9월-10월 호의 이슈로 사라 루이스의 “Site Sante Fe” 전시에 대해 격찬의 평론을 보였다. 리뷰 부제: “제8회 국제비엔날레 Site Sante Fe는 여전히 아름답다.” (사실, 잡지에서는 ‘Sante Fe.’라고 도시명의 철자가 틀렸다.) Mr.스토의 평론 첫째 줄, “때때로 제대로 돌아간다.” 마지막 줄, “내가 젊었다면, 어떻게 큐레이터의 생활을 시작할까? 이번 전시처럼,,,, 전엔 결코 이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Mr.스토의 여인 Ms.루이스와 그 전시는 무척 좋다. (같은 평론에서 “티-파티를 심미하는 모든 주위의 모든 미국인은 연기자 슬림 피켄스이다.(미셀 푸코 인용)” 라고 ‘Site’ 전임 큐레이터 데이브 히키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그러나 Mr.스토는 Ms.루이스가 하버드에서 자신의 학생이었다는 언급을 피한다. Ms.루이스는 MOMA에서 그와 함께 일했었다. Lewis는 지금 그녀가 박사과정에 있고, 스토가 학장이자 미술과 판화 교수로 있는 예일 대학 예술학교에서 “미술과 판화의 비평가”로 나열되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


내가 묻고 싶은 네 가지 질문입니다 :

1. 왜 프리즈가 이 사람에게 전시 평론을 요청했을까요?

2. 왜 프리즈 공식 큐레이터와 작가의 특별 장기적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발표했을까요?

3. 프리즈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왜 일까요?

4. 어떻게 이게 통과됐을 까요?


나는 모든 비평가가 이중 일부에 속할 거라 확신합니다. 나도 내 제자의 글을 분명 썼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것을 명시하지 않는 비슷한 것은 시간 같은 평론에서 이렇게 분명한 입장의 비엔날레에 대해, 이렇게 명확한 잡지에서, 이렇게 분명한 입장의 평론가, 큐레이터에 의해, 예술학교 학장이자 “Site Santa Fe Biennial”의 전임 큐레이터에서 나타났다.

Best,
Museum Nerd

Dear Mr. or Ms. Museum Nerd,
I don’t make rules for other people, but my policy is to not write about artists whose work I own or I know well. When I’ve done so, I try to disclose my association. The last column I wrote for the Village Voice was on Barbara Gladstone’s show by the painter Carroll Dunham. The first lines of that review are: "By now I no longer know if I like Carroll Dunham’s paintings because we’re friends or if we’re friends because I like his paintings. So anything I say about his work is biased -- although over the years I have relentlessly ribbed Dunham about how limiting and wrong it might be that he seems to paint the same male character over and over again." I’ve written about my friend, the curator Francesco Bonami, calling one of his shows great and another, organized for French luxury-goods magnate billionaire art collector Francois Pinault, "truly horrendous." But to each his own; I’m with Whitman who wrote, "It is not upon you alone the dark patches fall."

Still, something caught my attention in the current issue of Frieze. Robert Storr gives a rave review to Sarah Lewis’s "Site Santa Fe" show in the September–October issue of the magazine. The review is subtitled: "Site Santa Fe’s Eighth International Biennial is as inspiring as it is original." (Actually, the magazine misspells the name of the city as "Sante Fe.") The first line of Mr. Storr’s review is, "Sometimes someone gets it right." The last lines of Mr. Storr’s review are, "If I were young, how would I want to begin my curatorial life? With an exhibition like this -- because there’s never been one like it before."

It’s absolutely fine that Mr. Storr loves Ms. Lewis and this show so much (while in the same review lambasting previous "Site" curator Dave Hickey as a "Michel Foucault–quoting. . . all-around all-American Tea Party esthete, Slim Pickens impersonator"). Storr neglects to mention, however, that Ms. Lewis was his student at Harvard. Ms. Lewis worked with him at the Museum of Modern Art. Ms. Lewis is now employed with him at Yale University, where she is a PhD student, and listed as a "critic of painting and printmaking" in the School of Art, where Storr is dean and also a professor of painting and printmaking.

The four questions I would ask are:
1. Why would Frieze ask this person to review this show?
2. Why would Frieze publish this without mentioning the writer’s special long-term relationship with the curator?
3. If Frieze was unaware of these facts, why?
4. How did this come to pass?

I’m sure all critics have done some of these things. I am sure that I have written on former students. I’m not sure, however, that all of these unstated overlaps have appeared at the same time in the same review about such a high-profile biennial in such a high-profile magazine by such a high-profile critic, curator, art-school dean and former curator of a "Site Santa Fe Biennial."


*업데이트 : 로버트 스토에 관해 살츠의 코멘트에 대한 프리즈 공동 편집자 제니퍼 히지의 응답 :

제리, 당신은 이것을 잘 알기 바랍니다.

우리는 매우 심각하게 당신 칼럼의 편파적 주장에게 대응하는 바입니다. 제가 프리즈 평론에 관련한 공정성에 대해 양심적임을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난관에 도착했는가. 당신의 질문은 “왜 프리즈가 이 사람에게 전시 평론을 요청했을까?”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Site Santa Fe에서 로버트 스토의 견해(당신이 이곳에서 읽을 수 있는)는 일반상식에서 평론이 아니다. “다리 위의 풍경”, 그건 그의 정기적 칼럼의 일부이다. 그는 백지 위임장을 가지고 그의 감격 그리고 전시, 작가, 예술가 그리고/혹은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끌리는 생각에 대한 근거 없는 걱정을 표현한다. (당사의 광대한 국제적 리뷰 섹션은 잡지의 뒷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비록 분명 누구도 각자의 일에서 자기중심적임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말이 필요 없이 우리는 스토의 큐레이터와의 개인적 관계에 있어서는 간과했음을 인정한다. 스토가 범죄를 저질렀었다면, 열정적이고 그가 아는 그가 찬사한 작업의 전문 후임 큐레이터의 작업을 지지하면 간단하다.

행운을 빌며, 제니퍼 히지

;Update: Frieze co-editor Jennifer Higgie responds to Saltz’s comments on Robert Storr:

Dear Jerry,
I hope this finds you well.

We would like to respond to the allegations of cronyism in your column, which we take very seriously: I can assure you that Frieze is scrupulous about impartiality in regards to reviews. Which gets to the crux of the matter. You ask: "Why would Frieze ask this person to review this show?" There’s a simple answer. Rob Storr’s piece on Site Santa Fe (which you can read here) isn’t a review, in the conventional sense -- it’s part of his regular column, “View from the Bridge,” in which he has carte blanche to express his enthusiasms and bug-bears about shows, writers, artists and/or ideas that are engaging him at this point in time. (Our extensive international review section is to be found at the back of the magazine.) In retrospect, however, we agree it was an oversight not to mention Storr’s personal relationship with the curators, although it must be stressed that there is absolutely nothing self-serving in the piece. If Storr has committed a crime, it’s simply to be enthusiastic and supportive of the work of upcoming curators he knows professionally and whose work he admires.

With best wishes,
Jennifer Higgie


 


Sarah Palin



Glenn Beck




Rockefeller Center



Expert



Rocky by Leroy Neiman



Dave Hickey
Photo by Libby Lumpkin




Pecking order



Dan Colen at Gagosian Gallery, New York



Cavern




Carroll Dunham at Gladstone Gallery, 2007




Francesco Bonami at the 2003 Venice Biennale




Robert Storr at the 2007 Venice Biennale




Site Santa Fe


Sarah Lewis



Frieze magazine




101004 ASK AN ART CRITIC_Jerry Saltz.doc


Posted by seonwa
, |

 

에로틱 게토를 벗어나, OUT OF THE EROTIC GHETTO
Sept. 28, 2009
by Jerry Saltz

http://www.artnet.com/magazineus/features/saltz/georgia-okeeffe-whitney9-28-09.asp





“조르지아 오키프: 추상화” ‘09. 9. 17~ ‘10. 1. 17  뉴욕 휘트니 현대미술관
"Georgia O’Keeffe: Abstraction," Sept. 17, 2009-Jan. 17, 2010, at the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945 Madison Avenue, New York, N.Y. 10021.
The Whitney’s welcome retrospective rescues Georgia O’Keeffe from sex and flowers.BR>


불쌍한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죽음은 그녀의 예술세계에 대한 여론을 누그러트리지 못했다. 23년 후, 아름다운 그림 또는 예쁜 성기로 말할 수 있는 까다로운 화가인 그녀를 해체시키려는 시도가 많았다. “미국에 가장 유명하고 그림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여성화가”(1987년 그녀의 유화 한 점이 187만 달러라는 최고의 가격에 팔렸다. 2001년 오키프의 「붉은 아네모네와 칼라」는 200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620만 달러(당시 62억여 원) 경매가로 여성화가로서 최고가를 기록했으며, 그녀의 손을 찍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전설적인 사진은 2006년 소더비에서 147만 2000달러(약 15억)로 사진 경매가 최고를 기록했다.)라고 대할 때조차 그녀는 이런 한정들로 휩싸였다.
;Poor Georgia O’Keeffe. Death didn’t soften the opinions of the art world toward her paintings. Twenty-three years later, many continue to dismiss her as a prissy painter of pretty pictures -- or, I should say, pretty genitalia. Even when hailed for being "the most famous and highly paid woman artist in America," she gets saddled with a qualifier.

미국 미술사에 어떤 형식도 그렇게 빨리 명성을 얻지 못했다. 어떤 여자들이 쓴 글은 목덜미가 싸늘해지게 한다. 비평가들은 “이 소녀”의 예술에서 “엄청난 고통과 황홀한 절정”, 그녀가 “자궁을 통해” 얼마나 느끼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순교적인 여성의 육체적 감각”을 보인 것에 대해 글을 썼다. 그녀의 그림은 “생명의 수여자와 같은 여성의 정수에 대한 폭로”, “조밀하고, 진동하는, 영원한 생명”과 “여성에게 이미 알려졌던 세계”를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녀의 “성적액체의 분출”, “육체의 넘치는 갈망” 그리고 “성기의 길고 커다란 폭발, 젊은이의 성기, 청소년의 성기, 성인의 성기... 돌출한 성기, 팽창한 성기, 수축한 성기”같은 것들로 해석했다. 그리고 그것의 추종자들!  안티였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는 1946년 MOMA에서 오키프의 회고전을 열었을 때-여성으로써 처음 연 개인전- 작품이 ”마치 착색사진 같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침체된 남성작가(성기를 주제로 작업하던 이들!)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와 존 슬로언 John Sloan 은 그녀가 1949년 국립문학예술연구원 NIAL, National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에 뽑힌 것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며 방해하려 들었다.1949년 그녀가 국립예술문화원(NIAL)에 뽑힐 때는 에드워드 호퍼, 존 슬론 같은 남성 화가들이 방해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No other figure in American art history went from heights to has-been so quickly. See if these comments, some of them by women, don’t make the hairs on the back of your neck stand up. Critics wrote of the "great painful and ecstatic climaxes" in the art of "this girl," of how she felt "through the womb," and gave us a "sense of woman’s flesh in martyrdom." Her paintings were said to be a "revelation of the very essence of woman as Life Giver," expressing "dense, quivering, endless life," and "the world as it is known to woman." We read about her "outpouring of sexual juices," "loamy hungers of the flesh" and her art as "one long, loud blast of sex, sex in youth, sex in adolescence, sex in maturity. . . sex bulging, sex tumescent, sex deflated." And those were the admirers! Critic Clement Greenberg, a nonfan, was appalled when the Museum of Modern Art honored O’Keeffe with a retrospective in 1946 -- one of its first solo shows for a woman; her work was "little more than tinted photography." Threatened male artists (sex was their territory!) Edward Hopper and John Sloan were "furious" that she’d been elected to the National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 in 1949 and "tried to intervene."

이런 홀대를 받고도 오키프가 98년 죽음에 이를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신화와 인기로 더 채울 수 있는 예술 밖 세상인 뉴멕시코에서 마지막 37년을 보내면서 관계로부터 고립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놀랍지 않다. 뉴멕시코 사막의 신비스러운 존재가 된 오키프가 대중에게는 그녀의 미술보다 더 많은 관심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 예술에 단호한 독립적인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도로시 노먼 - 스티글리츠. 뉴멕시코의 광활한 사막에 영원히 정착하면서부터 오키프는 대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1997년 7월 18일 뉴멕시코 산타페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 개관.
;Given that reception, it’s amazing O’Keeffe continued making art until close to her death, at 98. Less surprising is that she did it in relative isolation, spending her last 37 years in New Mexico -- which only added to her mythology and popularity outside the art world.

휘트니미술관이 전시는 오키프가 이러한 조롱을 사게 한 작업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미국 화가로써 드물게 일찍- 1915년 시작한 얼마간의 추상미술을 개관했고, 오키프가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야심적인 예술 몇 가지를 창조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다시 주목한다. 표면, 규모, 색에 대한 그녀의 개념은 파격적일 뿐 아니라, 바넷 뉴먼 Barnett Newman, 밀턴 에버리 Milton Avery, 마크 로드코 Mark Rothko, 모리스 루이스 Morris Louis와 메리 헤일만 Mary Heilmann처럼 다양한 화가의 작업과 또한 컬러필드페인팅Color Field painting, 서정추상주의Lyrical Abstraction와 현대 포스트모던 추상화Postmodern Abstraction의 전조가 되었다. 그중 최고는 그녀가 신비롭고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한 번에 느끼게 하는 추상화를 만드는 공식적으로 독창적, 낭만적인 활동가라는 것이다. 1940년대 추상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서부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하드에지, 팝아트, 옵아트,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미국 모더니즘 양식들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The Whitney Museum’s revelatory survey of the work that earned O’Keeffe such derision, the evocative, more-or-less abstract art she made starting in 1915 -- phenomenally early for an American artist -- should reopen eyes to an undeniable fact: O’Keeffe produced some of the most original and ambitious art in the 20th century. Her ideas about surface, scale and color are not only daring; they presaged the work of artists as varied as Barnett Newman, Milton Avery, Mark Rothko, Morris Louis and Mary Heilmann, as well as Color Field painting, Lyrical Abstraction and contemporary postmodern abstraction. At her best, she is a formally inventive poetic powerhouse who makes the nonobjective feel mystical, familiar, objective and subjective all at once.

1887년 위스콘신의 농촌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오키프는 텍사스에서 일했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교수하고, 일리노이와 버지니아에서 미술공부를 했다. 순조롭지 않은 그녀의 인생에 휴식은 단지 그녀가 교수로 가르칠 때였다. 1916년 허가증을 취득 없이 있던 뉴욕의 어느 날, 여자 친구가 그녀의 목탄으로 그린 추상화를 유명한 사진가이자 뉴욕에서 잘나가는 ‘291 갤러리’의 경영자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대담한 눈으로 그는 즉시 그녀의 가망성을 알아보았다. 그는 ”종이위에 자신을 이렇게 완전하게 표현하는 여성을 본적이 없다.. 전시에 내보여도 좋겠어.”“드디어 회화사에 진정한 여성화가가 나타났다.”
;Born poor in 1887 on a farm in Wisconsin, O’Keeffe worked and taught and studied art in Texas, South Carolina, Illinois and Virginia. Just when it appeared she’d be a teacher for the rest of her life, fate stepped in. On New Year’s Day, 1916, without obtaining her permission, a girlfriend showed O’Keeffe’s abstract charcoal drawings to the legendary photographer-proprietor of New York’s great 291 Gallery, Alfred Stieglitz. With his intrepid eye, he instantly recognized her promise; he’d "never seen a woman express herself so fully on paper. . . I wouldn’t mind showing them."

5월,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목탄화 10점을 그룹전에 걸었다. 그 후 얼마안가 그녀는 “열정적이고, 사악하고, 파괴적”(기혼자)인 스티글리츠에게 빠졌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1918년 오키프 나이 30, 뉴욕으로 이사했고, 수주 만에 54세의 스티글리츠의 연인이 되었다. 오키프가 그에게 쓴 편지 중 “더 넓게 펼쳐지기를 원한다”라는 묘사에서 그들이 열렬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와우! 정말 뜨겁다!
;In May, Stieglitz hung ten of her charcoals in a group show. Soon thereafter, she confessed to a friend that she had fallen for the "hot, dark, destructive" (and married) Stieglitz. In 1918, O’Keeffe, 30, moved to New York and within weeks became the 54-year-old Stieglitz’s lover. It was an ardent union, judging from O’Keeffe’s letters to him, one of which described being "on my back -- wanting to be spread wide apart." Whew! That is hot!

1918년의 혼전임신만큼 충격적인(1924년에 그들은 결혼했다)- 45장의 주로 오키프의 누드사진이 포함된 1921년에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은 그들을 마치 예술계의 브란젤리나로 변모시킨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을 찍을 때 사랑을 나누었다.”라고 말했다. 훗날 사진 촬영의 “열기와 흥분”에 대해 오키프는 “사진처럼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없었다.”고 회고했다.
;As revolutionary as living out of wedlock was in 1918 (the couple married in 1924), a 1921 survey of Stieglitz’s photographs, including 45 pictures of O’Keeffe, many of them nudes, transformed the two of them into the equivalent of an art world Angelina Jolie and Brad Pitt. Stieglitz said, "When I make a photograph I make love." O’Keeffe, who later recalled the "heat and excitement" of the photo sessions, opined that "nothing like them had come into our world before."

하지만 스트글리츠를 유명하게 만든 그의 동일한 누드사진은 오키프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평생 그녀의 작품은 단지 성적인 것으로만 보였다. 오키프는 “사람들이 내 그림 안에서 성적인 기호를 읽을 때 자신들의 정사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이 성적이라는 착각은 그녀를 철저히 파괴시켰다. 1921년, 그녀는 자신이 “언제나 슬펐다.”고 회고했다.
;Yet the same nude photos that made Stieglitz famous triggered a backlash against O’Keeffe. Forever after, her work was seen in purely sexual terms. "When people read erotic symbols into my paintings they’re really talking about their own affairs," O’Keeffe said. Still, the sexualized misconceptions of her work devastated her. "I almost wept," she wrote of one review in 1921.

큐레이터 바바라 헤스켈 Barbara Haskell이 기획한 휘트니미술관 특별전은 125점 이상의 작품과 그 중 스티글리츠의 초상화는 12점 이상 있다. 오키프의 그림에서 당신은 절제와 침묵 그리고 엄청난 상상력과 맞닿게 될 것이다. 이상하게 전시가 방어적인 느낌이도록, 마치 오키프의 원래모습이 이상하고 신비롭고 외설적인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성적인 정합이 거의 없다. 나는 20, 30, 40년대의 추상과 자연의 시험적인 도피와 일시적 관심의 위협을 감상했다.; 일종의 자연, 일종의 애매한 조형의 50년대 ;괴팍한 평면의 60년대 작품 ; 대체로 소산된 70년대 작품.
;The Whitney’s focused show, carefully organized by curator Barbara Haskell, includes over 125 works and more than a dozen Stieglitz portraits. What strikes you about O’Keeffe’s paintings is their restraint and reticence. And the astounding imagination. The sexuality barely registers -- which makes the show feel strangely defensive, like it’s scared to let O’Keeffe be as weird, mystical and suggestive as she really was. I would have appreciated more of her terrified, tentative retreats from and flirtations with abstraction and nature in the ‘20s, ‘30s and ‘40s; her kind-of-like nature/kind-of-figurative hedged bets of the ‘50s; the oddball flat ‘60s abstractions; the almost-dissipated ‘70s works.

이것은 외설스럽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현대적 작업양식과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아서 도브 Arthur Dove와 비교해보면 이것은 “성기에서” 를 탈피한 오키프가 아니라 도브였다. 도브는 물리적으로 오키프와 복잡한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에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저서 <풀잎>을 품은 작업을 했다. 오키프의 예술은 체계적이고 층이 있고 추상적 소네트같이 엄격하고, 자신감 넘치고 지적이다. 오키프는 꽃의 ‘여성적’ 이미지에 전복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오키프 이전의 모든 여성 화가들은 남성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오키프의 작품 양식은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다. 조지아 오키프는 화단에서 진정으로 남자들의 영향에서 벗어난 첫 번째 여성 화가다.
;There are naughty bits. But when compared with the work of her closest stylistic contemporary and influence Arthur Dove, it is Dove, not O’Keeffe, who comes off as being "about sex." Dove plays the brooding, physical Walt Whitman of Leaves of Grass to O’Keeffe’s intricate Emily Dickinson. Dove’s touch has sensual weight, animalistic body and shadowy intensity. O’Keeffe’s art is Spartan, Apollonian and cerebral -- structured, layered and faceted like abstract sonnets.

헤스켈은 우리에게 오키프의 초기 종이작업과 모든 부분에서 적용되는 흥미와 전혀 장식적이지 않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도록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그녀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맨 처음 두개의 주요 전시실에서 보여 준다 그중 어떤 것은 도널드 주드 Donald Judd가 수십 년 후에 만든 것도 있다. 스티글리츠가 찍은 그야말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눈부신) 매력적인 오키프의 사진이 있는 전시실을 지나면 3번째 전시실부터는 오키프의 보석처럼 강렬한 무지갯빛 색과 화려한 얇은 평면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결코 과하지 않고 외부의 격렬한 느낌에서 관계하는 그녀의 내부형태는 오히려 순수한 피타고라스의 기하학처럼 보인다.
;In the first two knockout rooms of the Whitney’s show, Haskell gives us O’Keeffe’s early works on paper and her uncanny ability to conjure indivisible abstract wholes in which all parts are of equal interest and never decorative -- something Donald Judd made good on decades later. Aside from one darkened gallery of Stieglitz’s super-seductive pictures of her (who knew underarm hair could be so titillating?), from the third gallery on, you’re lowered into O’Keeffe’s lapidarian vision, glowing prismatic color and luscious thin surfaces. She never overworks anything; the relationship of her interior forms to external edges feels found yet pure as Pythagorean geometry.

그녀는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수수하게 하고 단호한 인상과 신비적으로 보이기 위해 화장을 어둡게 하는 편이었다. 휘트니에 가면 당신은 거대하게 확대되거나, 잘게 쪼개진, 실체가 없는 모양들로 매끄러운 평면에 오키프만의 화려한 색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그녀는 스티글리츠(와 폴 스트랜드Paul Strand)의 사진 개념을 회화에 가지고 왔다. 폴 스트랜드는 오키프의 “독보적으로 뛰어난 여성적 직관은 선이나 형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그림에서도 볼 수 없던 풍부한 표정을 지닌 색채를 통해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라고 호평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제 3자 Outsider”로 만들었다고 한다. 초현실적 규모로 바뀐 오키프 고유의 색과 형태는 워홀의 Day-Glo로 색과 대중문화처럼 그녀의 근간을 이루었다. 워홀처럼 그녀는 “심각한 예술”로 만들어지던 고상한 개념을 기꺼이 버렸고  이런 모험은 예술계에서 최고의 모욕인 아가씨, 여자 같은 남자, 예쁜 여자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휘트니 전에서 드러낸 것처럼 거침없이 아름답고 의미심장하며 괴상하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감상적이다. 망할 섹스
;"The men," as she witheringly referred to male contemporaries, tended to paint dark color with gritty surfaces and romantic symbolism. At the Whitney, you see O’Keeffe coaxing brilliant hues onto smooth grounds via colossally magnified, closely cropped, disembodied shapes. At the same time, she’s assimilated Stieglitz’s (and Paul Strand’s) ideas of photography into painting. All these things made her, in her own words, "an outsider." O’Keeffe’s purer color and form, her surreal scale shifts, were as radical for her time as Warhol’s Day-Glo color and pop-culture references were for his. Like Warhol, she was willing to forsake high-minded ideas of what constituted "serious art," and risk being branded with the worst insults the art world could muster: girly, swishy, pretty. O’Keeffe wasn’t afraid of those labels. And as the Whitney show demonstrates, her fearless prettiness is also profound and lyrical -- an eerie, ineffable joy. Fuck sex.




Georgia O’Keeffe
Early Abstraction
1915
Milwaukee Art Museum
Photography by Malcolm Varon
© Milwaukee Art Museum


Georgia O’Keeffe
Early Abstraction
1915
Milwaukee Art Museum
Photography by Malcolm Varon
© Milwaukee Art Museum


Georgia O’Keeffe
Abstraction
1926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 Georgia O’Keeffe Museum/Artist Rights Society


Georgia O’Keeffe
Black Place III
1944
Georgia O’Keeffe Museum
© 1987, Private Collection


Georgia O’Keeffe
Black Spot, No. 2
1919
Collection of Robert and Soledad Hurst
© Georgia O’Keeffe Museum/Artist Rights Society


Georgia O’Keeffe
Blue Flower
1918
Georgia O’Keeffe Museum
© Private collection


Georgia O’Keeffe
Series I -- No. 3
1918
Milwaukee Art Museum
Photography by Larry Sanders
© Milwaukee Art Museum


Alfred Stieglitz
Georgia O’Keeffe: A Portrait
1918
J. Paul Getty Museum
© J. Paul Getty Trust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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