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912~19_현대미술과 시각문화_강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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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1. 미술사의 추억
2. 워홀·팝·캠프
3. 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
4. 마르셀 브로타스의 미술관
5. 미술과 가치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2부
1. 관인식론
2. 이우환과 1970년대 단색회화
3. 1970년대 개념미술의 현황 : ST 전시를 중심으로
4. 1970년대의 행위미술 이벤트
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
1. 여는 말
패션과 미술은 역사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지만 현대에 와서 교류가 더 활발해 졌다. 이 글은 1980-1990년대 미술과 패션 또는 패션 사진을 중심으로 그들의 복합적인 상관관계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무한히 넓어지는 미술의 경계와 확산하는 시각문화의 관계를 더듬어 보는 일이고 더 나아가 대중문화 시대의 미술의 탄생을 새삼스럽게 음미해보는 계기이기도 하다.
2. 미술과 패션
아트포럼지의 대중문화에서 흐려진 경계에서 대중문화로 진입하면서 그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는 미술제작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한다. 20세기 후반 미술과 패션의 소통의 기점으로 1996년 플로렌스 비엔날레 ‘시간과 패션’에서 리히텐슈타인과 베르사체, 데미안과 프라다, 제니홀저와 헬무트 랑 등 7쌍의 협업작업과 구겜하임미술관의 <미술패션>전이 열리는 등 21세기에 와서 미술세계서 인정받는 디자이너들이 유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대부분 미술계나 건축계에서 비판적이었지만 패션의 또 다른 사회비평적인 기능에 주목하는 긍정적 시각도 있었다.
패션이 예(미)술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하에 이런 문제제기 자체는 미술비평적 시각이 패션에 미학적 분야의 존재를 증명하는 샘이다. 로버타 스미스의 <패션 이후의 미술>에서는 워홀이후 1990중반에 그 어느 때 보다 양자의 밀접해진 사례들을 든 바 있고 이후 매튜바니에 이르기까지 이런 경향이 지속됐다. 이들에게는 사진이라는 공통되는 분모가 있는데 1970년대 개념미술을 거쳐 사진이 미술로 진입하면서 패션사진 역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미술오브제로서 화랑서의 전시로 이어지는 일이 허다해졌다. 결국 패션은 미술의 대중문화에의 몰두의 최근 또는 최종단계이며 미술이 대중문화와 공존하는 이상 이들과늬 관계를 도외시할 수 없게 됐다.
3. 앤디워홀
초상. 초현실주의. 스냅샷
역사적으로 패션과 관계가 가장 밀접하고 생산적이었던 미술은 초현실주의였는데 만 레이, 달리, 마그리트, 키리코 등 여러 작가들이 패션 분야에서 작업했다. 또 초창기 패션사진은 초상이 대부분이었으나 야외촬영이 가능하게 되면서 생기와 발랄함을 불어넣고 서사의 가능성을 열게 됐으며 로버트 프랭크는 모델의 중요성과 상황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변화를 도입했다.
워홀의 <인터뷰>잡지. 1969 - 그것은 영화잡지로 시작해서 로이 할스톤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인터뷰 기제 후 패션화보가 제공되면서 패션관련인사들과 패션사진들이 이면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인터뷰>지는 당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업을 하던 하던 웨버, 허브 리츠, 라체플 등 젊은 패션사진가들의 작업을 과감하게 다뤄준다. 그에게 패션매체는 영화이기도 했으며 패션사진들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4. 미술과 당대 패션, 패션사진
패션은 자기표현의 형태로 현대사회의 표상이며 현재를 규명하는 도구라는 점에 힘이 있지만 일회성, 상업성 또는 전형성 때문에 진지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즉 패티시. 회고 취미. 다원주의 스타일 등의 대두는 이런 패션사진의 연구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보그, 하퍼스 바자, 영국의 더 페이스, 아이디, 인터뷰, 펑크, 빌리지 보이스, 뷰, 등이 기여했다. 의상의 변화도 큰 몫을 차지했다. 1980년대 여피패션과 뽕. 과장된 헤어의 파워 드레싱이 후반으로 가면서 젊은이의 거리 패션 그런지로 옮겨지며 고급패션의 전통이 몰락하거나 새로운 패션개념과 타협하게 된다.
댄 골딘> 성의 지하문화세계(특히 영화)에 심취했던 그는 테크닉은 무시한 채 친구와 주변인물들을 진솔하게 찍은 스냅샷을 찍었다. 그의 사진에 나타난 친밀함은 삶의 기록이자 생존의 방편이었고 당시 그의 성공은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비판적인 시선의 검열이나 왜곡 없이 전달되는 충격적인 현실감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로 드러났다. 1990년 이후 패션사진이 패션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어 그 주안점이 옷에서 생활방식에 종속되는 변화가 오면서 그 초점 역시 오브제에서 서사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패션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 지면서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뉴튼, 부르댕 등은 제품 자체보다는 이미지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여 제품 주변의 서사를 전복 또는 확산했으며.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세팅과 시나리오를 결합시켰다.
신디셔먼> 골딘처럼 미술가로서 패션사진을 찍은 작가다. 그녀는 중년 여성의 반 패션에 초점을 맞췄다. ‘우리 대부분은 미와 세련된 자태의 스테레오타입을 사회로 부터 강요당하면서 자라기에 이들은 그에 대한 반동이다.’ 그는 총 네 번의 패션사진을 제작했으며 이들에 대한 비판과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반패션 사진들은 패션내부에서 변화를 주도한 골딘의 ‘비패션’ 사진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실비 플뢰리> 패션계 출신의 사진가 지망생으로 그에게 패션은 손익은 도구로서 피상적인 접근이 아닌 직접수행의 과정 또는 결과로 활용했다. 그가 직접 고른 명품상품이나 쇼핑백들의 진열로 직접적인 대중소비문화와 그 싸움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팝아트의 후예. 개념미술가로도 분류된다. 아이라이너, 매니큐어, 깃털, 인조 모피 등을 사용한 작업은 패션과 소비에 관련된 여성욕망의 허영과 비속함을 비판하는 억압적인 남성시각의 해체를 전략으로 삼았다. 결국 패션을 미술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미술도 일종의 패션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바네사 비크로프트> 세트 디자인전공을 하고 여성의 몸을 사용해 퍼포먼스 작업을 한 그는 살아있는 조각의 언캐니와 침묵하는 모델과 관음적시선의 관객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주 미디엄으로 활용하여 마치 공간에 펼쳐지는 거대한 회화 또는 조각이라고도 불린다. 이 작업은 패션쇼의 구성을 빌리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들의 광범위한 협찬을 받았고 다수 패션잡지를 위해 프로젝트도 제작했다.
리처드 프린스> 그는 잡지 등의 미디어 이미지를 재촬영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기존의 사진들을 자신의 시점으로 재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들을 예술사진으로 변모시켜 왔다. 그는 사진 미디어 자체나 테크닉에 대한 관심이 없으며 미디어 이미지의 공허한 매혹과 순환 등에 대한 보다 복합적인 비판과 성찰이 전제되어 있다. 그는 사진의 중요한 효과를 같음과 다름,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언캐니로 보고 실제와 재현의 미묘한 차이를 극복하는 사진미디엄의 정상성이나 권위의 느낌을 작업의 토대로 삼는다. 이런 소박하고 과장된 아마추어리즘은 당대 패션사진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이런 사진들이 그에 의해 미술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이미지들이 갑자기 한 비평적 순간에 가시화되고 미술의 영토는 다시한번 드넓어진다는 사실이다.
5. 남은 말
1990년 이후 로우 앤 하이의 교류가 급격히 증대했으며 구분마저 모호해졌다.
1980년 웨버는 자신의 패션사진에 상업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주장과 같이 패션사진은 더 이상 패션과 무관해졌고 예술사진에 더 가까워졌다. 잡지에 등장한 사진과 갤러리에서 팔리는 사진들의 유일한 차이는 전자에는 크레딧이 있고 후자에는 없다는 사실 뿐이다.
올리비에로 토스카니. 미술처럼 사회 문화적인 사안들을 내비치며 베네통의 광고는 전세계적인 화제와 논란을 일으킨 패션사진을 출판한다. 의상이 완전히 배제되고 충격적인 저널리즘 사진 위에 로고만을 붙인 것이다. 노예제도, 갓난 아기, 수녀와 키스하는 신부, 마피아의 피살, 홍수, 불타는 자동차, 군인, 아동노동자, 전기의자, 환경오염, 난민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이슈화 시켜 상업의 노리개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결국 사형제도의 불합리성을 표현한 사진으로인해 해고당했지만 그는 “광고야말로 의사소통의 가장 강력하고 풍부한 형태이므로 사람들을 생각하고 토론하게 해야 한다... 광고는 소비자를 미망에 빠뜨려야 맞는 모양이다. 나는 늘 가짜가 받아들여지고 실제가 거부당하는 데 대해 당혹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결국 패션사진들이 이슈들을 끌어들여 스펙터클을 장식할 수는 있지만 심각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패션사진의 의미와 효용성에서 그것이 한 시대 문화의 가자 예민한 센서 중의 하나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골딘의<내가 너의 거울이 되리>는 개인과 시대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되었다. 이와 달리 초현실주의적인 풍경을 천의무봉하게 그려내는 디지털 사진은 그간 패션이 그나마 지니고 있던 현실과 환상 사이의 모호한 긴장을 소리 없이 증발시킨다. 그것은 .유령 같은 키치적 흥분과 환각적인 지복감 ‘느낌이 배제된 세계를 반향하는 깊이 없는 광택의’ 깨지지 않는 거울이다. 디지털의 매끄러운 표면이 패션사진의 필연적 미래라면 우리의 추억과 욕정을 비추는 거울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속하는 것일까?
마르셀 브로타스의 미술관
1. 여는말
이미 근 40여 년 전 현대를 ‘미술관의 시대’로 규정했다지만 지금은 ‘미술관이즘’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술관과 대규모 국제전시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미학의 태동과 함께 미술관이 등장했지만 그 역사는 서로 다른 길을 향해 진행되어 왔다. 당초 소장품의 보관과 전시를 위한 공간이었던 미술관은 어느새 미술을 정의하고 미술사 기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강력한 제도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미술과의 역사와 권위에 따라 관람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기꺼이 따라가리라는 의식을 고취하게 된다. 하지만 미술관은 모든 것이 통제되고 기획된 극히 이념적이고 제한적인 선택의 장이다. 표면적으로는 고매하고 중립적이며 사회의 모든 비속과는 무관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숨기는 곳으로, 미술관의 이런 측면에 먼저 눈 뜬 것은 작가들이었다. 1960년대 개념미술가들을 중심으로 미술환경자체평가를 검토하고 비판하는 일련의 작업이 등장했다.
전시공간과 구성개념에도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틀을 깬 기획전시가 이루어지는 등 미술관은 일종의 ‘전시 퍼포머스’의 장이 되고 있다. 이런 전시와 연관된 현대미술의 제반 양상을 살피는 데는 1960년대 마르셀 브로타스의 작품을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2. 성전에서 포럼으로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벽없는) 미술관’은 사진의 등장으로 작품들이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란히 비교하면서 양식을 추출해 내고 미술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을 뜻한다. 이곳은 이런 변신을 정면으로 대하는 곳이며 거기에는 모든 오브제를 작품화하는 ‘미술관 효과’가 작용한다.
근자에 들어 미술관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성전과 포럼’으로 대립된다. 미술관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그를 성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인 반면 포럼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를 대결, 실험, 토론의 장으로 보고 그 구조, 의식, 이념에 대한 폭로를 증시하는 입장이다. 미술관을 포럼으로 보는 미술관 담론에서 미술관은 자연스러운 곳이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특정 이데올로기와 전시정책이 결정되고 과시되는 곳이라는 대전제를 가진다.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는 사진이 매체가 되어 미술의 기원이나 용도 목적. 스케일 등의 왜곡으로 나타나는 총체적인 탈문맥화되어 양식이라는 내적인 일관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하지만, 로잘린드 크라우드는 그것에 미술관이 창조행위의 보편성이 추구되는 곳이라는 모더니즘을 기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며 이는 위대한 허구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더글러스 크림프 역시 미술관이 제공하는 일관성은 하나의 허구이며 존재론적 에센스로서의 미술은 미술사의 망령일 뿐이라고 했다. 도널드 프레지오시는 미술관은 현대 사회에 있어 가장 강력하고 명민한 허구 중의 하나이며 예술의 총체적 관념을 만든 것이 그 최대의 성공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예술의 문화적 의미를 확립하고 통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논의들은 아직 뚜렷한 성과가 축적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대변하던 권력이 전시 디자이너라는 특정 개인에게로 넘어가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1970이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다룬 작가들로는 브로타스 외에도 다니엘 뷔랭, 한스하케, 마이클 애셔, 루이즈 롤러 등이 대표적이고 이들은 다양하게 미술관과 전시를 비판하고 패러디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들의 작업이 결국 미술관에 흡수되는 쉽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하나의 실천으로, 하나의 상징으로, 그 작업들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3.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브로타스는 40이 되서야 미술가가 되었는데 쿠르트 쉬비터즈, 피에로 만조니와 이브클라인과에게 많은 영감을 얻었다. 특히 조지 시갈의 석고 캐스팅은 그의 작가로의 변신의 직접적인 동기 되었다. 시갈은 그에게 틀 즉 용기나 문맥에 관한 질문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4년 후 미술관 설립 전까지 갖가지 오브제를 만들었는데 홍합, 계란 껍질, 냄비, 와인병 등 음식이나 그릇용기 또는 껍질이나 틀 등이 소재가 되었다.
그가 미술관과 문화를 통제하는 시스템에 대해 처음 눈을 뜨고 얼마 후 미술관을 열고 그는 문화가 유연하고 순종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통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도 마찬가지 목적을 가졌다고 밝혔다.
자신의 아파트에 설립한 첫 미술관은 ‘현대미술관, 독수리 부, 19세기 섹션’이란 주제로 스스로가 관장이자 전시 디자이너이며 경영자로 자처했다. 미술관과 같은 전시 오프닝을 표방했지만 거기엔 유리창에 ‘미술관’이라고 써진 글씨와 ‘취급주의’ 가 붙은 빌려온 작품 운송장과 빈 상자, 전시작품으로는 벽에 붙어있는 명화그림엽서와 19세기 화가의 슬라이드를 연속으로 비췄을 뿐이었다. 브로타스의 미술관은 1972년 까지 이어졌고, 그것은 아이디어와 기억으로만 남은 허구의 존재였지만 4년 동안 위치와 섹션의 명칭만 바뀌면서 꾸준히 지소되어 총 11개가 만들어 졌다.
그는 워홀처럼 모든 예술의 목적은 상업적이며 자신의 목적도 역시 상업적이라고 단언했으며 말년에는 미술은 ‘초정치적이며 도덕적 의의는 별로 없는 쓸모없는 노동’이라고 결론지은바 있다. 그는 작가의 기회주의적 입장을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으로 보고 정치적 입장과 예술적 실천 사이에 내재하는 모순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것의 그의 미술관 설립을 증명하는 샘이다. 그는 기존의 미술관을 비판하기 위해 허구의 미술관을 설립하고 드문드문 전시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이런 일인극이 어떤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회의했다.
4. 이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뒤셀도르프 미술관 ‘이미지 섹션’ 점신세부터 지금까지의 독수리.
266개의 독수리에 관한 작품들이 장르와 종류를 망라하고 진열되었다. 모든 전시작에는 ‘이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라고 쓰인 똑같은 크기의 명패가 부착되었다. 브로타스는 이 전시의 개념을 아이디어로서의 독수리와 아이디어로서의 예술의 동일성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예술의 개념이 점검 없이 숭배되고 순환되는 데 대한 패러디이며. 그는 독수리로 상징되는 미술의 권위에 눈먼 대중들에게 뒤샹와 마그리트의 교훈을 다시 한번 깨우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의 의의는 제도권 비판으로서의 전시개념과 방법. 그리고 이들의 뒤샹과 마그리트와의 관계로 요약된다.
전시효과는 허구를 통해 강한 현실의 의식을 얻는 것이며, 자신의 미술관과 허구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것이 감추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미지가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하나의 징후로 보여질 때 전시는 계시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는 직접적이기보다는 빈틈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현실의 허구를 노출하기 위해 인위적인 허구를 만든 셈이며 또 신화화의 허구에 저항하기 위해 새로운 인위적인 신화를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브로타스의 전시는 뒤샹의 작업을 전제로 한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뒤샹의 실패를 적시하는 것을 뜻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로 통용되는 제스쳐가 예술의 패러다임을 ‘무엇’에서 ‘언제, 어디서'로 바꾼것이라면 브로타스는 '누가'를 되짚어 질문하고 그에 반기를 든다. 예술가가 예술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는 마그리트의 작업에 있어서도 그의 기호학이나 문학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품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며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뒤샹과 마그리트를 결합하여 자신의 공식을 끌어내어 미술과 그 이름이 표방하는 권능을 시험대에 올린 것이다. 그는 작가로 확립되면서 작품이 대형 국제미술제에 초대받으며 더 이상 미술관 지속의 명분이 없어졌다.
5. 맺는 말
제만이 기획한 '개인적 신화들'에서 '현대미술섹션'은 얼마 뒤 작품에 내용이 바뀐다. 가상의 미술관이었으나 스스로 책임자였으나 제만이 구성 전시에서는 그저 전체 테마에 종속된 일부일 뿐이었으며 자신이 패러디하고 공격한 그 상황에 자신의 작업이 함몰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여러 제도권 비판의 작업 가운데 미술관이나 전시를 그처럼 일관되게 또 치열하게 작품의 내용으로 삼은 작가로는 브로타스가 유일하다. 물론 1990년대 중반부터는 전시기획이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될 정도로 여러 작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작가와 큐레이터는 상호교환이 가능해졌다. 최근 이런 경향은 미술관에 대결의 장 보다는 재현과 현실에 대한 숙고의 장이 되었다고도 한다.
모래사장위에 미술관을 짓고 ‘다큐멘터리 섹션’이라고 이름한 작품은 미술관 또는 그가 설립한 미술관이 허구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강력한 메타포로 제시한 예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미술이 사기와 오류의 조건을 놓인다면 그것은 여전히 미술인가? 대답할 수 없다.
1970년대 개념미술의 현황 : ST전시를 중심으로
1. 여는 말
1970년대 우리 현대미술을 점검하고 당시 미술의 흐름이었던 앵포르멜과 단색회화 사이를 벗어난 그밖에 움직임에 시야를 돌려보고자 한다. 미술사의 성장을 위해 한국의 개념미술을 비롯한 실험미술을 재구성해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2. 실험미술이라는 명칭
1960후반부터 10여 년 사이의 오브제, 입체, 설치, 해프닝, 영화, 이벤트, 개념적 작업등의 실험 미술이라 불리는 작업은 그 당시의 역동, 격정, 도전, 반란, 전환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과히 생산적이었던 당시의 작업들이 그 후의 미술에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실험미술에서 재료나 기법 면의 확장에 치중한 것을 실험으로 봤을 때,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향한 ‘실험성’이 전제조건이었던 외국의 경우와 달리 주어진 양식을 받아들인 우리의 경우에는 실험이 어떤 식으로 내면화되었으며, 우리 나름의 집중적이고도 가시적인 형식 실험이 있었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되겠다. 일단 당시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며 작업한 작가들을 보자면 최명현, 박영남, 김구림, 정찬승 등이 있었지만 사실 자신들의 작업에 있었지만 그들조차 이 명칭에 회의적이었다. 또 당시의 상황은 앵포르멜에 대한 포만감과 무력감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갈증을 고조시켰는데 우리 미술의 결점 중의 하나인 획일화를 벗어난 이시기에는 다양한 시도와 변화가 추구되었던 만은 틀림없다. 덧붙여 당시의 미술을 더 이상 실험미술이 아닌 ‘탈 평면미술’이라 칭할 것을 제안한다.
3. 1960-70년의 개념미술
당시 실험미술만큼이나 개념과 특성의 정리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개념미술은 1960 후반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의 퇴조와 함께 아이디어 혹은 개념이 작품 성립의 주요 요인으로 분리되어 개념자체를 작품으로 독립된 장르로 성립된 것이다. 개념미술이란 ‘아이디어가 우선 편재하며 물질적인 형태는 이차적인 것으로, 가볍고, 한시적이고, 싸고 소박하며 그리고 또는 비물질화’한 미술이다.
1) 특성과 발단 : 1970년 <AG> 2호에서 ‘사념작품’이란 명칭으로 미국의 작품이 소개된 것이 처음이었다. 60년 당시 국제적 파장을 안긴 미국의 개념미술이 ST를 통해 국내에서도 심화되지만 그 존속기간과 참여작가를 보자면 소규모운동이었다. ST의 작업들은 오브제나 입체가 주종을 이루었고 행위를 통해 개념의 표현과 전달을 의도한 물질적이고 시각적인 것이 뚜렷한 특징으로 고도로 이론화한 논리가 요구되는 미술의 개념규정이나 영역설정에 관한 언어 분석적인 작업이 전무했다. 따라서 행위예술, 특히 이벤트가 주가 되었다. 우리나라 개념미술 1호: 김구림, 김차섭 <매스미디어의 유물, 1969>+설명-우편 통신의 종말을 예감하고 곧 폐기될 편지라는 수단을 통해 미술작업을 주고 받았다. 그 해 ‘ST 미술학회’ 라는 ST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이 이루어진다. (이건용, 김복영, 김문자, 여운, 박원준, 한정문, 신성희)
2) ST의 전시 <표>
-3회전 ..
당시 파리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공개토론회를 열어 현대미술의 역사성과 반 역사주의가 논의 되기도 했다.
성능경의 신문작업이 주목 받았으며 ST전에서는 처음으로 기록될 수 있는 개념미술의 예다.
-4회전 ..
“한국현대 미술의 딜레마를 자기 논리 및 분석의 결여로 보고, 창작과 평론의 부재를 정감하고, 논리와 분석을 사진, 물질, 환경, 행위(이벤트)를 통해 모색하겠다.”
그룹의 정체성에대한 입장.
-5회전 ..
김영복의 서문에서 개념미술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목적의식에 대한 부재가 드러난다. 대신 물질과 사건, 즉 오브제와 이벤트를 강조하며 이것이 전시의 주가 되었다.
전시 오프닝에서는 이건용,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이 퍼포먼스를 했으며 나카하라 유스케의 개념예술과 예술의 개념이 토론되었다.
이벤트와 사진 외에는 여전히 물질이나 일루전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었다.
-6회전 ..
김영복 서문 “해프너들이 환경, 신체, 대지를 통해서 나타낸 시위는 ‘예술은 또 다시 자연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는 점에서 금후 현대사에서 그 의의가 크게 강조될 것이며, 컨셉츄얼 아트와 극사실주의는 이념을 어느 정도 성숙된 원리의 실험에 의해 표명한 획기적인 것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ST의 개념작업은 행위와 자연이 그 틀과 내용 이었다는 것이다.
이벤트는 지나치게 무겁고 관념적인 ST의 이벤트에 대한 대안으로 관객을 재미있게 참여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이다.
-7회전 .. 멤버 무더기 탈퇴로 그룹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8회전 .. 동덕미술관 현대미술워크숍의 일환으로 열림 마지만 ST전시이다. 이건용, 성능경, 김장섭 만을 남기고 기존 멤버 대거 탈퇴한다. ST의 연속이라기 보기엔 궁색한 전시였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ST는 자신의 종말을 자체 증명하며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의 활동을 접게 된다.
3) ST와 개념미술
ST는 서구의 사고와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존의 행태를 백지화 하고 비판토론을 거쳐서 수용하고자 했으며, 창작과 논리라는 지적인 유기적 관계를 증진시키고, 단순한 장인이 아닌 사고자로서 예술의 본질을 새롭게 사고하고자 했다. 그 성과는 논리적 작가 타입 형성과, 입체, 사진, 평면화, 이벤트 등 매체의 개혁을 통한 미디어의 영역확장과 예술의 개념과 미디어의 문제를 통한 본질적인 문제 추구를 가능케 했다. 또한 외국의 주요 논문을 공개 토론하는 등 진지한 세미나를 열었고 지성적인 모임과 순수한 활동 전개로 한국화단에 좋은 작가와 이념을 구현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을 총평하자면 개념미술로 규정짓기 어려우며 입체작업이나 사진으로 작업을 심화시키지 못하고 유일하게 지속가능 했던 이벤트는 이건용으로 가능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벤트가 개념미술에 속하는가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신체의 장이 강조되는 사건의 전개에 치중했기에 개념적인 행위미술로 볼 수 있다.
4. 맺는 말 | 그들의 작업은 크게 보아 입체 작업을 통한 물질 탐구와 형식 실험 그리고 행위를 통한 논리나 관념의 점검이었다. 윤진섭은 1970년대의 개념화, 논리화의 훈련 덕분에 화면canvas을 감정 분출의 장이 아닌 사색의 장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행위미술 이벤트
1. 여는 말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으로 시작한 행위미술은 좀처럼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다 1975년 4월 ST의 이건용에 의해 새로운 행위미술이 나타났는데 그는 자신의 작업을 해프닝과는 차별화한 이벤트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그것의 발전과정이나 사상적 배경, 그 의의에 있어 일관된 평가가 없는 실정이다. 외국의 행위미술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서도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단절에 이른 상황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이벤트 시원
그는 60년대 해프닝 즉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행위와 달리 70년대를 이벤트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이벤트는 행위가 논리적으로 진행된다며 차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정의는 원조가 되는 구미 이벤트는 원래 플럭서스의 행위미술을 칭하는 말로서 존 케이지의 제자들인 플럭서스 작가들이 그들의 음악적인 행위미술을 해프닝과 구별하기 위해 이벤트(또는, 이벤트 스코어 notation, piece)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 당시 케이지의 수업에 참가했던 앨런 카프로가 해프닝의 효시가 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거니와 후에 플럭서스에 가담한 미술가들이 짤막하고 단순한 행위로 이루어진 극히 일상적인 작품들을 구상하고 실현했던 것이 그 시원인 것이다. 그 최초의 예는 조지 브레흐트의<석양의 자동차, 1960>로 겉보기에는 장난 같고 허망해 보이기 까지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사소한 우연의 점철로 이루어진 인생에 대한 언급이자 철학이 제시이며, 그 바탕에는 선을 깊이 연구한 케이지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벤트란 명칭은 일본의 그것이 (김구림에 의해)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에는 이미 케이지에게 수업을 받은 전위음악가 이치야나기 도시, 오노요코 등의 플럭서스 활동의 모체가 되는 일련의 개념적 음악회와 이벤트의 발표의 장이 있었다. ‘음악그룹’은 도쿄 플럭서스 결성을 주도했으며 그들의 이벤트는 플럭서스 이벤트보다는 해프닝적인 요소가 많아 보다 자극적이고 연극적이었고 백남준도 참여했다.
*이건용의 첫 이벤트 ‘현신’ <실내측정><동일면적>.. 그가 고집하는 언어 행위는 “사물과 작가의 신체가 하나의 사건화하는 과정”에 돌입하여 그것이 다시 “세계화라는 장의 확산”으로 이어져서 이벤트를 통해 “사건과 행위의 형이상학을 장과 신체의 조응” 속에서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몸과 장소하는 매개를 통해 세계와 관계를 어떻게 맺는지 분명하지 않고 관객은 투명한 논리의 결말로 직관적이고 통합적인 초논리의 세계로 인도된다는 문제점을 안게 된다.
3. ST멤버의 이벤트
이건용의 ‘공간미술대상’전의 <테이프자르고잇기>의 이벤트를 시작으로 ST 4, 5, 6회전과 AG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그러나 ST의 침체와 더불어 이건용을 제외하고는 이벤트를 이어가지 못했다.
1) 이건용의 이벤트
그는 175~80년까지 입체작품을 거쳐 행위미술까지 50여개의 작품을 내놓았으며 당시엔 입체와 행위를 탈평면이라는 이유로 같이묶어서 인식되었다. 그는 미술의 개념을 질문하고 정의하는 아이디어 위주의 작업보다는 공간, 상황, 장소, 신체 등이 연루되는 ‘행위’를 선택했다. 또한 제작 행위를 멀리하고 짤막하지만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 줌으로써 정확한 사건의 본질을 보고자 한 그는 사건 형태가 논리적인 관계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의 논리는 감정의 해석이 아닌 자기충족적이고 동어반복적인 “논리를 위한 논리”가 된다. 그러면서 다다적인 행위를 통해 인생을 넌지시 보여주고자 한 플럭서스 이벤트와는 거리가 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개념미술은 정보나 지식에 머물러 세계와의 직접적 관계를 떠나게 되어 모두 극단적이므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이벤트는 이런 결점을 극복하는 관계론적 논리적 사건이라며 개념미술과 차별화시키고자 했다.
제 2회 대구현대미술제:<물 마시기>, <성냥커기>, <물 붓기> ST:<건빵먹기>, <금긋기>, <열 번 왕복>, <두 사람의 왕복>, <셈세기>-일상의 사소한 행위로’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논리’로 설명한다. AG : <장소의 논리>, <이리오너라>, <바늘구멍꿰기>, <내가 보이느냐> ‘4인이벤트’-<장소의 논리>, <로프와 고무줄>, <로프와 두사람>, <고무줄 감기> 등. ‘3인의 이벤트’: <다섯 걸음>, <손의 논리>, <장소의 논리>. 신체드로잉 : <화면뒤에서>, <화면 앞에서>, <옆으로 서서>, <팔에 깁스>, <다리 사이에>, <양팔로>, <어깨를 축으로>등.
그 특유의 명료한 행위와 논리적 사건의 전개로 당대 행위미술의 전형을 세웠다고 볼수 있지만 이벤트의 모호한 ‘개념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으며 ‘논리’와 완벽을 추구하다보니 이벤트 특유의 모순이나 돌발 사태 등 우연의 개입이 철저하게 배제된 것 문제 중 하나이다.
2)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 윤진섭
쪾김용민> 75~79년 ‘3인 이벤트 쇼’:<두개의 돌>, <긋는 것과 지우는 것>, <샌드 페이퍼>. <물걸레>, <발자국>, <테이프> 등
쪾성능경>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 <신문읽기>, <돌 던지기>, <돈 세기>, <수축과 팽창>, <위치>, <끽연>, <손>, <검지>, <위치>, <팔 흔들기>, <한장의 신문> 등 한동안 이벤트를 했지만 그 후에는 신문 사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 보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옮아갔다.
쪾장석원> <혼인이벤트>, <시계>,<하나, 둘, 셋, 넷, 다섯> 등
쪾윤진섭> <돌과 반죽>, <종이와 물>, <노란 구두>,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등
3) 이우환의 영향
그의 철학적, 사변적, 이론적인 작업성향은 특히 논리와 개념을 추구하는 ST작가들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전범이 되었다. 이우환은 신체의 행위적이고 직관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험의 구조를 중시했다. 그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은 서구의 논리와 동양의 사상이 접목되어 ST \작가들이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다.비록 그의 글이 추상적인 것으로 구조, 현전, 만남 등의 개념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서구를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일이 없이 미술을 할 수 있다는 각성을 준 점에서 사건을 강조한 행위미술의 당위성을 보장하고 또한 그들 작업의 전반적인 철학적 배경이 된 점은 부인할수 없다.
4. 맺는 말
신체를 매개로 논리적이고 사념적인 행위를 통해 세계와의 연결을 인식하고 미술의 보다 본질적인 통로를 발견하고 제시하고자 했으나 한정되고 일회적인’사건’의 제시로 보편적인 만남을 이루려는 시도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많은 관객과의 소통에도 어려웠다. 어쨌든 이들의 이벤트는 우리 특유의 행위미술의 가능성을 개진했다는 긍정적인 평ㅇ가와 그를 개인적인 영역으로 비의화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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