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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인문 > 인문고전문고 >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지은이 칼 폴라니 (책세상,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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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
1. 시장 사회
2. 경제 결정론
3. 사회 실재의 현실
4. 산업 사회에서의 자유

제2장 거대한 변형 중에서
1. 자기 조정 시장 그리고 허구적 상품 : 노동, 토지, 화폐
2. 인간, 자연, 생산 조직

제3장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
1.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
2. 경제학 철학 수고 소개
3.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강의 교안
4.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적 관점 : 비판

제4장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

제5장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제6장 칼 폴라니 약전



■ 제 3장,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

1.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

(1) 왜 그 ‘숙명적인 일’이 다시 벌어지는가? 계급이란 생산 과정에서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의 집합이다. 그 와중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집단이 있다. 노동계급, 이 집단은 사회가 객관적, 역사적 상황이 허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지만 17,8세기 부르주아 혁명이후 생산이 증대되었을 때도 이들은 아무 영향을 받지 못했다. 사회 전체의 고통이 심해지면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노동 계급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변화를 원할 수밖에 없다. (2) 자기 이익과 지도력 특정 집단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다른 집단들의 이익을 대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3) 계급과 위기 마르크스의 계급전쟁이론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는다. 계급이익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생산수단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을 찾고자 힘을 기울일 때, 그리고 전체 사회의 이익을 대표할 때 비로소 사회의 변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변형시켜 다른 계급의 이익까지 충분하게 포괄할 수 있을 때에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4) 지도력의 대가 오늘날 전체 사회의 직접적인 이익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체제의 교착상태로 인해 막다른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진취적이고 독창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성공의 여부, 즉 노동 계급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은 사회전체를 지도한다는 목적아래 노동 계급의 물질적 이익에 무관심한 대중의 이익에 자신들의 이익을 맞춰감으로써 입증된다.

 

2. 경제학 철학 수고 소개

정치 경제학Political economy 용어의 변화 ①사회철학 ②어떤 나라의 재정을 현실적으로 조직하는 문제, 이와 한께 공동체의 물질적 복지를 개선하기 위한 정부의 모든 활동. ③국부를 다루는 과학. 마르크스는 고전하의 대표자들이 지혜를 빌려 이 새로운 과학이 인간사회 자체의 법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로 정치 경제학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듯 한 삶의 철학이 사실은 그 경제 체제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은 사상가였다. 경제정치학이라는 용어는 단지 부르주아적 경제 조직에 대한 과학뿐만 아니라 현실의 경제조기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①사적소유 ②욕구와 필요 ③저축과 지출 ④유효수요 ⑤자본과 노동 ⑥자본과 토지 같은 정치 경제학의 주요 용어들이 철학적으로 함의하는 바를 밝히고자 시도했다. 사적소유로 구현되는 인간 활동, 즉 노동의 규정이 그 시작이었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의 철학적 참여는 사적 소유의 주요 전제들이 갖는 인간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밝힐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의 노동이 사적 소유의 본질이라는 사실 이 명쾌하게 드러날수록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의 여러 조건이 갖는 비인간성이 더욱 자기모순은 부르주아의 근본적인 역설이다. 이런 모순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존재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자본이 노동이라지만 자본가는 노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반면, 노동자는 그럴 수 없다. 공산주의를 통해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인류가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밟아야할 다음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3.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강의 교안

(1)마르크스주의,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철학 -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그 적용에 있어 교조적이지 않고, 진보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체제보다는 하나의 방법에 가깝다. (2)그것은 무엇을 다루는가?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사회주의 즉 앞으로 다가올 사회 형태의 성격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사회는 인간들이 관계성(경제체제)이다. 사회주의란 산업생산이라는 조건 속에서 인간들의 관계가 매개자 없이 직접적이며 인격적인, 즉 인간적인 성격을 띠는 상태(사회유형)이다.(자본주의 사회는 생산과정의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며 인간관계가 비인격적이다.) (3)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 어떤 사회도 재화의 생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분배가 아닌 생산/ 사회전제의 이해에 따른 소유체제/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새로운 소유체제를 획득하게 하는 계급/ 개인들 간의 관계, 이념을 규정하는 생산 (4)경제학 마르크스의 사회학이란 인간본성에 대한 관점을 실제 생활에 적용한 것이고, 경제학은 단지 사회주의 사회를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 (5)변증법적 유물론 부정을 통한 인간정신 운동/ 변화의 급작성. 전환점으로의 악/ 인간 생활이 물질적 사실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사회 계급들의 행동에서 이론과 실천의 동일성.

 

4.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적 관점: 비판

1)그의 ‘전체적 관점’은 포괄적이며 파편적이다. 2)3)사회에 대한, 사회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 4)마르크스의 역사해석: 사회구조 결정에서 생활이라는 요인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평가 5) 인간들이 계급을 기초로 분할된다는 역사적 사실. 6)자본주의의 발흥. 7)자본이 축적되면서 주인-노예 관계가 생산. 8)19세기 자본주의가 ‘인간적 존재’라는 말에서 ‘인간적’ 요소를 최소화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모든 인간성을 아예 완전히 뿌리 뽑으라고 요구함. 9) ‘가격’과 ‘희소가치’가 자본주의적 생산제도를 빌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함. 10)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꾸리는 '삶‘ - 나누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다-의 성격 11)무의미한 필요욕구 12) ‘인간들의 한계’ = 현재의 ‘평등하게 궁핍한 자들의 연합의 인간 도구들 13)종교적인가 철학적 유물론인가? 14)자본주의 사회는 소유자-생산자라는 임무의 규정으로 계급사회이다. 15)더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무자비한 충동. 인간의 노동은 생활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품이 되었다. 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듯,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보탄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됨 16)여기에 대안이 민주주의, 그것도 영구적인 민주주의로 조직된 사회주의. 17)완벽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현재 사회가 파괴되므로 공동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순. 18)마르크스는 인간들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제도를 갖춘 사회를 건설하려 했고 세계 공동체를 이룰 것이라 믿었다. 그는 생계수단을 보장하는 제도를 세우면 인간들이 생활을 시작하리라는 것이다. 어떤 생활? 19)새로 건설해야할 ‘체제’에 대한 고찰. 무엇으로 공동체 실현을 위한 형식들을 채울 것이며, 누가 여기에 적극 참여할 의지가 있는가?

이런 최소 조건의 형식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조차 거부한다면 이는 인간을 반종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사악하나 관점의 연장일 뿐이며, 사회가 바뀌려면 인간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오늘날 취하고 있는 관점이다. 자본이 인간의 노동 없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도 생명을 얻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게 되어있다는 주장은 숙명론을 따르는 반종교적인 태도이다. 인간은 사회를 계획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므로 인간들이 어떤 종류의 의식을 얼마나 가질 것인지 사회 체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어떤 체제에 살아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고 또 결정해야한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간혹 자신의 준거 틀을 잃어버린다. 종교와 국가에 대한 태도에 대해 유럽에서 이 두 가지가 부패했다는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들을 본질적으로 사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럽과 전 세계를 혼동했던 것이다.

 

■ 제 4장,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

경제를 전체로서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가? 경제에 대한 의식적으로 사회적인 통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 변혁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경제를 이루는 요소는 ①인간의 필요욕구 ②인간의 노동과 노고 ③여러 생산수단: 광물, 도구, 기계, 식료품, 원료, 중간생산물, 노동력이 있다. 거시경제학은 이것을 모두 다뤄야한다. 관치경제의 접근방식은 거시경제학의 세 요소가운데 오로지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즉 노동력을 포함한 생산수단에만 관련 있다. 조망의 형식이 외부세계에 있는 물질적 대상을 관찰하는 것(외적 조망)과 내면적인 인간적 종재가 일으키는 심리학적, 정신적 현상을 관찰하는 것(내적 조망)으로 달라진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제외한 나머지 경제요소는 ‘내적조망’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조망 아래 있는 것이다.

‘통제 경제학자들’이 다루는 경제학의 범위는 생산의 영역으로 한정되어있다. 그들은 필요욕구를 단순히 미리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필요욕구와 물품의 사용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인간의 노고와 노동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제를 기획하는 자는 또한 필요욕구의 충족과 노동의 노고와 고통의 수지를 맞춰야한다. 노동 시간과 생산량, 임금은 노동자가 실제로 들인 수고와 고역의 양에 대한 지식을 대체할 수 없다. 때문에 노동의 ‘비(菲)효용’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관치경제에서 ‘내면적 조망’을 달성가능성은 관치경제에서 사용가능한 수단과 양식, 즉 통계와 조직에 달려 있지만 그것들은 한계를 갖고 있다.

❚ 이런 도움으로 견제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데 조직이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은 그 조직을 떠받치고 있는 목표와 원칙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앙 계획화된 경제방식과 반대로 노동조합, 산업결사체, 협동조합, 사회주의적 지방자치단체들은 경제의 ‘내적 조망’의 기관들로서 사회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주적으로 조직된 노동자 정당이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한 상황, 즉 최고의 효율성이 필요한 순간을 검토해보면, 당의 투쟁가들과 행동대원들의 투쟁 능력, 결의, 분위기 그리고 대중 안에 존재하는 표면과 저변의 흐름, 그 흐름의 방향과 강도는 가장 정교한 과학적 도구로 이에 대해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정당에서는 폭넓은 유권가 계층의 소망과 의지에 대한 ‘내적 조망’이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결국 노동 계급 운동의 기존 형식들이 조망문제에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이 모든 조직은 각자 모두가 전체 경제를 이루는 이런저런 기본 요소들을 이해할 능력에 이바지한다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 노동계급의 조직이 갖는 중요한 두 번째 특징은 독립적으로 창출한 조직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민주적인 감시 능력을 형성하고 있는 노동계금운동조직의 원리는, 동지적 협동의 원리이며 동등한 관계의 원리이며 진정한 자주적조직의 원리이다. 우리의 주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조적 조직이란, 그 조직을 발생시킨 한 일상생활의 특정한 측면을 내적으로 조망하게 해주는 도구이다. 각 개인이 조직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할수록 지도층이 구성원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도와주는 셈이며, 궁극적으로는 지도층이 사회에 대한 경제적 조망을 얻도록 힘을 주는 셈이다. 하지만 ‘조직’이라고 해서 모두 사회주의적 의미에서 조직의 진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조직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1) 투명성-기여도 2) 조직내부 민주주의 경도 3) 지도층뿐만 아니라 성원들이 전체 조망의 과정에 참여정도에 달렸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조직문제가 바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토바우어는 기능적 민주주의를 ‘전체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동지들의 끊임없는 협동 그리고 각자의 직업과 기능 속에서 모든 개인이 효과적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에 있는데, 이것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기능을 의식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모든 개인의 기능에 대한 의식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가 문제이다. 조망 문제의 해결에 대한 우리의 기여는, 사회주의의 살아있는 핵심인 기능적 민주주의라는 더 큰 문제와 관련 있는 것이다.

 

■ 제 5장,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Ⅰ. 우리세대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국제적 차원에서 인간의 삶이 조직되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영국, 러시아, 미국 세 나라의 외교정책의 바탕을 이루는 경향들을 좀 더 정확히 살펴본다면 전통적인 외교 정책의 유형들로는 세 나라의 현대 외교방식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들의 국제정치유형 자체를 보면 미국은 19세기 단일한 국제정치 유형에 어울리는 반면, 영국을 포함한 다른 강국들은 현재 새로운 형태로 옮아가고 있는 다른 종류의 국제정치 유형에 속한다.

우리시대에 벌어진 엄청난 사건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혁명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인종적 지배라는 세계적 규모의 세 가지 형태의 사회가 동시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적’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을 지향하는 사회주의를 극복하고,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그 여파로 실업자와 사회적손실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종말, 히틀러식 지배원리의 분쇄이후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계획 및 반계획경제로들.. 이들은 모두 본성상 지역적이다. 이런 과정은 15세기 말 유럽의 상황과 흡사하다. 금본위제의 폐지로 각국이 직접 자신의 대외 경제를 관리해야만했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위해 새로운 기관들과 제도들을 개발해야했다. 이제 나란히 공존하는 지역적 체제라는 영속적 유형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그중 예외는, 미국은 여전히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온상으로 남아있는데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파멸적인 체제에 포함되어 있는 유토피아적인 정책노선을 독자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사적 기업과 영리적 경쟁이며, 이것이야말로 대다수 국민에게 사회적 평등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1930년 대공황도 미국인들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편애를 손상시키지 못했다. 여기서 핵심은 미국이 이미 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자유주의적 경제에 들어맞는 전 세계적인 세계상을 고집함에도 영국의 반동적 인사들이 영국의 대외 경제 체제도 옛날로 되돌려 미국의 체제와 일치시키는 것이 아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Ⅱ. 러시아가 힘을 얻은 가장 큰 근원은 지역주의 노선에 철저한 데 있다.

Ⅲ. 이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외 정책의 문제이다. 영국의 선택에서 ‘대외 경제’는 여러 정책의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완전고용도 탄력적 통화 공급도 지속적인 수입도 불가능하다. 1931년 금본위제 탈퇴 후 자본통제를 도입하고 불환지체제로 전환함으로써 영국은 더 이상 자유무역국가가 아니며 국내의 사적기업들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간섭해오고 있다. 또 통제에 기초하여 누가 그 통제의 책임을 맡는 가와는 상관없이 대외 경제 활동 전부를 조직할 능력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개인들의 가장 중요한 여러 가지 자유나 공공의 여론을 형성할 자유는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이런 행운은 바로 대외경제가 국내교역보다 더 통제하기 쉽고 또 통제가 더욱 절실한 부분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은행들이 도산위기에 처해 금본위제를 희생하여 구제된 후로 미국과 불평등 협조정책을 맺음으로써 다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산업적 협조를 맺음으로써 행동반경을 넓히고 생활수준을 높이며 앞으로 건설적인 평화를 향한 모험을 해나갈 수도 있지만 미국의 무능력한 동반자라는 미심쩍은 특권을 미끼로 소련과 협조할 가능성을 포기하라고 권고 받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의 위대한 상징은 금본위제를 미국이 기를 쓰고 추구하는 것은 무역의 자동적 운동을 통해서, 즉 사적 개인들과 기업들의 무작위적인 교역을 통해 ‘대외경제’의 균형 상태를 꾀하는 것이며, 지역적 경제 계획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사이의 전투이다. 영국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금본위제에 대한 정책을 분명히 해야 한다. AMGOT, UNRRA, UFEA나 그 밖의 기구들은 해방된 국가들에 시장의 방식을 다시 확립하기 위한 기구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반드시 굶주림과 실업을 야기할 것이다.

 

■ 제 6장, 칼 폴라니 약전

칼 폴라니는 그의 사상이 발전해나감에 따라 몇 번에 걸쳐 사유양식의 단절을 겪었으며 그러한 단절들은 후에 재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관심, 일반 민중들의 문화에 대한 찬양, 진정한 민주주의가 표출될 유일한 체제로서의 인간적 사회주의를 향한 모색 등은 그가 평생 동안 한결같이 추구한 가치들이다. <복합 사회의 자유>

<사상의 위기, 1909>- 이 글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점증하는 시장 경제 실패의 징후로 나타났던 ‘집산주의적 규제’를 일컫는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파시즘이라는 형식으로 대체되는 것을 1914년 이전에 미리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본다. 결국 국가 사회주의, 즉 나치 출현을 낳은 독점과 집산주의로의 발전 경향은 시장 자본주의의 결함에 애초부터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의 다음 기간’에는 명령과 규제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한 자본주의는 인간관계를 비인격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본을 집적하는 데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개인 생활의 풍부함이나 의식성의 문화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에 밀려날 것이라는 것이 이 글의 예측이다.

폴라니는 자유의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강제의 영역은 점점 넓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육체노동자들이 열등하다는 의사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할 것이며, 사적 착취는 국가 자본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암시했다. 폴라니의 예언들은 오늘날의 서구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는 비대해진 국가에 맞서 개인을 보호하자는 미사여구로 포장된 급진적 ‘신 우익’이 다시 일어나는 현상까지도 설명하기에 이른다. 폴라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자유’의 형식으로 간주했다.

그의 일생은 세 번의 이주로 구분되는 다섯 기간으로 나뉜다.

1886 헝가리태생

1902 학생조직을 통해 처음 마르크스와 사회민주당과 인연.

1905 학생운동, <자유사상가>의 편집장, 1차 대전 군복무 등

1908 진보성향 ‘갈릴레이’서클- 진보적 개혁을 위해 영적인 각성과 이론적인 틀이 모두 필요하다고 봄.

1912 변호사로 일함 - 회의감으로 인해 건강악화.

1915 현역 군인으로 징발

1919 빈으로 이주. 사회주의 연구위해 사회학과 경제학 수학. <대괴수> 미출간 집필-그는 결정론에 바탕을 둔 사회학 이론과 경제학 이론을 강하게 거부하며, 미래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신념의 ‘치명적 오류’를 경고하고 인간발전에 대한 과학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함.

1920 마르크스 <자본론> 접함.

1924 <오스트리아 경제>선임 편집자.

1933 영국으로 이주. 성인교육교사, 기독교 좌익그룹, 영국의 사회사와 경제사 연구에 몰두(‘거대한 변형’의 근간으로 자본주의로 인해 영국노동계급에 나타난 비인간화를 보고 충격 받음.) 당시 마르크스 초기 저작들이 출간되자 기독좌파성원들이 큰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기독교 형제애에 바탕을 둔 사회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초기 마르크스의 초기와 후기가 대립적이라는 의견에 반재하며 오직 하나의 마르크스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1844년 경제학-철학수고>에서 물신성, 대상화, 소외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와 경제생활>, 논문<파시즘의 본질, 1935>, <파시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용어>, <어째서 러시아를 자극 하는가>,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1945>

1940 베닝턴 대학교수역임, 헝가리 해방을 준비하는 헝가리연합의 활동참여.

1947 컬럼비아 대학 교환교수로 임명되면서 캐나다로 이주. <초기 제국주의 교역과 시장, 1957>, 논문<제도화된 과정으로서의 경제>, <초기제국의 교역과 시장>, <거대한 변형>

1964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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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에서 온 음악_시그마 폴케 | ‘독일의 팝아트’로 출발한 성찰적 사진회화_게르하르트 리히터 | 가상적 상황에서 회화의 역사를 새로이 전개하다_데이나 슈츠

추상이라는 가상 세계
포스트-미디엄의 추상 구조를 부리는 픽셀의 디세뇨_홍승혜 | 건축적 공간을 도해하는 개념의 회오리_줄리 머레투 | 추상적 회화의 소우주(를 자가 해설하는 추상적 회화)_성낙희 | 성욕의 우주에서 가지를 뻗는 수묵의 촉수_이소정

본다는 것의 의미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빛과 공간의 예술’_제임스 터렐 | 유사-과학으로 재현한 대자연의 광학적 경이_올라푸어 엘리아손 | 기계장치를 통해 본 광학적 시선의 존재_최병일

사물의 사물화
과거를 차용해 합리화된 형형색색의 기념비 조각(혹은 썰렁한 영국식 농담)_게리 웹 | 일상 사물들이 조합돼 드러내는 신묘한 질서_사라 시 | 세상과 나의 접면을 기리는 (비)기념비_김민애

사진과 영상의 고민
사진의 레이어_김상길 | 핑크와 블루의 성별 분리주의_윤정미 | 타자의 정체성을 묻고 답하는 사진_김옥선 | 코야니스카시, 균형을 잃은 삶_고드프리 레지오와 필립 글래스 | ‘마음의 생태계’를 탐구하는 영화_구동희

애욕의 풍경
‘비현실의 영역에서’ 펼쳐진 광인의 판타지_헨리 다저 | 성애의 난장을 기념하는 추상화_사이 톰블리 | 당겼다, 풀었다, 꼬였다, 다시 풀려버린 남성 상징의 괴세계_매튜 바니 | 여성의 성적 쾌락으로 재구성되는 멜랑콜리의 무릉도원_이은실

싸움의 기술
미국이 선호하는 ‘전후 추상의 프랑스 대표 작가’_장 뒤뷔페 | ‘흑인미술’의 어제와 오늘_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 | 폭발하는 ‘중국성’을 폭발하는 예술로 포착하다_차이궈창 | ‘아시안 펑크 보이’_테렌스 고

일상의 고고학
우공이산의 예술_로만 오팔카 | “나는 아직 살아있다”_카와라 온 | 실재와 허구를 뒤섞는 일상의 사제_소피 칼 | 불만합창단_텔레르보 칼라이넨과 올리버 코차-칼라이넨

당대 미술의 문제적 지점
눈 밝은 예술 후원자의 힘_링컨 커스틴, 샘 웨그스태프, 사이먼 세인즈베리 |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중첩_‘관계적 미술’과 ‘비평적 디자인’ | 상호참조의 예술_박미나와 잭슨홍



책머리에

나는 ‘오늘의 미술’을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담은 예술이라고 즐겨 설명한다. 나아가 어떤 작품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새로운 성찰을 결여했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오늘의 미술’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은 세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다루는 문화적 메타기술 혹은 미적 유사학문이 됐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를 보는 방법’을 제도화한 결과가 지금의 현대미술이지만, 과연 그 승승장구는 앞으로도 계속될까?
넓은 의미의 현대미술은, 세잔의 작품부터 갓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의 작품까지 포괄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20세기 전반의 것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45년 이전의 미술을 현대미술이라 부르고, 45년 이후의 ‘전후 미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냉전시대의 일이었다. 80년대 중,후반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제 전후 미술은 45-70의 것으로 한정되고, 80년대 이래의 미술은 당대 미술 혹은 포스트-모던 미술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리고 21세기의 첫 10년의 막바지에 이르러, 드디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종결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지금의 상황을 지탱하는 두 개의 큰 축은 교육제도와 전시제도이다. 80년대를 거치며 전지구적 미술학교의 증가로 인한 예비 작가의 수는 천문학적 수준에 다다르고 있으며 여러 역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미술관과 갤러리의 증가는 전시의 기회확보와 유통이 가능하게 되며 젊은 작가들에게도 그럴듯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국제 비엔날레의 난립으로 발생한 심각한 부작용은 작가들이 개인전을 여는 것만으로는 미술사에 이름을 아로새길 수 없게 됐으며 이곳 저곳을 전전하는 유목민형 작가군을 등장하게 했다. 결국 현대미술의 주류는 제도화됐고, 아방가르드의 혁신성이 아니라 궁정 미술과 살롱 미술의 보수성을 닮게 됐다.
‘비재현적 모더니즘 미술’의 전개는 20세기 현대미술의 큰 자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자크랑시에르가 지적하듯, 재현 가능한 것과 재현 불가능한 것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고, 반재현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재현불가능성의 논리라는 과장’에 발 딛고 있다. 고로 반재현적 아방가르드 미술에서 드러나는 개념과 아이디어의 물화도 엄연히 재현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현대미술은 일종의 메타재현의 예술이 되고 만다. 
이 글은 2007-2008년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기사와 <조선일보>, <중앙선데이>등에 기고한 기사에 바탕을 뒀다. 이 책이 소개라는 이들은 전후 미술의 금자탑을 세운 작가, 당대 미술의 승자로 미술사적 위상을 확립한 작가. 바로 지금 현대미술의 전선에서 각축을 벌이며 문제적 지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작가이다.
+ 메타적 접근 : 자기가 말하면서 자기 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반성하고 고치면서 접근하려는 방식.



우리시대의 피카소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연결 고리 ;
로버트 라우센버그
1925. 10. 22 ~ 2008. 5. 12

전후미국 현대미술의 영웅인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추상표현주의에서 팝아트로 전개되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교두보 역할을 맏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51-64년까지가 최전성기로 존케이지의 <4분 33초>에 영향을 받은 <백색 페인팅, 1951>을 시작으로 <버펄로, 1964>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남성 동성애자의 정체성과 욕망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무제(흰 구두의 남자), 1954-55>, <침대, 1955>, 그 중 <모노그램, 1955-1959>은 현대미술사상 가장 노골적으로 성욕을 표현한 작품일 것이다. 콤바인 페인팅을 바닥에 깔고 숫염소가 제 몸통으로 타이어를 꾄 모습이다. 바로 남성간의 항문섹스에 관한 이야기다.
59-60경 전사기법의 일대일 판화를 본격시도했으며 62년엔 실크스크린 기법을 도입, 작품에 반복되는 사진 이미지를 활용하므로 워홀과 함께 ‘실크스크린 기법을 현대미술에 도입한 선구자’로 기억되게 한다. 6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작가로 ‘잭슨 폴록 이후 가장 위대한 미국 미술가” 또는 “미국의 “피카소”로 추앙받았다.


컨템퍼러리 아트의 살아있는 규준 ; 제프 쿤스
1955~ 증권거래인
베르사이유 08. 9.10~12.14

‘제프쿤스’ 하면 ‘키치’ 이지만, 그의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팽창형 꽃과 토끼, 1979>, <뉴 후버 컨버터블, 뉴 쉘튼 습건식 10갤론 더블데커, 1980>, <평형-연작> 이들은 모두 개념미술 성격의 설치작업처럼 보인다. 이에 반해 80년 후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문화 비평이나 기호학 등의 영향을 받아 키치적 성격이 분명하고 해석에도 별 어려움이 없다. <마이클 잭슨과 버블스, 1988>, <메이드 인 해븐-연작, 1989>, <강아지, 1992>
그의 작업 가운데 가장 홀대를 받는 것이 회화 연작이다. 하지만 그의 회화사 내부에서도 독자 생존이 가능한 힘을 지녔다. 조합된 이미지와 각 이미지의 데이터베이스가 2중의 매트릭스로 기능한 묘한 페티시를 창출하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 오타쿠의 이미지 유희와 상통한다. <자유의 종, 2007>
세인들이 주목하는 쿤스의 제1가치는 ‘미술시장적 의의’에 있다. 시장에서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하는 작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911사태 이후 경매 시스템에서 ‘전후 미술’이란 카테고리와 ‘컨템퍼러리’란 카테고리가 분리될 때, 기준점이 된 것이 바로 쿤스였기 때문이다. <욕조 속의 여자, 2001>-250만 달러. ‘전후 미술’의 대표격인 제프 쿤스의 작품은 전전의 역사적인 현대미술품들과 동급이 됐다.
+ 키치 : 억압없이 외형적인 제약없이 표출하고싶은 모든걸 표현하는 것,
+ 오타쿠 : 주로 특정 분야나 취미에 열중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이다.


“yBa”의 늙어버린 악동 ; 데미안 허스트

1965~

라우센버그가 뽑은 ‘우리 시대의 피카소’로 꼽혔던 첫 작가-데미안 허스트. 2007년 화이트 큐브에서 열린 개인전 <데미안 허스트: 믿음 너머에> 에서 공개된 <주님의 사랑으로>은 다이아몬드 8,601개로 장식된 백금 해골 조각이다. 이것의 제작비는 1,200만 파운드(한화221억6천 만원)였으며 5천만 파운드에 구매자가 이미 내정 되 있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살아있음’을 찬미하기 위한 물신숭배, 죽음에 대한 매혹과 공포, 부의 주술적 과시가 생생히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곧 작품의 빛이 바라면서 싸구려로 보이기 시작했고, 3개월 후에 작품을 구매한 투자그룹의 주요 투자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허스트 자신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70-80 ‘yBa’로 명명된 일련의 흐름속에서 허스트는 ‘yBa의 골목대장’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면, <사랑에 빠지고 나오기, 1991>,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의 불가능한 물리적인 죽음, 1991>, <천년, 1991>, <갈라진 엄마와 아이, 1993> 등이 있지만 수조를 이용한 작업들은 제리살츠가 지적했듯, 쿤스의 <평형>연작을 흉내낸 결과다. <규제 약물 키 페인팅, 1993>와 그 파생작 <LSD, 2000>, <아편, 2000>

 

전후 일본의 아방가르드 미술


원자폭탄이후의 번종 생태계 ; 쿠도 테츠미

1935~1990

쿠도 테츠미는 미 정령하의 패전국 일본에서 가치관의 혼돈을 겪으며 성장한 전형적인 전후 세대다. <증식성연쇄반응, 1960>, 그는 네오-다다, 구타이 등 일본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그룹과 어울려 전시하곤 했지만 그의 작업은 확연한 ‘아웃사이더 풍’이라 딱히 그룹을 지정하기 곤란하다. 62년 프랑스로 옮기고 그때부터 서구인의 이원론적 가치 체계를 비판하며 원폭 이후의 휴머니즘이 지닌 이율배반적 성격을, 자신이 꾸며낸 가상적 변태 생태계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랑, 1964>, ‘당신의 초상-연작 ~1970말’ 60년대 후반, 쿠도는 성기와 고치, 새장과 정원의 메타포를 활용하며 형광색으로 도색된 기이한 변종 생물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가 일군 괴세계는 정신병자의 환영처럼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어서, 종종 현대미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됐다.
그는 90년에 암으로 죽기 전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76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 77년 상파울루비엔날레 ‘특별상’, 89년 파리에서의 회고전을 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94년 구겐하임미술관 <9145년 일본미술: 하늘을 향한 비명>을 시작으로, 98년 로스엔젤레스 현대미술관 <행위로부터: 퍼포먼스와 오브제 사이, 1949-1979>에 포함되면 점차 미술사의 주요작가로 재고찰되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수요가 형성됐으며 2008년 6월 안드레아로슨갤러리가 개인전을 열고 이어 10월 워커아트센터가 회고전 <쿠도 테츠미: 메타모포시스의 정원>을 개막했다. 하드코어 예술의 거장인 폴 맥카시의 기획전 <낮은 삶, 느린 삶>에 포함되기도 했다.


재건된 전후 일본을 위한 버내큘러의 도상학 ; 요코오 타다노리
1936~ (73세)

65년 마츠야 긴자에서 열린 그룹전 <페르소나>에서 선언문격인 포스터 <타다노리 요코오> 혁신적인 포스터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의 버내큘러 디자인 문법을 차용해 모던 디자인과의 단절 의식을 표출하는 이 작업은 다층적으로 해석된다. 68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림 전시<말과 이미지>에 참가했을 때 미국의 관객들은 그를 시대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팝아티스트라고 추켜세웠지만 작가 자신은 “소비시회의 상징으로서의 대량 생산제품에 관심을 두는 팝아트와 달리, 모던 디자인의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잡다한 시각적 요소를 수집하는 데서 작업을 시작한다.”고 주장해 팝아트와 거리를 뒀다.
그렇게 5년 동안의 최전성기는 교통사고와 그의 훈인이었던 미시마 유키로의 할복 자살로 인해 한동안 작업을 멀리한 채 불교와 인도의 신비주의를 공부했다. 이후에 나타난 작업은 초기작에 비해 힘이 약했고, 80년대 화가로 전업했으나 미술사적 성취는 없었다. 전후 일본 디자이너의 ‘역사성의 아우라’에 기댄 채 ‘버내큘러 도상의 미적 마조히즘’을 만끽한 요코오 타다노리 작업의 핵심은 ‘팝콘 정신’이라고 한다.
+ 버내큘러 도상 : 버내큘러 디자인은 쉽게 말해 '디자이너가 디자인 하지 않은 디자인'을 의미한다. 곧, 전문가가 디자인하지는 않았으나 휼륭한 기능성과 아름다운 형태로 미적 감동을 주는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다.
+ 팝콘 정신 : ??


천엔 지폐 사건 ; 아카세가와 겐페이
1937~

63년 다카마츠 지로, 나카니시 나츠류키와 함께 결성한 전위예술 그룹 ‘하이레드센터’는 캔버스와 의자 따위를 포장지와 밧줄로 결박한 채 작품으로 전시하거나 온몸을 빨래집게로 집어 놓고는 ‘예술 테스트’라고 주장하는 등, 상식을 뒤엎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들의 예술에 관한 일관된 논리는 “이것도 예술이 아니고, 저것도 예술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시회 초대장에 게재한 단문에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의 소개 글을 의도적으로 고쳐놓고는 예기치 않은 오타라고 주장했으며 이런 ‘계획된 난센스’는 동료들에게 강매한 깡통을 망치로 어렵게 따보면 속에 깡통따개가 있는 식이다. 이렇게 뒤통수 치는 전략은 ‘모형 천엔지폐’ 연작 일부가 위폐로 간주돼 법정 소환되기에 이른다. 천엔 지폐를 실물크기로 인쇄해 포장지로 활용한 것인데 그들은 1966년 공판에서 자신이 행한 일이 예술이 아니라면 범죄가 돼 유죄 판결을 받을 처지라 여태까지의 주장을 180도 바꿔 “이것도 예술이고, 저것도 예술이다.”라는 논리를 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서 그들은 한 시간이 넘게 퍼포먼스를 펼쳤다. 하지만 70년 유죄판결로 징역3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그 후로 수필가 혹은 소설가로서 필명인 오츠지 카츠히코로 이름을 날렸다.  


진실을 꾸며내는 괴력 ; 오노 요코

1933. 2. 18~

1933. 2. 18~ 오노 요코는 귀족적이고 엘리트적인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52년 가쿠슈인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적응에 실패해 뉴욕으로 가서 현대시와 작곡을 공부하면서 이치야나기 도시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을 통해 존 케이지와 교우하게 된 그녀는 이후 젊은 작곡가 라 몬테 영과의 연인관계를 통해 AG갤러리를 운영하던 ‘미스터 플럭서스’ 조지 마키우나스를 만난다. 요코는 존 케이지의 사상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꿈꾸기 시작한다. 조지 마키우나스와 함께 기획한 ‘체임버스가 콘서트, 1960-1961에 <그림자 회화>, <연기 회화>, <밟기 위한 회화> 등을 발표한다. 61년 AG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62년, 전후 일본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돌연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소게츠아트센터에서 <오노 요코의 작품>을 선보이며 작곡가로 데뷔했다. 얼마 후 재즈 음악가이자 영화 제작가인 앤서니 콕스와 결혼해 자신의 사상과 작업을 정리하며 64년 <그레이프프루트, 1964>를 발표했다. 그것은 그녀의 독창적인 ‘지시문 작업’이 제 모양을 갖춘 기념비적 저작으로, 발간과 함께 <자르기 작품, 1964>, <자루 작품, 1964>같은 대표작을 발표했다. 이후 플럭서스에 적극 참여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늘 작품, 1965>, <아침 작품, 1965>, <새벽의 눈내림, 1965>등의 작업을 제작 발표했다.
영국으로 활동거점을 옮긴 그녀는 인디카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서 존 레넌을 만나게 된다. <파란 방 이벤트>, <천장 회화(예스 회화), 1966>, <못 박기 회화, 1966>, <백색 체스 세트, 1966>. 필름으로 작업 영역을 확대한 그녀는 <불 켜는 작품>에 기초한 <No.1(성냥), 1966>, <No.4(엉덩이들), 1966>을 발표했다. 67년부터 연인이 된 존 레넌과 공동작업으로 <방 반쪽, 1967>, <세 개의 숟가락, 1967>, <평화를 위한 침대에 눕기, 1969>, <전쟁은 끝났다, 1969> 등을 작업했으며 둘은 69년 결혼했다. 결혼 후 필름 작업도 지속돼 <파리, 1970>, <평화, 1970>, <아포테오시스, 1971>, <발기, 1971>가 제작됐다. 71년 애버슨미술관에서의 미술관 첫 개인전의 반응은 냉담했고 이후 미술작업에 힘을 쏟지 않고 80년후부터 아예 미술계를 멀리하게 된다. 2000년 회고전 <예스 요코 오노>를 통해 플럭서스의 대표 예술가로 추인되고 개념미술의 숨은 공로자이자, 일본의 전통적 선 사상과 하이쿠를 현대예술에 접목시킨 선구자로 재평가 됐다. 오노 요코의 진정한 역작은, 거짓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자체, 즉 개인의 거짓을 기반으로 했으나 세계가 공유하는 실제가 돼버림으로써 ‘아트’와 ‘역사’가 된 인생자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에이즈 시대의 미술

“살아있는 조각’으로 사는 영국의 괴짜 듀오 ; 길버트와 조지
길버트, 1943년 생
조지, 1942년 생

동성애자 듀오인 길버트와 조지는 스스로 ‘살아있는 조작’임을 주장하는 장난 같은 퍼포먼스와 액자를 여러 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크게 확대한 도발적이면서도 바보 같은 반종교적 사진 이미지로 유명하다. 68년 미니멀아트와 개념미술의 흐름을 정리한 역사적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의 개막 당일 이들이 페인트를 몸에 바르고 스스로 조각품임을 주장한 퍼포먼스는 미니멀리즘이나 개념주의에 대한 힐난으로 독해됐고, 독일의 아트딜러 콘라트 피셔가 이들을 발탁해 미술계의 중심에 진입할 수 있었다.
60년 말 이들의 전략은 기회주의적이었으나 77년 당시 런던의 스피탈필드에서 거주한 이들은 당시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게토지역에서 여러 사회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캠프 스타일의 작품 형식을 자리잡게 된다. 범죄를 일으킨 청소년들을 종교화에 등장하는 성인의 도상처럼 배치하거나, 분비물 사진을 조합해 배경이 되는 패턴을 만드는 등 이들이 작업은 점차 과감해졌고, 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에이즈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에이즈의 공포를 우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상해낸 유일한 작가였다.
+ 캠프 스타일 : 퀴어(성정체성 거부)들을 사회적으로 표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프로노그래피의 형식으로 탐구한 그레코-로망의 아름다움 ; 로버트 메이플소프
1946. 11. 4 ~ 1989. 3. 9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60년 당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흐름에 합류해 70-75년까지의 1500점 이상의 -대개 익명의 나체를 찍은- 폴라로이드 작품을 제작했다. 공공장소에서의 섹스, 혹은 게이 클럽이나 파티 등을 통해 만난 익명의 상대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그는 괴물로 거듭났다. ‘사진기를 유혹의 도구로 삼으며, 피사체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그의 주요 작업에서 느껴지는 사조-마조히즘적인 성격은 그러한 초기의 긴 실험 과정을 통해 계발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뉴욕 게이 명사 사회의 성장과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25살 연상의 연인이자 후원자인 샘 웨그스태프를 만났으며 부와 심미안을 갖춘 큐레이터이자 수집가인 연인의 후원에 힘입어 작업은 일취월장해, 70년 중반부터 점차 안정된 초상사진을 촬영했으며 더욱 강한 자아와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기술을 시험하는 동시에,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점차 높여갔다.
하지만 81년 게이사회를 강타한 에이즈에 메이플과 그의 연인이 감염되었고, 그는 더는 가질 수 없는 이상화된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에 상반되는 죽음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레코-로망의 이상을 재현하는 조각적 이미지는 그리스와 로마의 육체미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흑인 육체의 동시대적 아름다움을 꾸준히 기록했다. <블랙 북, 1986> 결국 에이즈 합병증으로 웨크스태프는 87년, 메이플소프는 89년에 생을 마감한다.
+ 사조-마조히즘 : 고통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뜻


‘빛나는 아기’ 영원한 1980년대의 아이콘 ; 키스 해링

1958~1990. 2. 16

앤디워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 그는 76~78년 동안 피츠버그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고 80년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는 거기서 도시 곳곳에 널린 그래피티와 한창 성장 일로에 있던 게이 공동체에 영감을 얻는다. 지하철역사의 벽면에 분필로 낙서를 하고, ‘클럽 57’에서 몇몇 기획전을 조직하기도 했다. 토니 샤프라지의 갤러리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이듬해 첫 갤러리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다. <빛나는 아기, 1980>-‘콜렙’ 그룹전 <타임스스퀘어 쇼>에서 전광판에 디스플레이. 그리고 만화와 그래피티의 문법을 차용한 거친 형식으로 문명비판적인 메시지를 담는 한편, 화면 전체를 아프리카 풍의 패턴으로 메워 나가는 추상 작업을 병행해, 자신의 미술사적 입지를 분명히 하고자 애썼다.
84년엔 세계 이곳저곳에 대형 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의 작업은 국제적 도시풍경의 일부가 됐다. 86년엔 뉴욕 다운타운에 ‘팝샵’을 개점해 자신의 작품을 응용한 다양한 물건들은 팔기도 했다. 그는 앤디워홀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그는 스타덤에 올랐고 유명 아티스트와 함께 협업했다. 80년 당시 예술계의 기저를 흔들던 에이즈는 “동성애자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는 인식이 아직 있었기에 걸리면 숨기고자 애썼다. 하지만 해링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작품에 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88년 에이즈 감염 후 사실을 숨기지 않고 에이즈와 에이즈 공포증, 그리고 동성애자 차별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89년에 세운 키스 해링 재단은 투병중인 어린이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90. 2. 16. 만31세 ‘영원한 1980년대의 아이콘’ 키스해링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에이즈 시대의 멜랑콜리한 영웅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1957-1996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 특징은, 개념미술의 어법과 미니멀리즘이 형식을 차용해 지극히 개인적인 일화들을 숨기고 그것이 전시되고 해석되는 과정이 정치적 비평 혹은 성찰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전선으로 이어진 전구들, 스냅사진을 인쇄한 퍼즐, 한 쌍의 벽시계/거울/커튼, 바닥에 쏟아놓은 알사탕, 끝없이 제공되는 인쇄물 더미, 반짝이 구슬장식 스크린, 옥외 광고판 등등) <무제(로스), 1991> 집안 귀퉁이에 사탕을 쏟아 놓은 것으로 관람자는 누구나 가져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무게는 (에이즈로 사망한 연인의 몸무게와 같은) 79kg을 유지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사탕은 연인에 대한 달콤한 추억에 대한 알레고리이고, 관객은 사탕을 집어가는 행위를 통해 사적인 기억-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뉴욕에서 활동하다 만 38세의 나이에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요절한 그는 사후 10년이 되서야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주인공이 되었다. 90년대 미국의 탈식민주의를 다룬 작가로 선정되었지만(감독:로버트 스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커미셔너인 낸시 스펙터가 제 맘대로 작가의 미완성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한 ‘신작’은 ‘수준이하’ 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평단이 아끼며 한국에서는 그의 영향은 받아 유사한 작업을 하는 이들도 많은 등 다시 한번 되새겨 볼 가치가 있음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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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와 수용

민족 정체성, 디아스포라의 불안 그리고 베트남 뮤직비디오 문화
애슐리 카루터스

1986년 베트남 공산당 제 6차 전당 대회에서 채택된 도이 머이, 즉 개혁 정책은 조용히 은둥 중이던 이 마르크스 레닌주의 국가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 통합된 시장 경제로 탈바꿈시켰다. 개혁정책은 베트남 디아스포라 대중문화를 통해 억압받던 민족이 문화를 다시 되살리는데에도 한 몫했다.
디아스포라의 1세대인 지도층은 반공주의와 망명성을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의 본질을 이루는 측면들로 제시했으며 베트남적인 것에 대한 본질적 규정을 심화시켰다. 이제 디아스포라의 상업문화와 관련된 최근의 논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전에 정치색이 짙었던 디아스포라의 방송프로그램은 최근 다원적, 찬양적, “향락적인” 연예문화로 옮겨갔다. 이제 망명음악과 정체성들은 다원성, 혼성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포스트 모던  공간 속에서 다른 무수한 정체성들과 경쟁하기 이른 것이다.
재외 베트남에서 가장 오랫동안 구준한 명성을 유지해온 버라이어티 쇼인 투이 응아 사의 <파리의 밤> ’<어머니>편’이 얼마전 반공주의 논란에 휩싸인 바있다. 버라이어티 쇼가 교육적 기능을 행사한다는 공감대가 디아스포라 사회에 형성되어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비디오의 내용은 베트콩들을 무참하게 사격하는 헬리콥터 등으로 전쟁의 참혹함이 그대로 담겨져있었다. 반공주의라는 대의의 정당성과 타당성의 이해는 없었다. 즉시 응아 사의 의도가 <파리의 밤.을 공식적으로 베트남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승인을 받고자 하노이에 동조하고있음을 보이기 위해 삽입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샀다. 그들은 극구 부인해면서 이념적 색채를 바꾸는 전략을 통해 경제적 이윤이 창출되었으리라는 추측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문제는 충분히 현실적 개연성이 있으며 세대 간 단절 현상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소비욕망은 점점 망명 문화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에서는 도이머리가 상업적 문화생산의 부활을 유례없이 성공시킴으로써 교역의 물고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기 시작하면서본국의 음악이 재외 베트남 지역사회 곳곳에 등장하는 빈도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머니>비디오를 둘러싼 반공주의 정서 논란은, 각 생성된 초국가적 베트남 사회의 헤게모니 장악을 둘러싼 디아스포라 지도층과 국가가 벌이는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한시적으로 현시점의 본국의 정체성이 거부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투쟁으로 보면 망명자 헤게모니는 그 위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도이 머이 이후 베트남은 서구문화 과잉에 대해 엄격한 제재를 가하면서 일련의 문화 순수성 지키기 운동을 벌여왔다. 이들의 적극적인 “문화청소”과정은 옥시덴탈리즘 패러다임 안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적이되 완전히 그런것도 아니며 타자이되 어딘가 우리와 비슷한 디아스포라 주체는 질서 짓고 규범화하는 담론으로서의 옥시덴탈리즘이 지닌 효율성을 무참히 무너뜨린다. 이들의 대중음악 문화는 공식적인 담론들이 흔히 사용하는 “외적” 도는  “외국” 문화라는 포괄적인 범주에 얌전히 들어가기를 거부하면서 베트남과 서구 사이에 있는 양가적 기호가 되어 베트남 특유의 옥시덴탈리즘 담론 속에서 성립된 공간적 경제와 문화적 극단성을 훼손시킨다.
베트남의 문화청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회색시장(손가방 비디오 등)’에서 손쉽게 디아스포라의 문화상품을 입수 할 수 있었다. 체제전복에 대한 국가적 두려움이 소비 욕구를 이기진 못하는 것이다. 다이스포라 생산물은 기술적 우월함, 높은 생산가치, 세계적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본국 문화가 자체의 음악적, 경제적 자원으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음을 극명히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서구 모더니티의 덫 한 가운데 있는 디아스포라 동포의 이미지는 확실히 본국 시청자들의 소비 판타지에 매력적인 거울이었다. 그들이 실제 공연에서 생각보다 멋지지 않다고 한들 사이공인들은 대부분 <파리의 밤>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대중음악 문화가 민족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있음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본국과 제외 베트남의 대중문화가 이제 더 이상 구별 불가능한 상화이 되어 버렸다. 대중음악 문화라는 제단 앞에서 이루어진 베트남 본국과 디아스포라 사회의 다소 세속적인 성격의 재혼, 세계화 시대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문화 교류로 인해 비롯된 재결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낭비와 결핍

한국의 베트남 전쟁:침묵을 넘어
찰스 암스트롱

남한은 공화국 역사상 자국 군대를 최초이자 대규모로 해외파병해 놓고도 이를 거의 잊고 지내다 90년 초반 베트남전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독재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경제적 문제로 베트남 참전을 시작하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경제난에 휩싸였던 남한에 그것은 ‘금광’과도 같았은 존재였다.
전쟁에서 한국군들은 유능하며 용맹스런 전투원들로 베트남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군의 잔혹행위의 규모와 특징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는 한국전쟁이 가졌던 잔혹성의 산물이기도 하며 일본식민지배의 유산, 그리고 인종적 분할이 명백한 전쟁에서 한국인들이 직면한 곤란한 처지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군사 독재 시절 동안 전혀 수면으로 부상하지 않았다. <한겨레 21>은 ’청룡’해병여단- 용의 눈 작전’등의 민간인 잔혹학살을 알렸다. 하지만 한국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행위와와 같이 미국의 노근리 학살배상문제와 겹치면서 미국과 한창 협의를 진행중이던 남한 정부 이 사실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우리 정부가 베트남 학살레 대해 반문한 내용을 보면 미국이 노근리 사건에 대처하는 미국인들의 모습과 흡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전쟁에 관한 기억을 두고 2000년 한국에서 분출된 갈등은 몇 년 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고 한국군의 잔혹행위라고 주장된 사안들 조차 조사되지 않았다. 두나라 정부 모두 각을 세워야 할 골치 아픈 과거사가 상호 이익이 되는 경제 관계를 쓸데 없이 망쳐버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NGO들의 연합체인 한국 베트남전 진실 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조사했고 비공식적으로나마 베트남민들에게 사과했고 황석영도 베트남 소설가 바오 닌 을 만나서 큰절을 하며 사과한 바 있다.) 지식인들과 지역의 보통 사람들이 나서서 가각의 상호 갈들이 제기하는 불만들을 해결하여 오랫동안 지속된 동아시아의 피비린내 나는 20세기가 뒤늦게나마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베트남 문제”:아시아에서의 전쟁 잔혹행위, 국가정체성, 그리고 화해
김현숙

1964-73까지 소위 미국의 "용병"으로 북베트남과 싸웠던 한국군 30만명이 무장하지 않은 베트남 민간인 수천명을 죽인 혐의가 드러난다. 최근 생성된 문화적. 정치적 움직임은 독재정권의 냉전시대 이후에 한국이 지닌 정치적 정체성을 재검토할 문맥을 제공한다. 다음은 한국의 베트남 문제가 갖는 지역적, 국제적 차원의 모호성과 명확성을 모두 보여주는 예이다.
하 미 마을 위령비 설치문제  99년 참전군인 여러명이 이 마을에 찾아와서 전쟁에 대해 사죄하면서 현금을 기부하고 하미 마을 공무원들과 주민들에게 "화해의 위령비"를 설립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은 2000년에 세워졌다. 하지만 준공식이 있던날 다시 오겠다는 한국 참전군인들을 비문의 내용과 전시방식에 불만아닌 불만을 가지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이 화해를 위한 위령비로 적합하지 않고, 학살이 아닌 민간이 구분불가능한 게릴라전의 결과였으며 위령비 앞에 나란히 걸기로한 태극기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면 누구의 생각과 관점이 어떤 메시지로 표현되야 하는가? 누가 그 주제와 의미를 정의 할 수 있고, 누가 표현을 허락하거나 반대할 권리를 가지는가?
참전 군인들의 반대는 단순히 용어 사용에 대한 불쾌함의 표현이 아니라 베트남 '내'의 지역 기념물을 그들 자신의 식대로 세우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목숨을 앗아가고 생계를 파괴해버렸던 사람들로부터 영예를 얻고 인정을 받으려한다는 점이 상황을 혼락스럽게 만든다. 위령비는 지역화된 진실의 외부적 표시이자 증거이며, 그 지역 특유의 진실과 역사를 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상징적이며 공식적인 문화적 유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립하는 문제는 전쟁 역사와 기억에 대한 어떤 견해가 영원한 공공형상으로 기록되어야하는 가에 관하여 국가의 논쟁과 논의를 낳았던 것이다.
상처가 남긴 흔적 한국인들을 포함해 베트남 외부인들은 베트남이 전쟁에 대해 잊어버렸거나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잘 숨긴다고 말한다. 그들의 공식입장도 이 일반화에 벗어나지도 않는다. 이런 정치적 논리는 외부와의 결속을 위해 전략적으로 짜여진 것으로 남한의 또다른 공식적 입장인 부정의 수사학(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기) 마저 합리화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은 실질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 (빈 호아 마을, 빈 손 현, 쾅 나이 성-민간이 학살피해지역으로 학살지역및 집단 무덤이 역사적 장소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이 새겨논 기념비에 그려진 여성 전사를 통해 사회가 여성에서 부과한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기준들을 볼수 있다. 여성은 희생적인 엄마와 아내라는 전통적 여성의 의무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용감한 전사와 군이이라는 전통적인 남성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부정과 사죄의 언어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베트남 정부와 자본주의 남한 정부가 고수하는 전쟁에 대한 공식적 입장은 경제발전이라는 동일한 담론에 의해 형성되었다. 냉전시대의 적이었던 두 나라는 이제 국가간 경제 협력 증진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며 두 국가 모두 학살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린다. 한국인의 잔혹행위에 대한 공식적 부인은 중대한 정치적, 도덕적 의미를 가진다. 이런 침묵과 부인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한국베트남전 진실규명 위원회라는 연합조직이 형성한 운동가들이 만든노래<미안해요 베트남>로 비공식적 사과를 했다.
이 글은 아시아 국가간의 역사와 기억을 다시쓰기위한 논쟁의 영역으로 국가간 논쟁은 불평등한 구조적 위상 속에서 상충하는 요구와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주체들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묘사되었다. 기념물과 학살에 관한 논쟁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은 이 논쟁이 전쟁의 기억, 후기식민주의시대의 역사, 국가적 정체성들이라는 질문에 관하여 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대화를 나룰 수 있는 정치적, 문화적 장을 열었다는 점이다.


기술자 수출합니다 :한 파월(派越)기술자의 삶과 베트남전쟁
윤충로

파월 인력송출(파월 열기)속에서 베트남은 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곳이 되었다. 당시 절박한 현실에 놓인 한국은 분단과 전쟁, 끔찍한 실업사회와 보릿고개로 이야기 되는 5-60년대로 분출구만 있으면 어디로든 튀어나가려는 끓어오르는 압력솥과 같은 곳이었다.
윤인식의 구술생애사(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26년생. 강원도 이북출생으로 우체국에서 월 30원으로 부모를 부양하여 생계를 꾸려나간 그는 해방 후 돈을 벌기 위해 월남하여 운좋게도 영어를 좀 한다는 이유로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피난을 못간채 서울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어 미군부대 경력과 추천서를 가지고 파월을 실현하게 된다. 베트남에서 그는 66~8년 동안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에서 유지, 관리하는 일을 했다. 당시 월급은 800-900달러 정도 받았지만 그 곳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고 그나마 '가족주의', '경제욕구'로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 한국에 귀국했다가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다시 파월한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트레일러 운전을 했다. 그 회사는 미국의 돈과 한국인 기술자로 운영되었으며 월 350달러를 받았다. 그나마 일이 줄면서 귀국신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삶에 대해 그는 '연민'과 '우월'의 양가성을 동시에 인식했다.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에 파견된 필리핀인의 역할을 자신이 베트남에서 한다는생각에 그들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인들에게 받는 차별에 대해 당연히 생각했다. 이런 양가적 의식의 배경에는 바로 미국을 정점으로 한 전시경제와 미국회사의 노동관리정책이 있었다.
해방과 분단, 두번의 전쟁을 겪으며 미군, 미국 회사와 함께 했던 청장년기는 그렇게 전쟁지원 업무 속에서 흘러갔다. 그때의 삶을 지배했던 거시적인 구조속에서 윤인식의 경험은 미국의 세계적인 군사적 패권주의, 국민을 전장으로 동원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했던 한국의 국가적 이해가 어떻게 미시적인 개인의 일상에 침투하고, 자신의 의지를 실현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 없이 펼쳐지는 기나긴 꿈


후일담과 전쟁을 뛰어넘어:남한과 베트남 문학의 오늘과 내일
유재현

베트남전은 72년 유신체제로 접어들었던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에 있어 반공주의 강화로 유신체제를 보위할 빌미가 되었다. 남한의 참전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보수우익의 전유물이었으며 파시스트적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반공주의, 군사주의가 그 평가의 굳건한 토대였다. 이것의 새로운 시각은 참전세대가 아닌 참전 후 세대에 의해 주도 되었다. 박영한<머나먼 쏭마강>, 황석영<무기의 그늘> 안정효<하얀전쟁>. 80년 민주화운동세대에게 베트남전은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민중의 항쟁이었고 미제국주의를 패퇴시킨 전쟁이었다. 또 베트남과 남의 현대사적 유사성 또는 동질성,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상황등은 서로를 좀더 가깝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90년대 후일담문학. 남한// 방현석의 소설 <존재의 형식>, <랍스터를 먹는 시간> 베트남//바오닌<전쟁의 슬픔>, 레 라이 헤이슬립<하늘과 땅>, 반레<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94>-반레의 그것은 종전의 전쟁소설과 달리 남한에만 소개된 책이다. <전쟁의 슬픔>에서 전쟁은 부정해야 할 것인 반면 <그대...>에서 전쟁은 극복의 대상으로 취급되며 시장사회주의로의 본격적인 길을 걷고 있는 베트남의 모순된 현실에 대한 상실감과 옅은 환멸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이 2002년에 남한에 소개된 후 80년대에 대한 상실감이 짙게 배어든 전형적인 후일담 문학으로서 방현석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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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BOL0042006.겨울정의
카테고리 잡지
지은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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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티아
전지구화하는 세계, 정의의 재구성 낸시 프레이저
동양철학에서의 정의란? 이장희
드로잉 댄 페르조프스키
분배적 정의의 문제: 롤즈의 정의 원칙을 중심으로 정성철
정의는 눈가리개를 해야 하는가?: 이미지, 법에 도전하다 마틴 제이
오웰의 말손바닥 안에서 헤매기 김병익

겹눈
과학에서 본 정의의 문제 - 홍성욱
최후의 만찬 - 매트스 비게르트& 라그 버그스트롬
의료적 관점에서 본 정의 - 유영진
끝장 - 황세준
경제학과 정의 - 류동민

공공의 순간
정의를 말하는 세 가지 목소리: 두 가지 현실적인 목소리, 한 가지 상상적인 목소리 - 페드로 라쉬
그렇다면 누구의 세계인가? - 야곱 야곱슨&미켈 볼트 라스무센
스태틱 - 김보형
새로운 질서 경계지도 - 16비버

네트
무엇을 할 것인가? - 한국미술의 몇 가지 현안에 대한 이메일 질의 응답 - 볼



그렇다면 누구의 세계인가?
_야곱 야곱슨 / 미켈 볼트 라스무센

1980년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는 전 지구적 패권을 확보하는데 일로매진해왔다. “오해하지 마라.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혁명이다.-레이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융합으로 동맹을 맺은 국가의 일반여론에는 이라크전쟁이 마치 이라크민중의 해방인 것처럼 판매될 정도이다.

청계천-신자유주의 강물

1990년대 ‘전지구화’의 개념은 200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일컫는 용어로 수사학적 변화를 맞는다. 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단계로 격상된 캠페인은 사실 미국이라는 제국의 지리경제학적인 전지구화를 완성시키는 노력이다. 미국이 세계를 통제하는데 1990년대는 세계시장을 통해 행사되었다면 이젠 군사력 투입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미 대사관 옆에 위치한 적선동-미국의 현존이 참호를 파고 숨어서 무장을 갖추고 있는 곳.

예방전쟁. 미국 부르주아의 통제권을 확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재의 세력 균형을 유지한다는 명백한 목적으로 라이벌 국가를 약화시키고자 이루어지는 전쟁. 미국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려는 메커니즘은 도처에 널려 있다. 911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후로 자기의 이익과 전지구적인 이익의 연관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우리와 함께하든가, 테러리스트와 함께 하든가”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수호하는데 모든 ‘동맹국’을 묶어주는 일반 적인 전략의 일환인 것이다.

용산 가족공원- 가까이 하기 너무 먼 공원.

특권을 누리는 중산층을 위해서 가난한 노동자계급을 쫓아내는 과정은 경제의 새로운 재구조화와 개발의 일환이면서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전지구조화를 암시하는 전조로 간주될 수 있다. 청계천은 이러한 고급화 재개발, 노동빈민과 그들 문화의 추방, 부유층과 그들의 담합적인 문화로의 대체라는 일련의 과정을 개시하고 있다는 징후를 모두 보여준다.

전지구적 부르주아의 경제적 필요성에 부응해서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억압의 체계가 수립된다. 하지만 현실은 노동력이 관리, 착취 가능하다면 경찰에 의한 ‘보호’에 노출된 채 최저임금으로 생계위협에 내몰려 투쟁을 일삼고 있다. 대다수 국민은 ‘자유세계’어디에서나 번창하고 있는 보안과 통제의 메커니즘을 정당화해주는 사회적 쓰레기에 불과하다. 자유주의 시민들에게 TV에서 비춰지는 참상은 헐벗은 삶의 군상에 대해 보다 더 많은 통제와 완벽한 배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포이동 226번지

 

 

스태틱
_김보형

스태틱은 건축가 폴 설리번과 미술평론가 존 번이 공동 디렉터이며 ‘스태틱 콤플랙스’를 거점으로 미술의 사후활동 -작품 생산이후의 교육, 소비, 소통, 비평의 구조에 개입-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스태틱 팜플랫 2003~ > 정기적인 국내외 전시, 문화행사 ,정책, 글 등에 대한 온/오프라인의 비평의 장으로 출판과 웹 토론 방식으로 진행됐다. <Exit Review> 비평적 담론의 부재에 대한 대안적 활동으로 리버풀지역 미술대학 졸업생들의 졸업 작품을 대상으로 비평하는 프로젝트이다. 창작경험만 가지고 있던 대학생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분석의 기회를 제공하고 공적과정에 노출시키고자 기획했다.

<2004리버풀 비엔날레> 공식 기자단 프로젝트는 미술언론과 정보의 소통 구조에 일정한 변경을 가하는 비평행위이다. 그들은 비엔날레에게 허가받은 ‘공식’ 집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엔날레의 전형적 언론 보도 자료가 아닌 가능한 많은 비평적 정보를 제공해서 보다 좋은 글과 비평이 나오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기획됐다. 그들이 운영한 Press Crops은 웹사이트와 사무실을 이용해 매일 언론을 대상으로 브리핑을 하거나 비엔날레 기간 중 방송, 인쇄 매체를 통해 보도된 모든 관련 기사를 모아 입체적인 비평의 지형도를 제공했다. 또한 보도현황 자체에 대한 별도의 기자 간담회를 열어 언론에 대한 비평적 점검도 했다. ’11개의 문단: <리버풀비엔날레> 보도 자료에 대한 간략한 탐구” -

국내에서 열렸던 <국제작가포럼 2006>에서 1회 행사인 “공공의 순간”공식 Press Crops을 스태틱에 위임했고, 같은 해 <광주비엔날레>는 기자신분으로 그들을 초청했다. 리버풀 때와 마찬가지로 웹사이트와 사무실을 이용해 비평적 글들을 구성했다.

인미공에서 운영된 사무실은 언론인만 출입이 가능했고 일반인들은 벽에 난 두개의 구멍으로만 내부를 볼 수 있게 했다. 이 설치를 통해, 작품과 관객, 언론과 관객 사이의 격리와 소외관계가 비유된다. 그들은 사무실 벽면에 일간지, 잡지, 온라인 뉴스매체에 보도된 기사가 수집돼 보도의 흐름과 언론의 관심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개막 후 2주 동안 수집된 보도 자료의 내용은 85% 일치할 정도로 획일적이다. 웹사이트는 두 미술행사 관련 자료와 비디오와 텍스트로 연결되었으며 언론보도의 검색도 가능했다. 온/오프라인으로 정보제공 ‘서비스’를 했다면 프로젝트 최종 단계인 국내외 필자 10명의 글은 미술행사와 작품이 전시 종료 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미디어와 미술의 상호 작용과 관계를 점검하기 위한 이런 시도들은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미술행사가 끝난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이며 작품이나 이미지는 행사이후 어떤 형태로 존재하며 소통하는가? 작품도 감상하지 않고 보도 자료만을 참고해 작성된 기사나 평론을 읽는 도작들에게 과연 향유의 대상은 무엇인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실제로 관객들이 작품을 직접 감상하기보다 매체를 통해 간접 경험하는 상황에서 더욱 중대한 문제가 된다. 비평적 보도의 역할은 단순히 미술작품과 관객을 매개하는 수단이 아니라, 미술작품의 내용에 직접 간섭하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미술의 몇 가지 현안에 대한 이메일 질의 응답
_볼

Q. 미술과 사회의 관계에서 중추적 역할인 언론은 미술에 무관심한채 겨우 기사를 보도하는것 같다. 그 원인과 개선방법이 있겠는가? 웹진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 블로그 같은 개인언론에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가?

A. 공성훈/
조선령/
황세준/
박찬경/
길예경

Q. 최근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국제작가포럼2006 ‘공공의 순간’>, <사춘기 징후>등의 전시를 보면 민중미술 이후세대의 ‘비판적 미술가’라고 할만한 젊은 작가들고 대안공간에서 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듯한 상황에 대해 자연스런 변화라는 시각과 ‘새로운 권력’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A. 황세준/
조선령/
공성훈/
박찬경/
길예경

Q. 참여를 통한 개혁

A. 조선령/
박찬경/
공성훈/
황세준/
길예경 

Q. 미술대학과 인문학의 위기의 시기에 미술대학의 생존도 가능하고, 의미 있는 교육도 가능한 길은 없을까? 대안적인 미술교육의 내용적인 핵심은 무엇이며 당장 어떤 실천이 가능할까?

A. 조선령/
공성훈/
황세경/
박찬경/
길예경 

Q. 세계화와 미술에서 문화 세계화는 지역사이의 연대와 문화적 개방성의 새로운 조건으로 활용가능성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 지금까지의 국제 행사의 문제는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활동을 기대하는가?

A. 조선령/
황세준/
박찬경/
길예경 

Q. 최근 젊은 미술가들에게 세계인식의 실패와 메시지의 모호성이 만연하다. 감상적 고백이나 위악적인 무관심이 부끄럼 없이 행해지는데 마치 세상만사에 지쳤다는 식의 태도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진단하는가?

A. 황세준/
공성훈/
조선령/
박찬경  

Q. 최근 확장된 의미에서의 비판적 미술에 가장 가까운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는 누구인가?

A.공성훈/
조선령/
황세준/
길예경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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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BOL0032006.여름역사의호출
카테고리 잡지
지은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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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구술사 드로잉 - 허윤희
상품화에 대한 태도: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 김진석
다운타운 커뮤니티 TV 센터(DCTV) 공동설립자, 존 알퍼트와의 인터뷰 - 볼
삼촌들 - 김기수

상품화
미디어와 역사의 소비 - 주은우

친구를 잃고 대중과 멀어지는 방법: 노만 핀켈스타인 교수와의 대담: - 돈 아타파투
말해줘요 “영일씨" - 고영일
역사와 여행 - 송도영
바다의 운運 - 알란 세큘라

기록
식민지 조선을 보는 눈: 일제시대 사진 아카이브 - 선일
스펙터클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스톡 사진과 시각 콘텐츠 산업에 관한 최신 보론 - 폴 프로쉬
용해 - 파울라 야쿱, 미셸 라세르
아카이브 조사연구 일지: KLM 항공사의 역사와 이미지 - 이영준

이후
예술 종말론 이후의 풍속도 - 김현도
일곱 가지 놀라운 이야기 - 크리스 마커



호출

상품화에 대한 태도: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지적담론 차원에서 ‘상품화’개념은 많은 경우 그 자체로 부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하지만 ‘상품’자체나 ‘상품화’경향이 무조건 나쁜 것 만은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태도를 함께 고려해보면, 상품화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못해 분열적이다. 상품화를 비판한다고 상품화를 거부하는 행위나 그런 삶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상황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 이분법은 기본적으로 역사가 상품화되어 가는 과정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선先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상품화 과정은 부정적인 측면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세대의 관점으로 보면 상품화의 과정이란 상당히 복합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여성의 육체적 미모에 대한 상품화 과정 등. 특히 시대가 점점 문화적 성격을 띨수록 분열적 양상은 더욱 심해진다. 혹 사람들이 실용적 상품화에 맹목적인 것처럼 문화적 상품화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이분법적 혹은 대립적 판단은 지적인 관점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국가에 종속된 담론생산자들이 문화의 상품화에 대해 둔감하거나 현실성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의도야 어찌됐건 선한일 爲善을 하는듯하지만 어쩌면 선한 표정을 짓는 일이 바로 위선僞善일 수 있다. 반면 문화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상품화 과정에 대해 다소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며 일부러 위악爲惡적인 태도를 취하는 시늉을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시늉이 아닌 진짜 나쁜 짓爲惡을 하는 것이기 쉽다. 여기서 위선적 관점은 ‘선한 인간’과 ‘선한 세상’을 바라는 의지 혹은 구조의 표현일 것이고, 위악성은 서로 모방하고 욕망하는 인간행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의지 혹은 구조의 표현일 것이다.

역사의 상품화에 대한 지적 담론들은 1950,60를 거치면서 상품과 대립되는 문화적 가치에 있어 그 자체의 성격이 변화하고 현실에 추월당해 총체적으로 상품으로 전락하게 됐다고 여긴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후기 산업사회의 사회적 변화들을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이전의 비판의 목표가 ‘상품’이었다면 여기서부터 상품형태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환가치에 대한 비판, 더 나아가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이 획기적으로 중요해진다. 마르쿠제가 말하는 교환가치에 대한 대립항은 ‘진리가치’이다. 과거엔 고급문화와 세속적 문화의 대립을 통해 유지되었는데 대중사회에 들어와 그 대립적 긴장이 녹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자리바꿈이라기보다 현실이 고급문화를 부인했다고 본다. 과거 고급문화로 승화되어 간직된 희망과 진리가 부인되고 부정되는 것을 비난한다. 이런 고급문화 속에 있던 대립적이며 낯선 요소들이 초월적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는 것이다. 좌파적 관점을 가지고서 과거 고급문화의 사라짐에 애통해하는 그는 위선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상품화의 과잉을 비판한 마르쿠제에 대해, 지나친 시장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일정한 수준에서 상품화를 인정하거나 긍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루카치 등이 상품에 의한 물신화를 비난하면서 ‘상품형태’가 한때 명백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사실 상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모호하다. 상품화는 자본주의적 특징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산업혁명기 사회구조를 바꾸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이제까지 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했던 다양한 약자들이 나름대로 기를 펴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 노동조합 등. 역사가 상품들 혹은 교환가치의 거대한 물류창고로 되어가는 와중에도 상품화는 역사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신분의 평등화에 기여한 셈이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개인일 지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 최소한 인권의 차원에서는 거의 무한한 권리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폭력적일지라도- 누리거나 요구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선택 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으로 자신의 군사적 기능을 상품화시킨 용병은 삶의 상품화라는 현상이 현재의 민주주의 사회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좋은 예다.

결국 상품화는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경로를 통해 사회의 민주주의와 밀접하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상품화가 좋은 의미의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면도 있지만, 거꾸로 그것은 민주주의를 동반하거나 촉진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상품화를 비판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심지어 인간적 가치조차 어쩔 수 없이 상품으로 만들어진다. 틱낫한의 책, 법정스님의 무소유 등. 말과 행위사이에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간격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상품화라는 주제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가치로서의 자신에 대해서도 해당한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의 상품가치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자신의 상품가치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상품화의 문제는 그 상품이 개입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방과 질투, 그리고 원한이 유발하는 몫이 크다. 그리고 주체들이 상품화에 대해 일관된 언행일치의 실행도 어렵다. 그중 시장가치는 사람들의 서로 비슷한 것을 욕망하고 또 그 욕망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이다. 결국 상품화는 모방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셈이다. 상품의 질서에 대한 주체들의 태도는 사실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상품에 대한 미학적 관점은 심한 모호성에 시달린다.

상품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악을 조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꼭 상품 탓만은 아니다. 인간들이 민주화된 사회에서 서로 모방하고 서로 질투하고 서로 원망하는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로 곁눈질할 때, 상품은 다만 모방과 질투 그리고 원한을 강력하게 매개할 뿐이다.

 

다운타운 커뮤니티TV센터(DCTV)공동설립자, 존 알퍼트와의 인터뷰

Q. EBS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 에서 상영하고 있는 네 편의 영화들은 어떻게 선정했나? A. 사실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들이 더 있었는데 TV로 방영시키는데 있어 방영권을 갖고 있지 않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Q. 1972에 설립한 DCTV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A. 그 시절, 나와 츠노 게이코에게 있어서는 지역공동체와 사회적 행동주의 시대였다. 미국이 개선해야할 여지가 많았고 베트남전쟁 시대였기에 전쟁을 둘러싼 사회적 행동주의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우선 주변이웃의 사안들을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점차 열악한 조건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투쟁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카메라는 우리 이웃을 매우 흥미롭게 개선하는 결과를 낳았다.

Q. DCTV의 후원자와 후원재단에는 폴 뉴먼 재단, 록펠러 재단, 국가예술기금NEA 등 많은 단체들이 있다. 어떻게 가능했나? A. 오늘날 다른 비디오 센터들이 거의 대부분 문을 닫았음에도 DCTV가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는, 우리는 자체 제작한 프로그램을 판매해서 수익을 창출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판매를 통한 수입으로 기금의 80%까지 충당했던 전설도 있다. 앞서 말한 후원자리스트는 3년 전 펀드레이저의 성과다. 현재는 50:50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가장진보적인 세력들 일부는 이러한 재단들로부터 후원과 격려를 받고 있다. 매우 진보적이고 지역공동체 위주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Q. 혹시 북한에 가서 남북한의 대치 상황을 영화로 제작할 생각은 없나? A. 관심이 아주 많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남북을 주제로 나온 것들은 어딘지 다들 비슷하다. 영화제작에 있어 북한에 가서 취재자유를 누리며 작업할 수 있도록 미국 영화제작자들은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1957년 쿠바에 입성한 최초의 미국 TV기자로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그들의 소개를 통해 UN에에 파견된 북한 공관에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별다른 소득 없이 헤어지고 10년 뒤 북한에서 세계청년 축제에 초청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초청을 수락하지 않았고 우리는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방송제작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Q. 당신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디오 저널리즘에서 살아있는 역사로 추앙받고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 스트레스 받지는 않나? A. 은퇴가 가까워진 것 같지만 사실 아직도 일할 능력이 되고 또 일을 좋아한다. DCTV는 하나의 조직으로서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이제는 내 개인이 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 크고 강한 팀으로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사람들은 저를 훌륭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생각하는데 미국에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ㅎ

Q. 이미지의 힘을 믿는가? A. 물론이다. 만약 당신이 민주주의를 믿는다면,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여본 적이 있고 그래서 이런 작품 유형은 모든 의미에서 당신이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준다. 국가가 자유로워지게 만들고, 또한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도 도움을 준다.

Q. 과연 영화가 현실의 거울로서 진실을 보여줍니까? A. 어떤 때는 시네마 베리테 기법을 사용해 내레이션 없이 삶의 단편만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인들로부터 은폐되어 온 이러한 모든 이미지들을 현장 속에서 거울을 들고 보여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다. 한사람의 리포터로서 내가 가진 책임은 진실의 어느 부분인가 하는 점이다. 진실은 선택될 수 있고 매우 주관적이다.

 

상품화

미디어와 역사의 소비

1990년대 들어 영화판에는 대기업들이 진출해 한국영화의 규모를 쑥쑥 키웠다. 단일 영화관객 천만시대를 맞아 대형투자배급사들은 대박을 꿈꾸며 사실상 할리우드를 모델로 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꿈을 마냥 키워가고만 있다. 컴퓨터 및 전자 테크놀로지는 화면 속에 실감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풍부한 기술적 수단을 제공해 주므로써 이미지의 사실성은 자본과 기술의 결합이 낳는 시너지 효과를 타고 수직상승한다. 이런 포스트 모던적인 극사실주의의 이미지들은 역사의 시뮬라크르를 형성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쥬라기공원. 1993>이 웅변하듯,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지나간 과거의 이미지들은 이제 진실로 사실주의적일 수 있으며, 그 지시체들이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시체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 대중들의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의 틀을 형성하는 미디어의 힘은 인간주의적 가정들이 애써 부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쥬라기공원>이후로 공룡에 대한 모든 대중적 상상력은 스필버그의 공룡들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재현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들이 지나간 과거와 역사를 상상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현재 극사실주의적인 역사의 스펙터클들을 양산하는 근본적인 동인은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와 스펙터클, 그리고 그것들의 극사실성은 자본과 그 이윤극대화의 논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에 이미 기 드보르는 보드리야르의 논지와도 흡사하게 현대를 표상이 현실을 지배하고 대체하는 .스펙터클 사회.로 진단하면서 스펙터클을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라 정의한 바 있는 것이다.

즉 미디어가 생산하는 역사의 이미지/스펙터클들에서 실증주의와 미학은 하나가 되며, 미디어는 자본과 디지털 기술의 결합으로 비약적으로 발달한 이 상품미학으로 포장한 역사의 이미지를 판매한다. 역사는 상품이 되고, 사색과 성찰의 준거이자 행동과 모색의 좌표이기보다는 한갓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 한국에서도 .한국적인 것.의 상품화.. <서편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 93년의 이런 .문화적 사건.들은 90년대 중반으로 진입하던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소비사회로서 80년대 일본의 상황과 유사하게 자기 자신의 전통적인’문화유산과 역사적 과거를 .이국적인 것.으로서, 매력적인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단계에 와 있었다는 것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상품화는 보다 진지한 학문적 작업마저 곧잘 위협한다. 출판미디어. 신명직<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 을 필두로 한국 근현대사와 식민지 시기 역사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서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학문학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 논쟁의 한국화 및 한국적 근(현)대성의 원형에 대한 모색, 해석과 서술을 포함한 담론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자기 반영적 성찰성의 성숙, 정치경제 중심의 역사에서 탈피한 일상사와 미시사에 대한 관심, 공식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힌 민중사와 여성사를 비롯한 소수자들의 역사 복원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근대의 풍속이나 문물은 종종 향수의 대상으로서 가능하다. 여기서 시각이미지는 심상이미지 보다 한발 앞선다.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역사적 과거를 극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한 영화들을 역사영화가 아니라 .향수영화.라고 했다. <백 투더 퓨쳐>, <아메리칸 그래피티>..<서편제>, <장군의 아들>, <여명의 눈동자>, <모레시계>

멜로드라마. 영화와 마찬가지로 9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들에서도 대규모 자본의 투자에 힘입어 역사와 지나간 과거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며, 이런 경향은 컴퓨터 발달에 힘입어 2000년대에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 모든 경향의 근저에는 역사와 과거의 상품화라는 자본주의 상업미디어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특징짓는 정서적, 도덕적 과잉은 경험의 표면 아래 있는 선과 악의 도덕적 힘을 표면화시켜 세계를 단순화하며, 그 과정에서 남녀의 관계를 비롯한 가족의 이야기로 끊임없이 회귀한다. <국가의 탄생>, <레즈>, <라이언일병구하기>..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문화산업은 비극을 진부하고 판에 박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역사와 과거의 멜로드라마화는 민족, 국가의 정체성으로 공고히 하는 데 동원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미디어에 의한 역사의 상품화 역시 상품화된 역사와 과거의 이미지를 민족/국가 공동체의 건설, 종종 전체주의적 경향을 띠곤 하는 기획과 연결시킨다. 요시미 순야. 일본의 상품화된 내셔널리즘의 두가지구도 1. 세계화와 흐름을 같이 하면서 .국사.의 내셔널한 문화의 정통성 재구축 2.남성이 주 지지층으로 페미니즘이나 젠더의 경계를 재편하는 움직임에 방어적 입장이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한국영화가 상처받은 민족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욕망에 매달려 남성적 연대에 의해 민족/국가 공동체를 건설하는 낡은 근대적 기획을 반복함으로 실현하려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친구>은 신화적으로 채색된 남성적 우정의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또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와 과거를 낭만적으로 미화하기까지 한다.

대중문화는 사실에 대한 숭배를 이용하여 가능한 한 자세한 묘사를 통해 잘못된 세계를 사실의 세계로 승격시키는데 만족한다. 이러한 전이는 존재 자체를 의미와 권리를 대신하는 대용물로 만든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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