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017_ 볼BOL 002 2006.봄 '중동과'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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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과 '우리'
카시오, 세이코, 쉐라톤, 도요타, 마르스에 대한 스크립트 / 션 스나이더
<태양 속의 남자들>이 던지는 물음, '우리'란 누구인가 / 서경식
무슬림에 대한 문화 정치적 이해 / 올리비에 로이
드로잉 / 안나 보기주이안
여행 외 8편 / 자카리아 모하메드
시제일치 -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메시지
로웨이셋, 근대적 토속성 / 나지아씨와 토니 샤카
하셈 엘 마다니와의 인터뷰 / 아크람 자타리
전후 레바논의 사진 : 전통의 소거와 비세계성의 침입 사이에서 / 잘락 투픽
중동이 아니다 <시제일치> 영화를 보고 / 오수연
잠재성 / 조아나 하지토마스 & 칼릴 조지
웹 + 로그
내가 아는 중동 / 허수경 + Over There / 노재운
인터뷰: 일렉트로닉 인티파다의 나이젤 패리 / 볼
은혜의 커넥션 / 김대중
블로고스피어 읽기 / 길예경
덧글
'국제전시', 문화 세계화의 한국적 굴절과 전유 / 박찬경
청사진과 조감도 / 김범
로웨이셋 Rowaysset, 근대적 토속성
_ 나지 아씨(건축가)와 토니샤카(작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근교의 로웨이셋은 고립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장소성을 스스로 규정하고자 분투중인 지역이다. <로웨이셋> 프로젝트는 도시화 과정에서 생겨나 점차 불가피해진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베이루트 및 그와 유사한 도시들에서 나타난 건축과 도시 관련 쟁점을 살펴보기위한 연구 및 성찰이다. 이 작업은 토속성vernacular이라는 주제와 이것이 여러 예술분야에서 갖는 함의를 알아보기 위해 기획된 대학연합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로웨이셋은 채석장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북쪽과 동쪽에도 레바논 최대 채석장이 존재한다.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이주민들이 1930년 이후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주거형태는 임시천막에서 붙박이주택으로 점차 발전해갔다. 이곳의 주거 형태는 특별하다. 하나의 부지 내에서 대여섯, 또는 열가구로 공간이 분할되어 빛과 공기의 접촉이 매우 드물고 그것을 얻기위한 경쟁이 필요할 정도이다. 이 건물 군락들은 끊임없이 다른 형태를 취하는 도로, 골목, 계단의 네트워크를 따라 서로 연결된다. 순식간에 통로가 되고 거기에 커튼만 치면 다시 집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현관문 앞에 의자 하나만 내놓으면 공적 공간은 금새 사적공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 만일 도로가 새롭게 생겨 동네를 관통하면 그 도로주변에 살던 어떤 집의 창문에는 빗장이 쳐지고 어떤집의 창문과 문은 개방될 것이다. 도로의 방향이 그주변의 형태와 인접한 주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 변하는 일은 허다하다.
로웨이셋에서 한 건물과 그 주변 건물 및 공간과의 관계는 상호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이다. 이곳의 도시조직은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고정된 형태학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도시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살아있는 살점들을 소모해가며 팽창해나간다. 인근의 즈데이즈 같은 교외도시들의 건물조직들을 살펴보면 도시적 폭력을 억제하거나 저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일반적 건축의 기본을 다하고 있으며 공간에 있어서도 공과 사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이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이 로웨이셋에는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며, 이런 주거 및 생활양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알기 힘든 로웨이셋의 토속언어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이 도와줄일이 없냐면서 다가왔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거나 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갈 수 있었다. 암하즈란 그 남자는 로웨이셋 주요정치세력의 하나인 시아파 군사조직 아말의 ‘간부’로서 여러 권력을 갖고있는 듯 보였다. 이 지역에서 그는 사회적 기능, 즉 경계선을 통제하고 수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일종의 ‘인터폰’이었다. 이는 이지역을 구성하는 기초단위가 가족이 아님을, 적어도 로웨이셋에서는 가족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뚜렷이 구분해오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일반적인 건축의 상식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언어를 사용한다. 이곳이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혼자살거나 친구와 사는 사람, 학생, 계절 노동자, 친정부모와 자식과 함께사는 이혼녀 등의 형태이다. 이들에게 전형적인 아파트, 예컨대 현관, 라운지, 식당이 딸린 거실, 두세 개의 침실과 기타 다른 시설 등으로 구성된 구조를 반드시 따를 필요 없는 상이한 종류의 거주 공간 형태를 요구한다. 하지만 로웨이셋의 아파트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상이한 주거 형태들이 한 건물 안에 공존하기도 한다.
쿠자빌딩은 6층의 전형적 고층빌딩으로 1층의 상점을 제외하고는 전층에 총 11가구가 들어가있다. 순간마다 지금도 구조변경이 계속 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이 새로운 배치도 불안정상태이다. 눈에띄는 것은 이런 변화들이 끊임없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건물자체의 기본형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습적이고 안정적인 외관과 극단적인, 심지어 광기에 가깝게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내부의 대조는 근대건축이 피하려고 했던, 심지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와 같은 도그마를 내세우며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의 건물이 다양하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며, 나아가 그 목적들 가운데 일부는 서로를 ‘오염’시키고 건물의 내적 ‘광기’를 초래할 전도의 ‘밀집’을 생성한다는 의미이다.
로웨이셋은 지리적으로 베이루트의 교외중 한 곳이이라는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같은 평범한 독해에 저항한다. 로웨이셋은 베이루트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수도를 내려다보는 언덕위에 위치하는데도 베이루트를 향해 시선을 두지도 않는다. 로웨이셋은 베이루트를 하나의 ‘전망’또는 일련의 전말들과 장면들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지역 거주자들의 의식속에서 베이루트는 기초적인 준거점이다.
이 지역은 일반적 건축도면으로 그리기란 불가능하다. ‘콘크리트 벽돌로 막은 창문’은 건축도면의 언어가 아닐뿐 아니라 기호가 없으므로 묘사자체가 불가능하다. 주거공간의 끊임없이 변하는 점유 양상, 그리고 그것과 교섭된 대응물들을 기록할 수 있는 도구들이 개발되어야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로웨이셋에 관한 해결책을 찾는데 있지 않았다. 더구나 이지역은 문제지역으로 취급한 적도 없다. 하지만 베이루트의 현구조를 떠받치는 미적 패러다임과 대치된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도시 및 건축관련 논의에서 제외되어왔다. 아카데미교육제도 전반과 르네상스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문분야의 사회적 적용과 관련된 오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로웨이셋 프로젝트는 아카데미 교육의 훈련 뿐 아니라 올바른 이해를 위한 읽기와 쓰기의 시도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로웨이셋 자체가 우리에게 부여한 결과이다.
하셈 엘 마다니와의 인터뷰
_ 아크람 자타리
-아크람자타리가 하셈 엘 마다니를 인터뷰한 내용.
나는 5살때 처음으로 사진을 접했다. 1946년 학교를 졸업하고 악카에서 직장을 구하던 중 사진가 카츠를 만나 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학약품 섞기, 필름 세척하기, 그리고 그를 도와 필름 자료정리하는일을 했다. 한달 동알 열심히 일을 배워 2팔레스타인 파운드를 받았다. 이스라엘이 국가를 수립하고 유대인들이 하이파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1948년엔 야파에서 유대인 사진작가인 벤 감조의 스튜디오에서 며칠간 작업을 했다.
1949년에는 부모님 댁에서 초상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53년에는 유리진열장들과 책상하나를 갖추고 스튜디오 세라자데를 개업했다.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은 갖가지 의상을 입어보고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권용 사진을 주로 원한다. 스튜디오는 타인에게 자신의 얼굴이 보이는걸 꺼리는 여성들을 고려해 적당히 독립적이고 넓고 저렴한 공간으로 선택했다. 당시 나는 출장사진을 찍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진의 배경은 단일회색을 선호했다. 붉은색, 녹색, 노란색 배경막과 더불어 풍경화를 구입한 것은 컬러 작업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사진찍으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젊은 청년들은 근육을 자랑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건장한 몸을 돋보이는데 신경썼다. 여성들은 얼굴을 가린채 와서는 가운을 벗으면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사진을 찍지 않으셨다. 어떤 부부는 여권사진을 찍으러 와서는 얼굴을 가리고 찍기를 원했다. 또 아내가 혼자 사진 찍은 사실을 알고는 남편이 찾아와 네거티브 필름에 흠집을 내 사용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키스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동성이었다.
1958년 차운모 대통령의 재임과 동시에 저항세력이 형성되면서 사람들이 총을 휴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튜디오에 와서 총과 함께 사진찍기를 원했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이다. 70년 나세르가 사망했을 때는 애국시민들이 애도하며 턱수염을 40일간 길렀는데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슬픈표정으로 사진 찍기를 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라크 바스주의 조직은 1973년 이주해서 이스라엘 침공이 있던 1982년까지 머물렀다. 스튜디오 건물이 침공기간에 폭격맞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 사업은 개업했던 1950년대에는 하루에 20-30명의 손님을 받았다. 최고전성기는 60,70년대로 그때는 하루에 100여명의 손님이 왔었다. 82년 이스라엘 침공 이후 사업이 기울기 시작한 후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서비스 직종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들고 삶의 기록을 제공하는 일이다. 사이다에 있는 모든 주민들을 찍을 수 있다면 좋겠다.
전후레바논의 사진 ‘전통의 소거와 비세계성의 침입 사이에서’
_ 잘랄 투픽
미국에서 레바논으로 직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여행객은 시카고-런던-암만행 표를 사야한다. 런던의 공항에 도착하면 표는 자동적으로 런던-베이루트 행 표로 바뀐다. 레바논은 국내 도시들을 잇는 비행기 노선이 없을 정도로 작은 나라이다.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됐던 내전 10년 동안 레바논에서 10만명이 살해되었다. 인구 10만명이 자연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4.383년이다.
2001년 5월 어느날 레바논의 비디오작가 마흐무드 호즈에이즈와 아크람 자타리는 위크숍을 조직하면서, 중동의 네 나라에서 영화, 비디오, 그래픽 디자인 등 서로 다른 여러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일곱 사람을 레바논으로 초청했다. 이들은 각자 워크숍이 끝날 때까지 1분짜리 비디오를 제작하기로 했다. ‘횡단의 조망’이 워크숍의 제목이었다. 원천적인 봉쇄를 가로지르는 횡단의 조망은 과연 가능한가? 레바논을 횡단하는 조망을 하겠다는 발상 그 자체가 1982년 침략 이래로 줄곧 이스라엘이 서부 베이루트를 점령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원천적인 봉쇄는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예술적 큐멘터리의 수준에서 만들어진 수 많은 레바논 사진들, 예컨대 사메르 모흐다드의 작품이나, 내전과 전쟁을 레바논에 극단적인 영행을 미친 재앙이자 봉쇄로 다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다루고 있는 푸아드 엘쿠리. 이 외에 전쟁기간 레바논이 원천적인 봉쇄이며 엄청난 재앙임을 말해주는 두 종류의 징후적이고 우의적인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행된 점령지역들의 사막화. 그런 지역지역들에서 사막화는 누구나 듣게 되는 절규의 라이트모티브이다. 레바논 사람, 팔레스타인 사람, 사라예보 주민, 투치소수인종, 이라크인들이 그렇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지역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고립지가 되었다고 말하는 예술작품을 만든다거나 그렇게 느끼는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 왈리드 라아드가 칼릴 지브란에 헌정한 작품으로, 라아드가 베이루트 수르소크 미술관에서 행한 강연 ‘경이로운 시작들’이 진행되는 동안 슬라이드로 상영되었던 <도큐멘트>가 그 중 하나이다. 라아드의 포토에세이 <경이로운 시작들> 영어판에 실려 있는 남녀 군상을 담은 8편의 작은 흑백사진도 마찬가지다. 이 사진들은 베이루트가 원천 봉쇄된 어느 한 시점에서 침입하는 비세계성과 무역사성으로 봐야 정당하다.
- 조아나 하지토마스와 칼릴조지의 전시회<기적의 베이루트>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1969년 레바논 정부로부터 우편엽서를 제작하는 주문을 받은 어느 한 사진작가를 중심으로 해서 기획되었다. 그는 내전에 휘말리면서 제작했던 우편엽서를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더이상 자신의 사진을 인화하지 않는다. 전시가 끝날 때 6000통의 필름을 바닥에 뿌려졌다. 2001년 하지토마스와 조지는 <잠재 이미지>라는 명칭의 전시회를 준비했으며 그들은 촬영되었지만 인화하지는 못한 채 남아있는 사진들을 기술한 텍스트들로 화랑의 벽을 장식할 계획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어떤 조재론적인 규정으로 돌아가도가 원했다. 이를테면 불에 타서 사라짐으로써 빛이 기입된다는 것이 그런 규정이었다.”-하지토마스와 조지- 이것은 레바논에서 모든 것을 소각시켰던 그 전쟁에 대한 반응이며 엄청난 재앙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미지들이 소거된다는 사정과도 연관된다.
왈리드 알 컬리디와 같은 팔레스트인의 아카데미 학자들이 자료기록이라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과 왈리드 라아드, 조아나 하지토마스와 칼릴 조지 등이 하는 일은 별개의 사안이며, 적어도 별개의 사안이어야 한다. 왈리드 라아드는 ‘아랍이미지재단’의 위원으로 ‘아랍조사연구소’의 기록물 컬렉션과 ‘아틀라스 그룹’의 컬렉션에도 관여하고 있다. 이 두 자료실에 관련된 예술 활동과 쟁점들이 아랍이미지 재단의 컬렉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장차 라아드를 통해 가능성이 있으리라 본다. 결국 아랍이미지재단의 자료실이 라아드의 잠재적인 자료실의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조아나 하지토마스와 칼릴 조지 마저도 아랍이미지재단의 위원이 되는 것으로 결정된다면 재단이 설정한 “사진 컬렉션을 보존하고 전시할 센터를 베이루트에 창설한다는 장기 목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재단의 자료보존의 목표나 전시목표, 연대작성의 목표는 어떻게 될 것인가?그들으 ㄶㅓ구적 인터뷰어의 입을 통해서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날르, 돈키호테의 저자>처럼 20세기의 피에르 메나르를 써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당신은 새로운 길, 그러니까 의도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기록이라는 길을 처음 밟는 샘이다.”
중동이 아니다. <시제일치>영화를 보고
_ 오수연
방향은 항상 상대적이다. 중동이나 극동은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든 말로 이것은 문화나 역사같은 단어보다는 세계의 화약고와 같이‘문제’라는 단어와 항상 짝을 이룬다. 몇 달 동안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머물렀던 나는 그곳을 아랍,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다리, 또는 세 문명이 흘러드는 대양이라 하겠다.
<시제일치: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메시지>에서 상영된 영화중 <내전>모하메드스에이드는 실종됐다 주검으로 발견된 한 레바논인 조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는 내전 당시 폭격에 파괴된 건물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가왜 그 버려진 건물에 들어가 계단을 하염없이 올라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랍인들도 우리처럼 상처받기 쉽고 감정이 복잡한 개인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뉴스에 나오는 파괴된 거리, 먼지와 포연, 피 흘리는 그곳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찰지언정, 그들의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들은 영화속에서 항상 무표정하게 죽고, 우리의 교과서에는 ‘한손에는 코란을 한손에는 칼을’이라는 말로 그려졌다. 그리고 911테러. 이런 이유 때문인가, 팔레스타인에 작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들은 항시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쁜줄로만 알고 있다.
<황혼>모하메드스에이드은 1970년 말에 파타당 학생단원이었던 이들이 나이들어 가끔 모여 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이야기이다.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무참히 살해됐을 때 우리는 경악했다. 그러나 우리군의 파병은 예정된 기한을 채웠다. 우리는 단지 약소국으로서 이 거친 세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객관적으로 필요한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대학살>모니카 보르크만 로크만 슬림은 가해자들의 고백이다. 1982. 9. 16~18 레바논 내전이라고 알고 있는 전쟁은 사실은 국제전이었으며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쳐들어가 3일동안 3000명을 죽였다. 학살자들은 당시‘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큰 일난다’는 강한 확신을 가졌지만 학살의 순간이 끝나자 그 학살의 이유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20년도 넘게 침묵속에 살아왔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미국인들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우리나라는 미국,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군대를 파병시켰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전쟁에 반드시 참전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나. 전쟁을 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은 강박이 아니었을까? ‘저게 바로 악마의 얼굴이야’ TV에 나온 부시를 보고 어떤 이라크인이 한 말이다. 그들이 느끼는 세계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세상과 많이 다를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도저히 이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지옥하고 별 차이 없는 상태일 것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일부 편견에 가득찬 백인들에게는 아랍인들이 ‘기괴하게 소리키는 군중’으로 보인다면, 일부 학을 뗀 아랍인들에게는 장엄한 미국, 영국, 한국의 국회의사당이 악마의 제단으로. 이라크에 와있는 외국 군대가 소름끼치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귀신들린 자들’로 보이지 않을까?
<아슈라: 내 혈관에서 흐르는 이 피>잘랄 투픽를 보며 같이 울기. 목메기,주르르 눈물흘리기, 흐느끼기, 꺼이꺼이 통곡하기, 제 손으로 갈비뼈가 부서져라 가슴치기, 스스로 채찍질하기, 간간이 들뢰즈와 기타리가 말한다. “예언자는 통곡하는 사람이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아랍어 영화가 상영된 적은 이번이 처음인것 같다.
<그녀+그 반 레오><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법>아크람 자타리 이 영화들은 소재의 독특함을 넘어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 이다. 작가는 세계의 화약고가 아닌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이 여실히 보였다. 「팔레스타인 시가 점령에 대해 부지런히 쓰여지던 시기가 있었다. 인구의 20%가 감옥에 갇혔던 경험도 있었다. 만사가 우리로 하여금 점령과 점령군의 탱크에 대해서 쓰지 않을수 없게 끔 떠민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탱크가 우리 시의 주제를 결정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매우 나쁘다. 이제부터 시는 탱크를 읊지 않을 것이다. 탱크가 우리 시마저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시인 자카리아 모하메드의 짧은 에세이<전쟁, 패배, 승리 그리고 문학>중에서..
아랍작가들은 영토를 지키는 것만큼 자신들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들의 정신을 ‘전쟁 전문형’으로 단정해 버리는 우리의 선입견은 우리에게는 ‘견해’일지 모르지만 본인들로서는 존재적 모독이요 정신적 폭력일 것이다. 아랍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는 이 정신적 폭력에 맞선 전략이다.
<신의 간섭>엘리야 술래이만
억울한가? 입장을 바꿔생각해봐, 너희가 힘 있고 돈 있다면 너희가 욕하는 저 나쁜 놈들처럼 안 하리라는 보장이 있나? 다 똑같고 다 잘살자고 하는 짓인데, 무슨 해결책이 있겠어. 부당한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는 자기는 당장 고통에 불타지 않기 때문에 심오한 사념에 잠기는 이들, 부당함을 겪는 이들을 두번 죽이는 것이다. 이 씁쓸한 인생관이 이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인 것 같다. 결국 자기가 해방되기 위해 진짜 도를 깨우쳐 인류전체를 해방시켜야만 한다. <시제일치>의 영화들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기 중동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 나의 삶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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