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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BOL0022006.봄중동과'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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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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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과 '우리'
카시오, 세이코, 쉐라톤, 도요타, 마르스에 대한 스크립트 / 션 스나이더
<태양 속의 남자들>이 던지는 물음, '우리'란 누구인가 / 서경식
무슬림에 대한 문화 정치적 이해 / 올리비에 로이
드로잉 / 안나 보기주이안
여행 외 8편 / 자카리아 모하메드

시제일치 -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메시지
로웨이셋, 근대적 토속성 / 나지아씨와 토니 샤카
하셈 엘 마다니와의 인터뷰 / 아크람 자타리
전후 레바논의 사진 : 전통의 소거와 비세계성의 침입 사이에서 / 잘락 투픽
중동이 아니다 <시제일치> 영화를 보고 / 오수연

잠재성 / 조아나 하지토마스 & 칼릴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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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중동 / 허수경 + Over There / 노재운
인터뷰: 일렉트로닉 인티파다의 나이젤 패리 / 볼
은혜의 커넥션 / 김대중
블로고스피어 읽기 / 길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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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시', 문화 세계화의 한국적 굴절과 전유 / 박찬경
청사진과 조감도 / 김범



로웨이셋 Rowaysset, 근대적 토속성  
_ 나지 아씨(건축가)와 토니샤카(작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근교의 로웨이셋은 고립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장소성을 스스로 규정하고자 분투중인 지역이다. <로웨이셋> 프로젝트는 도시화 과정에서 생겨나 점차 불가피해진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베이루트 및 그와 유사한 도시들에서 나타난 건축과 도시 관련 쟁점을 살펴보기위한 연구 및 성찰이다. 이 작업은 토속성vernacular이라는 주제와 이것이 여러 예술분야에서 갖는 함의를 알아보기 위해 기획된 대학연합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로웨이셋은 채석장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북쪽과 동쪽에도 레바논 최대 채석장이 존재한다.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이주민들이 1930년 이후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주거형태는 임시천막에서 붙박이주택으로 점차 발전해갔다. 이곳의 주거 형태는 특별하다. 하나의 부지 내에서 대여섯, 또는 열가구로 공간이 분할되어 빛과 공기의 접촉이 매우 드물고 그것을 얻기위한 경쟁이 필요할 정도이다. 이 건물 군락들은 끊임없이 다른 형태를 취하는 도로, 골목, 계단의 네트워크를 따라 서로 연결된다. 순식간에 통로가 되고 거기에 커튼만 치면 다시 집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현관문 앞에 의자 하나만 내놓으면 공적 공간은 금새 사적공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 만일 도로가 새롭게 생겨 동네를 관통하면 그 도로주변에 살던 어떤 집의 창문에는 빗장이 쳐지고 어떤집의 창문과 문은 개방될 것이다. 도로의 방향이 그주변의 형태와 인접한 주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 변하는 일은 허다하다.
로웨이셋에서 한 건물과 그 주변 건물 및 공간과의 관계는 상호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이다. 이곳의 도시조직은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고정된 형태학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도시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살아있는 살점들을 소모해가며 팽창해나간다. 인근의 즈데이즈 같은 교외도시들의 건물조직들을 살펴보면 도시적 폭력을 억제하거나 저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일반적 건축의 기본을 다하고 있으며 공간에 있어서도 공과 사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이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이 로웨이셋에는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며, 이런 주거 및 생활양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알기 힘든 로웨이셋의 토속언어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이 도와줄일이 없냐면서 다가왔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거나 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갈 수 있었다. 암하즈란 그 남자는 로웨이셋 주요정치세력의 하나인 시아파 군사조직 아말의 ‘간부’로서 여러 권력을 갖고있는 듯 보였다. 이 지역에서 그는 사회적 기능, 즉 경계선을 통제하고 수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일종의 ‘인터폰’이었다. 이는 이지역을 구성하는 기초단위가 가족이 아님을, 적어도 로웨이셋에서는 가족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뚜렷이 구분해오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일반적인 건축의 상식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언어를 사용한다. 이곳이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혼자살거나 친구와 사는 사람, 학생, 계절 노동자, 친정부모와 자식과 함께사는 이혼녀 등의 형태이다. 이들에게 전형적인 아파트, 예컨대 현관, 라운지, 식당이 딸린 거실, 두세 개의 침실과 기타 다른 시설 등으로 구성된 구조를 반드시 따를 필요 없는 상이한 종류의 거주 공간 형태를 요구한다. 하지만 로웨이셋의 아파트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상이한 주거 형태들이 한 건물 안에 공존하기도 한다.
쿠자빌딩은 6층의 전형적 고층빌딩으로 1층의 상점을 제외하고는 전층에 총 11가구가 들어가있다. 순간마다 지금도 구조변경이 계속 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이 새로운 배치도 불안정상태이다. 눈에띄는 것은 이런 변화들이 끊임없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건물자체의 기본형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습적이고 안정적인 외관과 극단적인, 심지어 광기에 가깝게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내부의 대조는 근대건축이 피하려고 했던, 심지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와 같은 도그마를 내세우며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의 건물이 다양하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며, 나아가 그 목적들 가운데 일부는 서로를 ‘오염’시키고 건물의 내적 ‘광기’를 초래할 전도의 ‘밀집’을 생성한다는 의미이다.
로웨이셋은 지리적으로 베이루트의 교외중 한 곳이이라는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같은 평범한 독해에 저항한다. 로웨이셋은 베이루트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수도를 내려다보는 언덕위에 위치하는데도 베이루트를 향해 시선을 두지도 않는다. 로웨이셋은 베이루트를 하나의 ‘전망’또는 일련의 전말들과 장면들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지역 거주자들의 의식속에서 베이루트는 기초적인 준거점이다.
이 지역은 일반적 건축도면으로 그리기란 불가능하다. ‘콘크리트 벽돌로 막은 창문’은 건축도면의 언어가 아닐뿐 아니라 기호가 없으므로 묘사자체가 불가능하다. 주거공간의 끊임없이 변하는 점유 양상, 그리고 그것과 교섭된 대응물들을 기록할 수 있는 도구들이 개발되어야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로웨이셋에 관한 해결책을 찾는데 있지 않았다. 더구나 이지역은 문제지역으로 취급한 적도 없다. 하지만 베이루트의 현구조를 떠받치는 미적 패러다임과 대치된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도시 및 건축관련 논의에서 제외되어왔다. 아카데미교육제도 전반과 르네상스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문분야의 사회적 적용과 관련된 오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로웨이셋 프로젝트는 아카데미 교육의 훈련 뿐 아니라 올바른 이해를 위한 읽기와 쓰기의 시도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로웨이셋 자체가 우리에게 부여한 결과이다.


하셈 엘 마다니와의 인터뷰

_ 아크람 자타리

-아크람자타리가 하셈 엘 마다니를 인터뷰한 내용.
나는 5살때 처음으로 사진을 접했다. 1946년 학교를 졸업하고 악카에서 직장을 구하던 중 사진가 카츠를 만나 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학약품 섞기, 필름 세척하기, 그리고 그를 도와 필름 자료정리하는일을 했다. 한달 동알 열심히 일을 배워 2팔레스타인 파운드를 받았다. 이스라엘이 국가를 수립하고 유대인들이 하이파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1948년엔 야파에서 유대인 사진작가인 벤 감조의 스튜디오에서 며칠간 작업을 했다.
1949년에는 부모님 댁에서 초상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53년에는 유리진열장들과 책상하나를 갖추고 스튜디오 세라자데를 개업했다.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은 갖가지 의상을 입어보고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권용 사진을 주로 원한다. 스튜디오는 타인에게 자신의 얼굴이 보이는걸 꺼리는 여성들을 고려해 적당히 독립적이고 넓고 저렴한 공간으로 선택했다. 당시 나는 출장사진을 찍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진의 배경은 단일회색을 선호했다. 붉은색, 녹색, 노란색 배경막과 더불어 풍경화를 구입한 것은 컬러 작업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사진찍으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젊은 청년들은 근육을 자랑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건장한 몸을 돋보이는데 신경썼다. 여성들은 얼굴을 가린채 와서는 가운을 벗으면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사진을 찍지 않으셨다. 어떤 부부는 여권사진을 찍으러 와서는 얼굴을 가리고 찍기를 원했다. 또 아내가 혼자 사진 찍은 사실을 알고는 남편이 찾아와 네거티브 필름에 흠집을 내 사용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키스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동성이었다.
1958년 차운모 대통령의 재임과 동시에 저항세력이 형성되면서 사람들이 총을 휴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튜디오에 와서 총과 함께 사진찍기를 원했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이다. 70년 나세르가 사망했을 때는 애국시민들이 애도하며 턱수염을 40일간 길렀는데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슬픈표정으로 사진 찍기를 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라크 바스주의 조직은 1973년 이주해서 이스라엘 침공이 있던 1982년까지 머물렀다. 스튜디오 건물이 침공기간에 폭격맞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 사업은 개업했던 1950년대에는 하루에 20-30명의 손님을 받았다. 최고전성기는 60,70년대로 그때는 하루에 100여명의 손님이 왔었다. 82년 이스라엘 침공 이후 사업이 기울기 시작한 후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서비스 직종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들고 삶의 기록을 제공하는 일이다. 사이다에 있는 모든 주민들을 찍을 수 있다면 좋겠다.


전후레바논의 사진 ‘전통의 소거와 비세계성의 침입 사이에서’

_ 잘랄 투픽

미국에서 레바논으로 직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여행객은 시카고-런던-암만행 표를 사야한다. 런던의 공항에 도착하면 표는 자동적으로 런던-베이루트 행 표로 바뀐다. 레바논은 국내 도시들을 잇는 비행기 노선이 없을 정도로 작은 나라이다.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됐던 내전 10년 동안 레바논에서 10만명이 살해되었다. 인구 10만명이 자연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4.383년이다.
2001년 5월 어느날 레바논의 비디오작가 마흐무드 호즈에이즈와 아크람 자타리는 위크숍을 조직하면서, 중동의 네 나라에서 영화, 비디오, 그래픽 디자인 등 서로 다른 여러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일곱 사람을 레바논으로 초청했다. 이들은 각자 워크숍이 끝날 때까지 1분짜리 비디오를 제작하기로 했다. ‘횡단의 조망’이 워크숍의 제목이었다. 원천적인 봉쇄를 가로지르는 횡단의 조망은 과연 가능한가? 레바논을 횡단하는 조망을 하겠다는 발상 그 자체가 1982년 침략 이래로 줄곧 이스라엘이 서부 베이루트를 점령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원천적인 봉쇄는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예술적 큐멘터리의 수준에서 만들어진 수 많은 레바논 사진들, 예컨대 사메르 모흐다드의 작품이나, 내전과 전쟁을 레바논에 극단적인 영행을 미친 재앙이자 봉쇄로 다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다루고 있는 푸아드 엘쿠리. 이 외에 전쟁기간 레바논이 원천적인 봉쇄이며 엄청난 재앙임을 말해주는 두 종류의 징후적이고 우의적인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행된 점령지역들의 사막화. 그런 지역지역들에서 사막화는 누구나 듣게 되는 절규의 라이트모티브이다. 레바논 사람, 팔레스타인 사람, 사라예보 주민, 투치소수인종, 이라크인들이 그렇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지역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고립지가 되었다고 말하는 예술작품을 만든다거나 그렇게 느끼는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 왈리드 라아드가 칼릴 지브란에 헌정한 작품으로, 라아드가 베이루트 수르소크 미술관에서 행한 강연 ‘경이로운 시작들’이 진행되는 동안 슬라이드로 상영되었던 <도큐멘트>가 그 중 하나이다. 라아드의 포토에세이 <경이로운 시작들> 영어판에 실려 있는 남녀 군상을 담은 8편의 작은 흑백사진도 마찬가지다. 이 사진들은 베이루트가 원천 봉쇄된 어느 한 시점에서 침입하는 비세계성과 무역사성으로 봐야 정당하다.
- 조아나 하지토마스와 칼릴조지의 전시회<기적의 베이루트>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1969년 레바논 정부로부터 우편엽서를 제작하는 주문을 받은 어느 한 사진작가를 중심으로 해서 기획되었다. 그는 내전에 휘말리면서 제작했던 우편엽서를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더이상 자신의 사진을 인화하지 않는다. 전시가 끝날 때 6000통의 필름을 바닥에 뿌려졌다. 2001년 하지토마스와 조지는 <잠재 이미지>라는 명칭의 전시회를 준비했으며 그들은 촬영되었지만 인화하지는 못한 채 남아있는 사진들을 기술한 텍스트들로 화랑의 벽을 장식할 계획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어떤 조재론적인 규정으로 돌아가도가 원했다. 이를테면 불에 타서 사라짐으로써 빛이 기입된다는 것이 그런 규정이었다.”-하지토마스와 조지- 이것은 레바논에서 모든 것을 소각시켰던 그 전쟁에 대한 반응이며 엄청난 재앙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미지들이 소거된다는 사정과도 연관된다.
왈리드 알 컬리디와 같은 팔레스트인의 아카데미 학자들이 자료기록이라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과 왈리드 라아드, 조아나 하지토마스와 칼릴 조지 등이 하는 일은 별개의 사안이며, 적어도 별개의 사안이어야 한다. 왈리드 라아드는 ‘아랍이미지재단’의 위원으로 ‘아랍조사연구소’의 기록물 컬렉션과 ‘아틀라스 그룹’의 컬렉션에도 관여하고 있다.  이 두 자료실에 관련된 예술 활동과 쟁점들이 아랍이미지 재단의 컬렉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장차 라아드를 통해 가능성이 있으리라 본다. 결국 아랍이미지재단의 자료실이 라아드의 잠재적인 자료실의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조아나 하지토마스와 칼릴 조지 마저도 아랍이미지재단의 위원이 되는 것으로 결정된다면 재단이 설정한 “사진 컬렉션을 보존하고 전시할 센터를 베이루트에 창설한다는 장기 목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재단의 자료보존의 목표나 전시목표, 연대작성의 목표는 어떻게 될 것인가?그들으 ㄶㅓ구적 인터뷰어의 입을 통해서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날르, 돈키호테의 저자>처럼 20세기의 피에르 메나르를 써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당신은 새로운 길, 그러니까 의도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기록이라는 길을 처음 밟는 샘이다.”


중동이 아니다. <시제일치>영화를 보고

_ 오수연

방향은 항상 상대적이다. 중동이나 극동은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든 말로 이것은 문화나 역사같은 단어보다는 세계의 화약고와 같이‘문제’라는 단어와 항상 짝을 이룬다. 몇 달 동안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머물렀던 나는 그곳을 아랍,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다리, 또는 세 문명이 흘러드는 대양이라 하겠다.
<시제일치: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메시지>에서 상영된 영화중 <내전>모하메드스에이드는 실종됐다 주검으로 발견된 한 레바논인 조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는 내전 당시 폭격에 파괴된 건물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가왜 그 버려진 건물에 들어가 계단을 하염없이 올라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랍인들도 우리처럼 상처받기 쉽고 감정이 복잡한 개인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뉴스에 나오는 파괴된 거리, 먼지와 포연, 피 흘리는 그곳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찰지언정, 그들의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들은 영화속에서 항상 무표정하게 죽고, 우리의 교과서에는 ‘한손에는 코란을 한손에는 칼을’이라는 말로 그려졌다. 그리고 911테러. 이런 이유 때문인가, 팔레스타인에 작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들은 항시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쁜줄로만 알고 있다.
<황혼>모하메드스에이드은 1970년 말에 파타당 학생단원이었던 이들이 나이들어 가끔 모여 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이야기이다.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무참히 살해됐을 때 우리는 경악했다. 그러나 우리군의 파병은 예정된 기한을 채웠다. 우리는 단지 약소국으로서 이 거친 세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객관적으로 필요한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대학살>모니카 보르크만 로크만 슬림은 가해자들의 고백이다. 1982. 9. 16~18 레바논 내전이라고 알고 있는 전쟁은 사실은 국제전이었으며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쳐들어가 3일동안 3000명을 죽였다. 학살자들은 당시‘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큰 일난다’는 강한 확신을 가졌지만 학살의 순간이 끝나자 그 학살의 이유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20년도 넘게 침묵속에 살아왔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미국인들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우리나라는 미국,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군대를 파병시켰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전쟁에 반드시 참전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나. 전쟁을 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은 강박이 아니었을까? ‘저게 바로 악마의 얼굴이야’ TV에 나온 부시를 보고 어떤 이라크인이 한 말이다. 그들이 느끼는 세계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세상과 많이 다를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도저히 이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지옥하고 별 차이 없는 상태일 것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일부 편견에 가득찬 백인들에게는 아랍인들이 ‘기괴하게 소리키는 군중’으로 보인다면, 일부 학을 뗀 아랍인들에게는 장엄한 미국, 영국, 한국의 국회의사당이 악마의 제단으로. 이라크에 와있는 외국 군대가 소름끼치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귀신들린 자들’로 보이지 않을까?
<아슈라: 내 혈관에서 흐르는 이 피>잘랄 투픽를 보며 같이 울기. 목메기,주르르 눈물흘리기, 흐느끼기, 꺼이꺼이 통곡하기, 제 손으로 갈비뼈가 부서져라 가슴치기, 스스로 채찍질하기, 간간이 들뢰즈와 기타리가 말한다. “예언자는 통곡하는 사람이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아랍어 영화가 상영된 적은 이번이 처음인것 같다.
<그녀+그 반 레오><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법>아크람 자타리 이 영화들은 소재의 독특함을 넘어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 이다. 작가는 세계의 화약고가 아닌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이 여실히 보였다. 「팔레스타인 시가 점령에 대해 부지런히 쓰여지던 시기가 있었다. 인구의 20%가 감옥에 갇혔던 경험도 있었다. 만사가 우리로 하여금 점령과 점령군의 탱크에 대해서 쓰지 않을수 없게 끔 떠민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탱크가 우리 시의 주제를 결정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매우 나쁘다. 이제부터 시는 탱크를 읊지 않을 것이다. 탱크가 우리 시마저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시인 자카리아 모하메드의 짧은 에세이<전쟁, 패배, 승리 그리고 문학>중에서..
아랍작가들은 영토를 지키는 것만큼 자신들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들의 정신을 ‘전쟁 전문형’으로 단정해 버리는 우리의 선입견은 우리에게는 ‘견해’일지 모르지만 본인들로서는 존재적 모독이요 정신적 폭력일 것이다. 아랍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는 이 정신적 폭력에 맞선 전략이다.
<신의 간섭>엘리야 술래이만
억울한가? 입장을 바꿔생각해봐, 너희가 힘 있고 돈 있다면 너희가 욕하는 저 나쁜 놈들처럼 안 하리라는 보장이 있나? 다 똑같고 다 잘살자고 하는 짓인데, 무슨 해결책이 있겠어. 부당한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는 자기는 당장 고통에 불타지 않기 때문에 심오한 사념에 잠기는 이들, 부당함을 겪는 이들을 두번 죽이는 것이다. 이 씁쓸한 인생관이 이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인 것 같다. 결국 자기가 해방되기 위해 진짜 도를 깨우쳐 인류전체를 해방시켜야만 한다. <시제일치>의 영화들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기 중동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 나의 삶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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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BOL0012005.겨울공황
카테고리 잡지
지은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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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비근대인을 찾아서 / 김종철
테러, 전쟁, 문화 - '테러'는 묘한 단어이다 / 아이자즈 아흐마드
어떻게? - 최인훈의 <화두> 2권 9장에 대한 지면 작업 / 황세준
인체의 신비 - 순수한 물질주의의 완성 / 정성철
킬로페의 676개의 환영 / 킬로페

진공
한국 남성 지식인 사회의 도착 / 김은실
지식인, 그 파란만장한 이름 / 김진송
'태극기'와 '실미도'의 정신적 파산 / 박찬경
핵 TV / 황세준
사이버 공간 속 주체의 '불만'
- 지젝의 '존재론적 묵시록'과 네트(net) 문화의 '수행 정치' 사이의 화해 시도 / 이만우
바다에게 묻다 l 프랭크는 5의 규칙에 복종한다 / 짐 우드링

퇴행
우리 안의 전체주의 / 안경화
극단적 풍경 - 2005년의 대한민국과 미술의 '위상' / 조선령
자유라는 이름의 퇴행 / 조선령

과잉
복잡성 연구 / 김주현
원자 시대 / 짐 샌본
nature.gif l nature.jpg / 슬기와 민


진공

핵 TV
_황세준
1.‘여생에는 미련이 없지요” .. 차고 넘치는 파국의 이미지에 어떤 그림을 띄어 놓고 말을 붙여야하나.. 하다 생각났다.  2. ‘방폐장터 경주확정’과 함께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신문기사를 본다. 3. 파국의 이미지 히로시마 원폭의 버섯구름.  4.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 -이것으로 11만명 이 즉사한것으로 추정되고 방사능중독으로 수만명이 몇개월, 몇년 안에 사망, 이것으로 2차세계대전 종결.  5. 역설적이게 핵의 위험은 강조될수록 희석된다. 핵은, 그 참상의 이미지는 파국의 고전으로, 역사적으로 인류가 겪어온 그저 그런 모든 파국의 만신전으로 밀려 올라가 버렸다.  6. 그간의 인류 문명에 종지부를 찍은 두가지 사건은 핵폭탄과 TV의 발명이다. 이둘은 우리를 멀리보게 하는데 하나는 가까이서 먼곳을 비춰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는 먼 소문으로 가까운 고통을 잊게 한다. 오락장이 된 세계에서 이 두 기계는 대중화된다.  7. 이것들은 기능이 높아질수록 아름다워진다. 인터넷으로 미사일사진을 본다. 이름과 그 위력을 상세히 볼수 있다. 이것들은 로켓의 자식이지만 핵의 욕망이다. 마치 이 인터넷이 컴퓨터의 지식이지만 TV의 욕망인것처럼.  8. 이것은 향후 국책사업 유치를 원하는 다른 도시의 모범저 선례, 국토개발의 새 모델이 될 것이다. 이미 원전 선진국에서 방폐장이 위험하고 비밀스런 장소가 아니고 주민의 휴양,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9. 윤리적 자신감은 심미적 태도를 낳기도 한다. 그런데 오락실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란 나는 이 작곡가 -911테러가 이제까지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한 독일 작곡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의 심미적 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0. 이렇게 발랄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문명의 비극적 대단원이 핵은 허구이며 이미지야말로 실제라는 썰렁한 유머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소비노동’에 시달리며 이 문명의 자연사를 기다리며 살게 될 것이다. 별 미련도 없이  11. 그러고 보니 이 오락작에서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생애적 기교는 ‘유예’의 기술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와 ‘꼼짝마’를 외치는 강도처럼, 파국의 이미지는 이미 실소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이버 공간속 주체의 ‘불만’ 지젝의 ‘존재론적 묵시록’과
네트net문화의 ‘수행 정치’ 사이의 화해 시도
_이만우
1. 序 - 사이버공간과 주체성
현대인의 삶에 인터넷을 통해 일상적인 활동영역이 된 사이버공간에게는 ‘좋음’과 ‘나쁨’의 주장들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이 획일적이고 완전히 통제된 전체가 아닌 이상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좀더 광범위한 검토가 필요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화의 대가로 지불해야하는 것은 주체의 본능적 욕동drive의 억압이자, 현대적 신경증과 그와 연관된 각종의 정신질환들로 이어지는 개인과 사고 및 행위라고 주장했다. 정신분석이론은 개인심리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있어 개인과 사회구조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기 부적절할지 모른다. 그러나 테레사 브렌넌은 개인심리에 고착되어 문화과정을 소홀히 하는 듯한 정신분석의 제 개념들은 철저하게 교정되어 재인식되어야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이버공간의 문화틀에 대한 분석에 정신분석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많은 담론의 주제는 주체성의 문제와 연관되며 주체의 ‘위치성’, 그로인한 ‘병리(불만)’을 분석하게 한다. 여기서 핵심은 반성적 수행성의 전략, 즉 제한없는 주체의 개입과 ‘숭고한’개방성의 장소로서 해방적 잠재력을 강조하는 네트의 ‘수행정치’와 관련하여 주체가 어느정도 근본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사이버 공간에 내재한 존재론적 모순에 지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입장을 정리하고, 그가 기초하고 있는 라캉의 문제틀로 돌아가 라캉읽기와는 사뭇다른 수준에서 그가 전개한 존재론적 묵시록과 네트 문화의 수행정치 사이의 ‘상호 담론’을 구성해 보고자 한다.
2. “위협은 가상the virtual 이 아니라 실제the real이다.”..
지젝은 사이버 공간이 생산적인 개방성보다는 존재의 근본적인’닫힘’을 유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상적 형태를 통해 얻을수 있다고 주장되는 ‘자유’에는 가상적 정체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정신병의 조건들을 생산하다는 입장이다. 사이버 공간의 개방성은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실제적인 제한 및 구속보다 더 질식할만한 무한대의 역설이다. 넘쳐나는 정보는 번영이 아닌 식욕부진으로 일어질 수 있다.
사이버 공간 의사소통 기술은 ‘상호수동성’의 관계에 집중되어 무능력상태를 조장한다. 하이데거가 주장한 ‘내맡김’의 개념과 일치하며 마치 매체가 유도한 진부한 웃음소리, 감정의 조작이 욕방주체가 반응하는 능력을 경감시키는 것이 그  개념들의 경험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오늘날 디지털적인 ‘모사물의 돌림병’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모사되지 않는 현실 형태가 아니라 외양 그 자체’라고 말한다. 외양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의미있는 개입을 가능케하는 조건들(미결절성)을 제공한다. 사이버 공간의 위협은 현실이 아닌 바로 외양이다.
이런 사이버 공간은 주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적 환상을 폭로함으로 비가상적 우주(현실)를 식민화하도록 위협하는 주체형성의 매개가 된다. 이는 사이버 기술들이 “상징적 표층조직과 그것을 기초짓는 환상을 분리시키는 틈새”를 매꾼다는 의미의 “과잉충족”을 일으키기 때문에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담힘”을 낳는다는 것이다. ‘거리의 죽음’, ‘닫힘’은‘나와 실제적인 몸을 가진 타자들과의 접촉이 점차 사라지는 거리의 중지, 스크린 속의 환영과 이웃을 맺고, 일반적 접근 가능성은 참을 수 없는 밀실 공포증을 야기할것이다. 선택의 과잉은 선택의 불가능성으로, 또 직접적인 참여공동체는 참여하는 사람들을 강력히 배제하고, 끝없는 변화와 창조의 공간에서 정반대의 사물을 은폐한다.
‘닫힘’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 혹은 대타자가 언어가 발생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이것은 주체의 기능에 필수불가결한 상징계에 대한 주체의 관계에 부여된 미결절성(모호함)이다. 이것이 주체가 현실과의 관계맺기를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친숙한 시공간적 연속체를 따라 주체의 장소가 완벽하게 붕괴되는 조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용어로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장소도 없는 것을 위한 공간을 열어 젖히는 암점의 기능이 방해받는 순간, 우리는 바로 ‘현실감’을 상실하게 된다.” 사이버 공간이 가진 위험은 이러한 구성적 모호성을 기초짓는 방식으로 상징계를 실제로 다시 쓴다는 데 있다.
자아의 가상화가 주체가 세계에 개입하는 좌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지젝에게 자기와 타자 간 차이의 결여, 몸의 경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의 무능력, 그리고 ‘하나됨’의 망상 등은 분명히 사이버 공간에서 드러나는 ‘불만(병리)’의 정신병적 유형들이다. 그의 견해는 확실히 사이버 공간은 편집증의 기괴한 형태를 유발하는 장소이고, 한발 물러나서 비록 그 공간이 정신병적 행동을 포괄하고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에게 편집증적 망상의 심연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3.’가상적인 것은 주체에게 다중적인 잠재력을 제공할 수 있다.”
지젝의 논의가 상당히 염세주의적이긴 하지만 급진적 가상화가 어느정도 현실 생활을 복원하여 새로운 지각을 열어 젖힐 것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이버 공간에서 주체의 개입양식을 변화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기제로서의 후기 자본주의가 주체형성에 본질적인 환상구조를 영속시킨다는 진단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의 견해는 지극히 환원주의적이며 증상을 정확한 진단을 했음에도 그것을 구조적인 문화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대목에서는 다소 일차원적이다. 따라서 그의 논의는 “시장과 같은 규범적 문화틀, 재현된 문화형태들, 또는 직접적 존재로서의 정보사회 간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대행자로서의 주체가 그것들에 의해 어떻게 분열되는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지젝의 존재론적 묵시록은 ‘닫힘’의 경향, 즉 정신병의 사회적 형태를 해명하는 사회이론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며 사이버 공간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의 이행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의 반성성이 결여된 문화비평의 정치적 무용성으로 이어진다.
콘리는 지젝을 컴퓨터나 가상 공간이 주체를 탈중심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만 보는 보수적 하이데거 입장의 대리인이라며 비난한다. 또 어떻게 컴퓨터가 오늘날의 사회환경에서 주체성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파악하지 못하며 오히려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주체성의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기 보다 그저 라캉의 도식에 매몰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존재론은 너무 제한적이고 이분법화되어 있기 때문에 대안적 가능성을 허용할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생각하자면 주체를 일종의 ‘간격interval’ 또는 ‘구획partition’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상징계에 대한 비역사적 이해는 ‘되어감’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를 부가할 여지를 만들지 않는다. 그의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문제틀을 벗어나 다른 전략으로 이론화시키기는 가능하다. 콘리는 “완고한 상징계 대신에 언술행위를 통해 창조성을 강조하는 또 다른 언어 이론”을 기초로 “사이버 공간이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향은 기술 그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기입되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했다.
콘리의 주장이 사이버 공간에서의 급진적”수행정치”를 옹호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정치 전략이 얼마나 유효한가? 사이버 공간은 그 기초가 불명확한 영역안에서도 기능할수 있는 주체들에게만 ‘되어감’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들을 제공할 수 있기때문에 상호주의적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맥락이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과학과 정보통신 기술 등의 소비라는 후기자본주의속 ‘수행정치’의 잠재력은 중시되어야한다. 네트 문화의 ‘수행정치’가 타자에 대한 주체의 전유 또는 지배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주목받아야한다.
지젝의 라캉읽기가 생산한 것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이론화를 통해 해결책을 발견하고자 한다. 바로 자기와 그 생생한 유사물 상의 거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보다는 제한된 자유가 의미를 획득하도록 하는 문화틀을 만든다. 이것은 콘리 주장과 같이 초인간적인 영역에 자리잡은 듯한 반성성을 갈구하는 것보다 생산적이고 실현가능한 것이다. 브렌넌은 그 가능성을 끄집에 내는데 지젝을 단순비판하기보다 거기서 어떤 ‘이익’을 색출하고 콘리의 비판에 부담을 덜어준다.
4.”자아는 자신의 이미지대로 세계를 주조한다.”
브렌넌은 후기자본주의 문화틀을 ‘ 자아의 시대’라고 진단했으며, 그이 주된 논점은 근본환상의 기술적 실현이 역사적으로 주체의 정신세계를 구성하고 과잉결정하는 방식에 놓여지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 정신병’에 빠져 있으며 그로인해 자아는 세계를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주조한다고 한다. 기술은 이러한 자아 투사를 행동하되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라캉의 이론은 “자아가 자연적 존재의 이질성과 다양한 문화적 질서를 성격이 불분명한 동일성의 반사물로 환원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대로 세계를 주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자연적 존재를 소비함으로써 세계를 주조한다. 이것이 정신병에 대한 기술적, 법적 정의이다.” 그는 지젝의 총체적 접근법을 받아들이지만 ‘주인기표’의 복귀에 근거한 정치 전략을 회피한다.
출생이후의 경제는 유아가 상실된 통제상황과 연기된 욕구들을 타자에 대한 통제 및 유아적 만족의 세계에 대한 환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에너지를 고정시키게 된다. 이러한 근본환상은 정신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과 분리시키고, 타자에 대한 감각을 특권화한다. 그리고 개인화와 주체의 자율성이란 환상을 창조하고 타자들을 지배받을 수 밖에 없는 대상들로 분열시킨다.
가상현실의 ‘창조성’에 관한 수많은 담론에 내재한 역설은 창조성의 조건으로 물질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회피’에 기초하고 있다. 가상 현실로 인한 가장 광범위한 오염 또는 중독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는 그 지각적 장이 조절되도록 재구성된 몸이다. 가상현실은 주체에게 권한부여의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물질성으로부터 삶을 빼앗는 첫 단계로 간주되기때문이다. 이과정에서 정보는 주체의 자연적 존재양식을 벗겨버린다. 그리고 가상현실을 가상주체와 비가상주체 사이의 위계구조를 형성한다. 이 감각은 사이버 속 캐릭터가 현실의 인물에 우선한다는 것을 통해 분명히 포착된다. 이제 물질적수준으로 돌아가 추론의 사슬을 엮어가기 보다는 추상적 수준에서 추론하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다. ‘물질적 현실’의 속성은 복잡하고 생성적인 자연적 연쇄와 그것에 덧씌여진 주체-대상의 관계가 만들어 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브렌넌은 총체성과 보편성에 적대하여 다중성과 단절을 강조하는 찰현대적 문화이론과 정치전략의 양가성을 인지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 자가의 환상화된 투사, 즉 지배하고 분리하여 나아가 파편화하고 동일화하려는 ‘자아의지’를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그 의지는 사이버 공간의 다양한 의사소통에서 즉각적으로 확인된다. ‘회피’는 자아가 자신의 방식대로 전유할 수 없는 것을 부인하는 방법이다. 동일성의 욕망에 의해 지배받는 가상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것 이면에서 우리는 자아가 세계를 자신의 이미지로 동일화하려는 감추어진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5. 結- ‘화해’를 위한 상호담론
브렌넌은 사이버공간에서 주체의 ‘위치성’,즉 주체에 대한 권한부여의 문제에 대해 매우 신중한 존재론적 문화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심리적 차원(사회적 정신병)을 경제적-기술적 차원과 결합시켰다. 네트문화에서 주체의 자유, 자유로운 연대, 그리고 물질적 한계의 초월 등은 무언가를 결의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연대적 차원을 허용하므로, 자아가 가상적인 것의 이미지로 비가상적인 세계를 주조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아의 시대”를 확장하는 것을 넘어 설수 있게 한다.
이런 사이버 공간의 존재론적 모순에 그의 해결은 자아에 구조적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 이익에 정치적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브렌넌과 지젝이 정치적 자유와 주체의 위치성, 그리고 가상 공동체와 관련하여 사이버 공간의 존재론적 모순을 지적한 것은 과학 및 정보통신의 기술을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대로 ‘사회적 연결사’를 구성하기 위한 새롭고 의미있는 방법을 색출해낼 수 있다.
가상과 현실세계의 이분법적 사고는 불가피하지만 이익을 얻고자 지젝과 브렌넌 사이를 반성적으로 옮겨다닐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계화되고 추상화된, 유연한 사이버 공간의 성격이 네트 문화에 선험적인, 또한 그 외부의 문화틀에 의해 지탱되기도 하고 제한되기도 함을 의미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사이버 문화의 지배적인 가정에 반대하는 것이지만 현존하는 사회관계와 의례들은 단지 정치적 해방의 방해물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작용의 기본 매체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다에게 묻다│프랭크는 5의 규칙에 복종한다
_짐 우드링


퇴행

우리안의 전체주의
_안경화 독립큐레이터
2003년 월드컵 당시 광화문에 모인 붉은 악마. 15만이 넘는 인파가 같은 옷을 입고 한마음으로 집결했다. 이런 상황에 월드컵을 보기는 커녕 J리그를 더 좋아했다는 필자는 주변인들에게 비애국자와 같은 눈총을 받았다. 빨간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될 수 있었던 그때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이 앞으로 국제무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자화자찬이 미디어를 통해 연달아 뿌려졌다. 월드컵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어디에도 없었고 있어서도 않됐다. 올림픽을 이용해 게르만 민족의 단합을 촉구한 나치즘의 전략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황우석 연구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난치병 극복에 획기적인 치료방식이 될 것으로 다시한번 한국민의 세계적 위상을 드높일수 있는 기회였다. 언론은 심지어 이 연구의 막대한 부가가치 창출과 인간의 무병장수의 가능성에대해 여과없이 내보냈다. 하지만 연구의 성과에 앞서 배아를 파괴하는 행위가 인간 윤리에 대한 기본적인, 본질적인 도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세계각국은 아직 윤리의식에 대한 합의나 해결책이 도출되지 않은 현시점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여러 제약을 가하고 있다. 또한 인간복제 가능성, 난자체취방식 등 생명윤리에 대한 법률 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과연 인류적 윤리문제를 도외시한 채 세계최초의 실적, 자국 경제적 이익, 나와 내 가족의 무병장수가 우선시 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실 이런 비판적 시각은 시대착오적 혹은 비애국자 취급을 받는 이유로 문제를 공론화하기는 힘들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다름을 배척하고 단일을 고수하는 배타성이 역사적인 과오가 될 지도 모를 연구를 성공시키는 성급한 원동력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줄기세포연구를 맹신하며 유토피아를 꿈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파시즘이나 니치즘보다 더 큰 해악으로 자랄 수 있는 파국의 단초를 발견한다.
(줄기세포 연구의 논란 이전의 글)

극단적 풍경 - 2005년 대한민국과 미술의 위상
_조선령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자유라는 이름의 퇴행
_조선령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 글은‘자유라는 이름의 퇴행’의 제목으로 청탁받았지만 사실 ‘퇴행’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다. 한번이라도 성숙했던적이 있었던가. 퇴행보다는 1005년 한국 미술계에 존재하는 어떤 보편적 ‘위기’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조각가 故구본주(2003.9.29)와 삼성생명간의 분쟁이 있었다. 구본주가 교통사고로 죽고 삼성생명에서는 그의 작가로서의 경력을 불인정하며 무직자에 해당하는 보험액을 지급하겠다고 항소했다. 예술이 의미있는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그로인해 미술인 스스로 갖는 자괴감과 소외감은 심각하다. 여기 또 다른 극단적인 풍경이 존재한다. 거대 기업의 미술관에서 개최한‘유망한 젊은 작가전’은 그야말로 신문사의 돈과 미술관의 이름이 결합된 관객 40만 명짜리 블록 버스터가 터진다. 미술이 자본논리속으로 스며들어 문화산업으로 넘어가고 있는것이다. 신사동의 거리에 고급스런 대형복합미술관이 들어선다. 젊은 작가들은 반지하 작업실이 있고, 돈벌이 때문에 작업할 시간을 못내는 것이 현실이다. 2005년 미술계의 또다른 풍경을 보자면, 미술이 ‘유행 아이템 산업’,’명품컬렉션’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믿는 한 젊은 작가(낸시 랭)가 초대받지도 않은 <2003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미모와 몸매를 상품으로 파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구본주의 시대가 지고 새로 떠오른 그녀. 그녀는 자신의 작업처럼 쿨하고 럭셔리하게 인생을 쉽게 사는 인물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지낼곳 없이 친구집에 얹혀 있단다. 구본주와 낸시랭 사이에는 생각만큼 큰 차이가 없다.
사실 자본논리의 구조속에서 미술계는 그닥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미술계가 생각하는 ‘바깥세상’의 무한권력 또한 부풀려져 있다. 자본 논리에 그나마 온전히 편입괴어 있는 부분은 미술계 전체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의식의 초라함이다. 진지하고 반골적인 세대와 쿨하고 가벼운 세대, 이 두가지로 세상을 보는 이분법, 그리고 지금은 과거와 달리 전적인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 자유를 맹목적으로 신봉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방향의 상실로 증오하거나 하는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의식의 획일성. 거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명품 컬렉션의 하나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등록되고 있는 시점에서 작가에게 지급되어야할 ‘푼돈’보험금을 안주려고 버티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거대기업을 비판하는 작업으로 유명한 작가에게 그 기업에서 운영한는 미술관이 친히 공간을 내어고 서문을 써주는 것이 현실이다.
슬라예보 지젝은 모든 역사는 우연한 사건에 필연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우연한 사건에 필연적 형식을 부가한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며, ‘주체’라는 사후적 범주는 자신의 전제를 소급적으로 정립함을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우리를 대항하게 하며 존재의 목적을찾게 만드는 ‘큰 타자’와 그 초월성이 환상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떨어진다. 아방가르드적 의식은 이 타자성의 논리에 의해 지탱된다.  그 ‘타자’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는 타자를 잃었다. 하지만 상실의 감각이 지젝이 말한 대로 더 큰 자유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위기가 아닐까?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 자유는 없고 자유의 강박관념만 있다는 말이다. 이런 ‘실재와의 만남’을 회피하려는 경향은 매끄러운 표면과, 세련된 테크닉, 최첨단 개념으로 자기모순을 포장한작품이나 전시에도 드러난다. 자신의 시대가 가진 문제의식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은 작품은 공허하다. 이전 시대가 할 수 없는 표현들, 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미술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제들, 소재들, 형식들이 너무나 많다.
2005년 대한민국 미술계에, 놀랄만큼 문제의식이 실종되고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미술이 정치적이어야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의 작업이 비정치적이라면 왜 그래야하는지 그 필연성을 말해야하고 도한 그 필연성을 자신의 ‘우연한’ 결단에 의해 설득력있게 보여줘야 한다.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어떤 희망이 있다면, 그런 곳에서 온다고 믿는다.


과잉

원자시대 
_ 짐 샌본
<우라윰 자동 방사선 사진>-사진들은 초기 우라늄 광산에서 수집한 우라늄 샘플들을 4*5인치 크기의 필름으로 찍은 것이다. 원석샘플들을 가만히 놓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이 필름에 노출되며 저절로 원석샘플의 사진이 찍힌다. 1934 파벨 체렌코프가 방사능의 ‘색’을 발견하는데 바로 코발트 블루다. 
<라듐시계>- 이것은 야광 라듐 알람 시계의 문자판을 저속 촬영한 사진이다. 뉴멕시코 남부의 각 가정에 이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계의 문자판을 칠했던 1920,30,40년대 여성들은 라듐에서 나오는 방사능 물질로 생명을 잃었다. 
<핵무기 시리즈>-1950이후 ‘열화’우라늄으로 만들어진 미군의 포탄은 명중하면 자연발화하여 모든 것을 불태운다. 이것은 아주 효과적인 무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랫동안 방사능과 독성물질로 주변을 오염시고 폭발과 동시에 연기와 먼지로 방사능이 유출된다. <원자시대> 30*36, 40*34인치의 일포크롬 프린트

nature.gif / nature.jpg
_슬기와 민
인터넷의 생태계에서 꼭 필요한  디지털이미지 압축기술은 보통 GIF나 JPG포맷으로 ‘손상형’압축시스템이다. 파일 크기를 줄이기 위해 이미지 퀄리티 손상을 감수해야한다는 뜻이다. GIF(Graphics Interchange Format)은 1987년 컴퓨서브사가 자사 네트워크 서비스용으로 개발한 기술이다. 이것은 최대 256색을 구사할수 있어 라인 드로잉, 그래프 그리고 간단한 애니메이션이 가능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JPG는 ‘Joint Photographic Experts Group’이라는 이것의 최초 개발팀 이름을 딴 것으로 퀄리티가 높지만 과도하게 압축하면 ‘아티팩트’라고 불리는 찌꺼기만 남기는 등 명료성을 떨어트린다.
인터넷 상에 존재하는 JPEG와 GIF 이미지를 찾아보면 (Google에서) ‘JPEG’로 8,710,000개, ‘JPG’로 11,800,000여개 등 최소 2천만개, ‘GIF’로 12,100,000개가 존재한다.
인터넷의 이미지는 대부분 다운로드가 가능하고 수집하고 싶은만큼 이상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아무 이미지나 수집해도 괜찮은가. 떠도는 이미지에는 테러리스트의 암호나 알카에다의 비밀지령이 있을수도 있다. 아방가르드의 꿈은 이렇게 그로테스크하게 실현되는 모양이다.
이미지는 풍경사진을 각각 jpg와 gif포맷의 이미지를 각각 8단계에 걸쳐 압축 푸는 과정을 보여준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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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에대하여
카테고리 인문 > 문학이론 > 문학이론일반
지은이 장 뤽 낭시 (문학과지성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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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장 뤽 낭시

고양의 언술 - 위(僞)롱기누스를 다시 읽기 위하여 / 미셸 드기
숭고한 봉헌 / 장 뤽 낭시
칸트 혹은 숭고의 단순성 / 엘리안 에스쿠바
숭고한 진실 / 필립 라쿠 라바르트
숭고와 관심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세계의 선물 / 자콥 로고진스키
비극과 숭고성 - 독일 이상주의 초창기에 시도된 <오이디푸스 왕>의 사변적 해석 / 장 프랑수아 쿠르틴
푸생의 그림 속 바벨탑에 관하여 / 루이 마랭



칸트 혹은 숭고의 단순성
_엘리안 에스쿠바

서언
칸트의 텍스트는 “구성”되는 방식은 “구축”이 아닌 형성이다. 상상력의 형성, “허구-제작”으로서의 형성, 건립하거나 쌓아 올리는 대신 개념들을 구부리고 주제들을 굽히고 접어“형태를 만들어내는”기법으로서의 형성. 하나의 Topic속에 텍스트를 고착시키기보다 대립 항들의 휘말림을 야기하는 전의와 절의 작업. 칸트의 텍스트 내에 이분법들이 작용한다고 하자. 그런데 거기에는 매번 중간마디에 해당하는 제삼의 용어가 개입한다. (인지력의 이분법- 감성과 오성은 제3능력인 상상력에 재차 뒤집힌다.) <판단력 비판> 상상력은 반성, 재현 혹은 제시, 종합 등의 “제작”을 의미한다. 이 같은 선회는 결국 숭고의 (단순성이 지니는) 명징성을 보여준다.

상상력
반성 상상력과 미적판단은 다 같이 비-대상성(대상의 후퇴)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상상력은 대상의 무(無)의 한복판에 형태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서 주어진다.미적 판단의 표현으로 정의되는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그 “특질”상 “재현과 대상간의 관계”가 아니라 “재현과 제반 재현의 능력 전체의 관계”로 정의된다. 취미판단이나 미는 재현으로부터 타자를, 즉 대적자나 대상을 멀리 떼어놓는다. 미적 판단은의 위장의 효과는 절대적 초상으로 규정하지 못하도록 교란한다. 미적 판단은 주관적 합목적성으로 쾌적함과 비장함이라는 두 가지 양상을 띠는 미적 쾌감의 의미이다. 이런 판단은 중성적이고 동일자와 타자, 또는 안과 밖의 대립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미적 판단은 일종의 부여가 이루어지는 계기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미적인 것에 해당하는 이상 그것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진술한 대상에 결코 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동일자도 타자도 아닌, 가운데, 중간마디. 칸트는 상상력이 그런 것이라 보았다. 상상력은 감성처럼“제시 또는 직관의 능력”이면서도, 감성이 수용적인데 반해 오성처럼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중간이란 무엇인가? 취미판단이나 미는 무엇을 반성하는가? - 바로 주체의 능력들의 조화라든가 합주를 반성한다.

1.합주를 실행하는 중간 마디(상상력, 판단력)자체가 합주가 일어나는 두 끝 항들 중 하나가 된다.

2.2.미의 경우 합주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명되는 반면 (상상력과 오성의 일치, 조화) 숭고의 경우에는 첫눈에 보기에 합주가 행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길항)

합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와 숭고의 판단을 통해 표현되지만 그저 주체의 쾌락감을 드러낼 뿐이고 이것은 언술의 후퇴와 함께 이루어진다. 합주가 표명하는 쾌감이란 무엇인가? – 미는(그리고 숭고는) 사유의 쾌감으로 판명된다. 이 사유의 순수한 쾌감은 대상에 대한 앎을 수반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앎의 하나는 아니다. 따라서 반성 및 합주에 관계된 것은 재현적 모방과는 전혀 다른 작용이다. 언술은 발화 행위 안에, 발화행위는 언술 안에 묻히는 이격접촉과 같은 이러한 능력들의 작용이 관조적 쾌감이다.

머묾Verweilung - 시간이 주체의 자기-느낌의 과정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리라. Weile(~동안)은 시간의 “정지”이며 머묾과 거주지로서의 시간. 관조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의 순수한 형태 속에서 기억 없음의 기록이 바로 상상력의 의미이다. 반성, 즉 상상력의 작동이 이루는 합주는 따라서 시간의 순수형태, 다시 말해 발생의 순수형태를 포착하는 작용에 부합한다. 이렇게 재생산이 아닌 생산으로서의 미메시스 개념의 창안된다.

 

상상력 - 제시 “제시 또는 직관의 능력”인 상상력은 현실의 능력이기도 하다. 상상력은 개념에 직관을 제시함으로써 오성과 감성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이 제시를 일컫는 이름이 도식이다. 여기서 도식은 하나의 광경이고, 상상력은 포착의 능력이다. 칸트에게 상상적인 것은 전적으로 현실에 포함되며 드러냄의 능력인 상상력은 현실의 현실성에 대한 능력이다. 감성은 존재자를 그것의 실질성을 통해 수용하는 반면, 상상력은 형태와 상에 의해 존재자를 제공한다. 출현은 증여의 능력 “있음”의 능력, 존재론적 차이의 능력이다.

존재자의 대적성이 철회되면 그때의 현존은 본질, 즉 순수한 출현의 섬광이다. 이것에 대한, 근거1) 숭고의 예인 거친 자연은 미와 숭고의 능력인 상상력을 존재론적 차이의 능력으로 주제화할 근거를 제공한다. 근거2) 상상력은 순수한 "제시"의 능력인 동시에,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 안에서, 그것의 존재 방식인 출현 혹 외관에 따라 포착하는 능력이다. 근거3) “단순성은 말하자면 숭고의 상태에 도달한 자연의 양식이자, 제이의(초감각적) 자연인 도덕성의 양식이기도 하다.”

단순성, 하나의 주름 - 이것은 자연의 제시 양식이다. 상상력이 숭고를 통해“보라고”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존재론적 차이로서의 단순성 또는 하나의 주름을 제시하는 것이 칸트가 말한 상상력이다. 칸트의 “부정적 제시”, “무한의 제시” - 드러냄의 작업 전체에 관여하되 저 스스로는 결코 드러내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이 곧 형태다. 형태, 혹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직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공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상상력은 사물들의 주름 내지 주름 접기인 공간과 시간의 제시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상상력은 현실의 현실성을 관장하는 능력이다.

양식에 관한 보충설명..

 

상상력 - 종합 상상력은 모으는 작업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상상력을 스스로 넘쳐나는 작용으로 규정하며 3가지 양태의(선험적) 종합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상상력의 종합은 종합의 일부인 동시에 전체로 이해된다.

1. 포착의 종합 - 이질적 요소들을 포학, 끌어 모음. 2. 이해의 종합, 계열적 종합 – 도식. 3. 재생산의 종합 - 상상력의 작용.

종합의 작용인 상상력의 작용이 각각의 능력 내부에서 마다 진행됨으로써 이분법 및 삼분법의 구분에는 혼선이 생긴다. 칸트는 혼선의 제거를 위해 상상력을 경계들 내에 담긴 채 오성을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재생과 비교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능력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칸트의 오류이다. 이처럼 상상력은 “나는 생각한다”와 동일시하는 시각의 여운으로 상상력의 작용인 미를 사유의 순수한 쾌감과 일치시키고 있는 <판단력 비판>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포착과 이해라는 이중의 작용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기술된다. 포착은 수학적 숭고의 분석으로 총량의 문제와 관련되고, 이해는 연관이며 그것의 극대치의 개념을 내포한다. 이해에는 상상력이 넘어설 수 없는 하나의 극대치가 존재한다. 반면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특성은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극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의 정점에서 숭고가 발생한다. 따라서 상상력은 기묘하게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는 능력인 셈이고, 숭고는 바로 상상력이 낳는 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상상할 수 없는 것, 즉 숭고는 상상력이 벌이는 “적게 잃고 크게 얻는” 게임의 결과다. 이 게임은 “근본척도”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됨의 작용이다. 이해와 정점은 ‘통일”, “조화”, “하나됨”의 능력이라는 위상을 상상력에 부여한다.

 

칸트의 주제에 관련한 상상력과 숭고에 관한 특성

1) 상상력의 작용은 “~없음”을 통해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서, 완성의 부정으로 행해진다. 이 “없음”의 연쇄의 중간 지점에서 미는 단 한 차례 멈추는데, 거기서부터는 숭고가 작용을 이어받고, 그러면 숭고와 함께 형태 그 자체가 아예 상실되고 만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와 숭고의 능력인 상상력은 존재자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쾌(만족)의 논리이다. 우리가 상상력의 재현을 어떤 개념 하에 놓으면, 상상력의 재현은 개념의 제시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규정된 개념의 범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거리를 스스로 제공하려 하며, 따라서 개념 자체를 미적으로 무제한으로 확장한다. 상상력은 따라서 창조적이다. 이것은 논리적 속성들과 달리, 미적 속성들은 창조의 숭고성과 위엄성의 개념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재현하지 않는다. 미적 관념은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 그것 앞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확장되어가는 동종의 재현의 장의 전망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자연개념의 확장 - 이것은 “주어짐”이 상정하는 연합을 통해 가능해지는 확장이다. 또 그것은 숭고에 의해 일어나는 상상력 그 자체의 확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와 관계된 것은 미의 경우에서처럼 대상과 상관된 만족감이 아니라 상상력 자체의 확장과 상관된 만족감인 것이다. 칸트적 의미의 상상력은 모든 능력들에 혼란을 일으키는 능력, 이분법과 삼분법을 흐트러트리는 능력, 결국 반-능력이다.

 

2) 시작의 "능력" 상상력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그것은 만족을 계기로, 다시 말해 감각의 도래, 감각의 기별을 계기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감각에 있어서 쾌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이 제공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각이 스스로를 부여하는 것이다. “쾌”= 감각의 발생, 나타남. 이때의 시간성은 연속의 형태가 아니라 정지의 양태를 띤다. 눈에 비치는 대로 바라보는 상태에서 시선은 “그것”것으로서의 존재자에 머무르거나 고정되지 않은 채 나타남으로서의 푸시스를 “포착”한다. 칸트적 의미의 숭고는 지금 나타나는 것의 나타남을 일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숭고의 단순성이다.

 

숭고한 진실
_필립 라쿠-라바르트

1 절대적으로 숭고한 것들 예1) 숭고는 “항상 사유의 양식과, 다시 말해 지성의 영역과 이성의 관념들이 감성에 대한 우위를 갖도록 하는 데 필요한 규범들과 결부되어야 한다." 이것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늘 높이 존재하는 것이든 낮은 땅 위에 있는 것이든, 혹은 땅보다 더 낮게(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각상이나 그림을 만들지 말라." 는 명령만큼 숭고한 대목은 없다. 예2) 천재, 즉 숭고한 예술가와 관련한 “사유의” 숭고 – 이시스의 신전에 새겨진 문구” 나는 지금 존재하고 이전에 존재했으며 앞으로 존재할 것인, 어떤 인간도 나의 베일을 들어올리지 못하였다.”칸트에 의하면 제시 불가능한 것을 제시하는 것은 숭고하다. 또는 리오타르의 표현에 의거하여 보다 엄밀하게 이야기해보면, 제시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숭고하다.

2 1935-36에 걸쳐 미학을 해체하고자 시도하면서, 하이데거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예술 철학 전체를 광범위하게 “미학”이라 부른다. 하이데거가 취한 해체의 방향은 결과적으로 미학의 규정을 통해 작품이란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로 흐르게 된다. 미란 예술 작품이 스스로 드러내는 어떤 것으로 에크파네스타톤(빛, 광채)을 띠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미는. ‘드러냄’이라는 진실의 측면에서 볼 때, 스스로의 본질 속에 저 자신을 활짝 펼치는 방식이다.” 그것은“무관심”에 의해서만 대상 그 자체와의 본질적 관계가 실현된다. 무관심(자유로운 호의)은 대상과 본질적으로 맺어지기위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한 사실 - 1. 칸트의 미 규정은 미의 본질에, 다시 말해 비-미학적인 미의 이해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다. 2. 빛남에 대한 일관된 사유에 의해서만 미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헤겔의 예술 종말론으로 난관에 봉착하고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관점의 결정적 특성을 거둔다. 그리고 매우 심오한 정치적 공모성과 그 직접적 인과관계를 내어준다.

1)정치적-철학적 공모… 이것은 예술과 예술 작품은 “절대적 필요”를 구성해냈다는 사실에서 위대해지는 것이지, 창조물의 탁월성만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 근대에 들어 이처럼 예술 스스로의 본질을 상실하여 쇠퇴하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수행한 미학의 완성이다.

2)직접적 인과관계… 두 사람 모두 예술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상호 배타적 관계에 놓는다. 예술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지식, 또는 학문이 출현하는 순간 “위대한 예술은 종말을 맞는다.”

… 하이데거가 시도한 작업의 모든 난관은 헤겔의 일관성에 대한 거부에서 기인한다. 미학의 탄생에 관한 헤겔의 논리에 가해진 하이데거의 조정은 예술의 종말로 설명된다. 예술에는 두 개의 죽음이 있다. 하나는 5세기 쇠퇴 무렵 철학의 탄생과 함께였고, 또 한번은 고유한 의미의 미학의 발전과 동궤를 이룬다. 하이데거가 완성한 미학은 헤겔 미학의 윤곽을 형성한 기점이 되었던 “존재자의 진실”을 제 안에 포함하므로 헤겔 미학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존재자의 진실이란 존재자의 직관적 진실이다. 미학적 개념체계의 전제가 그것으로부터 도출된다. 근대 미학은 이미 창작자와 애호가를 기점으로 예술을 파악하는 방식 사이에 공모가 이루어 졌다.

존재자의 직관적 규정보다 더 “시원적인”존재자의 규정이 존재하는가? (칸트와 실러의 재평가.)

1)칸트는 분명히 헤겔이 완결한 미학의 범위에 포함된다. 이것은 상상력에 관련된 용어들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2)칸트가 그 완결된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도 확실하다. 첫째로 실러에 기대면 <비판>의 주관주의를 “주관성”의 영역에서 빼낼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미의 본질을 순수한 빛남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곧 그가 예술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방식과 완전히 결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칸트는 소위 제일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분야 내에서 처음으로 미학의 권리를 인정해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철학의 일부, 또는 포함 분과로서의 미학을 말소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칸트가 미학의 권리를 박탈하게 된 데는 숭고에 대한 사유, 또는 숭고에 대한 어떤 유형의 사유가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1) 롱기누스 시대부터 숭고는 그 개념자체에 있어서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구분, 즉 감각과 초 감각을 구분하는 플라토니즘의 전통에 의거하여 제시되었다는 사실.

2) 미에 대해 부정적 방식으로 정의되는 숭고는 따라서 미의 개념에 끊임없이 종속되며, 미의 개념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제공하지도, 덜 제공하지도 않는다는 사실.

결국 하이데거가 숭고를 미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 헤겔의 관점에 찬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는 “예술의 본질에 관련하여 서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통찰력 있는 성찰”의 관점에 철학적으로 동의했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 내용과 형태 사이의 불일치는 부득이하게 미나 고유한 의미의 예술의 계기를 앞서는 순간으로 생각될 수 밖에 없다. 헤겔이 상징적으로 예술에 포함시킨 숭고가 아직 예술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숭고성은 신과 자연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무한한 주체의 현상이자, 그것이 세계와 맺는 관계이다. 미의 종교의 경우 그 정신적인 것은 외적 형태를 통해 온전히 파악할 수 있지만 숭고성은 숭고를 드러내는 질료가 사라지도록 만든다.

미켈란젤로의 <모세>- 이것은 제현의 금지에 대해 오직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을 가진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해석하는데 실패하고 빈켈만이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 사이의 투쟁이 곧바로 형태의 차원에서 판독될 수 있는 예술 작품의 예인<라오콘>상을 찾는다.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 “욕망하는 힘”,“강력한 관심”과 자유 사이에 빚어지는 길항에 완벽히 일치하는 이것은 미이다. 형상이 형상화하는 바는 형상화에 대한 일체의 적대감을 (숭고하게)포기하는 것, 바로 그것이 결론이다.

프로이트의 난관의 원인, 모세의 형상의 모순이 발생하는 진원지로서 드러내는 사실은, 1)모세의 율법이 실제로 숭고해지는 것은 바로 그 부정성 자체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근대에는” 위대한 예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2) 예술은 본질적으로 직관적 제시의 소관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이 제시라면 본질적으로 형태나 형상 이외에 과연 무엇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제시의 문제와 연결된 질문은 비밀스러울 정도로 조용히 등장(부활)하였다. - 이시스의 신전에 새겨진 문구- 이 질문의 상징적 집약.

4 이시스의 언술은 신비 그 자체이고 그것을 지탱하는 메타포만 제외한다면, 확증적인 것으로서의 진리 언술이다. 그 언술은 신성의 진실 또는 본질, 즉 신성은 폭로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나, 진실은 말한다. 이러한 이시스의 선언은 단지 진실의 언술일 뿐만 아니라 진실에 대한 진실의 언술이기도 하다.

진실은(폭로는) 스스로를 은폐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낸다. 진실은 그저 ‘베일을 벗기는 것’이다. 헤겔은 상직정이고 숭고한 세계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정신", 즉 자의식이 최초로 떠오른 세계인 그리스로의 상질징적인 이행과정에서 환희에 잠긴다. 진실은 그 본질에 있어서 비-진실이다. 우리는 존재자에 관해 더 이상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때 그것을 가장 잘 만날 수 있다. "어떤 인간도 내 베일을 들어올리지 못하였다."는 말은 폭로의 가능 조건 그 자체이다. 예술의 진리란 재현되는 대상의 본질(존재자의 존재)이 예술작품 속에 정립(탈은폐)됐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술작품 속에서 탈은폐된 존재자의 존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존재자에게 낯설음, 섬뜩함(Unheimlichkeit)을 보게 된다. 이런 탈-친숙화의 알레테이아(비은폐성)의 도래는 본질적으로 예술작품에 의해 일어나는데 그런 것이 예술 작품이 유발하는 "타격" 또는 "충격"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존재자에 보충 또는 잉여로서 신비스럽게 덧붙여지는 예술 작품은, 스스로를 창조된 것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그 사실을 통해 바로 존재자의 자리에서(예술작품 자체도 존재자이다)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 그는 "예술작품이 자신이 개진한 존재자의 열림 안으로 순수하게 옮겨지며 옮겨질수록 그것은 한층 더 단순하게 우리를 교란시킨다." 그러면서 우리를 그 열림 속으로 밀어 넣는 동시에 일사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위의 탈-친숙성, 낯설게 하기, 교란, 충격, 단순성, 은닉 또는 철회, 저지 – 이것들은 하나같이 숭고 그 자체를 일컫는 어휘이거나 그것을 하이데거 식 표현법으로 옮겨 쓴 용례들이다. 그는 특히 불안과 ‘죽음을 향하는 존재’의 문제를 언급하며 현존재 또는 탈존의 바깥을 향해 나오는 움직임에서 기인한다고 본 바로 그 경험이기도 하다. 시 작품이 유발하는 충격, 다시 말해 존재자를 낯설게 하는것은 그와 같은 황홀함, 그와 같은 매혹이다. 가장 낯선 것에서 가장 고유한(propre)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5 에크파네스타톤-한의 섬광, 극도의 빛, 바로 출현 그 자체의 빛남. 이것은 더 본원적인 미의 이해에 대한 기억으로 탄생한 숭고의 사유일 것이다. 위대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술의 본질을 다시 사유하는 것은 영원히 마감되고 "끝난"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스의 "위대한 예술"의 범례들에 대한 질문들이다.

l숭고가 특정한 테크네에 속한 것인가?

(여기서 테크네는 좁은 의미로서의 기술의 의미이며,) 그렇다, 숭고는 테크네의 영역에 속한다. 칸트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천재의 문제가 나오는데 칸트는 천재를 예술에 규범들을 부여하는 재주(자연의 선물)이고 그 자체는 자연에 속한다, 그리고 천재는 정신의 천부적 재능으로, 자연은 그것에 힘입어 예술에 규범들을 부여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롱기누스는 자연의 재주에는 스스로의 규칙(규범)이 있고 체계가 있으며 천재는 자신의 규범들은 오직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인다. 숭고와 관련된 푸시스는 "자율적"인 천재에겐 한계의 설정에 따른 방법론이 요구된다. 그 이유는 자기 스스로에게 내맡겨진 천재 앞에는 지나침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숭고의 예술은 단지 이 범위 내에서만 테크네에 속한다.

l이 사실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일상사에서 제일 큰 재산은 행복을 소유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이다. 여기 행복과 신중함 대신 자연(푸시스)과 기예(테크네)로 바꾼다면 오직 기예만이 문체의 어떤 특질들이 단일한 기초를 지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대목에 전개된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이론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해석들 중의 하나임이 확실하다. 오직 기예만이 자연을 드러낼 수 있다 - 또는 테크네가 없다면 푸시스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질상 푸시스는 스스로를 감추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를 일컫는 재현이라는 용어는 제시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또는 현존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테크네는 지식의 생산이다. 이런 지식은 재현하는 능력인 미메시스의 경로를 거쳐 모습을 드러낸다. 미메시스-재현은 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한 지식의 가능 조건이다.

롱기누스는 이상의 미메톨로지를 바탕으로 숭고의 문제를 취급하려 한다. 천재는 어떻게 이 세상에 오거나 싹 틀 수 있는가? 또 숭고로 이르는 길은 무엇이며 위대함을 향한 도정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근본적 수수께끼는 바로 천재성의 전수, 예술의 역사라는 수수께끼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경쟁심이란 개념을 통해 답을 찾으려 한다. 천재성의 전수와 반복은 신비로운 미메시스적 전염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모방의 모델이 아닌 승계, 전승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사실 천재가 예술에 부여하는 규범은 통상적인 교육법의 전달 경로를 통해서는 전수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1) 그 규범이 어떤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며 2) 천재 자신조차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메시스의 외견상 상호 모순되는 결론. 1) 숭고가 좁은 의미의 테크네에 의해 지배를 받는 만큼 테크네는 푸시스를 원조해야 한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따라서 숭고의 과잉을 조절해야 한다. 2)그와 같은 숭고의 경우, 기예는 지워져야 한다. 테크네는 그것이 푸시스처럼 보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목적을 완수한 것이다. 또 푸시스는 제 안에 테크네를 간직하되 사람들의 시선 앞에 그것을 감출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공한 것이다. 테크네는 성공적으로 완수될수록 성공적으로 감춰진다. 이러한 역설은 "자연스런 예술"과 동일한 영역에 속한다.

과연 테크네는 어떤 방식으로 지워져야 하는가? 롱기누스 "당연히 그것 자체의 빛이다." 곧 푸시스의 알레테이아가 바로 숭고의 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 일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숭고한 빛, 숭고라는 빛이다. "마땅히 그래야만 할 순간에 섬광을 발하는 숭고는 마치 번개와도 같다. 숭고가 거쳐갈 때 모든 것이 흩날려버린다." "아름다운 표현들이란 실상 사유의 빛이다."

창세기 구절중 "빛이 있으라!". 여기서 절대 수행의 말이 지니는 유일한 목적은 "있으라" 이고, 여기서 신은 원칙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것은 나타남, 또는 순수 현현의 언술은 바로 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2) 숭고가 미보다 우월한 이유는 숭고가 우리의 목적기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푸시스에게 인간은 위대함을 향해 운명 지어진 생명체로 간주되며, 존재자의 모든 전체가 목도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롱기누스는 존재자의 전체조차도 인간의 이론이나 사유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들은 때때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들을 넘어서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존재 이유 또한 바로 그렇게 해서 깨달아지곤 하지 않은가.

이렇듯 하이데거는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된 바의 일치라는 근대미학의 전제를 해체함으로써, 숭고를 외부 대상(요컨대 ‘대자연’)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술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무엇으로 변모시킨다. 따라서 숭고는 더 이상 미학을 위협하지 않는다.

롱기누스의 결론- "인간에게 유용하거나 심지어 필수적인 것들은 인간의 영향력 아래 놓이지만, 반면 놀라운 것은 인간에게 언제나 패러독스이다." 다시 옮기자면.. 낯섦-"우리는 베일에 가려 비밀스러운 채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 그를 일컬어 낯섦이라 부른다."

 

6 우리는 존재자체의 낯선 광채라는 것을 도처에서 깨닫게 된다. 에크파네스타톤, 그것은 숭고에 염두를 둔 표현이다. 이것은 벤야민이 쓴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에세이에 생생하게 표현된다. 
 



필립 라쿠-라바르트(1940~2007)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 철학과 교수”가 공식 직함이었던 라쿠-라바르트는 흔히 자크 데리다의 제자로 소개된다. 그러나 그는 데리다의 핵심 개념인 ‘차연’(diffrance)의 논리에 충실하게 스승의 말을 끊임없이 거스르고(differ) 유예시키면서(defer)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쳤다. 그러나 라쿠-라바르트는 독일 낭만주의 연구에서 시작해 라캉과 하이데거를 결합, 데리다의 전매특허인 “해체론”을 정치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를 받는 걸출한 사상가였다. 그의 작업은 「지금우리에게 낭만주의란 무엇인가?」(『세계의 문학』, 106호, 2002),「숭고한 진실“La verite sublime”, 1986」 단 두 개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저서

▶철학의 주체, 도상적 유형학1(79) :문학과 철학의 대립적 관계 안에서 서양사상사의 흐름을 재구성.
▶근대인의 모방, 도상적 유형학2(86) :근대적 미메시스(모방) 개념이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적 효과를 띄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비구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
▶정치성의 허구화(87) :하이데거의 나치참여 이유를 그의 심미적정치학에서 찾고,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성찰.


장-뤽 낭시 (1940- )

일본에는 낭시의 책이 상당수 번역되어 있다. 그 중에는 <주체 뒤에 누가 오는가?>(Who Comes After the Subject?)라는 책도 있다. 이건 낭시가 쓴 것이라기보다는 ≪주체 뒤에 누가 오는가?≫는 장-뤽 낭시가 제기한 물음에 대해 프랑스 사상가들(장 프랑소와 쿠르틴, 에티엔 발리바르, 믹켈 보르흐-야콥센, 알랭 바디우, 모리스 블랑쇼 등)이 답변한 것을 모은 책이다.
http://www.amazon.com/Comes-After-Subject-Eduardo-Cadava/dp/0415903602

그 책의 첫 대목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주체>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철저하게 비판받았다. 그 비판이 일단락된 현재, 도덕이나 이성의 복권을 내건 인간주의적 사상이 발흥하고 있다. 그러나 휴머니즘으로의 회귀는 철학의 망각에 속한다고 낭시는 비판한다. 서양의 주체․인간주의가 포스트모던에 의해 왜 비판되었는가, 그것에 대해 말하자면 푸코가 폭로했듯이 보편적 이상으로 간주되어야 할 인간성을 내건다는 것은 정상적인(이라고 간주된) 인간의 범주에는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소외하며 규탄하는 사태를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적 동질성을 인종차별에 대치시키는 한, 차별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체의 단순한 무화(無化)는 주체의 형이상학의 완성 형태이다. (스스로를 그 자신의 차이의 해소로서, 또는 자신의 아이러니로서 인정하는 자기-현전이다.) 그렇지만 주체의 무화라는 이 니힐리즘에 대해 ‘주체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주체의 장소에 누가 대신 도래하는가를 제시해야만 한다. 즉, ‘주체의 뒤에는 누가 오는가?’를.

여기에서 철학적 주체에 대한 정의를 뒤돌아보자. 철학적 주체란 헤겔의 “자기 속에 자신의 모순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모순이 자기 고유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주체성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외재성, 소원함, 타자)를 목적론적이고 절대적으로 재전유한다. 그 때문에 모든 변증법의 시작에는 주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재, 실존이란 주체가 모든 술어에 선행하는 한에서 주체의 본질이다. 그러나 실존은 본질(결정된 것, 분해불가능한 궁극적 요소)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현실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존하는 ‘실존자’이다. 즉, 인간의 본질인 주체란 지금까지의 철학이 생각해 왔듯이 절대적으로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그 장에서 그 때 그가 대면하는 것과의 관계에서만 본질을 지닐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일관성이라는 정체성/동일성 신화는 붕괴되어 버린다.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게 되는 ‘타자’라고 낭시는 생각한다. 자신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장소에는 사실 아무런 고정적인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바로 이’ 곳에서 어떠한 ‘하나’가 도래한다. ‘하나’는 실체적 통일이 아니다. 자신으로의 도래 속에서 하나이자 유일할 수 있으나 ‘그것’ 자체에 있어서는 다수이며 반복되는 것이다. 현전이란 자기에게 무제한적으로 도래하며 도착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 결코 자기 자신의 주체가 아닌 ‘주체’이다. 이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해 종래의 형이상학은 자기에게 도래하지 않는 타자를 항상 자신의 내부에 변증법적으로 편입하고 지배하려고 해 왔다. 이것은 자신이 모든 것에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오해 때문이다. 자기는 타자와의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장-뤽 낭시는 주로 독일철학, 예를 들어 독일낭만주의,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자신의 사유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이후에 가능한 공동체주의(communisme, 이 역어를 '공산주의' 대신에 택했다)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낭시는 또한 그 보다 한 세대 전 사상가,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를 이어가면서 '무엇'의 동일성의 지배에 저항하는 일종의 유한성의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있다(그러한 정치철학은 바타이유, 블랑쇼, 낭시의 사상을 바탕으로 현재 프랑스에서『선線Lignes』이라는 잡지의 정치적 입장의 배경이 된다).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등과 함께 가장 주목받고있는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 한사람이다. 이 사실을 낭시의 또 다른 측근, 데리다는 2000년『접촉, 장뤽 낭시』를 상자해 확인시켰다. 흔히 낭시를―라쿠라바르트도 마찬가지이지만―데리다의 후계자, 또는 제자로 여기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해라고 말할 수 있다. 낭시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소통, 공동체, 접촉등의 정치적 주제들을 독자적(독창적)인 관점에서 전개해 나아갔다. 낭시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대학 철학과에서 오랜 동안 교수생활을 하다 얼마 전 은퇴했다. 중요 저서로는, 바타이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의 지배 바깥의 공동체, 조직·기관·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무위無爲의 공동체La Communaute desoeuvree』, 실존이 어떻게 타인과 함께 하는 실존, 공-실존co-existence인가를 밝힌『복수적 단수의 존재L'Etre singulier pluriel』, 개념·명제 너머의 의미, 개념·명제의 성립조건으로서의 의미, '의미의 의미'에 대한 정식화,『세계의 의미Le Sens du monde』, 현전presence에 대한 새로운 해석,『사유의 무게Le poids d'une pensee』등이 있다. 낭시의 사상은, 그의 저서들의 번역과 더불어,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상태에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거의 소개 되어있지 않고, 단 한 권의 번역서도 찾을 수 없다. 블랑쇼는 그의『무위의 공동체』에서 영감을 얻어, 저자는 다르지만, 그 책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e inavouable』라는 책을 썼다. 낭시는 2001년에 블랑쇼의『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마주한 공동체La Communaute affrontee』라는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 책이『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번역에 함께 묶여 우리나라에 소개될 것 같다(모리스 블랑쇼,『밝힐 수 없는 공동체』/장-뤽 낭시,『마주한 공동체』, 이학사). (박준상)

[출처] 장-뤽 낭시(1940-).|작성자 지니


(2008 08/05 뉴스메이커 786호)

[독서일기](73) 우리 평범한 삶, 그 어디에도 숭고는 없다

숭고에 대하여_ 장-뤽 낭시 외,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2005

우리는 숭고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높이에 대한 꿈은 사라진 지 오래고, 우리는 끝없이 실패하며 지리멸렬한 일상의 밑바닥에서 어기적거리며 살아간다. 잡담과 업무 사이에, 밥 먹는 일과 거기에 쓴 그릇들을 씻는 일 사이에, 계약과 계약 사이에 어떤 숭고도 깃들 여지가 없다. 잘 다림질한 바지를 망가뜨리는 저 지하철 출근길에, 허망한 소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치르는 예식장의 판박이 결혼식과 진부한 장례식에, 돌연한 병사(病死) 혹은 노화의 결과인 자연사, 저 아파트에서 이루어지는 장삼이사의 평범한 삶 그 어디에도 숭고는 없다.

늘 지체되는 약속, 치솟는 세금과 물가, 불공정한 경쟁, 사소한 다툼, 어이 없는 배신, 타인의 무신경함, 터무니없는 험담과 비난, 오해, 과민반응, 짜증과 신경질…. 내가 이런 것들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사는 게 진절머리가 날 때, 나는 비 오는 날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린다. 비와 땀방울에 젖은 머리칼들이 이마에 달라붙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며 마침내 심장이 파열하기 직전까지. 나는 달리고 또 달린다. 때로는 비틀스의 노래를 듣는다. 내겐 언젠가 외국 여행 중에 발견하고 사들인 비틀스의 전곡을 담은 열한 장의 시디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며 비틀스의 노래를 들을 때면 나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며 화가 가라앉고 봉두난발로 허공을 떠다니는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린다. 나는 벤야민을 사랑한다. 그래서 벤야민의 책을 읽는다. 하루 종일 차를 잔뜩 끓여놓고 그것을 천천히 마시며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으며 아주 신중하게 마음이 행복해질 때까지 자제한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월화수목금토, 오감의 즐거움과 상관없이 배 고파서 먹는 끼니, 보람 없이 의무로만 채워지는 수고, 봉급이 나오는 날짜만 꼽아가며 출근하는 직장, 해마다 나이를 하나씩 더 먹는 것… 이것들에는 범속함의 지루함에 대한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묵묵히 치러야 하는 할당된 책임,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지나야 끝나는 견딤만 있을 뿐이다. 미지근한 맥주 몇 병, 혹은 소주 몇 병과 입에 집어넣는 죽은 동물의 근육 몇 점, 노래방에서 악쓰며 부르는 유행가 몇 곡, 그리고 피로에 절어 기절한 듯 자는 잠이 고작해야 그 책임과 견딤에서 풀려난 우리가 받는 보상이다. 거기 어디에도 숭고는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숭고는 솟구침이며 황홀경, 진실의 위대한 측면이며 미적 고양(高揚)이다. 시, 바흐의 음악, 모네가 그린 수련, 눈이 번쩍 뜨이는 승경(勝景), 이타적 희생, 임종하는 이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마지막 말들 속에 찰나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고 여겨지는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그렇다면 숭고는 어디에 있는가? 숭고는 감성과 오성, 혹은 미(美)와 진리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도덕에서 숭고는 희생과 포기에서 생기는 잉여들, 즉 능동적 가난과 가난이 표상하는 금욕주의에서 발견되는 그 무엇이다. 예술에서 숭고는 미적 실재로 현현된 것, 그 너머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자유의 고양, 감각적 직관을 꿰뚫으며 일어나는 윤리적 황홀경 따위다. 대개의 예술은 사용, 이득, 수익, 손실과 무관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기쁨이며 보상이다. 얀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볼 때 나는 숭고의 한 측면을 감지한다. 푸른 두건을 쓴 소녀의 순진무구한 표정 속에서 크게 뜬 눈동자는 그 아래 짙은 명암 속에서 빛나는 진주 귀고리와 같이 빛난다. 그 습기를 머금은 채 말갛게 빛나는 눈빛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현실 저 너머의 어떤 세계를 암시한다. 뛰어난 예술은 가능성의 극한에 가 닿지만 그것은 가냘프고 찰나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나는 내 그림이 그것들의 외관이 아니라 그 아래에, 저 스스로의 난폭함과 항구적인 힘 겨루기 밑에 있다는 것을 안다. 선(善)이나 숭고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취약하다.”(니콜라 드 스탈) 장-뤽 낭시는 숭고를 문제삼을 때 그것은 ‘제시의 문제’라고 말한다. 제시의 다양한 양태, 이를테면 언술·출현·봉헌·진실·경계·소통·감정·세계·벼락 등은 하나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숭고는 자주 미학의 차원에서 다루어지지만, 미학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예술 속에서 예술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언제나 한계의 예술이니만큼, 예술의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장-뤽 낭시) 예술은 그 한계에 닿을 때 봉헌의 제스처를 취한다. 봉헌에는 순진성과 단순성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감정들의 생동감은 나타나지만 요란한 과도성 혹은 숭고한 열광은 없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숭고와 같이 드높거나 깊디 깊은 곳에 깃들지 않는다.” 그 표면은 그저 과잉이 없는 평온을 지향할 따름이다. 장-뤽 낭시는 숭고가 예술에 대한 사유의 가장 고유한 영역이 될 수 있는 계기를 칸트에서 찾는다. 낭시는 “예술에 대한 사유의 핵은 숭고이며, 미는 단지 그것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 미와 따로 존재하는 숭고란 없다. 왜냐하면 “숭고, 그것은 그를 통해 미가 우리를 건드리는 계기지 미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숭고는 작품과 접촉함으로써 존재하지 그 형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접촉은 작품의 바깥, 작품의 경계선에서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접촉은 예술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예술이 없다면 그 접촉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예술이 드러나고, 예술이 주어진다. 이 사실이 바로 숭고다.”

왜 숭고를 문제삼는가. 미학이 숭고를 문제삼는 것은 미학의 월경(越境)이며 진화의 증거다. 프랑스의 68세대 철학자들이 싹을 틔우고 푸코, 리오타르, 라캉, 들뢰즈, 레비나스 들에 의해 그 논의가 확장된 숭고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구조주의 사유의 압력 아래에 있던 68세대 철학자들이 그 전 세대가 제시한 사유의 틀을 깨고자 하는 욕망이 숭고로 이끈 촉매제가 되었다. 전 세대가 제시한 낡은 틀이 아니라 저희들이 만든 새로운 사유의 틀로 자신의 세대를 규정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숭고를 사유의 영역 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틀을 깨고자 하는 것, 경계 바깥으로 튕겨 나가려 함은 다시 그 틀과 경계에 대한 사유로 재귀하도록 이끈다. “숭고에 대한 사유에 의하면, 윤곽이나 틀, 자취는 그것들 자신으로 귀착한다. 그것들은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 제시 자체의 중지, 다시 말해 윤곽과 틀, 자취들이다.”(장-뤽 낭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숭고에 대한 사유는 경계의 미학 혹은 미학의 경계에 대한 사유로 귀착한다. 다시 한 번 묻자. 숭고란 무엇인가? “찰나적으로 획득한 불멸성의 지점,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항하여 죽음으로부터 낚아챈 말은 숭고하다. 그 안에서 생성-소멸의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그 지점은 죽음의 곡선에 속하되 그와 동시에 그 곡선을 거슬러오르고, 곡선과 접촉하는 순간 역력한 방향의 전환을 일으키며 위로 솟아오르는 첨점이자 육체와 영혼이 합쳐진 채로 정지하는 절정이다. 또한 불안정한 산꼭대기에서 최대한 높이 뛰어내리는 순간에 그런 것처럼, 극미한 무중력의 유토피아다.”(미셸 드기) 숭고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과 세계의 접점, 안과 바깥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숭고는 예술과 자연의 결합 안에서 파생하고 그 파생하는 힘으로 끝없이 움직여 나간다. 숭고는 틀과 경계 안에 가둬놓을 수 없는, 넘치고 흘러나가는, 유동하는 움직임 속에서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장석주>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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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연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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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앙토넹 아르토 (현대미학사,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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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연극과 문화
2. 연극과 페스트
3. 연출과 형이상학

4. 연금술적 연극
5. 발리 연극에 관해서
6. 동양 연극과 서양연극
7. 걸작품과 결별하기
8. 연극과 잔혹성
9. 잔혹연극-첫번째 선언문
10. 잔혹성에 관한 편지들
11. 언어에 관한 편지들
12. 잔혼연극- 두번째 선언문
13. 감성운동
14. 두 개의 노트들



Ⅰ. 서문 - 연극과 문화

문명의 발생과 동시에 문화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체제와 제도아래 자리 잡았다. 지금의 문화는 현재의 붕괴된 체제아래의 죽은 형태의 *이념으로만 남아 인간과 단절되어 있다. 문명인은 행위에서 생각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조리한 상태로 삶에의 정열과 항구적 마술성이 결여되어 있다. 신성으로 남아야할 삶의 이념은 무기력 속에 그 생명을 잃었고 우리는 습관처럼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의 역할을 한정짓는다.

문화는 삶이 분리되어있거나 혹은 진정한 문화가 삶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에 하나의 세련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반면 정신투사에만 목표를 둔 서구적 예술이념은 진정한 문화의 상실을 조장하고 열광에 참여하는 힘을 약화시켰다. 조직화된 문명아래의 예술과 문화의 보편화, 규칙 등은 이념의 생명력 박물관에 잠들게 했다.

진정한 문화는 열광과 힘에 의해 움직이는 문화이고 그 열광에 참여하는 것이 예술의 이상이다. 또 진정한 문화는 그것을 이중으로 겹쳐놓은 것과 같은 *그림자(힘)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연극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연극은 모든 언어, 모든 예술 가운데 예술의 한계를 파괴시키는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르이다. 연극은 스스로 움직이고 살아있는 매개물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삶을 뒤흔드는 그림자들을 열광시키는 작용을 끊임없이 지속한다. 배우는 형태들을 난폭하게하고 그것을 파괴시켜 사라짐과 동시에 새로이 탄생되는 형태들과 그대로 존속하는 형태들을 합류시킨다.

연극은 영혼이 스스로의 표현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어떤 정확한 상태로 나아간다. 이것은 인간의 습관화된 한계들, 인간적 능력의 한계들을 뛰어넘도록 이끌며, 소위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의 경계를 넘어 무한대로 발전하게 만든다.

우리는 연극에 의해 새로워진 삶의 의미를 믿어야한다. 그러면 어떤 두려움도 없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로 되돌아갈 수 있다. 또 삶이란 우리의 눈을 통해 인지되는 삶이 아니라 형태를 벗어나 일종의 파괴하기 쉬우면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불씨라는 사실을 간파해야한다. (*그림자 = 힘, 상징 *이념 = 철학, 신념, 사상)

 

Ⅱ. 연극과 페스트

페스트는 바이러스에 반복적으로 생기를 주는 것같이 독자적으로 온전히 민감하게 동일한 재해들을 유발시킬 수 있었다. 의학이나 역사를 무시한 채 일종의 정신적 실체인 듯한 페스트의 이념,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 옮겨질 수 없는 페스트의 이념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그 형태(증상)를 통해 정신은 몇몇 현상으로 묘사할 수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은 온몸이 마치 산송장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페스트는 오직 뇌와 폐만을 감염시키고 손상시킨다. 이것은 사람의 의식과 의지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데 광기에 따른 기분이나 신체내의 작용들을 통제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정확히 상술 할 수는 없지만 정신적 외양의 도출로 이상함, 신비함, 모순성, 특징들을 통해 생명과 조직을 잔혹하게 파괴하는 페스트는 고통과 같다. 그 고통은 마치 모든 감수성의 고리들 속에서 강렬하게 증대하며, 깊숙이 침투할 뿐만 아니라 통증을 다양하게 전파하고 확대시킨다. 그러나 쥐도 세균도 없이 그리고 그것들과 접촉하는 일도 없이 페스트가 확산되어 가는듯한 정신적 해방, 즉 이러한 정신적 자유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스팩터클 속에서 절대적이고 엄청난 유희를 창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환경과 도시를 파괴하고 집단으로 도피를 유도하며,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힘의 절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다 그것은 정신을 해방시켜 병이 악화됨을 느끼면서 오히려 죽음이 오는 것을 맞이하게 한다. 그들이 해대는 불평은 무가치하며, 문이 열린 집을 향해 탐욕스런 빈민들마저 그것의 무용함을 안다. 연극, 그것은 바로 현실에 아무런 이득을 주는 일 없이 무용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의 즉각적인 무상성(無償性)인 것이다.

(페스트의 최후 생존자들은 극도의 흥분상태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한다. 상벌이 부재하다거나 죽음이 다가온다는 생각도 사람들의 이런 부조리한 행위의 동기가 되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죽음이 모든 것을 다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도망가기는커녕 그 자리에 남아서 죽어가는 가고 시체더미에서 욕정을 드러내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손상 없이 죽어가는 페스트 환자의 상태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으면서 그 느낌들이 바닥까지 탐사되고 또 상반된 감정으로 전환되는 배우의 상태와 일치한다. 페스트의 이미지들은 마치 탈진 상태에 빠진 정신의 힘이 최종적으로 발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스트처럼 연극에서도 시적 이미지들은 현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감각적인 것 속에서 자기의 행정을 시작하는 하나의 정신력이 된다.

(살인자의 격분과 비교해보면, 비극적인 배우의 분노는 닫혀진 어떤 곳에 순수하게 남지만 살인자의 격분은 행위를 완수함과 동시에 그에게 영감을 주는 힘과의 만남을 상실한 채 퇴색되고 아무런 힘이 공급되지 않는다. 반면 배우의 격분은 발산됨에 따라 부인될 것이며, 나아가 보편적 행동 속으로 용해된다.)

페스트는 잠자고 있는 이미지들과 잠재적인 무질서 상태를 취하고 있으며, 불현듯 가장 극단적인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그 이미지들을 밀고 간다. 연극은 페스트처럼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의 잠재성과 물질화된 성질 속에 존재하는 것 사이의 연결을 재구성한다. 연극은 페스트처럼 정신을 갈등의 근원으로 이끌고 가는 힘들의 거대한 부름이다. 연극과 페스트의 본질적 유사성은 전염성보다는 잠재적 잔혹성을 밑바닥에서 밖으로 밀어내고 폭로하며 주창하는 것이다.

연극은 갈등을 고발하고 갈등의 힘을 밝혀준다. 우리에게 제공된 삶은 결코 열광적인 주제들을 제안하지 않지만 연극의 집단성에 의해서 그 거대한 암종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연극은 페스트처럼 복수에 불타는 재앙의 방식이나 구원을 위한 전염병으로 만들어져야한다. 페스트는 완전한 공황이며 그것이 휩쓸고 지나가면 죽음이나 정대적인 정화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연극도 이처럼 파괴 없이는 획득되지 않는 최상의 균형이다. 정신의 활력을 자극하는 마술적 환각은 인간 스스로에게 가면을 벗겨주어 거짓과 비열함과 저속함과 위선을 드러나게 한다. 이러한 자발적 고발은 어둠을 들춰내서 사회로 하여금 영웅적이면서도 우월한 태도를 취하도록 한다. 연극은 우리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도그마들로부터 우리에게 본능적이고 마술적인 것과 동등한 모든 가치들을 되돌려줄 것이다.

 

Ⅲ. 연출과 형이상학

<로트의 그 딸들>의 그림에서 직접적으로 보여 지는 이념은 성욕과 생식에 관한 이념이다. 그 밖의 다른 이념들은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은 생성의 이념, 숙명의 이념, ‘카오스’에 관한 이념, ‘경이로움’과 ‘균형’에 관한 이념이 있다. 그리고 말의 무력함에 관한 이념이 있다.

이처럼 말이나 단어의 분절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이 연극에도 필요하다. 서양 연극에서 대화(일종의 책)로만 이루어진 무대는 진정한 것이 아니다. 무대는 물질적인 장소이다. 그리고 감각의 시는 물질적 언어로 무대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한다. 물질적 언어는 무대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데 가령 음악이나 춤, 도형, 판토마임, 무언의 몸짓, 제스처, 억양, 건축, 조명, 무대장치 등 이다. 이런 물질적 언어는 공각적인 시의 형태가 되어 이념과 정신의 태도들, 자연의 양상들을 표현한다. 배우도 포함된다.

하지만 파롤의 지배 하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연극은 물질적 언어들을 무시한다. (나는) 이런 텍스트에 의존한 연극을 ‘기술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런 기호들은 우리가 ‘연출’이나 ‘실현’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다. 하지만 이런 연출에 의한 고정된 목표를 지향하는 서양의 연극보다는 연극언어가 무대를 출발해서 무대에서 자발적으로 창조의 효력을 이끌어내고 파롤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무대와 만나는 것이 더 연극적인 것이 된다.

오늘날의 연극은 사회, 도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그저 등장인물들의 심리생태만을 보여준다. 이런 고정관념은 있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덧없고 물질적인 인간의 악취만을 풍기고 있다. 연극은 ‘위험’과 단절되어 파괴적인 효력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모든 시의 기초를 이루는 심오한 무질서의 정신과 단절된 것이다.

우리는 인습에 의해 사물을 인지한다. 그리고 사물이 내재하는 모든 관계들이나 형태와 그 의미에 새로운 이의를 제기하는 시에 대해 무질서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형태를 전복시키는 일, 그리고 의미들을 이동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연출과 관련 있는 공간에서 이러한 유머 있는 시의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의 실현은 극단적인 시적 결과들을 도출해 낼 때, 그 실현 가능성들과 뒤섞일 수 있다. 연극의 실현 가능성은 전적으로 운동과 공간의 언어로 간주되는 연출의 몫이고 이것은 형이상학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연극이 지니고 있는 모든 표현 수단들을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절언어를 형이상학으로 만드는 일. 즉 언어를 예외적인 방법, 습관적이지 않은 방법, 새로운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언어를 ‘주술’의 형태로 고찰하는 것이다. 통상적인 표현으로 ‘종교적’이거나 ‘신비적’이라는 말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단순히 언어를 갖다 부쳐 사용만 할 줄 아는 우리의 무지를 비판한다. 또한 종합하고 유추하는 정신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무지를 비판한다.

모든 가능한 차원 위에서 제스처와 역양, 조화의 사용에 관한 비밀들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해온 동양의 연극은 정신을 지배하는 물리적 효능이 존재한다. 우리는 문명이 만들어낸 사물의 한정적 언어들을 혼신을 다해 지속적으로 파괴해야하며 사고의 자유로운 실천을 누려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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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탄생다빈치에서파인먼까지창조성을빛낸사람들의13가지생각도?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에코의서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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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다시 생각하기
상상력을 학습하는 13가지 생각도구
생각도구 1 - 관찰
생각도구 2 - 형상화
생각도구 3 - 추상화
생각도구 4 - 패턴인식
생각도구 5 - 패턴형성
생각도구 6 - 유추
생각도구 7 - 몸으로 생각하기
생각도구 8 - 감정이입
생각도구 9 - 차원적 사고
생각도구 10 - 모형 만들기
생각도구 11 - 놀이
생각도구 12 - 변형
생각도구 13 - 통합
전인을 길러내는 통합교육



생각의 도구 11. 놀이

⊙ 놀이는 다른 통합적인 생각도구로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역할연기와 모형만들기 등의 생각도구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놀이는 작업에 즐거움을 불어넣어주며 관습적인 절차나 목표, 게임의 법칙 등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무슨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기존 과학과 예술, 기술의 한계에 장난스럽게 도전한다는 것은 기발한 생각들이 탄생하는 가장 흔한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 페니실린을 발견한 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에게 연구는 놀이와 같았다. 온갖 스포츠와 게임을 즐긴 그는 통상적인 규칙을 적용하지 않고 게임을 어렵게 하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더 쾌감을 느꼈다. 그는 미생물과 놀면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밌는 것을 항상 기대했던것 같다. 그는 박테리아를 착색시켜 그림을 놀이를 하다가 녹색곰팡이에서 최초 항생물질인 페니실린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연구(놀이)가 목적보다 그자체를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그의 친구가 접시를 돌리는 것을 보고 그 움직임에 대한 방정식을 만들어보고는 그러고 나서 상대성이론, 전기역학, 양자 전기역학에 파고들어 결국 전자궤도의 움직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놀이는 다양한 정신적 기술을 몇가지 방법으로 강화시킨다. 1. 실습놀이는 실습을 통해 기술을 향상시켜 모든 생각도구를 연마하고 발달시킨다. 2. 상징놀이는 어떤 한 가지의 다른 것을 의미하는 가상의 세계에 호소함으로써 유추, 모형만들기, 연기, 감정이입 같은 생각들을 키워낸다. 3. 게임놀이는 어떤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규칙을 만들거나 그 규칙을 파괴하도록 가르킨다. 
- '놀이감각’이란 발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자세제어를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자이로컴퍼스와 자이로스테빌라이저를 발명한 엘머 스페리, 에디슨 이후 가장 많은 발명을 한 장난감 발명가 제롬 메멀슨, 서커스에 영감을 받고 움직이는 조각미술에 있어 선구자라고 불리는 알렉산더 콜더.. 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중에 발명이 가능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콜더는 무엇이건간에 그것을 가지고 작품을 구성했다. 서커스에 매혹되고 나서는 직접 모형을 만들면서 물체가 움직이는 방식을 고찰하는 등 그의 머릿속의 자유로운 연상인 놀이를 현실화 시켰다. 콜더의 동역학의 원리들은 조각미술에 있어 혁명을 일으켰는데 케네스 스넬슨의 텐스그리티 개념이 그것이다. 동화 작가 루이스 캐럴(찰스 도지슨)은 논리적인 개념을 가지고 '놀았던'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그의 논리적 게임이 서사적 스토리에 게임같이 소통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의미없는 단어에 논리적인 설명붙이기. 한달 중의 날짜를 알리는 시계등. 펜로즈 부자는 에셔의 영향을 받고 '불가능한 삼각형'과 '불가능한 계단'의 도안을 만들고 비반복적 타일붙이기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 창조적인 놀이는 놀이에서 끝나지 않고 실용적인 분야에 응용된다. 캐럴의 논리적 난제는 ‘이성의 한계’를 알아내려는 작업에 유용하다. 에셔의 ‘불가능’ 시리즈 중 많은 것들이 인지심리학자들의 주된 사용재료가 되었다. 찰스 아이브스는 자연의 소리를 재현하며 놀았고 소리가 나는 모든 물건을 악기로 삼았다. 그는 코드 대신 미분음이나 음 다발을 가지고 놀았다. 그는 타음악에 기반을 두고 작곡하는 ‘음악적 자연주의’를 선사하며 현대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젓가락행진곡은 대표적인 음표의 패턴놀이. 애너그램anagram은 단어 철자의 순서를 바꾸거나 회전을 시켜 다른 만드는 단어놀이.
- 거의 모든 지적오락은 여러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지식, 개념을 발달시킨다. 단어게임에 관한 지식은 음악과 결정학에 응용될 수 있고, 카드게임은 통계학과 진화론에, 시각게임은 건축과 심리학, 그리고 생화학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한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을 할 만큼 충분히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놀기’자체가 점점 사라지면서 노는 기술마저 실종되고 있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지 간에 우리는 표준적인 행동과 사고와 지각의 습성을 깨드려야 한다. 필로볼러스 무용단은 연습중 내리는 빗속에서 진흙탕에 뛰어들어 어린아이처럼 뛰어놀았는데 거기서 새로운 안무를 창작해 낼 수 있었다. 놀이는 상징화 되기 이전의 내면적이고 본능적인 느낌과 정서, 직관, 쾌락을 선사하는데,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창조적인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창안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 새로운 과학과 예술이 가능해진다.


생각의 도구 12- 변형

⊙ 변형은 하나의 생각도구와 다른 생각도구 사이, 그리고 생각의 도구들과 공식적인 의사전달 언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과정으로 다른 생각도구들을 한데 엮어서 하나로 기능하는 전체로 만들고 각각의 기술을 다른 기술들과 상호접합시킨다.
-선사시대 동식물의 특성파악을 목적으로 탄자니아의 라에콜리사막에 탐사를 떠난 메리 리키와 동료 학자들은 휴식을 취하며 노는중에 원인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선명한 발자국은 인류의 원인이 직집보행했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탐사팀은 탐사방향을 바꿔 동물과 원인의 흔적의 발굴잡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움직이는 3차원적 몸의 2차원적, 정적, 추상적 투영에 불과한 굉장히 난해한 것이었다. 그들은 발자국의 주인공들의 당시 상황을 추측해본다. 발의 크기로 봐서 어른과 아이의 두 원인이 화산이 폭발하는 시점에 진흙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고 화산재가 발자국을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의 크기가 30cm나 하는것은 원인이라고 하기에 비상식적인 크기였고 탐사팀도 이해할수 없었다. 그것은 침팬치의 '대장따라가기'놀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그곳에는 세명의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놀았고, 관찰했고, 패턴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패턴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 차원적 사고를 했으며, 몸의 움직임을 상상했고, 역할을 연기했고, 패턴을 만들고, 유추하고, 모형을 만들었다. 이런 상상력 넘치는 통찰들은 사진과 그림, 모형, 단어, 재연 등으로 변환되어 머릿속의 생각을 검증하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현실세계에서의 창조작업은 문제를 규정할때, 조사할때, 해답을 표현할 때 각각 적합한 생각도구들을 동원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변형적 사고는 모든 분야의 창조적 작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1948년 초고속 사진촬영용 스트로브(플레쉬)를 발명한 해럴드 애드거튼, 조각가 클래스 올덴버그와 작가 쿠시에 반 브뤼겐의 공동조각물 작업이 그것이다.
- 창조적인 사람들은 복잡한 사고의 변형과정을 쉽게 다룬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억법>은 어떤 추상적인 것에 ’몸’을 입힘으로써 구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먹쥔 손 마디의 높낮이로 달의 날 수를 알 수 있다. 인도에서는 음악과 시문을 배우는 학생들이 기초적인 소리 리틈패턴을 익히고 배우기 위해 암기하는 말도 안되는 이상한 단어yaMATARAjaBHAnasalagam가 있다. 이것의 기본적인 패턴을 디지털(0111010001)과 같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것은 십진 기수법상의 등가치로 변환할 수도 있다. 스타인은 이 수의 연속에서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 같은 운동 감각적인 유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특히 수학자들에게 ‘기억의 바퀴’로 알려져 온 것과 같은 패턴을 띠고 2/3/4의 조 엮음에서 나타날수 있는 경우의 수를 가장 축약된 형태로 저장하고 있다고 한다. 
- 변형적사고는 학문분야 간의 경계를 허무는데, 이 사고체계 안에서는 수학과 미술 사이 구분도 흐릿해진다. 수학은 물체와 물체, 군집과 군집, 움직임과 움직임 간의 관계에 대한 과학이고 이 관계들을 포착해서 형태를 부여하는 이런 변형작업은 막스빌의 ‘변형’작품, 나움가보의 ‘우주건축’등이 있다. 변형의 상호작용은 언어로 표현한 문제가 방정식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한다. 어떤 분야의 자료가 그래프나 다른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는 등의 변형작업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파인먼은 조금더 성공적인 작업으로, 자신이 지각하는 육체적 감각과 물리적 세계의 개념을 서로 결부 시키는 작업을 했다. 그는 사람들의 소변샘플을 받아서 여러각도로 분석해서 소리합성장치가 판독할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켜 악보를 만들기도 했다. 변형은 한가지 생각이나 자료를 다르게 변형시킴으로써 다른 특성과 용도를 얻게 하고 그 작업이 독특할수록 놀라운 통할을 얻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무용에서 무보법과 전자의 움직임을 표현한 ‘전류’. 파울클레는 음악을 이미지로 변형시켰다. 그는 바흐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사람들이 시각적 형태로도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지각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음표를 변형시키고 거듭 추상화작업을 거쳐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 냈다.
-변형적 사고는 문제들을 생각하는데 있어 하나의 해답이 아닌 ‘해답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삶에서 지속적으로 실습과정을 거쳐 오감을 사용해 언어와 형태들을 추상적이고 다차원적으로 변형할수 있어야 한다. 이 실습의 목적은 행위 자체와 상상력 풍부한 사고와의 유사성을 파악하는데 있다. 우리가 생각에서 일어나는 변형을 의식한다는 것은 사고과정으로서의 ‘창조적 상상’에 제대로 개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생각의 도구 13- 통합

⊙ 끝으로 가장 중요한 통합은 지금까지 설명한 생각 도구들의 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항상 통합적이며 많은 경험의 방식들을 결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통합은 공감각synethesia과 지식의 통합을 말하며 통합된 지식 안에서는 관찰, 형상화, 감정이입과 기타 생각도구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한다. 이 작용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며 기억, 지식, 상상, 느낌 등 모든 것들이 따로따로가 아닌 전체로, 그리고 몸을 통해서 이해된다. 이 단계에서 토크를 숫자로 표시하는 방정식이 실제로 문을 열 때 손에서 느껴지는 회전력으로 직접 다가온다. 우리는 이것을 몸과 마음, 감각과 분별력을 이어주는 '통합적 이해unified understanding', 혹은 종합지synosi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생각도구를 가르치는 일의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다. 
- 과학자들이나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은 제어할 수 없는 감각의 교차, 통합 현상을 경험했다. 응용수학자인 제임스 라이트힐이 수영을 하면서 유체, 바다에서의 육체적인 경험과 감각적인 관찰, 다른 해양동물과 나누었던 교감들은 나보코프가 말한 '우주적 동시성'속으로 융합되어 들어갔던 것과 같다. 리처드 파인만은 방정식을 볼 때 글자들이 색깔 있는 것으로 보이고 분자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프는 특정 단어들에 대해 시각과 소리, 운동이 합쳐진 반응이 생겨난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칸딘스키는 색채로 소리와 운동감각적 느낌, 숱하게 이입되는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조지아 오키프는 색의 맛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메이 사턴은 자신이 쓴 시와 소설에 맞는 '음조key'를 찾고 있고, 극작가 해럴드 핀터는 글을 쓰면서 계속 음악을 느낀다고 한다. 수학자 필립 데이비스와 로이벤 허시는 심지어 한 방정식에 딸려나온 '음악의 주제'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음악을 들을 때마다 색을 지각한다고 한다. 리처드 사이토윅은 친구가 닭고기 음식을 먹고는 "뾰족한 맛이 없네'라는 말을 듣고나서 사이토윅이 감각융합현상을 연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감각융합 현상들은 공감각의 형태를 띤다.
- 사이토윅 등 많은 신경학자들은 이렇게 비자발적이고 항상 일어나는 감각융합이 '진정한 공감각'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신경의학적 질환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것은 유전처럼 보이며 10명중 1명 꼴도 안되는 사람만이 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 의식에 의한 감각의 융합현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며 이것은 특정한 경험으로 공감각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이 현상은 성인인구의 5~15%밖에 일어나지 않는것으로 기초교육이 단일 감각적인 경험과 표현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어린시절의 자연스러운 연상능력이 위축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생각하기’ 가 본질적으로 공감각적이라면, 연습을 통해 연상적인 공감각 능력을 유지. 발전 시키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오딘은 “감각들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색, 소리, 맛, 향, 감촉, 온도감각 등 모든 감각들이 섞이면서 느낌의 연속체로 융합된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 체험이 공감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에 비로소 진정 자신을 잊고 그것(체험)과 일체가 된다. 통합은 우리가 한가지의 지각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의 경험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와 같으며,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능동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헬렌켈러같은 청각장애인도 듣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수 있다.
-‘사과’를 연상할 때 우리는 마음으로 사과에 대해 여러 각도로 생각한다. 이때 우리는 모든 감각이 스스로 지각작용을 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두뇌가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마음과 협력한다.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다. 감각과 감성은 분리될 수 없다. 이처럼 생각이라는 것은 감각과 지식 사이에 만들어지는 결합에 의존하며 모든 창조적인 작업은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 지금까지 말한 감각과 분별력의 총체적 통합을 종합지synosia라고 부르기로한다. 종합지란 공감각의 지적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감각이 미적 감수성의 가장 고급한 형태라면 종합지는 궁극적인 이해의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앎과 느낌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통합한 것을 말한다. 동물학자 데스몬드 모리스는 동물을 연구할 때 동물이 된다. 그런 그만의 가상세계는 실제의 몇 가지 표본만을 놓고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고 다각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했다. 그 스스로를 생체표본이라고 말한 그는 상상의 신체기관을 가지고 일종의 ‘사고실험’을 하며 현실세계와 대조했다. 이처럼 “상상하면서 분석하고, 화가이면서 동시에 과학자가 되는것” 이것이 바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종합지 적인 사고의 모습인 것이다.
- 예술, 과학에 최고의 성과를 발전시킨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인간이 통합에 이르어야만 완전해진다고 믿었다. 리처드 파인먼은 세계를 전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시인들을 힐난하기도 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런 통합정신을 가지고 지성과 육체와 정신을 연마하는 것이 진정한 학습이라고 말했다.
현대생활과 교육에 남겨진 과제는 시와 물리학, 미술과 화학, 음악과 생물학, 무용과 사회학, 그리고 기타 가능한 모든 미학적 지식과 분석적 지식을 재통합해서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느끼고자 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과학자라면 세계에 관해 단지 생각만 하지 않고, 뛰어난 화가라면 세계를 단지 느끼기만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알고자 해야한다. 이와 같은 능동적인 이해는 창조의 중심에 있다. 예술과 과학과 기술간의 연계성이 강력한 문명화시대. 20세기를 이룩한 진보를 이해하려면 생각생각도구들을 엮어서 사고의 연쇄사슬을 형성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에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만이 다음 단계의 통합을 꿈꿀 수 있다. 더욱이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만능)’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이것은 당위이며 필수다.


⊙ 전인을 길러내는 통합교육
우리는 상상력이 생각도구의 숙달과 종합지적인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길러지고 연마될 수 있음을 알았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교실에서 사용되며 종합지적인 교육인 통합교육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합교육은 단지 가르치는 방법의 변화를 말하며, 거기에는 염두에 두어야 할 여덟가지 기본 목표가 있다.
- 1.학생들의 지식획득 이외의 보편적인 창조의 과정을 가르치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2.이러한 창조과정에 필요한 직관적이고 상상적인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3.예술과목과 과학과목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 다학문적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 4.혁신을 위해 공통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교과목을 통합해야한다. 5.한 과목에서 배운 것을 여러분야에 응용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6.과목간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허문 사람들의 경험을 창조성의 본보기로 활용해야한다. 7.정신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시키지 위해 모든 과목에서 해당 개념들을 여러 형태로 발표하는 법을 가르쳐야한다.  8.개척자적인 교육방법을 만들어 내야한다.
-구름상자를 만든 찰스 토머슨R.윌슨, 시를 사랑했지만 수학자가되어 러시아 여성최조로 대학교수가 된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기하학을 사랑했지만 곤충학자가된 앙리 파브리.. 이들은 전문가가 아니라 '전인全人'이었다.그들은 자신들의 방대한 관심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의 분야에 공헌 할 수 있었다.  우리가 통합교육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앞으로 의지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그들 같은 박식가이다. 그들은 중요한 단계에서 지식활동을 제어할 줄 알고 지식들 간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인지할 수 잇는 사람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베르살리우스,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은 누구도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보유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모든것을 포괄 할 수 있었다.
- 누구나 (직접과 별개로) 취미 및 여가활동으로 그림이나 공예,작곡, 수학문제풀기 등을 공부할 수 있다. 이런 취미나 관심사에 따른 지식을 변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업무에도 활용할 수 있다. "교양있는 음악가라면 라파엘로의마돈나 그림을 연구해야 하며, 화가라면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공부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서로 똑같은 이점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서 배우가 조각을 공부하면 동작의 틀이 잡힐 것이고 조각가 연극에 대해 탐구하다보면 그의 작품을 배우와 같은 생명을 갖게 될 것이다. 화가는 시를 그림으로 바꾸고 음악가는 그림에 음악성을 부여해야한다.-작곡가 슈만-"
- 박식과 상상력은 서로 동반한다. 경험을 변형할 줄 알고 지식을 통합할 줄 아는 전인들만이 우리를 종합지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예술가, 다시말해 창조하는 사람은 수학, 논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유전학, 고생물학, 인문과학, 역사학을 망라한 당야한 분야의 식견과 창의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는 곧 만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형태와 구조'를 기반으로 두어야 하고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 "기능적인 훈련 하나만 받아서는 재밌고 유익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야니스 제나키스-" 통합교육의 목적은 '전인'을 길러내는데 있어야 한다. 전인이야말로 축적된 인간의 경험을 한데 집약하여 '전인성'을 통해 한 조각 광휘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Posted by seon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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